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6:25-33/ 새해에 새 용기 / 한경직 목사 2014-08-27 10:07:25 read : 1414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6장 33절을 다시 봉독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날, 잡히시기 전날 밤에 다락방에서 여러 제자들에게 주신 모든 교훈의 총 결론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서 그 교훈의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모든 제자들이 누리게 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평안’이라고 하는 말은 곧 ‘평화’를 의미합니다. 오늘 세계 인류가 이 새해를 당하여 제일 갈망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 평화일 것입니다. 마음의 평화, 가정의 평화, 사회의 평화, 국제간의 평화, 온 세계의 평화일 것입니다.
여기에 평화의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간이 다 그리스도의 마음, 그리스도의 정신,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케 되고, 그 가운데서 살 때에 평화는 자연히 따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우리가 사는 이 땅에 다시 전쟁이 없는, 평화의 통일을 염원합니다. 이 평화적 통일도, 또 평화로운 사회도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룰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먼저 기억하십시다.
그리고 주님은 최후로 여기에 부탁한 말씀이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담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리라고 미리 경고하시면서 그러나 담대하라고 또한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것은 내가 세상을 이미 이기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금년에도 우리는 환난을 당할 것을 미리 각오해야 합니다. 인간이란 아무래도 소위 ‘인생 사고(四苦)’, ‘생로병사(生老病死)’라고 해서, 나고 병나고 늙고 죽음의 고통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또한 천재지변, 불의의 사고, 재난이 또한 종종 일어납니다.
이것뿐이 아닙니다. 이것들 위에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한 가지 환난이 더 있습니다. 곧 선한 생활에는 언제나 악의 핍박이 있는 법입니다. 성도의 수난과 환난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담대하라고. 용감히 살라고. 왜? 그리스도께서 이미 세상을 이기신 까닭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도 모든 환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오늘 새해 첫 주일 아침, 우리 하나하나가 새 용기를 얻기를 바랍니다.
먼저, 우리는 자기 반성과 죄를 회개하는 데에 용감해야 합니다. 자신 안의 부정과 부패는 언제나 우리를 비겁하게 만듭니다. ‘양심이 다 우리를 겁쟁이로 만든다.’고 하는 속담도 있습니다. 불안한 양심은 우리로 하여금 비겁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먼저 내가 내 자신을 비판해서 죄를 스스로 깨닫고 회개할 때에 마음의 평화가 회복되고, 양심이 평안할 때에 우리는 용감히 살 수 있고, 의를 위해서 싸울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우리는 혹 다른 이가 우리를 비판할 때에 그것이 사실이면, 우리는 받아들여서 그것을 시정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용기입니다. 전에 다윗왕은 음란한 죄를 범한 후에 선지자 나단의 충고를 듣고, 곧 원통히 그 앞에서 회개하였습니다. 여기에 다윗의 용기가 역시 나타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약시대에 내려와서 헤롯왕 같은 사람은 음란한 죄를 범한 후에 세례 요한의 충고를 들었지만,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세례 요한을 죽였습니다. 여기에 그가 얼마나 졸렬하고 비겁한 자라는 것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다. 참으로 용기 있는 이는 먼저 죄를 회개하는 데에 용감합니다.
둘째는, 유혹과 시험을 물리치는 데 용감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로부터 많은 시험을 받았으나 용감히 물리친 것을 우리는 잘 기억합니다. 배가 고프니 돌로라도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주릴 때에 들어오는 모든 물질의 시험이 있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하였는데, 여기에 인간 심리 속에 있는 허영의 유혹이 있습니다. 나에게 절만 하면 천하만국의 영광을 네게 주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세상 권력에 대한 유혹이 있습니다. 권력을 갖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모든 유혹을 담대히 물리쳤습니다. 유혹과 시험을 용감히 물리칠 줄 알아야 옳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에 요셉이 애굽에서 보디발의 집에서 종노릇할 때에 그 아내를 통하여 들어오는 정욕의 유혹을 어떻게 담대히 물리쳤는가를 우리는 너무나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청년 요셉의 굳은 의지와 그의 용기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성경에서 유혹을 담대히 물리치지 못함으로 일생을 그르친 비겁한 이들의 이야기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령 에서와 같은 사람은 팥죽 한 그릇, 곧 식욕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장자의 특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구약의 아간이나 신약에 와서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은 황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서 일신을 망쳐버린 이들입니다. 삼손과 같은 사람은, 참 동양으로 말하면 항우와 같은 큰 기력을 가진 사람이지만, 정력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서 비참하게 최후를 마치고 만 것입니다.
시대는 변하고 환경도 변하지만, 옛날이나 오늘이나 육신을 쓴 인간에게 누구에게나 닥쳐오는 유혹과 시험들이 있습니다. 곧 ‘황금은 흑사심(黃金黑士心)’이라고, 물질을 통하여 들어오는 시험이 있습니다. 특별히 젊었을 때에는 정욕을 통하여 들어오는 유혹이 있습니다. 장년에 이르게 되면 특별히 권세욕, 명예욕, 허영들이 유혹으로 또한 우리를 이끄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모든 유혹과 시험을 물리치는 데 용감해야 합니다.
