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6:28-34/ 막10:13-16/ 첫 어린이날 / 한경직 목사 2014-08-26 22:36:17 read : 1991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우리 주님의 어린이에 대한 교훈의 말씀이올시다.
오늘을 본 교회에서는 ‘어린이날’로 지킵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지키고, 또 외국의 교회, 미국 교회와 같은 데서는 흔히 6월 둘째 주일, 장미가 많이 피는 계절을 택해서 ‘꽃주일’이라는 이름으로 어린이날을 또한 지키는 것입니다. 어느 날이든 1년에 1번씩, 특별히 어린이들을 생각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예배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인 줄 생각합니다.
우리 주님은 산상보훈에서,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보라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다”며 백합화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또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고, 또 어린이들을 찬양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꽃을 사랑하시고, 또 어린이들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연계에는 아름다운 꽃을 주시고, 우리 가정에는 아름다운 어린이들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꽃을 사랑하고, 어린이를 사랑해서 꽃을 가꿀 줄 알고, 어린이들을 바로 기를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읽은 마가복음 10장의 내용은 어린이날이, 말하자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알려 주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이 세계에 이 꽃주일 혹은 어린이날이 있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어떤 날 어린이들을 영접해서 그들을 안고 그 머리에 손을 얹으시고 축복하여 주심으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 간단한 주님의 하신 일이 세계 역사를 통해서 얼마나 어린이들을 위한 사상, 어린이들을 위한 운동, 어린이들을 위한 구호나 모든 기관에 큰 영향을 주었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여러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아침, 말하자면 첫 어린이날에 된 일을 잠깐 회상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오늘날 사는 우리에게 새롭게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에 보니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이들을 데리고 오매” 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아마 특별히 어머니들 같습니다. 이 어머니들이 예수님께서 만져주시고 예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어머니의 마음은 같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그 때의 위대한, 참 귀하신 선생님의 축복을 자기네 어린이들이 받기를 원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이렇게 말하자면, 어린이날은 부모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옴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부모들만 오지 아니하고 어린이들을 데리고 주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나온 것입니다. 혼자 교회에 나오는 것도 물론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부모가 된 이들은 어린이들까지 데리고 와서 같이 주님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성경에 보니 한 아버지는 간질병 앓는 아이를 주님께 데리고 나와서 간절히 간청을 해서 그 아이를 고친 이야기가 있습니다.
기도의 어머니 한나는 기도로 받은 그 어린아기 사무엘을 멀리 실로에 있는 성막에까지 데리고 가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도 어린 아기 예수를 예루살렘 성전에까지 데리고 와서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엘리사벳도 아기 요한을 성전에 데리고 와서 드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이들을 데리고 교회에 나오는 것은 매우 긴요한 일입니다. 아기세례도 할 수만 있으면 난 지 6개월 이내 혹은 1년 이내에 받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린이들의 이름을 영아부에 넣어주고, 좀 크면 유치부, 유년부 등에 꼭 넣어주어서 어렸을 적부터 옳은 기도를 받게 하는 것은 부모로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겉으로만이 아니고, 중심으로 어린이들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한나는 중심으로 아기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사무엘이 그 후에 그런 위대한 인물이 된 것입니다. 엘리사벳도 어린 요한을 중심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게 다 그 후에 세례 요한이 되도록 만든 것입니다. 이것은 어린이들의 장래에 대한 지도, 교육 일체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중에 몇 분이나 집안에서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주기도 또는 사도신경을 가르치기 위해서 힘씁니까? 여러분이 어린이들에게 다른 공부를 힘써 시키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 어린 마음 밭에 심기 위하여 얼마나 힘을 씁니까? “네 아들이 어디 있느냐? 네 딸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따금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 부모들은 지금 성전에 와 있으나, 지금 우리의 자녀들은 어디 있습니까? 어떤 자리에 있습니까?
