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5:1-12/ 그리스도인과 평화 / 한경직 목사 2014-08-25 14:46:56 read : 1054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오늘 아침은 주님의 산상보훈 가운데서 팔복, 여덟 가지 축복에 대한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 가운데 일곱 번째로 말씀하신 5장 9절을 제가 다시 봉독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온 세계 인류는 평화를 갈망합니다. 듣는 대로 UN은 특별히 금년을 ‘평화의 해’로 선포하였다고 합니다. 이 시간 성경이 교훈하는 평화에 대하여 잠깐 생각하고자 합니다. 먼저 성경에는 히브리어로는 평화를 ‘샬롬’이라고 합니다. 또 헬라어로는 ‘에이레네’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에는 ‘평화’란 말이 히브리말로 하나 헬라말로 하나가 있을 뿐입니다. 그저 하나로 다 표현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비슷한 말들이 여럿이 있습니다. 가령 화평, 평안, 평강, 안녕, 모두 ‘평화’란 뜻입니다. 경우에 따라서 이런 말도 쓰고 저런 말도 쓸 뿐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오셨다고 스가랴는 예언하였습니다. 주님께서 탄생하시던 밤에 천군천사들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누가복음 2장 14절에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또 주님께서 친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한복음 14장 27절에 말씀하셨습니다.
또 성경은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고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말하였는데, 곧 화평은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입니다. 한마디로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 모두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평화는 신앙을 통하여 우리 믿는 사람들이 받는 모든 축복의 총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이사야 26장 3절의 말씀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도다” 이런 말씀을 이사야 53장 5절에 기록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편지할 때마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혹은 처음에, 혹은 결론으로 이런 말씀을 항상 하였습니다. 은혜와 평강은 우리 믿는 사람이 받을 수 있는 모든 축복의 총칭입니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과의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인간이 범죄한 이후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고 사실 원수가 되었습니다. 인간이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옳게 회복하기 전에는 마음에 평화를 얻을 수 없고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평화의 축복을 받는 첫째 길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항상 회개하라. 주께 돌아오라. 너희 죄가 비록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권합니다.
또 죄를 회개하지 아니하는 악한 자에게는 평화가 없다고 솔직히 말씀하여 줍니다. “오직 악인은 능히 안정치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쳐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이사야 57장 20절과 21절에 분명히 단언합니다. 먼저 모든 죄를 회개하고 참으로 그 심령이 하나님께 돌아와야 참된 평화를 얻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온전히 신앙으로 돌아와 예수님을 내 구주로 영접하지 않는 마음은 언제나 그 심령이 분열 상태에 있습니다. 한편에는 선한 생각이 있으나 다른 편에는 항상 악으로 기울어지는 성향이 있습니다.
유명한 스티븐슨의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가 보여주는 것과 같이, 우리 인간의 마음 속에는 한편에는 지킬 박사와 같이 선한 마음이 있으나, 다른 편에는 악한 하이드가 있어 항상 서로 싸웁니다. 내적 충돌이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심령의 속에는 자연히 평화가 없습니다. 문자 그대로 정신분열증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들은 교회에 출석하는 이들 가운데도 그 수가 상당히 많지 아니할까 염려됩니다. “너희가 왜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느냐 만일 여호와가 하나님이면 그를 섬길 것이요 바알이 너희 신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일찍이 엘리야는 옛날 이스라엘 백성에게 외쳤습니다. 전적으로 주님을 내 마음 속에 영접하고, 그만 따르는 이들에게만 그 속에 참 평화가 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이러한 참 신앙으로 뭉친 이들에게는 언제나 그 주변이 또한 평화롭습니다. 그러므로 참 신앙이 있는 가정은 언제나 평화롭습니다. 크리스천 홈(Christian home)은 평화로워야 합니다. 그 가정이 화평해야 합니다. 또한 이러한 신앙으로 모인 교회는 언제나 화평합니다. 때로는 교회에도 불화, 분쟁 심지어 분열의 비극까지 초래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한마디로 말하면 그러한 교회에는 누군가가 참된 신앙으로 행치 아니하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온 교회가 한 하나님, 한 주님을 섬기며 한 성령으로 충만할 때에는 자연히 그러한 교회에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모든 성령의 열매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평화를 생각할 때에 한 가지 더 기억할 것은 평화의 기초는 언제나 정의입니다.
