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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18:21-35/ 화합과 용서 /한경직 목사
    2014-08-25 11:57:48   read : 1360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한번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아와 “형제가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 물었습니다. 당시 랍비들의 교훈에 흔히 세 번까지 용서하라고 하던 때입니다. 베드로는 그보다 더 넓은 마음을 가지고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여야 되는가 하고 질문하였습니다. 아마 베드로의 마음에는 그만하면 족한 줄 생각하고 물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뜻밖에 곧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할지니라” 사실 용서에는 제한이 없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하여 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옛날 어떤 나라에 임금이 있었는데 그 종들과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나 빚을 진 종 하나를 데려왔다고 합니다. 일만 달란트면 사실 큰 돈입니다. 이 종은 도저히 그 빚을 갚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해서 그저 엎드려 불쌍히 여겨 달라고 부르짖을 때에 그 임금은 그 많은 빚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온전히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탕감을 받은 종이 나가다가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빚을 진 동관 하나를 만났다고 합니다. 100데나리온은 매우 적은 액수입니다. 그때에 그 동관은 엎드려 빌기를 지금은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 좀 참아주면 다 갚겠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종은 그 친구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빚을 다 갚도록 옥에 가두었다고 합니다.

    다른 동관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마음에 민망히 여겨 그 주인에게 가서 그 사정을 다 고하니 임금은 크게 노해서 그 종을 다시 불러 탕감해 주었던 빚을 취소하고 그 불의한 종을 옥에 가두고 그 빚을 다 갚도록 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 비유를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진리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우리가 왜 형제간에 지은 허물이나 죄를 피차에 용서하여 주어야 하는가?

    첫째는, 용서는 우리 인간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는 일만 달란트에 달하는 큰 죄를 지은 인간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서 독생자를 보내시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이렇게 우리 인간들의 죄를 탕감하여 주셨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모두 이렇게 큰 죄의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이 피차에 짓는 죄는 사실 여기 말씀대로 100데나리온에 불과합니다. 매우 작은 죄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실 믿음으로 하나님의 그 크신 용서를 깨닫는다고 하면 인간 상호간에 작은 죄들을 용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합니다. 이렇게 용서는 인간의 당연한 마땅한 의무입니다. 우리는 다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우리가 서로 용서하면서 사는 삶은 장래에 용서를 받는 데 필수조건이라는 것도 잊지 아니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간이 피차에 작은 죄들을 서로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범한 큰 죄를 용서하시지 않는다는 이 엄숙한 사실을 또 잊지 아니해야 될 것입니다. 비록 이야기이지만 빚을 다 갚도록 옥에 넣었다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에 뿐만 아니고 예수님께서는 이점에 대해서 매우 강조해서 주기도를 가르치실 때에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다 기억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설명까지 하여 주셨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허물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태복음 6장 14절과 15절을 읽어 보세요. 이렇게 분명히 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 생활에 있어서 용서하면서 산다고 하는 것은 내가 용서를 받는 데 필수조건이라고 하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더욱이 앞으로 대심판을 생각할 때에 더욱 그러합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용서하지 아니하는 마음은 그 마음 자체가 내 자신에게 큰 해를 가져옵니다.

    어떤 형제가 내게 무슨 잘못을 하였다고 용서치 아니하고 미운 마음을 품는 것은, 말하자면 독사의 알을 품고 다니는 것과 같다고 어떤 분은 지적하였습니다. 독사의 알을 오래 품고 다니면 그 알이 언젠가는 까게 되는데, 까게 되면 작은 독사들이 나올 것이요, 그 독사들은 제일 먼저 그 자신의 알을 품고 다니던 그 사람을 문다고 합니다.

    기억하여야 합니다. 남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고 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을 품으면 첫째는 그 마음이 불편하고 괴롭습니다. 불편하고 괴로운 마음으로 무슨 창조적인 좋은 생각을 할 수도 없고 자기 삶 자체가 메마르고 앙상하게 됩니다. 무슨 좋은 생각을 할 수도 없고 또 한다고 해도 무슨 일이나 실패로 돌아갑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마음은 그 성격에 악한 영향을 주어서 성격이 괴상하게 되고 다른 이들과 화평하게 살 수가 없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불평과 불만이 가득하고 자기가 사는 사회를 저주하고 불만과 불평으로 가득하게 만듭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이들을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자기 자신이 해를 받습니다. 또 물론 건강에도 해를 받습니다. 소화불량과 온갖 신경성 질환의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용서하면서 사는 것이 삶의 원칙이라는 것도 우리는 깨닫고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로마서 12장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원칙을 자세히 설명하는 내용이 있는데 그 마지막 절 곧 12장 21절에는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가서 읽어 보세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용서는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입니다.

    옛날 요셉이 형들의 시기를 받아 멀리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러한 역경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올바른 생활을 계속하였으며 모든 육신의 정욕을 이겼고, 오히려 오해를 받아 감옥에까지 들어가 고생을 하였지만, 그러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결국은 애굽의 총리대신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근동 일대에 큰 흉년이 들고 가나안까지 큰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게 되니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에는 곡식이 많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까지 내려갔습니다. 그러다가 뜻밖에 죽은 줄만 알았던 요셉을 만난 사실을 우리가 잘 기억합니다. 그때에 요셉은 사실 그 형들의 원수를 갚으려면 좋은 기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태도를 우리는 잘 기억합니다. 형들은 요셉이라는 말에 벌벌 떨었으나 요셉은 오히려 그들을 위로하며 과거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준 것입니다.

