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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관객 수 1000만명을 넘어섰다 <신과 함께>를 기독교인이 꼭 봐야 하는 이유 / 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2018-01-06 01:39:57   read : 450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영화 ‘신과 함께’가 4일 관객 수 1000만명을 넘어섰다. 개봉 16일 만이다.

    전반적으로 불교의 내세관을 따르고 있는 영화는 사망한 지 49일째에 망자가 좋은 곳에 다시 태어나길(윤회사상) 기원하는 의식인 49재에 초점을 맞췄다. 영화는 인간이 7개 지옥의 재판을 통과해서 환생한다는 사후 세계의 재판정을 상상해 담아냈다.

    무속신앙과 불교의 사후 세계관이 혼합된 영화가 흥행하면서 교계에서는 기독교적 내세관에 대한 분별력도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문화선교연구원(문선연·원장 백광훈)은 최근 홈페이지에 ‘기독교 신앙으로 신과 함께 읽기’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기독교인들이 (신과 함께) 영화를 통해 불교를 포함해서 율법적인 종교가 왜 선한 행위를 강조하는지 그 이유를 파악할 수 있다”며 “선한 행위를 하는 건 한편에서는 지옥의 심판을 이겨내려는 것이기 때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다음 생을 위한 업을 쌓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와 비교해 기독교 내세관을 설명하기도 했다. 문선연은 “무엇보다 성경에서 지옥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이 땅에서 바른 신앙을 갖고 윤리적인 삶을 살도록 환기하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눅 16:19∼31)를 예로 들면서 “온전한 육체로 지옥에서 사는 것보다 비록 지체 중 하나가 없다 해도 영생을 얻는 것이 낫다는 것을 나타낸다”며 “지옥은 이 땅에서 하나님 뜻에 합당하게 살지 않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이 극대화된 곳임을 나타낸다”고 덧붙였다.

    이 영화에는 기독교인이 분명히 경계해야 할 부분도 있다.

    49재를 올리는 이유는 죽은 자의 환생을 위함이며 평소 제사를 지내는 이유는 망자가 후손을 보호해주는 조상신이 되길 기대하는 마음에서다. 총신대 이상원(기독교윤리) 교수는 “기독교의 내세관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다시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가는 것에 기초하고 있다”면서 “고인이 환생하거나 조상신으로 승화된다는 식의 해석과는 큰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기독교의 장례예식은 죽은 뒤 천국 혹은 지옥으로 명확하게 나뉘는 기독교의 사후 세계를 반영해 유가족을 위로하며 점진적으로 일상생활에 복귀하도록 돕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혼합종교가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통해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가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장로회신학대 임성빈 총장은 “이 영화는 ‘효’와 ‘가족애’ 등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가치관을 강조하며 불확실하고 혼란스러운 삶에 지친 현대인에게 거부감 없이 관심을 얻어냈다”고 평했다. 임 총장은 “혼합 종교를 담은 문화콘텐츠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독교인이 누구보다 윤리적인 삶을 사는 모습을 보이고 그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것이 선행돼야 문화 분야에서도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당부했다.

    영화 <신과 함께>를 기독교인이 꼭 봐야 하는 이유

    [이영진의 기호와 해석] ‘죄와 벌’을 삶에서 제거한 우리 칭의의 ‘새 관점’

    영화 <신과 함께: 죄와 벌>은 누구보다 기독교인들이 꼭 봐야 할 영화다.

    무당들이나 쓰는 목검(木劒)의 검기(劍氣)가 난무하고, 지옥의 단층별 사신(死神)들이며, 심지어 염라대왕이 심판주로 등장하는 이 영화를 왜 기독교인이 꼭 봐야 할까?

    19세기 말 '역사적 시각'으로 개신교 교리사(史)에 회의적 파문을 일으킨 역사신학의 거장 아돌프 폰 하르낙(Adolf von Harnack)은 그의 역작 'History of Dogma(1885)'에서 이런 말을 던졌다.

    "... 도그마(교리)는 모든 교회의 배경에서 존재해 왔다. 동방교회는 제의의 공간적 측면을 강조한 바 있고, 서방교회는 교권적 측면을, 그리고 개신교회는 복음서의 본질을 추구하는 면에서 그러했지만, 역설적인 것은 개신교회들이 가장 후대 멀리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그 유리한 위치적 이점을 이용해 도그마들을 일시에 제거하는데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작금에 자신의 취향에 따라 직접적으로 말하는 방식의 설교라는 도그마로 치환되어 와 있게 되었다. ..."

