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8:18-30/ 탄식과 대망의 세계 / 한경직 목사 2014-08-27 11:41:33 read : 1850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오늘 아침은 로마서 8장에서 중심 부분을 우리가 같이 읽었습니다. 그 읽은 말씀을 자세히 보면 크게 ‘탄식’이라고 하는 말이 세 번 나타납니다. 22절에 “모든 피조물이 탄식을 한다”고, 23절에는 “성령의 처음 열매,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 믿는 사람도 탄식을 한다”는 말이 있고, 26절에는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 자세히 읽어 보면, 거기 ‘고대하는’이라고 하는 말, 혹은 ‘기다리는’이란 말이 세 번 나타납니다. 19절, 23절, 25절에 각각 나타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이렇게 탄식과 대망의 세계입니다. 오늘 이 교훈을 잠깐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피조물의 탄식과 대망이 있습니다.
22절에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피조물이라는 뜻은 자연계, 곧 생물과 무생물계를 의미한 것인 줄 보통으로 생각합니다.
자연계를 두 가지 방면으로 관찰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피상적으로 또 하나는 내면적으로 관찰할 수가 있습니다. 피상적으로 자연계를 볼 때에는 자연계는 아름다워 보이고, 또 평화롭게도 보입니다. 그러나 그 내면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모순이 있고, 탄식이 많습니다.
현 자연계는 에덴동산이 아닙니다. 창세기 3장 17절에 지적한 대로, 인간이 죄를 지은 후에 땅도 같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녹음방초(綠陰芳草)만 나는 것이 아닙니다. 가시덤불과 엉겅퀴도 이 땅 위에는 나는 것입니다. 그 속에는 약육강식(弱肉强食), 약자의 고기를 강자가 먹는, 처참한 광경을 볼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약자의 비명과 탄식 소리가 그치지 아니합니다.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고, 개구리는 파리를 잡아먹고, 새들은 벌레를 잡아먹으며, 송충이는 아름다운 소나무를 깎아먹어 말리어 버립니다. 호랑이는 사슴을 잡아먹고, 고양이는 쥐를 잡아먹고, 거미는 하루살이를 잡아먹고, 큰 고기는 작은 고기를 잡아먹습니다. 자연계는 문자 그대로 이렇게 피 묻은 발톱과 피 묻은 이빨의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비명과 탄식으로 가득합니다.
또 우리가 사는 이 지구는 모순으로 가득합니다. 때로는 지진이 일어나고, 화산이 폭발하고, 폭풍우와 노도와 뇌성벽력과 해일이 일어납니다. 탄식의 대지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한국의 많은 황폐한 강산은 인간의 학대로 말미암아 탄식의 소리가 그치질 않는 것 같습니다. 금수의 남획으로, 새나 짐승을 함부로 잡아서 새들과 짐승도 탄식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지금은 다람쥐까지 수난 시대로써 그 탄식의 소리는 신문기사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왜 자연계가 이렇게 되었는가? 이것은 다 인간의 죄의 결과라고 성경은 지적합니다. 그러므로 이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한다고 성경은 기록했습니다. 썩어짐의 종노릇 하는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대망합니다. 우주만물이 전 인류가 회개하기를 기다립니다. 개구리의 최후 비명 속에서도 ‘인간들이여, 어서 속히 회개하라!’ 이런 비참한 소리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회개하여 새 세계가 될 때에는 피조물까지도 변화되어 진정한 영화의 자연계가 될 것입니다.
이사야 11장 6절 이하에 다음과 같이 이사야는 예언하였습니다. “그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온 자연계가 이런 세계가 되기를 대망합니다. 어느 때에?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물이 바다에 넘치는 것처럼, 온 세계 인류에게 넘쳐서 세계 사람들이 새 사람이 될 때에는 이런 자연계도 변할 것입니다. 이렇게 내다보았습니다.
또, 이 피조물은 물론 자연계만 아닙니다. 우리 인간도 피조물입니다. 우리 인류의 탄식과 대망을 잠깐 생각해 보십시다.
