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3:1-11/ 부활한 생활 / 한경직 목사 2014-08-27 09:50:11 read : 1706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것을 생각하고 땅엣것을 생각하지 말라”
1972년 부활절 아침에,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만민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나, 3일 만에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지금까지, 아니 영원히 살아 계십니다. 이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잠자는 자의 첫 열매가 된다고 성경은 지적하여 주십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같이 모든 잠자는 자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도 앞으로 부활할 때가 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지나간 과거의 부활이라고 하면, 이 장차 올 모든 신자의 부활은 미래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과거와 미래의 부활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이뿐만 아니고, 현재의 모든 믿는 자의 부활을 또한 가르쳐 줍니다.
오늘 본문에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하는 말은 곧 현재의 영적 부활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적으로 다시 살리심을 받은 사실을 지적합니다. 곧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였으므로 부활한 사람으로서의 합당한 부활의 생활을 하라는 권면입니다. 오늘 아침, 이 부활한 생활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비록 죽을지라도, 앞으로 우리의 몸이 다시 살아날 때가 옵니다.
이 미래의 부활을 성경에서 확실히 가르칩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우리 죽은 몸도 부활할 때가 옵니다. 우리 주님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때까지 기다릴 것 없이, 현재에 우리의 영이 부활해야 될 것을 또한 가르치십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2장 1절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같은 장 5절에는,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이렇게 기록한 것입니다. 곧 영적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믿어 모든 죄를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기 전에 곧 영으로 부활한 이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경험을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죽었다는 뜻입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의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그는 새 사람이 되어 부활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 누구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합니다. 곧 죄에 대하여는 죽어야 합니다. 음란, 부정, 부패, 허영, 탐심, 교만, 거짓 등 온갖 죄에 속한 사람은 먼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그리스도와 같이 영적으로 새 사람으로 부활해야 합니다.
사실 세례의 깊은 뜻도 여기에 본래 있습니다. 옛날에는 세례를 받을 때 흔히 침례를 하였습니다. 온몸을 물에 잠기게 하였다가 다시 올라오게 하는 것입니다. 온몸이 물에 잠기는 것은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을 의미하고, 다시 물에서 올라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새 사람으로 부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인간의 일생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경험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세상에 온 날, 곧 생일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와 꼭 같이 중요한 날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거듭나는 날, 혹은 영적으로 부활하는 이날입니다. 이날이 있어야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날은 흔히 세례 받는 날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혹 그 전이라도 영적으로 온전히 부활하는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1972년 부활절이 여러분 심령이 온전히 다시 사는 부활의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탕자의 비유 가운데서 그 아버지가 돌아오는 그 아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였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사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과거의 죄를 이 시간 온전히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영접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오늘이 여러분 하나하나에게 이와 같은 뜻 깊은 영적 부활의 날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본문에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곧 영적으로 부활해서 새 사람이 되었으면, 그다음에 새 사람이 하는 일을 가르쳐 줍니다. “위에 있는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것을 생각하고 땅엣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먼저 이 말씀을 오해하지는 마십시다. 위엣것을 찾으라 위엣것을 생각하라고 하는 것은 그저 하늘만 늘 쳐다보라고 하는 뜻은 아닙니다.
제가 들으니 미국의 한 히피 청년이 해만 몇 시간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그 결과는 시신경이 상해서 그만 소경이 되었다고 합디다. 또 요사이 어떤 믿는 사람들처럼 사업도 하지 아니하고, 살림도 하지 아니하고, 산에 들어가서, 혹은 굴 속에서, 혹은 기도원에서 성경만 보고 기도만 하라고 하는 뜻도 아닙니다. 요사이 성경을 잘못 읽고 이런 곳을 찾아다니다가 잘못되어서 개인적으로는 일신을 망치고,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며, 더욱이 기독교에 대한 큰 오해를 가져오게 하는 이들이 있는 것은 실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위엣것을 찾고 위엣것을 생각하라고 하는 교훈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의미입니까? 첫째로, 생의 새로운 방향을 의미합니다. 삶의 새로운 방향을 의미합니다. 여기 ‘위엣것’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와 그 나라에 속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땅엣것’이라고 함은 ‘그리스도와 그 나라에 반대 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벌레가 변해서 나비가 된 후에는 언제나 위로 날아갑니다. 방향이 변합니다. 벌레 때에는 항상 땅 속으로 기어들어갔으나, 나비로 변한 후에는 그 생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범사에 위엣것이 있고, 아랫것이 있습니다. 밝은 것이 있고, 어두운 것이 있습니다. 깨끗한 것이 있고, 더러운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것이 있고, 그와 그 나라에 반대 되는 어두운 것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영적으로 부활한 사람은 언제나 위엣것을, 곧 밝은 것을, 깨끗한 것을,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것을 찾습니다.