    대부분 이런 종교사학파 아류의 언설은 들어보려 하지도 않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교리(dogma) 파괴적 논지에서가 아니라 500년이나 흐른 지금까지도 '개혁'이라는 이름 하나로 지탱해 나가고 있는 현대 개신교가, 과연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고 있는가 라는 반성적 측면에서 한 번쯤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신(神)과 함께>라는 영화가 입고 있는 샤머니즘만도 못한 '죄와 벌'에 관한 희박한 관념이 우리 생명의 교리를 퇴행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칭의에 대한 별의별 '새 관점'은 아마 '죄와 벌'을 우리 삶에서 사실상 제거한 데 따른 미봉책이 아니겠는가 반성하면서, 우리가 퇴행시킨 '죄와 벌'은 무엇인지 이 영화를 통해 잠깐 돌아볼까 한다.

    1. 귀인(貴人) vs 의인(義人)

    주인공 김자홍은 죽어서 '귀인(貴人)'이 되었다. 정의롭게 죽은 망자(亡者)를 저승에서 부르는 명칭이라는데, 요즘 같은 세상에는 저승에서도 귀인 만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19년 만에 나온 귀인이라고 하니.

    그러나 19년 만에 나온 이 귀인은 죽어서도 스스로를 전혀 귀인이라 생각지 않는다. 그럼에도 저승에서 귀인으로 환대받는 이유는 그가 죽을 때 의롭게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귀인이 아닌 의인(義人)이라는 용어를 대입해 보면, 이 영화는 기독교인이 읽기(reading)에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이 망자는 죽을 때 고층 건물에서 아이를 안고서 몸을 날려, 자신은 죽고 아이를 살렸다. 그리고 죽어서도 자신을 결코 의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이라 여긴다. 그렇다면, 평범한 사람은 죄인이란 말인가? 평범한 사람은 단지 귀인(의인)이 아닐 뿐 아닌가?

    아니다. 의인(귀인)이 아니라면 모든 (평범한) 사람은 죄인이라는 점에서, 이 영화의 인간론 및 죄론은 기독교 도그마와 배치하지 않는다.

    주인공 김자홍은 저승의 차사(差使) 3인이 에스코트하는 48번째 귀인이다. 49번째 귀인을 채우고 나면, 귀인은 물론 차사들 자신도 자기들이 원하는 삶으로 회귀할 수 있다. 단 망자의 영혼과 지상의 시신이 완전히 분리하는 시한인 49제 동안, 7개의 재판정을 무사히 통과해야 한다.

    2. 일곱 죄 vs 칠죄종

    일곱 번의 재판은 일곱 가지 죄를 묻는 심판정이다. 살인, 나태, 거짓, 불의, 배신, 폭력, 천륜. 기독교에도 일곱 가지 죄가 있다. 바로 칠죄종(七罪宗, septem peccata capitalia)이다.

    이 칠죄종이라는 죄 개념은 원죄와는 달리, 인간이 자기 자신의 의지와 뜻에 따라 범하는 죄의 근원으로 명시한 것이다. 죄가 일곱 가지 밖에 안 된다는 뜻이 아니라, 일곱 가지로 분류되는 일곱 근원으로 일컫는 중세의 죄 개념이다.

    중세 교회는 이를 교회가 가르치고 훈육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전래했는데, 오늘날의 개신교에서는 낯선 개념이기도 하다. 왜 낯설까? '죄가 일곱 가지 밖에 안 되겠느냐' 라는 마음에서 개혁을 한 것일까? 아니면 그 죄들은 한방에 다 사함받을 수 있다는 강력한 믿음에서 없앤 것일까? 이유가 어찌되었든, 개신교에서 개혁한 일곱 가지의 죄 근원은 다음과 같았다.



    ▲The Seven Deadly Sins and the Four Last Things, Hieronymus Bosch.

    교만 superbia/ pride
    인색 avaritia/ greed
    질투 invidia/ envy
    분노 ira/ wrath
    음욕 luxuria/ lust
    탐욕 gula/ gluttony
    나태 pigritia seu/ acedia

    3. 일곱 재판정

    개신교에서 일곱 가지 죄 근원이 약화된 결정적 사유는, 자신의 모든 죄가 사라졌다는 자기 믿음에 스스로 권능을 부여한 탓일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그 일곱 가지 죄에 대한 강력한 심문이 주된 플롯(plot)을 이루고 있다.