    여기에 요셉의 참된 신앙과 위대한 인격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과거를 다 잊으라고 오히려 위로하면서 그 형들을 격려하였습니다. 요셉은 문자 그대로 악을 선으로 갚았습니다. 용서하였습니다. 용서는 악을 선으로 갚아 최후 승리를 얻는 길입니다.

    한 가지 얘기를 더 하면, 옛날 다윗이 젊었을 때에 사울의 궁전에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사울왕의 시기를 받아 사울왕이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부득이 도망해서 엔게디 황무지에 그의 부하들과 같이 피하여 있었습니다. 얼마 후 사울이 그 소식을 듣고 군대를 거느리고 다윗을 잡아 처치하기 위하여 그곳을 따라 갔습니다. 여러분, 성경 자세히 읽어 보세요.

    사울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발을 가리우기 위하여 한 굴 속에 홀로 들어간 일이 있습니다. 그때에 마침 다윗과 그 부하들이 그 굴 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때입니다. 사울은 모릅니다. 다윗의 부하들은 좋은 기회이니 처치하자고 진언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왕을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끝까지 거부하고, 다만 몰래 그 옷자락의 한 부분만 베었습니다. 물론 사울은 아무 것도 모르고 나왔습니다.

    그 후에 다 나간 후에, 다윗과 그 일행도 역시 그 굴 속에서 나와서 멀리 서서 다윗은 그 자른 옷자락을 흔들면서 보이며 “이것이 뉘 것인지 알겠는가?”라고 부르짖었습니다. 하여간 다윗은 문자 그대로 자기를 해하려는 원수를 용서하여 준 것입니다. 여기에 다윗의 인격의 위대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이 다윗을 축복하여 주셔서 온 이스라엘의 왕을 삼으신 것은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다윗도 악을 선으로 갚았습니다. 어떻게? 용서함으로. 또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이를 축복하시고 최후 승리를 주신 것입니다.

    천국은 용서를 받고 또 용서하는 이들이 모인 곳입니다. 우리가 이 천국에 들어가려면 서로 용서하는 법을 꼭 좀 배워야 합니다. 이러한 정신으로 사는 가정은 그 가정이 화평하고 자연히 화합할 것입니다. 가정에도 용서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정신으로 사는 교회는 그 교회 자체가 언제나 화평하고 화합해서 주님의 일을 힘쓸 것입니다. 교회에도 용서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어떠한 모임이나 직장이나 관청이나 회사나 이렇게 피차에 용서함으로 살아가면 자연히 그 사회는 화평하고 화합하며 명랑하여질 것입니다. 아니 한 나라가, 그 나라 안의 국민 모두가 이렇게 주님의 말씀과 같이 서로 용서하며 살아가면 그 나라 자체가 언제나 화평하고 화합해서 명랑하여질 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경제 모든 면이 성장하고 번영할 것은 틀림없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무엇보다도 모든 면에서 온 국민이 화합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광주 사태의 원만한 해결을 갈망합니다. 그런데 이 원만한 해결과 화합은 아무래도 피차에 용서의 정신이 결여되면 불가능할 것입니다. 피차에 용서를 배우십시다.

    우리는 용서를 받았으니 용서하여야 하겠고, 또 앞으로 더 잘 살기 위하여 피차에 용서를 배워야 합니다. ‘미친 개를 땅에 묻을 때에 꼬리를 내놓지 말라.’ 어떤 분이 말하였습니다. 용서하되 온전히 용서하고, 과거는 잊어버리고 앞을 바라보며 화합하며 살아가도록 우리 모두 힘을 씁시다.

    또 우리는 모두 남북통일을 원합니다. 평화통일을 원합니다. 남북이 협력하여 같이 살아가기를 모두 원합니다. 그리하려면 아무래도 우리 민족이 피차에 용서하라는 이 주님의 권고에 귀를 좀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북한은 솔직히 과거에 저지른 잘못된 행동과 만행을 시인하고 평화협상에 나와야 그들에게도 살길이 열립니다.
    용서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권면합니다. 평화통일을 원하는 우리는 주님의 이 교훈에 아무래도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또 오늘은 ‘청년주일’입니다. 우리 청년들이 젊었을 때부터 피차에 용서의 정신을 배워서 우리 장래 사회를 화평한 사회로 이루어 간다고 하면 우리나라가, 우리 교회가 얼마나 더 큰 축복을 받을 것입니까?

    이제 성경 몇 구절을 제가 봉독하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43절로 45절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이올시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누가복음 23장 34절에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주님의 십자가상의 기도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 60절에는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첫 순교자 스데반이 자기를 돌로 치는 이들을 위한 마지막 기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 31절 32절과 골로새서 3장 13절에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3장 8절 이하에 이렇게 권면합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 이 교훈이 우리 모두에게 큰 축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시여, 우리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독생자까지 보내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생각할 때마다 얼마나 감사하고 또 우리 자신들의 생활을 돌이켜 회고해 보면 얼마나 부끄러운지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주님의 말씀을 저희들이 직접 들었사오니 주님의 마음을 저희들에게 주시고 십자가의 기도를 기억할 수 있게 해 주시고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때에 마음이 상할 때도 있고 때로는 억울한 말을 들을 때도 있고 분한 마음이 생길 때도 있으나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여기의 교훈대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실 중심으로 용서하며 살아갈 수 있는 저희들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가정에서나 내 직장에서나 내 교회에서나 내 나라에서나 어디서나 이러한 중심과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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