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8:38-39/ 사랑에 대한 이야기 /조용기 목사 2014-09-13 23:30:19 read : 949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 이와 같이 성경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면으로 무궁무진합니다. 오늘 저는 하나님의 속성인 무궁무진한 사랑 중에서 몇 가지만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본론>
1. 무조건적인 사랑
첫째로,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세상적인 사랑은 조건이 있지만 하나님은 무조건적인 아가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세상에 부모도 자식을 사랑하는데 거의 조건이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에 대한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아버지가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두 아들 다 불량한 아들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회 많은 무리를 일으키고 손가락질을 받는 그런 아들들이었습니다. 이웃 사람들이 아버지에게 “당신은 왜 못된 아들을 사랑합니까?”하고 항의를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 아들들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다는 말입니까? 내가 그들을 사랑하는 것은 완벽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내 아들이기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내 아들이 아니면 내가 왜 사랑하겠습니까? 비록 못나고 손가락질 받지만 그래도 내 아들이기 때문에 나는 어찌할 수없이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못 된 자식으로 보이지만 아버지가 볼 때는 자기의 살과 피를 나눈 친 자식이기 때문에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신7:7~8절에 야훼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야훼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너희를 택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택함 받은 것은 다른 민족보다 잘나서 택함 받은 것도 아니고 수가 많아서 강성해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택했다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조건이 없지 않습니까?
엡1:3~4절에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무엇이 잘나서 우리를 창세전에 택했습니까?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택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랑받을만한 그런 인물들이 됩니까?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택하여 주신 것입니다.
요15:16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택하였나요? 그러나 하나님을 거역하고 세상으로 향한 우리들을 하나님이 쫓아 오셔서 우리를 택하여 주시고 사랑하사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아들을 가진 아버지 이야기를 제가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 아들은 자기를 배신한 여자 친구와 그 여자 친구의 남자친구를 동시에 죽였습니다. 그래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서 집행일을 기다리고 있는 청년이었습니다. 신문과 방송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 청년을 다 욕하고 정죄했습니다.
그래도 그 청년의 아버지는 울면서 일주일에 두 번씩 감옥을 방문하여 아들을 위로하고 기도해주면서 평안히 죽음을 받아들이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아들이 범죄한 것은 사실입니다.
살인죄를 지은 흉악한 행동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 아들입니다. 죄는 미워하지만 내 아들은 내가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그 아들이 사형을 받는 그날까지 그 아버지는 매 주일마다 두 번씩 아들에게 찾아가서 성경을 읽어주고 울면서 기도하고 평안히 죽음을 받아들이도록 용기와 힘을 주었다는 기록을 읽어 보았었습니다.
아무리 흉악한 죄인일지라도 그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나같이 못난 놈을 사랑하십니까? 여러분 이것을 생각해 보신 적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완벽하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완벽해야 사랑한다면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것입니다.
요1:12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매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왜 사랑하느냐고요?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을 받을 조건이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알아야 됩니다. 무조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렘31:3에 “나 야훼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고 말했습니다.
이 한없는 사람입니다. “무궁한 사랑으로 내가 너를 사랑했다.”
요일4:10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우리가 사랑을 해서 사랑받는 것이 아니고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 편에서 미리 먼저 우리를 사랑하사 그 아들 예수를 보내셔서 우리를 구속해 주신 것입니다.
롬8:34~35에 보면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어마어마한 장애물이 다가와 있어도 하나님은 그것을 개의치 않고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무궁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제한된 사랑이 아닙니다.
롬8:38~39절 보십시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예수를 구주로 모셨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태어나게 하시고 그 이후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그 사랑은 그 어느 것도 막을 수가 없는 막강한 무조건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습 3:17에 보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기쁨을 이기지 못합니다. 잠잠히 사랑하시며 우리를 인하여 즐거워 부르며 기뻐한다. 여러분 손주나 손녀가 오면 굉장히 사랑스럽지 않아요? 손주, 손녀가 와서 재롱을 부리면 그를 바라보는 할아버지나 할머니는 그 손주나 손녀를 위해서 기쁨을 이기지 못합니다.