    플롯이란 고대 그리스의 비극론에 따르면 단순한 극/영화의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인간 개인의 삶에 탑재된 이야기(μύθευμα)를 말한다.

    우리 자신의 '이야기'는 어디에서 발발하는가?



    대리님, 과장님, 차장님으로 승진하는 것이 우리의 이야기인가? 아니다. 그 승진 과정에서 야기되는 '배신'의 플롯이야말로 진정한 '이야기'이다.

    친구와 즐겁게 먹고 마시고 영화보는 것이 이야기인가? 아니다. 생사가 오가는 현장에서 친구는 미처 구하지 못하고 나만 살아남아 마치 친구를 '살인'한 것만 같은 깊은 자책감의 삶이 진정한 '이야기'이다.

    가족과 놀이공원 다니고 즐거운 여행을 다니는 것이 이야기인가? 아니다. 함께 가난하며, 가난에 지쳐 동반자살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 진정한 '이야기', 즉 뮈테우마(μύθευμα)/ 플롯인 것이다.

    이러한 '뮈테우마'를 기반으로 이 주인공은 일곱 번의 재판을 받으며, 기소가 입증될 시 즉각 해당 지옥으로 떨어지는 구조이다. 각 관문에서 죄 사실이 판명되면 각각의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①살인죄를 심판하는 '독사지옥'에서는 업무(소방관) 중 미필적 고의에 의한 치사혐의를
    ②나태죄를 심판하는 '화탕지옥'에서는 쉬지 않고 열심히 일했지만 결국 돈을 쫓은 열심이라면 나태죄에 해당한다는 판결에 대하여
    ③거짓을 심판하는 '거해지옥'에서는 선의의 거짓말일지라도 혀를 뽑혀야 하는 판결에 대하여, 그리고
    ④위기에 처한 이를 외면했는가에 대해 다루는 '검수지옥'과
    ⑤배신/사기에 대해 심판하는 '한빙지옥'을 지나
    ⑥폭력을 심판하는 '도산지옥'에서 친동생을 부득이 심하게 때린 죄에 대해 격렬한 심문을 받은 후에, 드디어 마지막 관문,
    ⑦염라대왕이 버티고 있는 '천륜지옥'에 다다른다.

    기독교인은 이런 지옥이 있느냐 없느냐를 논하기에 앞서, 우리 자신에게 이런 죄가 있는 지 없는지, 그리고 그 죄는 실제로 확실히 사하여졌는지, 실제로 사하여졌다면 이젠 다시는 저런 일곱 죄는 발생하지 않는 것인지... 를 짚어봐야 한다. 왜냐하면 앞서 언급했듯이 귀인은 어떤 엄청난 의인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범인(凡人)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범인(凡人)이 엄청난 악인(惡人)일 수도 있는 원리이다.

    우리 기독교인의 내면에 이 일곱 가지 '뮈테우마'에 대한 어떠한 두려움과 떨림도 없다면, 우리는 진정 산 채로 구원을 이룬 사람들일 것이다. 아니면 구원파이거나.

    4. 천륜지옥 vs 최후의 심판

    칠죄종의 마지막 죄가 나태(acedia)인 것에 비해, 이 영화의 마지막 죄가 천륜(天倫)이라는 사실은 더욱 두렵고 떨리게 만드는 플롯이다. 천륜은 부모 형제 사이에 벌어지는 도리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주 쉬운만큼, 아주 어렵다.


    특히 이 최종적인 일곱 번째 죄는 주인공 김자홍에게 있어서는 여섯 번째 죄와 연결되어 있다. 여섯 번째 죄는 형제와의 사이에 벌어진 죄를 다루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이 일곱 번째 죄는 우리에게 있어 앞의 모든 여섯 가지 죄종(罪宗)과 연결돼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모와의 천륜은 인간과 인간의 첫 번째 관계이며, 나머지 모든 관계는 파생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관계의 근원이 죄의 근원이라고나 할까.

    주인공 김자홍은 이런 저런 사연으로 가족과 15년 간을 떨어져서 지냈다. 이에 관해 기소를 한 차사는 놀란 눈으로 이렇게 말한다.

    "아니 세상에 어떻게 1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때린 것에 대해) 화해를 하지 않았느냐?!"

    우리 내면 속,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귀인으로 여기는 그 목소리는 이렇게 답한다.

    '아니, 뭐 그럴 수도 있지. 칭의...'