누구나 음악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음악 가운데는 위에 속하는 음악이 있고, 땅에 속하는 음악이 있습니다. 한 번 들으면 인간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깨끗게 하고, 평화롭게 하고, 곧 인간의 심령을 저 높은 곳으로 이끌어 올리는 경건한 음악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면에 음악 가운데는 한 번 들어서 사람의 마음을 타락하게 하고, 해이하게 하고, 더럽게 하는 추한 음악이 또한 있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음악을 찾는가? 어떠한 음악을 생각하는가? 영적으로 부활한 사람은 위에 속하는 음악을 찾습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기독교 음악이 필요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 교회 박재훈 장로께서 <에스더>를 작곡하였고, 또 <에스더> 공연의 의미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음악뿐이 아닙니다. 모든 예술 방면이 다 그러합니다. 영화 가운데도 두 가지 종류의 영화가 있습니다. 위에 속하는 영화, 또 반면에 땅에 속하는 영화. 그림 가운데도 두 가지 종류의 그림이 있습니다. 위에 속하는 그림, 또는 반면에 땅에 속하는 그림. 문학 혹은 소설 가운데도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위에 속하는 문학 혹은 소설, 또는 반면에 땅에 속에 속하는 문학 혹은 소설이 있습니다.
예술만이 아닙니다. 사교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위에 속하는 교제, 또는 그 반면에 땅에 속하는 교제가 있습니다. 순결, 고귀, 신의, 참된 사랑의 교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정욕, 탐심, 자기의 이익을 중심하는 악마적 교제가 있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교제가 있고, 파멸에 이르는 교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한 사람은 모든 사귐에 있어서 위에 속하는 성도의 교제를 가집니다.
교제뿐이 아닙니다. 무슨 직업, 무슨 일을 하든지 위에 속하는 것이 있고, 반면에 땅에 속하는 것이 있습니다. 똑같이 정치활동, 경제활동, 사회활동을 하나, 한 사람은 참된 애국심과 민족중흥의 위대한 사명감에서 할 수 있고,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오직 자기 중심, 자기 이익, 자기 권세, 자기 지위만을 중심하여 움직일 수 있습니다. 부활한 그리스도인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어떤 방면에서든지 오직 위에 있는 것을 찾습니다. 부활한 생활은 그 생의 방향이 다릅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위엣것을 찾고 또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둘째는, 가치관이 다릅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날 때에는 제일 먼저 눈을 뜬다고 합니다. 영적으로 부활한 사람은 신령한 눈이 밝아집니다. 멀리 봅니다. 장래까지도 봅니다. 내세까지도 봅니다. 높이 봅니다. 하늘나라도 봅니다. 하나님의 보좌도 봅니다. 그 보좌 곁에 앉으신 그리스도도 봅니다. 그래서 무엇이나 밝은 눈으로 보고 가치를 판단합니다. 무슨 일이나 영원한 견지에서 또는 하늘나라의 견지에서, 곧 하나님 나라의 견지에서 보고, 그 가치를 판단합니다. 이렇게 새로운 표준으로 모든 일의 가치를 판단하게 됩니다.
이렇게 보게 되면 현재에 그렇게 귀하게 보이는 것도 실상은 그리 귀한 것이 못되고, 현재에 그렇게 부러운 것도 실상은 그렇게 부러운 것이 못 되는 것들도 많습니다. 소위 부귀영화를 보통 사람들이 그렇게 탐하나, 이 영원한 세계, 하늘나라의 견지에서 볼 때에는 그렇게 탐할 것이 못됩니다. 왜? 이런 것들은 다 풀과 같고 그 피는 꽃과 같아서,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질 때가 쉬이 오는 까닭입니다.
이런 영원한 견지에서 볼 때에, 사실 무엇을 얻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귀하고, 대접을 받는 것보다 봉사를 하는 것이 더 귀하고, 보복을 하는 것보다 남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더 귀하고, 불의한 재물보다 맑은 빈곤한 생활이 오히려 더 귀하고, 세상의 헛된 명예보다 하나님 앞에서 맑은 양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더 귀하고, 육신보다도 영의 구원이 더 귀한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부활한 생활은 그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셋째는, 부활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 생의 목적이 분명하고 보통 사람과 또한 다릅니다.
인간이 무엇을 위하여 사는가? 이는 인간으로서 물어볼 수 있는 한 큰 문제일 것입니다. 먹기 위하여 사는가? 입기 위하여 사는가? 좋은 집을 위하여 사는가? 돈을 모으기 위하여 사는가? 연애를 하기 위하여 사는가? 권세를 얻기 위하여 사는가? 지식을 얻기 위하여 사는가? 이것들은 다 삶을 위한 방편이지 삶의 최고 목표는 될 수가 없습니다.
삶의 최고 목표가 무엇인가? 참으로 영적으로 부활한 사람은 이 삶의 최고 목표를 분명히 알고 항상 그것을 위하여 노력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부활한 이들도 여전히 이 세상에 살며, 사업도 하고,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방면에 여전히 활동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활동의 최고 목적이 아직도 죄 가운데 죽을 세상 사람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나의 향락이나 나의 유익을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부활한 이는 생의 최고 목표를 찾은 분입니다.
이 부활절 아침에 두 가지 축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첫째는 이날이 우리 하나하나에게 영적으로 부활하는 날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오직 과거의 온갖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므로 이 시간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영적으로 부활하였으면 범사에 위엣것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새 가치관에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최고의 목표를 위하여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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