정의가 없이 참된 평화는 없습니다. 참된 평화는 진정한 정의, 혹은 공의 위에 성립됩니다. 또 참된 사랑에는 공의가 같이 한다는 것도 잊지 아니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어떻게 평화가 이루어졌습니까? 그 평화도 공의 위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잊지 아니해야 합니다. 곧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평화도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을 수 없습니다.
죄인의 그 죄를 사하고 구원함에는 하나님의 독생자가 희생되었습니다. 곧 십자가 위에서 주님이 죽으셨습니다. 왜?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기 위하여, 또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하여 십자가가 있었던 것입니다.
평화를 말할 때에는 참된 평화는 공의 위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회의 평화도 그렇습니다. 사회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참된 사회 평화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공의로운 사회가 평화로운 사회라는 것을 우리는 언제나 잊지 아니해야 합니다.
우리가 모두 우리 가정, 우리 사회, 우리나라, 우리 세계가 평화롭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내 자신이 죄를 회개하고, 공의를 행하고, 어디서나 사회정의를 확립하고, 국제정의를 확립할 수 있도록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우리 주님은 산상보훈에서 8가지 복을 말씀하시면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내 자신이 참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평한 생활을 할 뿐더러,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불화가 많은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자가 되라고, 또 이러한 사람이 사실 축복을 받는다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사실입니다.
오늘의 세계상을 보면 화평케 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반면에 싸움을 붙이는 자들도 적지 아니한 모양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가르칩니다. 싸움하지 말라. 구경만 하지도 말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싸움을 말리는 자가 되라고 권합니다. 싸움 많은 세상에 실로 귀한 말씀이올시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화평케 하는 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까?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선 내 자신이 참 신앙을 통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언제나 화평한 생활을 해야 될 것입니다. 참된 신앙과 기도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러한 생활은 가능합니다. 그리하여 우선 내 자신이 화평한 생활의 모범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 가정을 평화롭게 지키도록 힘쓸 것입니다. 내가 섬기는 교회를 항상 평화로운 교회로 봉사하도록 최대한 노력을 할 것입니다. 내가 일하는 직장도 항상 평화로운 직장으로 지키기 위하여 힘써야 할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어디서나 정의를, 혹은 공의를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공의가 있는 곳에만 항구적인 평화가 있는 것을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 하신 아모스 5장 24절을 항상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오직 공의가 실천되는 곳에 항구적인 평화가 언제나 깃들인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아직 주를 모르는 이들에게는 복음을 전파하여 그들도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전도는 최대의 평화운동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다.
유명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한번 이런 말씀을 하였다고 합니다. 어떤 곳에 큰 강이 있는데 그 위에는 외나무다리 하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번은 두 염소가 좌우편에서 그 다리로 건너오다가 중간에서 서로 마주쳤다고 합니다. 서로 싸우면 둘 다 강물에 떨어져 죽을 것이 분명합니다. 또 염소는 뒷걸음질을 할 줄 모른다고 합니다. 서로 의논하다가 한 놈이 가만히 그 다리 위에 엎드렸다고 합니다. 그때에 다른 한 놈은 그 잔등을 밟고 건너갔고, 엎드렸던 놈은 그 후 천천히 일어나 그 다리를 또한 건너갔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어 두 염소가 죽지 않고 다 살았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슨 일로 싸움이 일어났든지 싸움을 그쳐야 하는 데는 우선 피차에 양보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어떻든지 평화는 회복되어야 합니다.
유명한 성 프란시스는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남겼습니다. “오, 주여! 나로 하여금 당신의 도구로 삼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범죄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쟁이 있는 곳에 화해를, 잘못이 있는 곳에 진리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소망을, 어두운 곳에는 당신의 빛을, 설움이 있는 곳에 기쁨을 전하는 사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합시다.
자비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오늘 아침은 저희들이 산상보훈의 첫머리에 있는 말씀을 다시 한번 읽었습니다. 특별히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이 의미 깊은 말씀을 다시 한번 생각하였습니다. 오, 하나님 아버지시여! 여기 앉아 예배하는 우리 하나하나에게 이 시간 아버지와 우리 사이에 담이 없는 화평의 축복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또 우리 마음 속에 오직 주님을 영접해서 언제나 우리의 마음에 화평한 마음을 주시옵소서. 그리고 우리의 가정도 화평한 가정, 직장도 화평한 직장, 우리나라 38선에도 화평이 있고, 우리가 사는 세계에도 화평이 있는 평화의 해로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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