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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사람이 탈 수 있는 큰 수레같은 김경재 교수,
    2018-05-26 03:04:23   read : 287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김경재 교수, 『틸리히 신학 되새김』 출판

    석가세존(釋迦世尊)의 자비(慈悲)가 온누리에 가득했던 날, “모든 사람들이 올라 탈 수 있는 큰 수레같은 기독교”가 되기를 바라며 이웃종교들과의 대화와 협력을 위해 한 평생을 바친 한신대 신학과 김경재 명예교수를 만났다. 작고하신 감리교신학대학의 변선환 교수와 더불어 한국 기독교에서 김경재 교수만큼 이웃종교와의 대화에 힘을 쏟은 사람이 드물다는 세간의 평은 괜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간 출판한 책들이 또 이를 증명하기도 했다.

    이런 김경재 교수가 한 달이 조금 못되게 새로운 책을 출판했다. 그간 김경재 교수를 직ㆍ간접적으로 알아왔던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조금은 의외의 책이었다. 『틸리히 신학 되새김』(서울: 재단법인 여해와 함께, 2018).

    물론 폴 틸리히의 신학과 사상이 김경재 교수 신학의 근간이라는 점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김경재 교수가 그만큼 강조해 왔던 바이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장공 김재준” 교수나 “함석헌” 선생에 대한 책을 줄곧 펴내왔던 일련의 과정에서 본다면 폴 틸리히에 대한 책이 의외였다는 말이다.

    이런 의외성에 대해 그리고 책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김경재 교수를 만났다. 김경재 교수는 최근 3년간 “아내의 돌봄이 계기”가 되어 건강이 많이 약해졌지만 큰 병은 없다고 첫 말문을 열었다.



    ▲ 지난 4월 평생을 같이 해 왔던 신학자 폴 틸리히에 관해 책을 출판한 한신대 신학과 김경재 명예교수를 자그마한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윤병희

    ▲ 건강이 좋지 않으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선생님의 건강을 염려하는 후학들이나 제자들을 위해 건강이 어떠신지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본래 건강한 체질이었는데, 지난 3년 동안 집사람 건강 돌봄이 계기가 되어서 요즘 많이 어렵다. 결정적인 지병이 있는 건 아니까 회복이 될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워낙 건강한 체질이기도 하니 많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다.

    틸리히 신학, 바울신학의 20세기 판

    ▲ 먼저 이번에 출판하신 책 이야기를 하려면 폴 틸리히의 신학에 대해 조금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 기억나는 것은, 물론 이것도 모두 선생님께 배운 것이지만, 틸리히가 자신의 신학을 이야기할 때 강조했던 것이 세 가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변증과 해석, 그리고 중재인 것 같습니다. 앞의 두 개념은 틸리히가 자신의 책 『조직신학』 1권에서 이야기한 것이고, 마지막 것은 『19-20세기 프로테스탄트 신학』에서 언급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비슷하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사뭇 다르게도 보입니다.

    틸리히 신학을 관통하는 정신을 잘 파악했다. 그 세 가지가 어떻게 보면 서로 통해 있다. 변증은 틸리히가 실질적으로 목사 수련을 하면서 느꼈던 것인데, 틸리히가 노동자들 속에서 목회하며 학교 교육과정과 비교해 기독교가 그동안 말해왔던 메시지 내용이 전혀 소통되지 않는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 사람들의 마음이 악해서가 아니라 소통이 안 되고 있구나. 소통이 안 되니까 이해가 안 된다는 점이었다.

    일반 사회의 거대한 흐름이 세속화 과정, 탈종교화 과정 등인데 이런 흐름은 과학의 찬란한 업적에 압도 되어서 종교라는 것이 변두리로 물러가고, 주변화 되어 종교를 멸시하는 지성인들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지 않나. 변증이라는 말 자체가 그런 것 아니겠는가. 변호사가 자기의 수임 받은 사람의 권익을 법정에서 변호하듯이 기독교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 그 안에 진정한 생명의 능력과 구원이 있다는 것을 현대인들에게 알아들을 수 있게 변호하고 증언하려 하다보니까 옛 소리를 그대로 레토릭하게 반복해서는 안 되고 새롭게 해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틸리히는 그래서 신학의 임무를 기독교의 영원한 메시지를 매 시대마다 그 시대의 언어와 정신으로 새롭게 해석해 주는 것, 그것을 신학의 본래의 임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해석과도 통하는 것이다. 중재라고 하는 것도 기독교가 그동안 이분법적으로 갈라놓았던, 이성/신앙, 지성/믿음, 개인/사회, 현세 일에 충실할 것인가 내세의 소망을 가질 것인가? 이런 일체의 이항 대립적인 의식구조, 사회구조, 학문체계 구조를 어떻게든 가운데서 서로가 해석학적인 순환 원리에 의해 필요하다. 그래서 중재의 방법으로서 그가 이야기한 신학방법론이 상관의 방법이다.

    틸리히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인간 실존은 질문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 혹은 성서는 대답한다. 질문이 앞서고 대답이 뒤따라오는 연속적인 시간 계기적인 순서로 이해했다. 처음 시작할 때, 틸리히 신학을 이해할 때는 그렇게 시작하는 게 좋다. 하지만 깊이 들어가면 실존주의나 해석학에서 누차 말하듯이 그렇지 않다. 인간의 질문 속에 이미 대답이 부분적으로 있고, 대답은 또 다른 질문을 만들어 내고, 그래서 질문과 대답이 서로서로 구별되지만은 서로 맞물려 있다. 그러니까 중재가 보통 화해 정도가 아니라 진지해 지고 심각해진다.