잠잠히 사랑하고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는 것과 꼭 한가지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그 사랑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너무나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지식이 너무나 천박합니다. 얼마나 무궁한 사랑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2. 아픔을 함께 하시는 사랑
둘째로, 우리 하나님은 우리와 아픔을 같이 하시는 사랑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시 34:18에 “야훼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 하시는 도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어떤 아버지의 아들이 귀머거리였습니다. 아들이 귀머거리다는 것을 발견한 그날부터 시작해서 아버지의 마음은 무너질 듯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기도드릴 때마다 늘 말했습니다. “하나님 할 수 만 있으면 내 고막을 떼어 아들에게 주고 싶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귀머거리면 “내 고막 떼서 아버지에게 주겠다.”는 말을 하는 아들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지만 이 아버지는 평생에 늘
“하나님 아버지 내 고막을 떼어서 아들에게 줄 수 있으면 내가 아들에게 내 고막을 주고 나는 귀머거리로 살고 싶습니다.” 이렇게 기도했다는 그 아버지의 기도를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 어린 아이가 장난을 하다가 문이 확 닫혀서 가슴을 때려서 이만한 대못이 가슴에 박혀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병원에 데려가서 대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내내 수술하는 동안에 아들의 손을 잡고 울었습니다.
그 대못이 약간 심장 옆으로 비켜서 박혔기 때문에 조금만 심장이 터져 죽을 뻔 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께 수술을 중지시켜 달라고 울부짖었습니다. 아프니까. 아버지는 아들을 꼭 잡고 의사가 수술을 하도록 기다렸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 만이 아들을 살리는 길이기 때문에 아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면서 끝까지 아들을 수술을 받게 하는 것은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아들이 수술 받아야 살기 때문에 고통을 받게 할 때 아버지도 함께 고통을 나눈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 때 하나님 보좌에서 평안이 앉아 있었다고 생각합니까? 예수께서 양손과 양발에 대못이 박히고 십자가에 매달려 피와 땀을 흘릴 때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다는 것은 그 아들을 주셔서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사랑하시고 당신 자신이 아들과 더불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시련의 아픔을 통할 때 시련을 그쳐 달라고 아우성 처도 하나님은 함께 아파하시면서도 시련을 당하게 할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만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성장시킬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완악하고 무식한 사람들입니다. 깨어지게 하고 현명하게 만들고 장수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을 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무지가 깨어지고 완악함이 깨어집니다.
우리가 시험당하고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같이 아파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손을 꼭 잡고 이 시험과 환난을 통하게 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야 우리가 변화 받고 장성하고 새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시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 하시나이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때 부모, 형제, 처자도 다 떠나버리는데 외롭게 차디찬 산골짜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데 성경은 말하기를 주님께서 거기에 함께 와서 우리와 행하신다.
아픔을 함께 나누신다 그 말인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와 함께 아픔을 나누면서 그를 통하여 우리를 변화시키고 깨뜨리시고 그러면서도 주님은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를 안위해 주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잠3:11~12에 “내 아들아 야훼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야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징계할 때 아버지가 기쁩니까? 여러분도 자식 길러 보면 알지요. 자식들이 잘못해서 매를 때릴 때 부모는 마음속에서 같이 매를 맞고 눈물을 흘립니다. 좋아서 자식 때리는 부모 없습니다. 자식을 때린 만큼 부모는 마음속에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시기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징계를 하지 않으면 자라지 못하고 그 영혼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하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셔야 돼요. 그러나 하나님은 눈물을 흘리시면서 징계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고통을 당하시면서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사63:9에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 사랑과 그 긍휼로 그들을 구속하시고” 환난에 우리 혼자 내버려 놓지 않고 우리와 동참을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되실 것입니다.
한 고등학교 학생이 아버지께 오토바이를 사달라고 매일매일 졸랐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왜냐하면 옛날 그의 친구가 오토바이 사고로 죽은 것을 보았습니다. 또 다른 여자는 오토바이 사고로 다리를 잘린 것을 보았기 때문에 아이는 아버지가 무정하다고 생각했으나 아버지는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결단코 오토바이를 사주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사랑스런 아이가 때를 쓰고 운다고 해도 지극히 위험한 칼이나 총 같은 물건을 줄 수 없잖아요. 우리가 여러 번 기도해도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지 않습니까? 왜 이렇게 어렵게 참으십니까?
