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123:14/ 시125:1-5/ 눈을 주께 향하라/ 한경직 목사 2014-08-23 20:22:43 read : 969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하늘에 계신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시 一二三․一)
시편 一二三편은 가장 짧은 시중의 하나입니다. 성전에 올라갈 때에 부르던 시 가운데의 하나입니다. 이 시를 누가 언제 지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으로 보아서 이 시가 느헤미야 때 지어지지 않았는가 추측합니다. 사실 우리가 느헤미야서를 읽고, 이 시를 읽어보면 더욱 실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느헤미야는 본래 파사 궁정의 고관으로 있었지마는 조국 예루살렘의 비참한 소식을 듣고, 즉 예루살렘 성은 무너지고 문짝은 불살라진 그대로 있다고 하는 소식을 들은 후에, 그냥 있을 수 없어서 평안한 그 자리를 내어놓고 여러 천리를 여러 달을 걸려서 예루살렘에 돌아온 것입니다.
먼저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힘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격려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짓기도 한 것입니다. 원수는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호론사람 산발랏, 암몬사람 도비야 같은 사람들이 주동이 되어서 여러 가지로 방해하고, 습격을 하려 하기도 하고, 항상 와서 그들이 일하는 것을 조소하고 멸시하는 말을 그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 四장 四절에는 이런 글귀도 찾을 수 있습니다.『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업신여김을 당하면서도 싸울 수는 없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 때에 이렇게 원수의 습격을 막기 위해서, 모든 역사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한 손에는 병기를 들고 한 손에는 장기를 들고 일을 계속한 것입니다.
이 때에 느헤미야는 눈을 들어 하늘에 계신 주께 그 눈을 향한 것입니다.『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을, 여종의 눈이 그 주모의 손을 바람과 같이 우리 눈이 우리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기다리나이다. 여호와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소서, 이 많은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눈을 들어 주께 향한다고 하는 말씀은,
(1) 믿음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태도입니다.
(2) 겸손의 표시입니다.
매일 부족한 때에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3) 순종하는 마음을 뜻합니다.
주의 손이 인도하는 대로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4) 하늘을 공경하는 심령의 모습입니다.
괴롭고 죄 많은 세상은 잠깐 있고 하늘의 위로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5) 기도하는 경건한 모습입니다.
말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입으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우리의 눈으로도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을 앙망 하는 눈, 간절한 소원을 눈으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간절히 사모하는 그 눈은 곧 기도인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역경 가운데서 예루살렘 성을 다시 쌓으면서 그의 눈은 항상 위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신앙과 기도입니다.
이와 같은 신앙과 기도를 우리는 종종 성경에서 찾아봅니다.
히스기야 왕은 여러 왕 가운데서 선한 왕 중의 하나였습니다. 신앙과 모든 방면으로 모범이었고 선한 정치를 한 어진 임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개인 생활과 국가적으로 생각해 볼 때는 종종 위기를 당하기도 한 왕입니다.
아마 그 가운데서도 제일 위험하였던 때는 앗수르 왕 산헤립이 내침 한 때인 줄 생각합니다. 북방의 앗수르라는 나라가 갑자기 강성하게 되었습니다. 인근의 적은 나라들을 정탐하였습니다. 말머리를 돌려서 남쪽으로 향했습니다.
북편에 있던 수리아 나라와 심지어 사마리아 성을 중심 한 이스라엘까지 그 앞에서 멸망을 당했습니다.
이제는 그와 같은 큰 세력을 가진 앗수르 왕 산헤립이 큰 군대를 휘동해서 적은 유대나라를 침범해 옵니다. 그 대 유대나라의 운명은 문자 그대로 풍전등화의 운명이었습니다. 이 앗수르 왕 산헤립은 자기 사자를 통하여 서신을 보냈습니다.
그 글 가운데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글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빨리 나와서 항복하라고 권고합니다. 네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마는 여호와 하나님이 내 권세에서 네 나라를 구원할 수가 있겠느냐?
다른 나라의 신도 그 나라를 구원할 수 없었거든 하물며 네 신이 너희 나라를 구원할 수 있겠는가? 조롱하면서 하나님까지 모독합니다.
이런 글을 받고 히스기야 왕은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성전에 그 글을 가지고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그 글을 펴놓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간절히 이런 위기에서 모면해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이 때 역사상 큰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十八만 五천 명의 대군이 무슨 이유인지 알 수는 없지마는 하루 저녁에 소멸되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자기 개인생활에 있어서도 위기를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그가 중한 병에 걸렸습니다.
아무리 약을 쓸지라도 백약(百藥)이 무효입니다. 이사야도 꼭 죽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모든 일을 정리하고 유언이 있으면 다 말하라고, 분명히 죽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돌아갔습니다. 사람 보기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 때에 일을 우리가 선경에서 보면 히스기야 왕이 얼굴을 하나님께 향하면서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사람 보기에는 소망이 없던 그 병 가운데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十五년을 더 살며 많은 봉사를 한 이야기를 우리는 읽어볼 수 있습니다.
서울 거리를 다니느라면 어떤 때에 소위 막다른 골목에 부딪칠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돌파구를 찾아야 돌파할 곳이 없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 때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눈을 들어 위를 바라봐야 합니다.