    틸리히 신학은 크게 말해서 그의 조직신학의 구조로 보면 존재와 하나님, 이성과 계시, 실존과 그리스도, 생명 일반과 성령, 역사 현실과 하나님 나라를 상관관계로 해석했다. 그것을 다른 말로 중재라고 한다. 그의 신학 체계가 얼마나 성공적이었냐는 것은 부차해 두고, 바르트 신학을 들어간 20세기 소위 케리그마 신학에 큰 공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 세속 사람들, 교회 울타리 밖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활동한 틸리히는 20세기 인간 영혼의 의사라고 본다.

    내가 발견한 것은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보다도 일반 평신도들 중에 진지하게 기독교 진리를 자신의 전문 직업과 삶의 경험 속에서 이해해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틸리히를 많이 좋아하고 독서하고 계속해서 묻고, 그런 질문도 여러 번 받았다. 그리고 책 안내를 해달라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지방에 있는 정신과 의사들, 문학하는 사람들, 여러 번 만났다. 단순히 기독교 교계 내지는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그 역할도 중요하지만 기독교 신학자로서의 역할을 넘어서 울타리 밖에서 그가 말한 경계선 상에서 신학하는 것이라 본다.

    정리하면 변증의 책임, 변증을 하려고 하니까 해석을 새롭게 할 수 밖에 없었고, 해석의 방법은 일방적인 전달이 아니라 서로 중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중재는 그리스도교 사상과 동양의 거대한 사상과의 중재도 포함된다.

    ▲ 그런 면에서 생각해 본다면 틸리히가 이야기하는 “기독교 진리를 진술한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요? 단순히 성서의 내용을 읊조리는 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중요한 점을 지적했는데, 한 사람을 전공했다고 하면 틸리히를 사사를 하고 살았으니까. 나도 이번에 정리를 하면서 새롭게 발견한 것이 뭐냐면, 일반적으로 틸리히 하면 대단히 리버럴(자유롭고)하고, 철학적 신학자, 존재론적 신학자이고, 2천년 신앙의 노선과는 자유로운, 보수에서 말하는 인본주의 신학자로 오해한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절감했다. 정말 리버럴한 입장에서 보면 아주 보수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민중신학회나 문화신학회에서 이런 이야기를 나눴다.

    감리교 신학자 출신들은 그런 질문들을 많이 내포하고 있었다. 감리교는 본래 리버럴하다. 변선환 교수를 파문한 것은 그들이 번지수를 잘 몰라서 그런 것이다. 감리교는 신학은 아주 자유로운 것인데, 그런 입장에서 보면 틸리히가 아직도 보수적인 것이다.

    그 점은 인정한다. 마치 김정준 박사가 김재준 목사의 신학을 진보적 자유주의자, 자유주의적 진보주의자 이렇게 역설적 표현을 하듯이 감히 내가 발견한 것은 틸리히는 바울신학의 20세기의 해석자, 이론신학분야에서 조직신학 분야에서 성서신학적 방법을 안 쓴 것뿐이지, 바울이 증언하려고 했던 초대 그리스도교의 메시지, 복음, 그것을 20세기 언어로 되살리려고 했을 뿐이지 자유로운, 자기를 위해 멋대로 한 신학자는 결코 아니다.

    그가 루터 목사 집안에서 자랐다는 것도 있지만 철저하게 프로테스탄트 신학 원리에 충실한 신학자이다. 같은 기독교지만 가톨릭 쪽에서도 틸리히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연구한 사람도 많다. 그러나 틸리히는 프로테스탄트 신학자이다. 개신교의 원리라는 것은 간단히 줄여 말하면 하나님 외에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신학체계, 성직체계, 교황이 됐든 성서가 됐든 기독교라고 하는 역사적 종교가 됐든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지 달 행세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다 보니까 우상을 타파하는 정신으로 간 것이다. 인간이 만든 거룩하다고 절대화하는 모든 사상체계, 비판하는 비판적 태도를 가지니까.

    그의 설교집, 설교집이 한 신학자의 신학사상을 가장 쉬우면서도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인데, 그 설교집 세 권의 제목이 『흔들리는 도전』, 『새로운 존재』, 『영원한 현재』이다. 그 ‘흔들리는 도전’이라는 것이 아주 상징적이다.

    그 시대 자체가 1, 2차 대전을 겪으면서 그동안 특히 유럽의 기독교 지성인과 기독교 세계관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안전하고 진보적이고 옳고 그들이 선하다고 하는 확신이 밑바닥에서 흔들리는 체험을 했다는 것이지만, 틸리히는 그것을 넘어서 소위 정통주의라고 자처하는 기독교 자체에서 안주하는 교리 중심주의, 교의중심주의, 심지어 성서해석 방법론의 절대화, 한마디로 교회를 교회답게 섬기고, 복음의 진수를 다시 내 시대에 밝혀보려는 그런 의미에서 교회를 섬기는 종이고, 복음을 섬기는 사람들이지 자기가 그것을 대신하려고 하면 안 된다.

    나는 한국의 보수 신학자를 만나 보면 그들이 마치 하나님을 호위하는 근위병처럼 그런 의무감과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자기들의 신학이 아니라 이걸 지켜야 하나님이 하나님 된다고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더라. 그런 사람들에게는 틸리히가 상당히 위험스러운 인물이지만 자신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서는 경청해야할 분이라고 본다.