부모들은 어린이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맡은 청지기들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책임이 있습니다. 전에 어진 어머니 모니카는 자기의 아들 어거스틴이 참으로 회개하기까지 눈물이 그 눈에서 마르지를 못하였습니다. 계속해서 눈물의 기도를 드리며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가 회개했습니다. 첫 어린이날에는 부모들이 다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그래서 꼭 축복을 받기 원했습니다. 오늘 이런 축복이 우리 모든 부모 되신 이들에게 또 어린이들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또 오늘 이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면, 부모님들은 이렇게 어린애들을 데리고 왔는데, 그때 여러 제자들은 그들을 꾸짖었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를 꾸짖었는지 아이들을 꾸짖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둘 다 꾸짖은 모양입니다. 물론 제자들이 그렇게 한 것도 주님을 돕기 위해서, 주님의 일에 방해가 될까 해서 그런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여간 이 제자들은 예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린이들을 환영하지 않고, 말하자면 어린이들이 주님께 가까이 오는 것을 방해했습니다. 그래서 꾸짖기까지 했습니다.
이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분이 너무 심해서,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늘나라에 있는 이들이 이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도 문자 그대로 교회에서 어린이들을 혹은 부모들을 꾸짖는 이들이 혹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이유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너무 떠든다든지 혼란을 막기 위함인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어린이들을 대할 때에 언제나 조심해야 합니다.
제가 몇 해 전에, 어떤 가정에 가서 심방을 할 때에 한 청년을 만나서 이야기해 보니 그는 어렸을 때에, 일찍이 신의주에 있을 때에 주일학교에 잘 다녔는데, 한번은 주일학교 갔다가 주일학교 선생에게 매를 맞았다고 합니다. 그다음부터 예배당 안 나갔다고 합니다. 물론, 그 주일학교 선생이 아마 유익하겠기에 그런 줄 압니다. 하나 우리가 조심해야 합니다. 권사님들도 그렇고, 집사님들도 그렇고, 주일학교 선생들도 어린이들을 잘 용납하는 것을 꼭 배워야 합니다.
또 넓은 의미에서 어른들은 어린이들이 주님께 나오는 것을 방해하는 어떤 말이나 행동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에 우리가 나오긴 나오지만,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인답게 행동하지 못하는 모든 일을, 어린이들이 주님께 나오는 것을 방해하는 행동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 어른 된 사람들은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 성경에 보니 예수님께서 분을 내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사소한 일에 분을 내시는 이가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 분을 내신 것을 보니 주님께서는 어린이들을 이렇게 막는 것은, 아주 중대한 허물을 짓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분명합니다. 우선 이것은 어린이들을 경시하는, 가볍게 보는 당시의 사상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신 것입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어린이들을 경시하고 가볍게 보고, 천대하고 귀중히 여길 줄을 모르는 이들이 적지 아니합니다. 그래서 심지어 어린이들을 학대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내가 사실 일전에 어떤 책을 보니, 어떤 나라에서 부모들이 성나서 어린이들을 불러 매를 때리기도 하고, 바로 치료를 안 해줘서 죽는 애들도 많다고 합니다.
어린이들을 귀중히 여기며, 그들이 옳게 자라나게 하기 위해서 모든 배려를 하고 준비를 하는 것은 실로 그 사회, 그 나라의 문화의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문화가 높을수록 어린이들을 우대하고, 그들의 필요한 장난감을 비롯해서 모든 시설을, 아동공원이니 유치원이니 학교니 하는 모든 시설을 갖추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또 어린이들이 반드시 주께 나와서 주님의 축복을 받고 주를 배워야 합니다. 어린이들이 지금 세상 학교에 가서 물론 여러 가지 지식과 기술을 많이 배웁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것들을 바로 쓸 만한 사람이 돼야 합니다. 이렇게 모든 지식과 기술을 바로 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꼭 주님께 나와서 주님을 배워야 합니다.