여기에 대해서는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는 줄 압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탄식하여 보지 않은 이 있습니까? 한숨 쉬어 보지 않은 이 있습니까? 아침저녁으로 신문을 볼 때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탄식을 합니다. 형사 셋이 공모하고 압수된 밀수 금괴를 다 가지고 달아났다고 하지, 국민학교(초등학교) 교장 교감 자격시험에도 부정이 있었다고 하지, 또 어떤 운전사는 사람을 치고 달아나 뺑소니 운전사가 됐다고 하지, 그저 탄식 없이 신문을 볼 수 없을 지경입니다.
탄식의 소리는 어디서나 들립니다. 농촌에 가면 농민의 탄식, 어촌에 가면 어민의 탄식, 도시에 오면 도시인의 탄식, 오막살이집에도 탄식이 있는가 하면, 고루거각에도 역시 탄식의 소리는 마찬가지입니다. 아내는 아내로서의 탄식, 남편은 남편으로서의 탄식, 며느리는 며느리로서의 탄식, 시어머니는 시어머니로서의 탄식, 부모의 탄식이 있는가 하면, 자식들의 탄식도 또한 있습니다. 공장에 가면 노동자들의 탄식, 흔히 임금이 적다고. 그러나 경영주는 또 경영주로서의 탄식이 있습니다. 흔히 세금이 너무 높다고.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탄식이 있는가 하면, 교사는 교사로서의 탄식이 적지 않습니다.
일전에 어떤 야당 국회의원을 만났더니, 야당의 탄식이 굉장합니다. 아마 여당은 여당으로써의 탄식도 또한 없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 38선으로 말미암아 탄식이 그치질 않습니다. 공산당 압박 아래에서 신음하는 북한 동포들의 탄식이야말로 무엇으로 형용할 수 있을 것입니까? 삼천리강산은 탄식 소리로 하늘에 사무쳤습니다.
그런데 또 어느 나라에 가도 탄식 소리는 여전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부하고 가장 강하다고 하는 미국에 가도 인종 문제니, 폭행 문제니, 범죄 문제니, 히피 문제니 해서 탄식 소리는 상당히 높습니다. 인도에 가보니 또 그 나라대로 탄식 소리가 가득합니다. 문맹이 너무 많아서, 거지가 너무 많아서, 거리에 소 떼가 너무 많아서, 요새는 콜레라 환자가 너무 많아서 그저 탄식의 나라입니다.
파키스탄 같은 나라는 폭풍우와 해일로 큰 재난을 겪었는데, 다시 동 파키스탄의 분리 운동으로 탄식 소리는 더욱 높아져 가고만 있습니다. 중동 문제, 월남 문제 등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저 세계 어느 나라나 겉으로는 평온한 듯하지만, 그 속에는 탄식 소리가 하늘에 사무칩니다. 하물며 철의 장막 배후에 있는 국민들의 신음과 탄식의 소리는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왜 이런 세계가 되었는가? 여러분 요리문답 17문을 기억하십니까? 거기에 보면 이런 질문이 있습니다. “이 타락이 인종으로 하여금 어떠한 지위에 이르게 하였느뇨?” 거기 대답이 “이 타락은 인종으로 하여금 죄와 비참한 처지에 이르게 하였느니라.” 이 타락이란 말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인류의 타락이란 뜻입니다. 이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이런 저주 아래 있고, 많은 비참한 가운데 있다고 하는 것을 지적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사는 20세기 하반기는 과학문명의 발전으로 공중에는 제트기가 날고, 인공위성이 지구를 수없이 돌고 있지만, 전 인류는 불안과 공포와 압박 가운데서 신음과 탄식의 소리를 연발하면서 다른 피조물과 똑같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합니다. 죄와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데서 해방이 되어서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대망합니다. 과학을 통하여 인류에게 부여된 그 많은 지식과 기술, 그 엄청난 에너지, 곧 능력을 인류의 행복과 자유를 위해서 쓸 줄 아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정신혁명을 통해서 자유와 공의와 평화의 세계를 이룩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탄식에 있는 복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셋째로는, 23절에 신자의 탄식과 대망에 대해서도 기록한 바가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이로서, 우리의 영혼이 구원을 얻은 것은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지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은 아직도 온전히 변해서 새 몸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자들에게도 또한 탄식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생존하는 동안에는 이 육을 쓰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육신이라는 것은 약합니다. 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허물과 죄가 늘 우리를 따라다닙니다. 원치는 않았지만, 제자들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을 잤습니다. 원치는 않았지만, 베드로 같은 이도 예수를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탄식을 했습니다. 성도의 탄식이 여기에 있습니다. 원하는 선은 행치 못하고, 원치 아니하는 악을 오히려 행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도 탄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사실 육체를 통하여 오는 여러 가지 고통이 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생활 문제가 있습니다. 또 여러 가지 질병이 많습니다. 바울에게도 몸에 가시가 있었습니다. 