    그리고 아주 역설적으로 보아야 한다. 틸리히는 적어도 20세기 신학자 중에서는 가장 리버럴한 자유로운 신학을 한 사람이지만 그의 사상을 깊이 보면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바울과 어거스틴과 루터를 이어오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전통적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변증하려는 신학자였다.

    감리교 이정배 선생을 정말 존중하고 사랑하는 후배인데, 감리교 계통의 좀 더 리버럴한 입장에서는 틸리히는 좀 보수적인 뭔가가 있지 않는가 생각한다. 장공을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이 인본주의자 자유주의자 신신학자 그렇게 비판한다.

    장공 생활신학 깊이 읽기에서 내가 누차 변증했지만 아주 보수주의 신학, 그런 역설, 그런 역설이 이번에 재발견되는 계기를 가졌다.

    ▲ 틸리히 이야기를 하면 빠질 수 없는 학자가 같은 대학에 있던 ‘라인홀드 니버’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니버가 틸리히를 비판할 때 “너무 존재론적”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이 말을 많이 들었지만 쉽게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처음에 틸리히를 살려낸 사람은 니버라고 볼 수 있다. 유니온 신학대학 신학부 이사회에서 교수를 초빙하고 청빙하려면 재원도 마련해야 하는데, 그런 준비가 없었다. 본회퍼도 그랬듯이 유럽의 전화 속에 재로 화할 것 같아서 일단 불러내서 살려야겠다는 그런 절박한 심정으로, 위대한 학자를 아끼는 심정으로 오라고 부른 것이다. 틸리히도 1년 정도 있다가 다시 돌아갈 생각을 했다. 아주 절친하고 그 위대성을 펼쳐 달라고 했던 사람이 니버인데, 처음에 와서 맡은 과목 자체도 그렇고, 그것이 ‘철학적 신학’이었다.



    ▲ 김경재 교수는 틸리히가 굉장히 자유로운 신학자, 정통을 모두 해체한 신학자 같아 보이지만, 그는 철저한 프로테스탄 신학 원리 충실했던, 바울신학의 20세기 판이라고 강조했다. ⓒ윤병희

    그리고 이제 안식년이라 그의 아까 생활의 방법에서 말하는 대로 조직신학의 체계 중에서도 맨 처음 부분이 방법론 말하고 생활의 방법론 말하고 이제 이성과 계시, 하나님과 존재, 그 부분까지 이제 니버와 교수들과 대화를 많이 했을테니까. 그것만 들으면 이제 틸리히가 신학자라기보다는 철학과 신학을 비빔밥 만드는, 그런 철학에 가까운 신학이 아니냐는 불만을 할 수 있다.

    너무나 존재론적이라고 말하게 된 근본 동기는 “하나님이 누구시냐?” 하고 표현했을 때, 성서에서는 하나님이 나의 산성이시오, 진리, 영원한 바위, 인자와 성실의 하나님 등 표현이 많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라고 한다. 이것은 은유적 표현으로서는 최고의 표현인데, 그것마저도 하나님의 일부분, 속성에 대한 표현이지 하나님 자체를 다 말하기에는 부족한 것이라고 본 것이다.

    말을 바꿔서 ‘하이데거’의 용어로 말하면, 현대인들이 존재 망각의 시대를 살고 있다. 철학자도, 신학자도 그렇다. 철학자는 그것을 존재라고 표현하고, 신학자는 그것을 신이라고 표현하지만 실제로는 여러 존재하는 것들, 존재자들 중에 최고, 어떤 한 존재자를 말하면서 하나님 말한다고 했다. 그렇게 비판했다. 틸리히도 비슷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특히 유신론적인 전통적 초월신론에 의하면 우리들이 그런 이미지를 떠나서는 하나님을 생각할 수 없으니까. 하나님의 나라에, 천국에, 높은 보좌에,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어떤 왕처럼 보좌에 앉아계셔서 낮고 천한 인류 세상을 섭리하시고 간섭하시는 그런 어떤 이미지가 너무 강하니까, 그런 하나님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 1차 대전, 아우슈비츠를 경험하고, 그 전쟁과 무의미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너의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 하는 것에 대해 적절한 대답을 해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은 존재 그 자체다.”라는 말을 그냥 해버렸다. 존재 자체라고 해놓으니까. 안 잡힌다. 살짝 설명해놨는데, 하나님의 존재의 능력이시오. 존재의 지반이시다. 존재 그 자체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존재하게 하고 그들에게 성서적으로 말하면 가장 성서적 표현을 그의 철학적 신학 표현으로 은폐한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아레오바고 법정”에서 그(하나님)는 우리에게서 멀리계시지 않다. 그를 힘입어 살며, 숨쉬며, 운동하며, 기동하고 있다는 표현, 출애굽기의 떨기나무에서 불타고 있는데 그 속에 현존하면서도 불태워 없애지 않고 그들과 함께 임마누엘 하시는 하나님, 그런 어떤 하나님을 자기 철학적 신학으로 표현한 것이 ‘하나님은 존재 자체이다’라는 말이다. 다른 설명을 알아듣기 쉽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존재의 능력이시고, 존재의 지반이시다.

