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7:11-19/ 아홉은 어디 있느냐 / 한경직 목사 2014-08-25 21:18:06 read : 1715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오늘 읽은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에 한번은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이로 가시면서 한 촌에 들어가셨습니다. 마침 그 촌 변두리에 있는 문둥병자 열 사람이 예수를 보고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부르짖었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당시에 문둥병자들은 일반 사람들과 가까이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을 고쳐주시기로 생각하시고,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 뜻은 당시에는 제사장들이 지금으로 말하면 의사를 대신해서 문둥병자들에게 그 병이 나을 때에는 건강 진단서를 써주던 때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나을 줄 믿고, 예루살렘으로 가던 도중에 모두 깨끗하여졌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너무 감사하여 예수님께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서 사례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사마리아 사람, 곧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아홉 사람은 다 유대인이었는데 감사할 줄을 몰랐습니다.
감사는 참 드문 은혜입니다.
보통으로 생각하면 그럴 수가 있을까 생각되지만, 아마 이것이 인간의 일반적인 모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은혜는 잊어버리기 참 쉽습니다. 전에 요셉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애굽의 감옥에 있을 때에 마침 그 나라의 고관 두 사람이 무슨 죄를 얻고 요셉이 있는 감방에 들어왔습니다. 하나는 애굽 왕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이요, 다른 하나는 떡을 관장하는 어른이었습니다.
며칠 후에 두 관원장이 모두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술 맡은 관원장이 꿈에 보니 포도가 많이 열린 포도나무 가지 셋이 보이는데, 자기가 그 포도를 따서 즙을 짜서 잔에 담아서 바로 왕에게 올렸습니다. 그 뜻이 무엇일까 생각해도 자세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요셉이 그 말을 듣고 해몽하여 주었습니다. “그것은 참 좋은 꿈인데, 그 세 가지는 사흘을 의미하는데, 사흘 후에 당신께서 풀려나가서 전직을 회복하게 될 거요.” 그러니 그 술 맡은 관원장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사흘을 기다리는데 과연 사흘째 되던 날 석방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때에 요셉은 이 나가는 술 맡은 관원장을 붙잡고 자기의 억울한 사정을 얘기했습니다. “사실 나는 여기 들어올 죄가 없는데 이렇게 억울한 누명을 쓰고 들어왔는데, 나가게 되면 바로 왕에게 내 사정을 고해서 나도 좀 풀려나갈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했고, 술 맡은 관원장도 그렇게 하기로 약속한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그 관원장은 나온 다음에 그 약속을 잊어버렸습니다. 오래 있다가 생각이 났는데, 그때는 다른 때가 아니고 바로가 이상한 꿈을 꾸고 고민하면서 모든 관리들을 다 모아놓고 그 꿈을 해몽해 달라고 강요하였으나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때에야 이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이 생각이 나서 요셉에 대한 얘기를 하고 그렇게 되어서 요셉이 풀려나오게 된 것입니다.
은혜는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 가운데도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그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혹 병상에서 기도할 때에 그저 나으면 어떻게 하겠다는 서원도 하고, 생각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사실 나은 후에 어떻게 합니까? 아마 그대로 하는 이들이 많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30여 년 전 우리가 피난민으로 38선을 넘을 때 혹은 6?25 사변으로 한강을 건널 때 간절한 기도와 서원도 많이 한 줄 생각합니다. 내가 이 서원에 얼마나 충실한 생활을 하였는가, 한번 반성하여 보는 것도 필요할 것입니다.
자선사업 기관에서, 혹은 보린원, 혹은 모자원 같은 자선사업 기관에서 많은 고아들이 도움을 받고 사회에 나아갑니다. 그들 중에 얼마나 그들을 기른 보모들이나, 혹은 원장이나, 또는 기관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을 가지는가? 중고등학교와 대학에서 많은 학생들이 교육을 받고 사회에 진출합니다. 그 가운데에는 크게 성공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몇 분지 일이나 모교나 은사의 은혜를 잊지 않는가?
남녀 전도회 또는 개인들이 믿음을 가지고 여러 곳에 전도자를 파송해서 개척교회를 세웁니다. 그 가운데 어떤 교회는 큰 교회로 성장합니다. 그런데 이 많은 교회들 가운데 몇 교회나 본래 그 교회를 세운 교회나 단체, 혹은 개척 전도자에게 감사할 줄을 아는가?
다윗이 시편 103편 2절에,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깨우쳤습니다. 누구나 이러한 깨우침이 필요하지 아니할까 생각됩니다.
그런데 주목할 일은 이 은혜를 잊은 이들이 전부 유대인이었습니다.
은혜를 잊은 아홉 문둥이가 전부 유대인이었음에 더욱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본래 혼합 종으로, 이방인으로서 유대인에게 천대를 받던 민족입니다. 그런데 이 사라미아 사람은 오히려 은혜를 잊지 않고 돌아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순수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은 감사할 줄을 몰랐습니다. 이들은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의 모든 교훈을 어렸을 때부터 배운 이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이 사실은 단적으로 우리에게 무슨 교훈을 주는가? 은혜를 많이 받은 이들이 도리어 은혜를 잊어버리기 쉽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가난한 집 자녀들보다 부잣집 자녀들이 오히려 부모의 은혜를 모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육적으로, 물질적으로, 지적으로, 영적으로 은혜를 많이 받은 이들이 오히려 은혜를 잊기 쉽다는 이 사실은 우리 믿는 모두에게 큰 경고가 됩니다. 믿는 집 가정에서 자라난 모든 자녀들에게도 큰 경종이 되는 사실입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이사야 1장 3절의 말씀이올시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탄식하셨습니다. 은혜를 많이 받은 이일수록 은혜를 잊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경고합니다. 배가 부를 때에 하나님을 잊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또 이들은 정말 큰 은혜를 잊었습니다.