칼빈 선생 같은 이는 항상 몸에 고통을 지니면서 일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에 영국의 유명한 그리스도인인 윌버 포스(Wilber Force) 같은 이는 거의 늘 누워서 주사로 고통을 억제하면서 일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교우들 가운데에서도 여러 가지 중한 병으로 누워서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성도들에게도 이런 탄식이 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육체라는 것은 나이 많아 가면 아무래도 점점 성경의 말씀대로 후패(朽敗 썩어 문드러짐)하여집니다. 고통이 따르게 됩니다. 며칠 전에도 어떤 나이 많은 자매님을 한 분 만나서 어떠냐고 물어보니깐 “다리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팔도 아프고 그저 사방이 쑤십니다.”라고 탄식하였습니다. 우리 믿는 이도 이 탄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말씀과 같이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손으로 지은 영원한 집, 곧 신령한 몸을 우리 믿는 사람들도 탄식하면서 고대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2절 이하의 말씀과 같이,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한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이 신령한 몸을 우리 믿는 사람들은 고대합니다. 기다립니다. 현재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과 비교하면 감히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 신령한 몸을 항상 대망하면서 삽니다.
그리고 한 가지만 더, 26절에 보면 성령의 탄식과 대망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기도하시느니라” 여기에 성령의 탄식이 있습니다. 이 탄식은 모든 탄식을 그치게 하는 탄식입니다. 우리의 대망을 이루어 주시는 탄식입니다. 곧 성령이 우리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간구를 해 주십니다.
우리가 늘 기도는 하지만, 사실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고 기도를 합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가 있어요. 첫째는 우리는 장래 일을 모릅니다. 무엇이 현재는 필요하나 장래에 필요할는지는 모릅니다. 또 하나는 우리는 무엇이 우리에게 최선이 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잘못 구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최선이 될 것을 아시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대신 기도하여 주시므로 우리의 대망하는 바가 다 마지막엔 이루어집니다.
자연계, 전 인류, 모든 성도, 성령까지도 지금은 탄식을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탄식은 헛된 탄식이 아닙니다. 큰 영광의 날에 해산의 수고로써 오는 창조적인 탄식입니다. 이 탄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나타나게 되고, 대망하는 새 세계는 결국 오고야 맙니다. 이 탄식과 대망이 꼭 이루어질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확실히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3장 4절에서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3장 2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곧 우리의 주님이 다시 나타날 때에는 우리 성도들의 구원이 완성되어서 대망하는 영광의 소망이 다 이루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21장 5절에는,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였습니다. 만물이 새로워질 때가 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절에는,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새 하늘과 새 땅이 됩니다. 곧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과 전 인류와 모든 성도와 성령이 다 같이 탄식하며 대망하는 전 인류의 구원과 전 세계의 구원을 완성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말고, 이 빛나는 소망을 가지고 이 탄식의 세계 가운데서 담대히 살아야 하며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모든 것은 내게로부터 시작합니다. 내가 먼저 온전히 회개하고, 내가 먼저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자녀가 많이 나타나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우주관과 역사관은 비관이 아닙니다. 낙관입니다. 원자탄으로 잿더미로 될 세계가 아니고, 광명과 자유와 공의와 평화의 새 하늘과 새 땅이 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탄식의 세계는 변해서 할렐루야 찬송의 세계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는 이 영원한 불멸의 소망이 있습니다. 기도하십시다.
영원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시여, 탄식의 세계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광과 자유로 충만한 새 세계를 바라보면서 지금 저희들이 이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가 잠깐 사는 이 세상에 괴로움이 있을지라도 장차 우리가 받을 영광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닌즉 우리는 이 모든 고통을 즐겁게 받으면서 영광스러운 세계를 영접하기 위해서 담대히 살고 담대히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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