    나는 그라운드라는 말이 재미있다. 아까 능력이라는 말은 아까 그를 힘입어 살고 있으니까 난 틸리히의 표현을 언젠가 클래스에서 한 것 같다. 지반은 그라운드, 대지 땅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살다보면 돌뿌리에 걸려 넘어진다. 인생의 고통이, 시련이 질병이 그렇다. 암에 걸리고 그럴 때 이제 투덜댄다. 돌뿌리를 발로 차기도 하고, 재수없다고 하지만 넘어진 그 사람이 다시 일어나려면 대지를 짚고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난 그런 비유를 들었다. 무신론과 유신론의 논쟁자가 복싱을 할 수 있는 권투장 무대 역할을 하는 것이다. 틸리히의 존재 자체이신 하나님은, 그러니까 니체가 전통적인 기독교 신론을 다 부정하고 무신론을 선언하면서, ‘그러면 네가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소위 힘 보다 더 강해지고 유해지려는 인간의 꺼버릴 수 없는 충동, 초인 그것을 만약 니체가 최고의 가치로 삼고 생명의 본질로 삼았다면, 니체에 있어서 틸리히는 니체 너가 말한 그것은 너에게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단순한 동물이나 식물로 돌아갈 수 없고, 삶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묻고 찾는 존재인한 그 사람이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추구하는 그 목적, 그 목표, 그 실제가 궁극적 실재, 궁극적 관심이고, 그것이 너에게는 하나님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전통적 신관이 자신의 삶에 안 맞으니까 그걸 팽개치고, 자유롭냐 등을 묻는다. 나는 틸리히에게서 제일 배운 중요한 것이 기독교 변증과 동시에 사이비 종교, 자기가 종교라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실질적으로는 현실 속에서는 종교 기능을 인간들에게 하면서 중세기 종교가 그들에 의해서 위세를 떨쳤듯이 인간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전쟁에 내보내고, 하는 이런 어떤 이데올로기, 허위의식, 이념들이다. 대표적으로 오늘날에는 국가주의,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 물질만능주의 과학만능주의 등이다. 나는 도킨스나 호킨스를 과학자로 존경하지만 그들을 보면 과학의 영역을 넘어서버렸다. 과학 아닌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자기는 자기로서 신념을 말하면 되지, 자기 못지않은 과학적 지식을 가진 사람이 여전히 신앙생활을 하는데, 그 사람들의 인격을 그런 식으로 무시할 수 없다.

    그 질문을 정리하면은, 처음에 초창기에 니버가 틸리히를 보고 오해를 했다. 틸리히의 『조직신학』 후반기 제4부와 제5부, 생명과 성령, 역사와 하나님을 정리해 보니까. 앞으로는 틸리히를 두 날개로 보자. 하나는 철학적 신학, 존재론적 신학, 실존론적 신학 학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만 보면 틸리히는 반쪽이다. 후반부를 보면 그는 현대 서구 정신사에서 보면 낭만주의와 생의 철학을 이어가는 사상가이다.

    낭만주의가 한국에서는 오해가 되었는데, 연애감정 정도 하는 문학으로 아는데, 근현대의 기계론적 세계관이 세상을 지배하고 모든 것을 인과율적인 기계의 어떤 무엇으로 보고, 심지어는 인간의 정신 현상 일체까지도 뇌세포 원자들의 이합집산, 물리화학작용 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본다. 그럼 종교는 환상에 불과하다. 그것이 현대를 지배하고 있다. 컴퓨터가 오래되면 낡아서 쓰레기통에 버리듯이 보다 잘 만들어진 인간의 뇌 컴퓨터도 쓰다가 오래되면 폐기처분하면 끝이다. 이것이 현대 젊은이들에게 먹혀 들어가는 하나의 인생관이다.

    낭만주의는 이것에 대한 저항이다. 쉘링, 베르그송, 틸타이, 괴테, 노발리스 이런 낭만주의에서 생의 철학자들은 물질세계와 생명의 세계는 차원이 다르고 결코 물질의 반복적이고 인과율적인 법칙, 정신, 생명 현상에 적용시키지 말라고 한다. 그래서 생명의 경이로움, 외경, 신비로움을 주목하도록 몸부림쳤던 사람들인데, 현대 거대한 세속주의와 과학만능주의가 내가 보기에는 낭만주의나 생의 철학을 덮어버렸다.

    별 결과를 못 얻었다. 유일하게 고전 속에 남아있는 것은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 떼이야르 샤르뎅의 인간현상과 같은 고전에 들어있지 나머지는 전멸하다시피 했다. 틸리히는 신학자로서 그 정신을 이어가려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20세기 생의 신학자로 보고 싶다. 특히 성령론을 말할 때는 그렇다.

    ▲ 이건 약간의 벗어나는 질문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처음으로 틸리히에 관한 연구서를 출판하신 때가 제가 기억하기로는 1979년입니다. 그런데 틸리히의 『조직신학』을 번역하신 분은 한국기독교장로회 ‘김경수’ 목사입니다. 김경수 목사님이 틸리히 책을 번역하신 것이 1980년대 초반이었습니다. 두 분이 교분이 있으셨습니까?

    알긴 안다. 나이로 보면 1, 2년 선배였을 거다. 노고와 수고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사상이 심오하지 영어가 어렵지는 않다. 니버의 영어책은 어렵다. 문장이 어렵다. 틸리히는 문장이 단촐하다. 고3 문법만 알면 틸리히 책을 다 읽을 수 있다. 그 속에 내포, 함의되어 있는 내용이 워낙 심원해서 이해하기 어렵다면 어렵지, 문장 자체는 큰 어려움 없다. 나는 틸리히 조직신학을 읽을 정도의 지성이라면 번역본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직접 읽으면 된다. 그런 생각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다. 내가 그런 체험을 가지고 있으니까. 직접적인 교분이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틸리히의 종교사회주의, 통일 시대에 도움될 것

    ▲ 틸리히 책에서 50여개의 중요한 텍스트들을 뽑아내셨다. 물론 중요하다고 생각하셔서 그러셨겠지만 어떤 기준이 있으셨는가?