그러나 아버지의 뜻이 있어요. 저는 한때에 의사가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무지무지 기도했습니다. 병원에서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제가 의사가 되는 길을 막아 버렸습니다. 굉장히 야속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 다음 불광동 천막 교회 때는 월남 선교사가 되게 해달라고 맹렬히 기도했습니다. 철야하고 금식하면서 그때 월남전 때 월남에 선교사로 가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또 미국 선교부에 연락해서 신청서가 접수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병영미필자가 되어서 결코 출국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월남도 못 갔습니다. 굉장히 하나님께 원망을 했습니다. “하나님 월남 전선에 수많은 사람이 총탄에 쓰러져 가는데 그곳에 가서 내가 위로하고 복음을 전하겠다고 하는데 왜 내 길을 막습니까? 다른 사람은 병 미필자도 선교사로 가는 것을 보았는데 왜 나는 못갑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막았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고 보니까 하나님이 저를 보호하사 여의도순복음교회 목사가 되게 만들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 우리가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했지만 그 모든 것 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보호하기 위해서 응답을 안 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재깍재깍 응답을 해주면 더 큰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줄 수가 없기 때문에 더 큰 위험에 노출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49:14~16절에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야훼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 찌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여러분의 이름을 손바닥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여인이 그 적자를 잃어버릴지라도 나는 너를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런데 너는 나를 버리며 나를 잊으셨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느냐. 하나님의 심정을 우리가 이렇게도 몰라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좌에 앉아서 위험과 권세로만 다스린다고 생각하고 우리를 낳으시고 우리를 기르시는 친 아버지라는 것을 우리가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말하기를 “왜 하나님은 십계명 같은 괴로운 계명을 주어서 지키라고 하느냐?” 우리가 미워서 우리를 묶으시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를 보호하시려는 사랑 때문에 십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십계명은 벼랑에 떨어질 위험이 있으면 철조망 쳐놓고 ‘이 벼랑이 나가지 마시오’ 라고 해놓은 것과 같습니다. 십계명은 벼랑 끝에 쳐놓은 철조망입니다. 그것을 뛰어 넘으면 우리가 상처를 입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호하기 위해서 보호하는 사랑으로 십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요일5:3~4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대저 하나님께 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여러분 성경에는 계명을 지키면 자손 천대에 복과 은혜를 주겠다 했습니다. 더구나 오계명에 보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 여러분 오늘날 세상에 불효한 행동이 만연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부모를 지키고 나를 지키고 내 자식들을 지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효경에 이르기를 사람의 행위 가운데 효보다 큰 것이 없고 어버이를 공경하는 것은 하늘을 받드는 것 같으며 사랑 중에 제일이요, 덕의 근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부모도 자기도 자식도 천대에 이르게 하나님께 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와 같은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어떤 때는 가혹한 것 같지만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사랑이란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4. 좋은 것을 주시는 사랑
넷째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는 사랑인 것입니다.
롬8:32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이 성경말씀은 가슴이 찌릿합니다. 왜냐하면 아들을 아끼지 않고 주신 하나님이 그 아들을 구주로 모시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에게 무엇을 선물로 주지 아니하시겠습니까? 합당하다고 생각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과 함께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 기사를 읽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미국에 딸아이를 기르는 아버지가 있었는데 그 16살 먹은 딸이 날로 파리해져서 병원에 가보니까 신장 신후염으로 신장을 이식해야 살 수 있습니다.