    하지만, 저 차사가 놀라면서 한 질문은 아마도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 5:26; 눅 12:59)"는 말씀과 일반이다.

    우리의 '이야기'는 안녕한가?
    (왜냐하면 그것이 그대로 재판정이 될 것이기 때문에.)

    뜻하지 않은 사고로 삶의 시간을 다 잃어버린 주인공들은 삶을 만회하려 무척 애를 쓴다. 그러자 염라대왕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어찌하여 살아서 해야 할 일을 죽어서 하려고 한단 말이냐."

    우리의 '뮈테우마'는 안녕한가?

    우리는 우리가 믿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염라대왕과 유비하면 심각한 모독으로 여기지만, '죄와 벌'에 관하여 이 영화에서와 같이 상쇄(相殺)가 가능한 어떤 것이라고 여기는 한, 우리는 우리 하나님을 염라대왕 정도로 여기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우리의 이야기는 안녕한가?

    이영진 기호와 해석



    ▲이영진 교수. ⓒ크리스천투데이 DB

    이영진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이다. 다양한 인문학 지평 간의 융합 속에서 각 분야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도, 보수적인 성서 테제들을 유지해 혼합주의에 배타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신학자로, 일반적인 융·복합이나 통섭과는 차별화된 연구를 지향하고 있다.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홍성사)>, <영혼사용설명서(샘솟는기쁨)>,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홍성사)', <자본적 교회(대장간)>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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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사람 되신 하나님의 고초

    키에르케고어를 만나다



    ▲이창우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겠는가(눅 12:49)!"

    이 말씀은 한숨이다, 탄식이다. 이 길은 좁다. 그래서 한숨을 쉰다! 한숨이란 무엇인가? 한숨이란 무언가 내면에 갇혀 있는 것을 의미한다. 밖으로 나와야 하는 무엇인가 나올 수 없고 나오지 말아야 한다. 무언가 마음에 근심이 있으나 밝힐 수 없을 때, 한숨을 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을 쉬고 싶은 무언가가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는 한숨을 쉰다. 사람이 죽지 않기 위해 거칠게 숨을 쉬는 것처럼, 그는 이 말은 죽지 않기 위해 마음의 부담을 터는 행위였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겠는가!"

    내가 어떻게 이 고난을 서술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서술해 볼 것이다. 시도는 해 보겠지만, 이 시도가 얼마나 보잘것 없는지, 이 고난과 비교할 때 얼마나 저열한 것인지, 미리 밝혀두는 바이다.

    배를 상상해 보라. 당신이 이 세상에서 본 배보다 무한히 큰 배,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큰 배를 상상해 보라. 이 배에는 약 10만 명 정도는 탈 수 있는 큰 배다. 전쟁의 시기였고, 전투는 계속되고 있었다. 이번 싸움의 목표는 이 배를 폭파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배에 불을 당겨야 하는 사령관을 상상해보라! 그가 한 번만 불을 당기면 이 배에 탄 사람은 다 죽는다.

    이미 밝힌 것처럼, 이것은 아주 보잘것없는 예이다. 어찌 10만 명과 인류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어찌 이 모든 사람을 날려버리려는 사령관과 그리스도께서 당겨야 하는 불의 공포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분이 불을 당길 때, 아버지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이 있을 것이다(눅 12:53).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겠는가!"

    그러나 이 순간은 아직 여기에 오지 않았다. "오, 이 일이 일어났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라고 한숨 쉴 때, 이 앞에 있는 순간 역시 끔찍하겠지만, 그 끔찍한 순간은 아직 여기에 오지 않았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요,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마 17:17)."

    이것은 한숨이다. 그는 마치 임종 가운데 있는 환자와 같다. 그는 가벼운 병상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고 임종 가운데 있다. 그는 가벼운 질병이 아니었기에 포기했던 것이다. 그는 간신히 베개에서 머리를 들며 묻는다.

    "지금 몇 시인가요?"

    죽음은 확실하다! 그러나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지금 몇 시인가? 내가 얼마나 참아야 하는가? 그러나 아직 그 순간은 오지 않았다. 고난당하는 자가 "내가 얼마나 더 이것을 참아야 하는가?"라고 한숨 쉴 때, 이 앞에 있는 순간 역시 끔찍하지만, 그 끔찍한 순간은 아직 여기에 오지 않았다.