    이번에 북토크 시간에 어떤 분이 틸리히 신학 속에서 너의 소리를 했는데, 틸리히 신학을 앞에 깔아놨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내가 내 하고 싶은 말, 나이가 되니까 진지하게 하고 싶은 질문을 하고 했지만. 기본적으로 틸리히는 정말 20세기의 내가 전공한 이론신학 분야에서는 거목이니까. 그분의 조직신학이 너무 방대하고 커서 다 읽어내기가 어려우니까, 핵심 내용을 일단 소개해야 하겠다는 목적이 있었다.

    틸리히를 먼저 소개하고 나의 이야기를 한 것이다. 기준이라는 것은 내 마음대로 고르지는 않았다. 내가 그 책 속에서 파악하는 틸리히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주제, 후대 사람이 틸리히를 독해할 때 반드시 봐야할 것 같은 주제, 근데 이제 그러다 보니까 그 속에서 가량 종교간의 대화 같은 주제는 많이 나오지 않는다. 살짝 언급은 하지만 그런 챕터는 따로 인용했다.

    책을 내고 보니까 아쉬운 것은 미국으로 가기 전에 프랑크푸르트 철학부에서 일했고, 내가 알기로는 아도르노라는 젊은 철학자, 유대인의 핏줄을 탄 사람을 조교수로 쓴 것이 밉게 보여서 히틀러한테 찍혀서 파문도 당하고 해직 당했는데, 그 철학부 교수하기 전에 1920년대 소위 종교사회주의 운동에 굉장히 관심이 많았다. 사회주의와 그리스도교와의 대화, 이것을 한 챕터로 다루려 하다가 조직신학에서는 그 챕터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내용 속에 풀어서 이야기 했는데, 챕터로 하나 만들 것을 그랬다는 아쉬움이 있다.

    왜 그러냐 하면 한국 같은 이런 격동하는 오늘의 진통 속에서 한국의 지성인의 사회가 너무나 극과 극을 달리는 것이어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도 구별 못하는 사회 아닌가. 사회주의 운동하면 공산당, 빨갱이라고 이렇게 몰아쳐버렸으니까. 그건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사회주의 하면 벌벌 떠는데, 이것은 무지에서 나오는 것이다.

    첫째 1920, 30년대 신의주에서 목회하던 한경직 목사나 초창기 우리 제1 세대의 사람들은 기독교 사회주의 운동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다. 더구나 유럽에서 칼 바르트, 폴 틸리히 이런 거성들이 유럽의 소위 근세 자본주의가 몰락을 했고, 거기에 대한 반동으로 노동자의 혁명이 일어나서 볼셰비키 혁명이 1907년에 일어났는데, 되어가는 꼴이 보니 스탈린 등이 또 하나의 괴물이 되어가고 극단적 전체주의나 극단적 방임적 자본주의를 동시에 부정하면서 소위 말하면 제3의 길을 모색하고 그것을 모색할 때가 됐었다. 그런 의미에서 카이로스 시기에 있었다. 틸리히의 카이로스론과 종교사회주의론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틸리히에게서 배운 깨달음은 사회주의의 뿌리가 서구 경제 사상사 발전에서 소위 공상적 사회주의를 말하면 인류 사회주의의 뿌리가 구약의 야훼 신앙에 예언자 사상 속에 있다는 것이다. 세속적 정치 사회적 사회주의 운동은 성서가 말하는 예언자 정신의 세상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신도 말하지 않고 종교도 빼버렸지만, 예언자들이 말하는 야훼 신앙의 핵심에 야훼가 너희에게 요청하는 것은 공의로움과 평등,
    특히 없는 자, 가난한 자, 눌린 자, 배고픈 자, 그들의 권리를 짓밟고 그들을 인간을 비인간화 시키는 것을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는다. 그래서 강력한 평등과 인간의 존엄성을 정의로 강조하면서 예언자, 그것의 정치철학적, 정치사회학적 표현이 사회주의 운동이라고 갈파했다. 이것이 내 머리 속에 들어왔다. 백번 이해가 갔다. 그렇게 이해해야 옳다.

    이번 이 책을 통해서, 앞으로 조금 있으면 통일이 될 것인데, 지리 공간적으로 통일이 되더라도 잘못하면 더 큰 내란에 빠질 수 있다. 그것을 극복하려면 향후 기독교가 사회주의 운동에 대해서 이해를 좀 해야 한다. 물론 북한의 김일성 체제가 순수한 사회주의 체제냐는 비판은 있다. 그러나 더 큰 눈으로 봐서 프랑스 혁명 이후에 인류가 꿈꾸었던 세 가지 꿈이 있었다. 자유, 평등, 박애.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체제에서는 자유는 만끽하지만 평등, 박애는 사라졌다. 그래서 반동이 일어났던 북한 쪽에서는 평등은 주장했지만 자유는 압살되고 박애도 사라졌다.