그 가족들 다 조사해 보니까 아버지 신장이 딸하고 맞아요. 아버지가 두말하지 않고 기꺼이 딸하고 같이 병원에 입원해서 딸의 신장을 적출해 내고 아버지 신장을 하나 떼어서 딸에게 주었습니다. 딸이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아주 기뻐하고 즐거워했는데 수년이 지나고 난 다음 그 이식한 신장이 또 병이 들어서 망가졌습니다. 딸은 재 신장 이식수술을 하지 않으면 살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내 나머지 신장을 내 딸에게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온 주위가 깜짝 놀랐습니다. 의사들은 의사윤리위원회에서 “그것은 살인과 같은 것이니 비윤리적이기 때문에 절대로 아버지의 남은 신장을 다 떼어서 딸에게 못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윤리위원회 앞에 서서 말했습니다. “여러분 나의 딸에 대한 사랑은 우리가 말하는 윤리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윤리는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내가 딸에 대한 사랑은 그 윤리를 뛰어 넘는 것입니다. 내 나머지 신장을 떼 주고 나는 평생 투석을 하면서 살지라도 내 딸의 생명은 행복하게 만들어 주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머지 신장을 떼서 딸에게 주고 남은여생을 투석을 하며 그 고통을 당하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읽어 보았습니다. 이런 일이 여러분 있을 수가 있습니까?
사랑 이야기 아니고는 이런 이야기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요. 이 이야기를 읽을 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의미를 조금은 알 수가 있습니다. 왜, 우리에게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은 엄청난 사랑 때문에 주신 것입니다. 성경은 뭐라고 말합니까? 살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살인했어요. 율법으로는 살인하지 말라 했는데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살인했어요. 십자가에 못박혀 죽였다 말입니다. 왜, 사랑은 율법보다도 더 강하고 초월한 것입니다.
율법은 인간적인 것이지만 사랑은 율법조차 초월해서 하나님이 주신 직접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들을 살인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였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을 위해서 율법을 뛰어넘은 것입니다.
나는 사자우리에 뛰어든 아버지
이야기를 읽어 보았었습니다. 가족과 함께 동물원 나들이에 나섰던 어린아이가 부주의를 해서 무서운 사자 우리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사자들이 좋은 먹이 감을 만났다는 듯이 몰려들고 아이는 무서워 울부짖었습니다.
사람들마다 모두 다 고함을 쳤습니다. 사태가 위급한 것을 보자 아버지는 주위 사람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순식간에 사자 우리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겁에 질려있는 아이를 덥썩 품에 안고는 아이를 해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결사적인 각오로 무시무시한 눈길로 사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습니다.
사자들이 단숨에 달려들 것 같이 생각을 했는데 사자들이 와서 아버지와 아들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데 그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했다는 그 뜨거운 열정으로 무시무시한 결단으로 사자의 눈을 노려보니까 사자가 그 아버지의 사랑과 그 결단의 눈길에 기가 질려서 옆을 빙글빙글 돌다가 꼬리를 안으로 넣고 물러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이를 살리려는 아버지의 희생적인 사랑에서 뿜어내는 강렬한 눈빛에 엄청난 힘이 발산되었던 것입니다. 사자들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아주 무서운 상대를 만났다고 오히려 겁에 질려 도망을 친 것 입니다.
사53:5 보세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죄악의 사자 우리 속에 뛰어 들어온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대신해서 고통당하는 것 보십시오.
롬5:8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사랑할 것이냐, 안 할 것이냐 그것이 아닙니다. 아예 확증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논란의 대상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사랑에 더 이상 논란이 없습니다. 결정인 것입니다.
갈2:20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 끝없는 사랑을 우리는 믿고서 사는 것입니다.
엡3:17~19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사랑에 대한 이해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이해요, 사랑에 대한 충만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충만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지식이 너무나 천박합니다.
<결론>
하나님의 사랑의 그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우리가 감히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삼고 온 산속의 새의 깃을 다 펜으로 삼아도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다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아픔을 함께 하시며 항상 보호하시고 좋은 것을 아끼지 않고 주시기를 원하시는 놀라운 사랑이라는 것을 여러분 깊이 이해해야 될 것 입니다.
세상에 자식이 부모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오늘 예수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나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 마음을 활짝 열고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사랑에 감동되어서 사랑으로 말미암아 역사하는 큰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을 믿고 섬기며 살다가 사랑의 처소인 천국으로 들어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는 이 말씀을 우리는 아무 의미 없이 깊이 없이 생각하고 말하고 외웁니다.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 아들을 아끼지 않고 주신 아버지의 사랑은 우리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의 높이와 넓이고 깊이를 조금이라도 깨달아 알게 도와주시옵소서.
바울선생은 내가 미쳤어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미쳤고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하여 온전한 것이니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신다고 말했었습니다. 사랑에 포로가 되어서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