문둥병이 낫게 되면 문자 그대로 생명을 도로 찾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홉 문둥이는 이렇게 참 엄청난 큰 은택을 입고도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일도 과히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여기 앉은 우리도 대체로 그러합니다.
어두운 밤길을 갈 때에 작은 등잔불을 누가 빌려주면 참 감사히 생각합니다. 그러나 매일 아침 큰 빛을 주시는 아침 해를 위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들이 얼마나 됩니까? 목마를 때에 누가 물 한 그릇을 주면 감사히 생각합니다. 그러나 골짜기마다 파면 생수를 주는 하나님께 우리가 물을 마시면서 얼마나 감사드립니까?
동양의 역사를 보면, 옛날 요 임금이 정치를 아주 잘하여 백성들이 평안히 살 때에 밭에서 일하는 농부들이 늘 격양가를 불렀다고 합니다. 흙덩이를 치며 격양가를 불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참 이상합니다.
한문 그대로 하면 ‘경전이식하고 착정이음하니 제은이어아에 하관언고(耕田而食 鑿井而飮 帝恩而於我 何關焉)’ ‘내가 밭을 갈아 밥을 먹고, 내가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니 임금의 은혜가 내게 무슨 상관인고.’ 임금의 은혜가 너무 크니, 정치를 너무 잘하니 백성은 오히려 그 은혜를 몰랐습니다.
새들이 공기의 은혜를 모릅니다. 그 수많은 물고기들이 물의 은혜를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면서도 그 은혜를 모릅니다. 왜? 너무 커서 그렇습니다. 큰 은혜도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또, 이 얘기를 읽으면서 이런 면도 생각이 됩니다. 기도와 믿음은 있는데, 이들이 은혜는 잊었습니다.
이 열 문둥이들이 다같이 목소리를 높여 주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병을 고쳐 달라고 열심으로 기도를 하였습니다. 또 제사장에게 가서 그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실 때에 주저하지 아니하고 곧 예루살렘을 향해서 달음질하여 간 것을 보면 이들은 정녕 다 믿음이 있었습니다. 큰 믿음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 믿음으로 그 무서운 병으로부터 나음을 얻었습니다. 이렇게 큰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아홉은 감사할 줄을 몰랐습니다. 기도도 열심으로 하고 믿음도 있으나 은혜는 잊어버렸습니다. 이러한 사실도 우리 믿는 이들에게 큰 경고가 되는 줄 생각합니다. 감사할 줄 아는 은혜까지 받도록 노력하여야 하겠습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주님은 탄식하십니다. 아니 그들을 찾습니다. 감사의 은혜까지 받는 것을 보고 싶어합니다. 우리 자신은 어떠합니까?
이 은혜를 생각할 때에 대략 5가지 방면으로 우리가 늘 아는 바이지만, 우리 자신을 깨우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만복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육적으로, 물질적으로, 영적으로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독생자까지 보내셔서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또 금생과 내생에 미치는 영원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둘째는, 부모님의 은혜입니다. 여기에 청년들도 많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부모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를 낳으시고, 기르시고, 가르치시고, 항상 기도하여 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부모님의 은혜입니다. 이런 부모님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젊은이들은 옳은 생활을 해야 될 것입니다.
셋째는, 스승의 은혜입니다. 유치원으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가르치고 인도하여 주신 여러 스승님들의 은혜입니다. 내가 안다고 교만한 생각을 품지 맙시다. 다 선생님들을 통해서 배운 지식입니다.
넷째는, 나라의 은혜입니다. 나라가 있어야 개인이 살 수 있습니다. 나라 없는 슬픔은 당하여 본 이만 압니다. 우리나라가 광복되고 독립을 유지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가? 우리는 언제나 나라와 애국자들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섯째는, 중생(衆生) 곧 모든 인간의 은혜입니다. 인간은 홀로 살지 못합니다. 우리의 입는 의복은 기업주와 근로자들의 노력으로 온 것입니다. 우리의 식탁에 오르는 밥과 반찬은 많은 농민의, 혹은 생명을 무릅쓰고 바다에 가서 그물을 던지는 어부의 공헌으로 우리가 먹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쓰는 연탄은 지하 200 혹은 300미터 땅 속에 들어가서 광부들이 캐어 올린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피차의 은혜로 삶을 가집니다. 중생의 은혜를 잊지 마십시다.
매년 11월을 특별히 감사와 보은의 달로 지키는 것은 매우 옳은 일인 줄 생각합니다. 또 우리 교회에서도 다음 주일을 감사주일로 지킵니다. 만복의 근본이 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마십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기도합시다.
만복의 근본이 되시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금년 1년도 거의 다 지나고 이 11월을 당하게 될 때에 1년 동안 받은 모든 은혜와 축복을 돌이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저 감사하고 감격할 따름이올시다. 오 아버지시여! 우리가 이 열 문둥이의 얘기를 통해서 아버지의 주시는 교훈을 받았사오니 어떻든지 모든 은택을 기억해서 잊지 아니하는 이 감사의 은혜까지 우리 모두가 받을 수 있는 이 축복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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