    다른 말로 줄여 말하면 아직도 인류는 프랑스 혁명 시대에 꿈꿨던 인류의 비전을 절반도 아직 실현하지 못했다. 그것을 실현해야 인간이 인간다운 것이다. 자유와 평등과 정의가 같이 입맞추면서 박애, 기독교로 말하면 사랑, 평화의 공동체로 가는 길 밖에 없다. 그래서 WCC에 지난 번 화두가 생명, 정의, 평화라고 했고. 장공도 평생을 사신 분이 기독교가 이 시대에 관심하고 주목해야할 화두 세 마디를 단어로 표현할 때, 생명 정의 평화라고 했다. 여신도 분들이 찾아 가서 글을 써주신 것이었지만 그 깊은 뜻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틸리히의 이런 신학적 조명이 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 선생님의 책을 읽으면서 마치 불경의 “여시아문(如是我聞)”이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나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이 선생님의 책 전반에 깔려 있는 것 같았습니다. 틸리히 신학을 해석하는 것을 넘어 선생님의 해석으로 틸리히 신학을 이끌어 가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찬이다. 아까 말한 신학자들이 서평도 써주고 격려도 해주고 칭찬해 주었다. 그러나 과찬인 것 같다. 다만 틸리히의 신학을 문자 그대로 소개, 번역할 생각은 없었다. 다행히 우리말로 틸리히 신학을 풀어 쓰려면 아까 말한 해석학적 원리 때문에 해석자의 생각과 사상에 녹아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좀 의도적으로 강했다고 볼 수 있고, 또 그러고 싶었다. 어차피 책을 밸 바에는, 그렇게 안하면 직접 다 보면 될 것을 따로 활자 인쇄책을 낼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내가 체계적인 김경재 신학을 펴 낼만한 인물은 못된다고 생각하니까. 자기 신학이 어디 있겠나? 모든 선배들의 신학을 물려받아서 자기 삶의 경험에 녹아서 자기에게 미친 영향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이 신학의 이야기가 될 테니까.

    본래 아까 여시아문은 그 경전의 권위를 미리 선언하기를 하려고 나는 부처에게 이렇게 들었노라 하고 해서 썼는데, 그런데 그러면서도 자신의 해석이 들어갔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시아문도 그럴 수밖에 없다. 복음서도 들은 대로 쓴다고 했지만 네 개의 복음서 기자의 삶의 자리가 반영되듯이 나의 삶의 자리, 넓게 보면 동아시아, 좁게 보면 한국인데, 유동식, 조지훈 교수가 말하듯이 땅은 좁고 인구는 작지만 세계사로서 보면 한국이라는, 특히 종교적 풍토가 보통스럽지 않다. “세계 위대한 종교철학사상의 마지막 정류지다.” 이런 표현을 썼다. 유교, 대승불교, 동학, 천도교, 역사적 기독교 등 온갖 종교 들어와서 정류한 곳이다.

    이 말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다른 지역에서 활짝 진 단물은 빠져버리고 말하자면 껍데기만 남아버리는 쓰레기통이 될 수도 있고, 그것들이 들어와서 다시 새로운 재창조의 재해석의 용광로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 함석헌 같은 사람은 용광로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것은 우리 하기 나름이다.

    단순히 반복만 하고, 전달만 하는 수입신학 하면 우리가 아무리 위대한 일을 해도 마지막 페기 처분할 정신유산 창고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주체적으로 살아 있다면 그것들을 오늘날에 재의미 하면서 우리 시대에 삶의 절박한 문제와 씨름을 하면서 기독교가 말하려하는 진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변증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들어갔던 것 같다.

    심한 과찬을 말을 해준 것 같다. 나로서는 황송한 말이다. 나는 틸리히에 비하면 틸리히가 거대한 태산이라면 나는 동네의 조그만 언덕에 불과하다.

    모든 사람이 탈 수 있는 큰 수레같은 기독교

    ▲ 이 책에 녹아 있는 선생님이 가지고 계신 해석학에 대해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어떤 것이 될 수 있을까요?

    문화신학회에서 자기 신학 이야기를 하라고 했을 때, 나도 교수로 학자로 한 생을 살았으니까. 나는 신학 방법론보다 대승적 기독교의 시대를 열고 싶다는 것이 꿈이었다. 대승적 기독교가 불교적 냄새가 난다고 해서 오해를 하지만 그런 뜻은 전혀 없고, 기독교 용어로 말하면 교회는 본래 가톨릭, 보편적이고 우주적인데, 너무나 기독교가 좁아져 버렸다. 서양종교, 기독교를 한 역사적 종교, 교회당 안에 갇힌 종교, 목사, 신부가 이래라 저래라 관할하는 종교, 내가 성서에서 만나고 읽은 기독교는 그런 기독교가 아니다. 기독교의 복음 진리를 그런 기독교라는 역사적 종교 울타리, 도그마의 울타리, 성직 권위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서 대승, 대승은 소승과 모든 사람이 탈 수 있는 수레 같은 것이다.

    이번에 얘기하는 이 책의 후반부에서 그것이 중요하다고 한 것은 한국의 기독교, 노골적으로 말하지만 보수적 신학자, 목사, 신도들이 훈련받은 것은 성서가 말하는 야훼 하나님이 개신교에 1885년 언더우드, 아펜젤러와 함께 제물포로 입국하셔서 한국에 상륙하신 외래 ‘신’ 같은 인상이 있다. 가톨릭을 인정하더라도 125년 전에, 그럼 그 이전 우리는 하나님 하고 성령 하고 아무 관계없이 우리 조상들은 살았단 말인가? 나는 이건 성서의 근본 주장과 사도신경의 근본에 위배된다고 본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이렇게 고백은 해놓고, 저 서양 사람들, 백인들의 하나님이었다가 이제 언더우드, 아펜젤러에 의해 동아시아에 조그만 나라, 불쌍한 나라에 방문해 보자 해서 들어왔다? 나는 그런 신학적 사고, 성서 메시지에 저항하는 것이다.