또 주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지만, 특별히 어린이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모든 양들을 사랑하시나 특별히 어린 양들을 더 사랑하셨습니다. 왜? 어린 양은 더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제일 먼저 부탁했습니다. 그 어린 양은 어린아이들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이 심정으로 어린이들을 대하여야 합니다. 또 어린이들을 위한 모든 배려, 기관, 우리 교회 학교에서의 영아부, 유치부, 이런 모든 교회학교, 혹은 유치원, 특별히 부모 없는 아이들을 기르는 보린원, 주님의 진리 가운데서 교육을 주는 기독교 국민학교(초등학교), 기독교 중고등학교, 기독교 대학이 얼마나 필요하다고 하는 것도 우리가 좀 인식해야 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런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에 이 첫 어린이날에, 모든 장성한 사람들에게 주신 주님의 엄숙한 교훈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어린이들 사이에 긴밀한 공통되는 점을 여기서 보여주십니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먼저 어린아이와 같이 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어린이들에게 배울 점들이 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첫째는 아마 그 어린이들의 천진성일 겁니다. 곧 천진난만한 그 성품일 것입니다. 어린이들은 참됩니다. 담박(淡泊 욕심이 없고 마음이 깨끗함)합니다. 외식과 가장이 없습니다. 물론 권모술수를 모릅니다. 문자 그대로 무사리(無私利)합니다. 그들의 맑은 눈동자처럼 그 마음도 맑습니다.
제가 일찍이 신의주에서 교회 일을 볼 때에, 한번 어떤 집에 심방을 가서 그 가정에 들어앉았는데, 그때 그 부인과 어린아이들만 같이 있고, 남편은 없어요. 그때 그 어머님 말이, 자기 옆에 앉은 작은 딸에게 “얘, 너 아빠가 옆집에 간 것 같은데, 얼른 가서 목사님 심방하러 오셨는데 오시라고 그래라.” 그랬더니 얘가 얼른 뛰어가요. 얼마 후에 자기 혼자 돌아오더니 큰 소리로 하는 말이, “아빠 없다고 하래.” 얼마나 진실합니까? 어린애들은 이렇게 진실하게 참말을 합니다. 어른들한테 거짓말 배우기 전에는 이렇게 진실합니다.
이렇던 애들이 점점 커가면서 거짓말을 배웁니다. 누구한테 제일 먼저 배우는지 압니까? 부모들한테 제일 먼저 배웁니다. 요샛말로 아주 아이러니컬(ironical)한, 참 기막힌 사정입니다. 예수님 말씀이 이렇게 진실하여야, 이런 성품이 있어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또 아마 둘째는 그 겸허성일 겁니다. 어린이들에게는 교만이 없습니다. 애들은 겸손합니다. 무슨 금전의 교만, 지위의 교만, 지식의 교만을 모를 때입니다. 그래서 어린이들은 가난한 집 애나 부잣집 애나 같이 잘 사귀어 놉니다. 어른들은 부자하고 가난한 사람하고 그렇게 사귀지 않아요. 그러나 어린애들은 잘 만나서 같이 놉니다. 어린이들의 사회는 실로 민주사회입니다. 평등사회입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전에 어떤 촌에 부농, 좀 잘사는 농사하는 집이 두 집이 있단 말이에요. 그 두 집 사이에 토지의 경계 때문에 싸움이 나서 그만 소송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두 농부 사이에 서로 원수가 되어서 외면하고, 어른들은 당초에 서로 피하고 만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 두 집 애들은 전해 들으면 매일 같이 논단 말이에요. 잘 놀거든요. 그런데 한 농부가 자기 아이가 미워하는 집 아이랑 노는 걸 보니까 도무지 견딜 수가 없어서 잘 노는 걸 뿌리쳐서 떼어 가지고는 자기 집으로 들어왔단 말예요. 그 후에 물론 다른 농부가 그걸 알고 자기 아이도 데리고 왔어요.
그래서 이편에서는 이편 부모가 말리고, 저편에서는 저편 부모가 말리고, 그렇게 의좋게 잘 놀던 애들이 못 놀게 됐단 말이에요. 그러다가 그 한집 아이가 그만 병이 났다고 합니다. 병이 나자 중하게 앓는데, 이놈이 글쎄 열이 올라서 앓으면서 자꾸 누구를 부르는고 하니, 그 동네 자기하고 놀던 애 이름을 부르거든요. 자꾸 그 애 이름을 부른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강퍅하던 그 부모도 거기에 마음이 녹아서 그 옆집에 가서 그 사정 얘기를 하고, 그 아이를 데려다가 그 앓는 아이를 위로해 주고 함께 놀게 하고, 그 계기로 해서 어른들도 화해를 하고, 서로 의좋게 지냈다고 합니다. 이것이 어린이의 마음이올시다. 이런 겸허하고 화해하는 이 마음을 좀 가져야 합니다. 이래야 천국에 갑니다.