    그때 그는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함께 모인다. 그는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기를 얼마나 간절히 고대했는지 모른다(눅 22:15). 그는 언제나 그랬듯 아무런 변호도 하지 않았다. 아무런 변호도. 그는 어떤 면에서 충분히 화도 내고 자기변호를 했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이 무한히 존경할 만한 "온유"가 그에게 있었다. 아마 그는 가룟 유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었다.

    "저리 가! 이 만찬에 오지 마! 너를 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너무 고통스럽구나."

    그러나 온유한 그는 유다에게 말한다. "네가 하려는 일을 속히 하라(요 13:27)!"

    이것은 한숨이다. 다만 속히 하라! 가장 두려운 것도 이 말보다 더 두렵지 않다. 다만 속히 하라! 깊고 천천히 내쉬는 한숨, 다만 속히 하라! 이것은 마치 누군가 거대한 사명을 수행할 것처럼 보인다. 노력이 그의 능력을 초과했을지라도, 그는 다음 순간을 위해 남겨진 충분한 힘이 있는 것처럼 느낀다.

    "한 순간만 늦어도 나는 너무 약해질 수 있어. 그땐 내가 더 이상 내가 아니야. 그러나 다만 속히 하라! 네가 하려는 일을 속히 하라!"

    그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겟세마네 동산으로 향한다. 거기에서 그는 기진하여 쓰러진다. 오, 이 일이 속히 일어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는 마치 죽은 자처럼 쓰러진 것이다.

    그는 정말로 겟세마네보다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사람이었을까! 십자가에서의 싸움이 죽음의 싸움이었다면, 기도에서의 싸움은 살기 위한 싸움이었던 것이다. 피 흘리는 것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땀은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처럼 되었으니까(눅 22:44).

    그때 그는 다시 한 번 힘을 내어 자리에서 일어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그때 그는 유다에게 입을 맞춘다. 당신은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때 그는 체포당하고, 고소당하고, 유죄판결을 받는다. 이 모든 것은 '합법적 과정'이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정의였다!

    거기에는 그가 선의를 베푼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정말로 자신을 위해 계획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의 삶과 모든 생각은 허구한 날 이 사람들을 위해 희생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외친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눅 23:21)!"

    그 땅에 황제를 두려워하는 지배자가 있었다. 물론 그 지배자는 교양 있는 사람이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 "손 씻는 의식(마 27:24)"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유죄판결을 받는다! 오, 인간의 정의여!

    그래, 날씨가 화창할 때, 모든 일들이 부드럽게 진행될 때, 일종의 약간 작은 정의는 실현된다. 그러나 상황이 특별해질 때마다, 오, 인간의 정의여! 오, 인간의 문화여, 너는 네가 가장 증오하는 것, 즉 문화의 부족, 군중의 야비함과는 얼마나 다른가? 너는 군중이 저지른 것과 같은 일을 하고 있지만, 좋은 방법만을 준수하고 씻지 않는 손으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를 뿐이다. 오, 인간의 문화여!

    그때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힌다. 한 번의 한숨이 더 있었고 끝나버리고 만다. 한 번 더 있었던 한숨, 가장 깊고도, 가장 끔찍한 한숨이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막 15:34)?"

    이 굴욕은 고난의 최후이다. 그의 제자들 중에서,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순교자들 중에서, 당신은 그와 같은 경험을 한 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했고,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했다.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았을지라도, 하나님께 버림받지는 않았다. 그들은 충분히 강했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죽음의 순간에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는 이 한숨만은 피해갔다. 그러나 그에게 최후의 순간이 왔다. 그때 그는 정말로 하나님께 버림받았다. 정말로!

    "그래, 나의 원수들이여, 네가 옳았다. 이제 기뻐하라. 내가 말했던 모든 것은 사실이 아니었고 착각이었을 뿐이다. 이제 모든 것은 명백해졌구나.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나를 버리고 말았구나."

    맙소사! 그가, 그가 자신이 아버지의 단 하나뿐인 아들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요 1:14)! 아버지와 자신은 하나라고 말하지 않았던가(요 10:30)! 그러나 하나였다면, 어떻게 단 한 순간이라도 아버지가 그를 버리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말한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따라서 그가 아버지와 하나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오, 가장 극단적이고 초인간적인 고난이여! 오, 인간의 마음은 조금 더 빨리 터져버렸을텐데. 오직 사람 되신 하나님만이 이 최후의 고난을 통해 모든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때 그는 죽었다. 이것이 바로 그가 갔던 길이었다. 그러나 과연 누가 이 길을 따라갈 것인가?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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