    성서가 말하는 만인의 아버지, 김재준의 표현으로 말하면, 응답하는 표현이 다르고, 성서를 접촉을 못하고, 예수의 생애와 삶을 직접 접촉을 못했지만 성령께서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 원효, 퇴계, 율곡, 동학, 최제우, 전봉준, 또 이름 없는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물 한 사발, 정한수 떠놓고 간절히 기도했던 그들의 마음에 함께 했던 하나님을 성서의 하나님이라고 본다. 그 하나님을 성서가 가르친다는 것을 나는 강조하고 주장하고 싶다. 그것이 신학자로서의 소명이다. 그래서 대승적 기독교 시대를 열자고 주장한다. 수유리의 구석에서 분필 가지고 한평생 산 사람의 이야기가 귀에 들리겠습니까? 내 뜻은 그렇다. 지금도 변함없다.

    ▲ 선생님의 책에 성령론 부분이 많았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성령에 관한 부분이 많다는 것은 나도 잘 몰랐다. 그럴 수도 있었겠다고 생각한 것은, 내 자신이 유가의 가정에서 자라다가 글자 그대로 무등산 산정에서 어떤 성령의 인도하심이 분명히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소위 순복음식으로 말하는 뜨거운 불체험을 했거나 은사체험을 한 것은 없다. 하지만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생명의 종교라고 보고, 생명 현실과 생명실제를 그 속에 깃들어져 있는 고통과 아픔과 무의미를 극복하려는 생명의 존재이기 때문에 자연히 성령이 누구시냐 할 때, 교회가 성령에 대한 규정할 때, 유일하게 덧붙인 것은 생명을 주시는 자 성령을 믿습니다, 그 말 한마디였다. 생명을 주시는 자 성령이다. 성령론은 여러 조직 신학 중에 하나로서 기독론, 종말론, 신론 그 중에 하나지만 전체를 관계할 수 있는 주제라고 본다.

    성령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는 것은 그 만큼 우리 시대, 우리 교회가 성령은 많이 말하는데, 진정한 의미에서 생명의 왜곡현상이 너무나 많은 것에 대한 몸부림, 저항이라고 볼 수 있고, 그래서 생명이 생명답게 회복이 되고, 생명 값이 제대로 재평가되는 시대가 되기를 바란다.

    내 신학이 다른 것을 원하지 않는다. 오늘날 젊은 10대 아이들이 12시간 이상을 살면서 가상 현실 속에 빠져 정신이 없는데, 학교에 오가면서 길가에 핀 작은 풀잎과 꽃잎이 자기를 향해서 미소 짓고 있는 것에 둔감해져 버렸거든, 그리고 눈에 보이지도 않거든, 핸드폰에 보이는 그것에 다 미쳐버렸다.

    나의 신학의 유일한 목표가 있다면 그 젊은이들로 하여금 핸드폰은 우리에게 중요하고 귀한 문명의 이기에는 틀림없지만 기계이고, 가상현실이고, 진짜 현실은 너희 앞에 피어있는 한 송이 꽃이다. 걸어가는 강아지다. 너를 보고 웃는 어린 아기의 손짓이다. 더 나아가서 너 자신이다. 자기 생명이 들어간 타자의 생명에 경외감과 중요성을 다시 감지하도록 하는 것을 우리 시대의 신학의 최대의 책임이 아닌가 싶다. 교회를 넓히고 교세를 확장하고, 히틀러가 일어날 때 독일 국민의 90%가 기독교인이었다. 기독교인의 수가 부족해서 세상이 이런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령 중심이다.

    영성에 대한 각성운동이 일어났는데 한국교회의 성장론자들이 영성까지도 성장의 도구로 이용했다. 그래서 영성성이 죽어버렸다. 변질되었다. 그래서 영성신학이란 말을 쓰고도 싶지 않다. 참담한데, 이번 책을 내는 보람을 제일 느낀다면 틸리히가 존재론적인 철학신학자만이 아니라 굉장히 성령론적 신학이다. 생명의 신학자라는 것을 재발견 해라는 것을 젊은 후배 신학자들에게 강조하고 싶다.

    ▲ 그리고 인간론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틸리히의 인간론을 해석하시면서 선생님의 신학에 서남동ㆍ안병무의 신학이 어떤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외국의 틸리히, 바르트, 폰 라트, 샤르뎅, 본회퍼 못지않게 나를 직접 가르친 선생님들의 은혜를 많이 받았다. 간단히 줄여서 말하면 내 신학의 저 밑바닥에 바르트 신학이 있다. 초창기 로마서 강해를 쓸 때의 바르트의 그 순수한, 사실 그것도 우상타파 거든, 바르트는 기독교마저도 상대화 시켜야 한다는 입장이었으니까. 오직 계시, 지금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것이니까. 바르트 신학을 나에게 가르쳐주신, 전경연, 박봉랑 선생님에게 감사를 한다.