그리고 아마 또 하나 생각할 수 있어요. 그것은 어린이들의 신뢰성일 것입니다. 어린이들은 남의 말을 그대로 믿습니다. 더욱이 부모의 말은 꼭 그대로 믿습니다. 전에 들으니 미국의 한 대학생은 대학교에까지 와서도 산타클로스가 정말 있는 줄 알더라고요. 그거 왜 그렇게 되었겠느냐? 그가 하는 말이, “우리 어머니 말씀인데”, 하는 겁니다. 그만큼 어린애들이 부모의 말씀을 믿습니다. 이러한 믿는 마음이야말로 천국에 들어가기에 필수조건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런 믿음으로 천국을 받들어야,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어린이가 부모를 믿는 것과 같습니다. 자식이 어찌 부모를 의심할 수 있습니까? 어린이가 부모를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것과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때에 우리는 그 때부터 천국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사진이 없는 때이니까 확실히 모르지만, 어떤 책을 읽어보니 옛날 성 프란시스의 얼굴은 어린애의 얼굴과 같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 참 크리스천의 마음에 이런 어린이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 첫 어린이날을 생각하면서 다음 세 가지 교훈을 꼭 명심하십시다. 첫째는, 어린이들을 꼭 주님께 인도하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부모의 첫째 사명임을 기억하십시다. 아무리 모든 방면에 부모의 책임을 다하였다고 할지라도, 이 점을 실패하면 그 부모는 부모로서의 최고의 책임을 저버린 것입니다. 어린이들을 인도하고, 어린이들을 온전히 주님께 바쳐야 합니다. 부모님들이 게을러서 아기세례 받는 것을 잊어버리지 맙시다. 부모님들이 게을러서 아이들을 교회학교로 인도하는 것을 잊어버리지 맙시다.
둘째는, 어린이들이 주께 나오는 것을 방해하지 아니해야 되겠어요. 꾸짖지 아니해야 되겠습니다. 더욱이 어린이들을 범죄로 인도하는 것은 가장 큰 죄악이라고 예수님께서 지적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6절에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경고했습니다. 어린이들을 유혹이나 범죄로 유도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우리가 삼가야 합니다.
그리고 셋째는, 어린이들에게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진실을 배우십시다. 겸손을 배우십시다.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그 신뢰의 마음을 배우십시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전에 어떤 예술가가 예수님의 초상을 대리석에다 조각을 합니다. 이태를 수고해서 예수님의 얼굴을 다 조각한 후에 자기 집 어린애를 불러서 “얘, 이 조각이 누구 같으냐? 이 초상이 누구 같으냐?” 물어봤다고 합니다. 그 어린애가 하는 말이 “아마 유명한 사람이겠지요.” 그 아버지는 그 말을 듣고 실망했습니다.
다시 그것을 버리고, 다른 대리석을 택해서 다시 이태를 수고해서 예수님 얼굴을 다시 조각을 했습니다. 그다음에 어린애에게 또다시 물어봤습니다. “얘, 이거 누구 같으냐?” 가만히 보더니 “재주 많은 사람 같습니다.” 또 실패했습니다.
그다음에 다른 대리석 조각을 통해서 다시 이태를 수고해서 예수님 얼굴을 만들어 놓고 “얘, 이거 누구 같으냐?” 그때 어린애 하는 말이 “아, 우리 주님이시다.” 그때야 이 아버지 예술가가 기뻐서 “아, 이제는 내가 성공을 했구나.” 그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어린이들이 예수를 바로 봅니다. 신앙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린이들을 속이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어린이들이 여러분을 어떻게 봅니까? 여러분의 어린이들이 과연 여러분의 얼굴과 마음 속에서 예수님을 찾습니까? ‘우리 어머님은 참 믿음이 있어.’ 어린이들이 그렇게 생각합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얼굴, 여러분의 말씀, 여러분의 행동 가운데서 어린이들이 예수를 찾아볼 만큼 그런 아버지가 되시고, 그런 어머니가 되시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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