그리고 셋째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용감해야 합니다. 소극적으로 죄를 회개하고 유혹을 물리치는 데만 용감할 뿐더러, 한 걸음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데 용감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리스도의 정병이 되라고 권합니다. 선한 싸움을 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절대 다수가 아직도 그리스도를 모르는 불신 사회입니다. 이러한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려고 하면, 작은 일에도 용기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세례문답을 할 때에 들어보면, 어떤 학생은 이런 질문을 합니다. “눈뜨고 식사기도를 해도 됩니까?” 묻는 학생이 있습니다. 또 어떤 학생은 “집에서는 식사기도를 하나 학교에 가서는 못합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나는 그 심정을 잘 이해합니다. 사실 다른 사람들이 다 기도 안 할 때에 나 홀로 머리를 숙여서 기도하는 것은 처음에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런 작은 일에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실 어떤 이들은 주초(酒草)가 좋지 않은 줄 알면서도, 혹 연회석상에서 이런 데에 동참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작은 데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제가 일찍이 들으니 고한규 장로님, 본 교회 시무 장로로 계시다가 얼마 전 세상을 떠나신 어른이올시다. 이분이 일제시대에 그 평안남도에서 평안수리조합이라고 하는 큰 사업을 하면서 그 수리조합장으로 일을 할 때에 무슨 일이 있어서 서울에 와서 조선총독을 면회했다고 합니다. 총독과 인사를 한 후에는 자리에 앉아서 조용히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 총독이 그 기도하는 것을 자세히 보더니, 기도를 다 그친 다음에 감사하다고, 참, 기도를 해주시니 대단히 감사하다고 그리고서 일을 의논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작은 일 같으나 이것도 고 장로님의 인격과 용기를 나타내는 일화입니다.
개인전도에도 언제나 용기가 필요합니다. 대중전도에도 역시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마지막으로 올라갔을 때에, 유대 폭도들에게 붙잡혀서 매를 맞는 중에 로마 천부장이 이것을 알고 같이 와서 구원을 받아서 영문으로 끌려가다가 한 높은 층계에 이를 때에, 바울이 천부장에게 허락을 받아서 자기를 핍박하던 그 무리를 향해서 손을 흔들며 조용하게 한 후에, 그들에게 일장 연설을 하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장면이 사도행전 21장과 22장에 나타납니다. 여기에서도 사도 바울이 얼마나 용감하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전도에도 언제나 용기가 필요합니다.
마틴 루터가 웜스(Worms) 국회회의에서 당시에 그가 새로 주장하던 이 신교의 진리를 취소하라고 하는 위협을 받을 때에 황제 앞에서, “나는 여기 섭니다. 나는 다르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외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역사의 일화입니다. 마틴 루터도 얼마나 용감하였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는 것입니다. 진리 수호에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악을 저항하는 데 용감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선과 악의 각축장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어 보세요. 빛과 어두움의 싸움터입니다. 정(正)과 부정(不正), 의와 불의, 진리와 허위, 선과 악의 대결은 어디나 있습니다. 사회에도, 국제간에도 이 대결은 계속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무슨 문제를 당하든지 사리를 옳게 판단하고 옳은 편에 설 줄을 알아야 하고, 언제나 진리와 정의를 위해서 용감히 싸워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이 국토가 양단된 이 나라에 사는 우리로서는, 이 땅에 궁극적으로 자유와 정의와 통일이 확보되기 위해서 각 방면에서 용감히 싸워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지막 말씀을 잊지 마십시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사실 그리스도는 광야에서 뿐만 아니고, 일생을 통하여 모든 시험과 유혹을 이기었습니다. 또한 십자가를 통하여 오는 모든 고통과 환난도 이기시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부활을 통하여 사망의 권세까지 이기신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향하여 담대하라고 권하십니다. 우리가 비록 약하고 보잘 것이 없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이 모든 유혹과 환난을 이기고 승리적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37절에,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리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또 빌립보서 4장 13절에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할 수 없으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 수 있습니다.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용기의 비결이 어디 있는가? 곧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생활하는 것입니다. 용기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신앙에서 옵니다. 용기는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평안한 양심에서 옵니다. 용기는 의심 없는 믿음에서 옵니다.
이 새해 아침에,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도 세상을 이깁니다. 환난도 이깁니다. 질고도 이길 수 있습니다. 실패, 고독, 상심도 이깁니다. 유혹과 시험도 이길 수 있습니다. 슬픔도, 사망까지도 모든 악의 세력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리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도 세상을 이깁니다. 그러므로 담대히 용감히 나아갈 것입니다. 새 용기로 새해를 맞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버지시여, 이 새해 첫 주일 아침에 우리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가 비록 약하나 주 안에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용감히 금년 1년 동안 살아 나갈 수 있는 이 은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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