    그러나 그의 방대한 방법론이나 교회교의학 중심으로 하는 것은 오영석 교수가 잘 하니까, 나는 문화신학, 철학적 신학 쪽으로 파악하려고 분담을 한 셈이이다. 그리고 이제 틸리히와 관련해서 제일 큰 영향을 준 선생님은 서남동 선생님이다. 물론 내가 지금 말한 박봉랑, 전경연, 서남동, 안병무 선생님보다 나의 실질적으로 신학체계보다도 기독교란 무엇이냐, 기독교란 어떤 종교라는 것을 가르쳐 준 두 분의 선생님이 있는데, 그 분은 김재준과 함석헌이다. 그 분들이 나의 거의 삶의 가치관과 기독교 이해를 터놓았다고 할 수 있다. 그 뒤에 문익환, 서남동 등의 그 분들의 제자이다. 그러고 보면 3대째인데, 서남동 선생을 통해서 직접 처음으로 소개를 받았었고, 틸리히의 많은 것 중에서 민중신학 나오기 전부터 역사적 실재란 무엇이냐 하는 그런 논문도 있다. 역사적 실재가 무엇인가를 가르쳐준 선생님이었다. 역사가 단순히 기록물도 아니고 지나간 과거도 아니고, 살아있는 역사적 실재란 다른 말로 하면 현재적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현실을 말하는데, 역사적 실재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을 하도록 하신 서남동 선생님께 감사를 한다.

    안병무 선생님은 70년대 조교, 전임강사할 때 같이 모시고 지냈다. 안병무 선생님은 신약을 하면서 자기의 신학이 무엇인지 아는 신학자였다. 신학을 정말 실존론적으로 하신 분이다. 그러면서도 서구 신학의 강한 영향을 받으면서도 한신의 교수단 중에서 장공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동양사상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무시하면 안 된다고 강조한 것이 안병무 선생님이다.

    노장 이야기도 많이 하셨고, 불교 이기형 선생을 초빙도 했고, 안기부 감시가 서슬 퍼랬을 때도 학교 학생들의 고전 특강, 노자와 장자 강의를 2학기 이상 듣도록 하자고 강력히 주장한 사람도 안병무 선생님이고. 안병무 선생님을 통해서 실존론적 사고와 동양사상과 기독교 사상의 진정한 깊이 차원에서의 만남에 대해서 생가하도록 해주셨다. 안병무 선생님과 10년 이상 함께 교직 생황을 했는데, 한 번도 나를 꾸중하거나 하지 않았다. 참 인간적인 분이었다. 시대의 아픔에 아주 예민한 분이었다. 좋은 교수 선생님들을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책이 가능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 마지막으로 후학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지금 재학 중인 대학원생들에게 이야기 하고 싶다. 나는 내 자신이 신학에 입문한 과정과 동기가 그래서 그런지, 적어도 신학에 문을 두드린 사람은 뭔가가 결정적인 생의 계기가 있었고, 비전과 꿈이 있었고, 신앙적으로 말하면,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어서 왔다고 본다. 그냥 왔거나 밥벌이 하려고 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와서 현실을 보고, 교육과정을 보면서 고민하는 것을 잘 안다. 능률적이고 효율적인 사고에 익숙해서 고전을 이해하려하거나 한 신학자를 전체적으로 깊이 씨름하려고 하는 정렬이나 야망이 부족한 것 같다. 단편적 지식은 많고, 레포트도 짜깁기는 선수인데, 그래서 틸리히도 좋고, 불트만 좋고, 누구든 좋으니까, 20세기의 거성들이 많이 있다, 그분들과 깊은 씨름을 해라. 그러면 신학을 한 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고, 용기도 얻을 것이다.

    밥벌이 하려면 언제라도 할 수 있다. 어떻게 의미 있게 살 것인가 삶의 문제를 가지고 온 바에야, 우리 시대가 목사가 일할 자리가 없다고 하지만 역으로 말하면 쓸 만한 목사가 없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일반 교인들 중에서 생각하는 사람들 다 보고 있다. 그들은 정치학, 경제학 다 했는데, 자기들 신앙 안에서는 모르지만은 자기들의 고민과 지성을 충분히 충족시키면서도 예언자적인 제사장적인 그런 말씀을 전해줄 리더십을 가진 목사를 찾는 것이다. 자기는 다 갖춰져 있다고 하는데, 없는 거다. 안 보이는 거다.

    특히 재학생 시절에는 알바를 하겠지만 최소한으로 줄이고, 후회하지 말고 20세기 신학의 거성들의 유산을 최소한 아웃라인이라도, 그래도 편식은 금지, 좀 깊이 공부하는 계기를 만들면 좋겠다. 그래서 머리말에도 젊은 신학도들에게 부탁도 했다.

    ▲ 자신의 신학적 지반이었던 풀 틸리히가 후학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길 바라는 노학자의 바람이 웅변처럼 들리는 시간이었다. ⓒ윤병희

    한 시간이 조금 넘는 동안 진행된 인터뷰 끝에서 김경재 교수는 “이제 내년이면 80이다. 더 여한도 없다. 이것으로 만족한다.”며 자신이 걸어온 신학여정에 후회가 없음을 내비췄다. 그리고 에큐메니안에게 “아직도 기장성이 더 강하다. 조금 더 이웃종교와 에큐메니칼 하게 글들도 받고 소식들이 전해지면 좋겠다.”는 부탁을 하셨다. 김경재 교수의 화두는 여전히 이웃종교와 기독교 내의 대화가 아닌가 싶었다.

    어쩌면 이번에 출판한 『틸리히 신학 되새김』은 이를 위한 이론적 “지반”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정훈 typolog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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