오래 전에 제가 신의주에 있을 때에 지금은 세상을 떠났지만 제가 존경하는 장로님이 한 분이 계셨는데 그 장로임에게서 그의 경험을 들은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이 장로님은 본래 촌에서 농사 지으면서 살던 장로님인데 촌에서는 그런 대로 생활할 수 있었지마는 촌에서는 자녀들 교육이 힘들어서 돈 될 만한 것들을 다 팔아서 신의주로 이사를 했습니다. 와서 이런 사업, 저런 사업을 해보았지만 경험도 없고 해서 거듭 실패를 하였습니다.
몇 해 후에는 촌에서 가져온 돈은 다 없어졌습니다. 자녀들을 더 많이 낳았습니다. 학비는 많이 듭니다. 마지막에는 끼니조차 어려운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밤새도록 무슨 궁리를 하지마는 생각이 잘 나지를 않고 잠은 한 잠도 못 잤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아침에는 무슨 생각이 났는지 압록강 철교를 건너가서 안동이라는 곳으로 갔습니다. 신의주에는 산이 없으나 안동에는 진강산 이라는 산이 있는데 그 꼭대기를 올라갔다고 합니다.
올라가서는 어떤 소나무 아래 앉아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합니다. 전에 물론 교회도 다닌다고는 했지만 이런 간절한 기도를 드려본 적이 없으리 만큼 간절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께 매어 달려 기도했습니다. 종일 기도했다고 합니다.
날이 어두운 다음에 다시 압록강 철교를 건너오는데 다른 생각이 나는 것은 없었으나 철교를 건너갈 때에는 빠져 죽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나, 철교를 건너올 때는 그런 마음은 없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겠지 하는 든든한 마음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 후에 여러 가지 사업을 하는 중에 모든 것이 형통해서 가정의 안정을 이룰뿐더러 다른 사람들까지 많이 도와주다가 이 장로님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때에 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으셨을 줄 압니다. 여러분, 사도 요한이 이와 같이 위대한 계시를 받게 된 그 기회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사도 요한은 본래 유혹을 많이 받았습니다. 연로할 때까지 에베소 교회에서 오래 목회를 하고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나이 많을 때에 큰 핍박이 일어났습니다. 에베소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밧모섬 이라고 하는 황막하고 나무도 없고 돌만 있는 그런 섬에 정배(定配)를 가게 되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어떤 조그만 굴속에서 여생을 지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때에 사도 요한은 믿음이 자랐습니다. 죽음이 다가오는 곳에서 영광스러운 주님의 얼굴을 보게 되었습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보좌를 보았습니다. 二十四장로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미 구원을 받은 三천 만 선남 선녀의 구원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찬송을 부를 수 있었습니다. 하늘만 바라본 것이 아닙니다. 장차 오고 오는 인간의 역사도 보았습니다. 인간 역사에는 큰 풍파가 있습니다.
큰 환난이 있습니다. 큰 재난이 있습니다. 짐승이 나타납니다. 뱀이 나타납니다. 붉은 용이 나타납니다. 어린아이가 싸움을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어린아이가 승리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보입니다. 새 예루살렘을 보았습니다. 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위를 바라본 것입니다.
근대 선교 역사를 공부하는 가운데 위대한 선교사의 전기를 우리가 많이 읽어 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중국에 가서 선교사시던 분 중에서 제일 유명한 분이 허드슨(Hudson Taylor)라고 하는 분일 것입니다.
다른 분도 많지만 거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허드슨 테일러는 영국 사람으로서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고 어려서부터 몸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서 복음을 알지 못하는 곳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자원하여 중국의 선교사로 간 것입니다.
영국의 어떤 선교회의 파송을 받아서 중국에 가게 된 것입니다. 그는 거기서 몇 해를 전도하는 가운데 하루는 영국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편지는 선교회 총무가 보냈는데 그 내용을 보니 선교비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서 당신의 월급을 매달 보낼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힘써도 안 됩니다. 섭섭한 일이지마는 본국으로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하는 소환장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테일러는 민망해졌습니다. 멀고 먼 곳이 전도하려 왔는데 선교 비용이 없어서 돌아오라고 하는데 돌아가자니 민망하고, 계속하자니 앞일 캄캄했습니다.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이 테일러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는데서 구약성서 중의 히브리말 두 말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는 사무엘서에 나오는「에벤에셀」이라는 말인데『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하셨다』하는 뜻이요. 또 하나는 창세기 二十二장에 나오는 말로「여호와이레」라고 하는 말입니다.
즉,『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느니라』하는 뜻입니다. 그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에 이삭을 제사 드리러 올라갈 때에 이삭이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물어 보기를『아버지여! 제사드릴 나무도 있고 불도 있는데 제사드릴 양은 없으니 어떻게 하시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무엇이라 대답했습니까? 얼른 대답하는 말이『여호와이레 여호와께서 그것은 준비하시느니라』대답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준비하시리라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과연 산꼭대기에 하나님께서 양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테일러는 이 말이 기억났습니다. 그는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나를 인도하셨다.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리라 하는 말씀을 믿고 이 땅에 계속 남아 복음을 전파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중국사람 입는 대로 옷 입고, 중국사람 먹는 대로 먹고, 중국사람 자는 데서 자고, 중국사람과 꼭 같이 살면서 전도를 계속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굶기지 않으셨습니다. 쓸 것 그냥 주셨습니다.
외롭게 혼자 전도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많을 일꾼들을 보내서 중국 내지 선교회라고 하는 유명한 선교운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 헤이드 밋숀이라는 테일러의 신앙에 의지한 전도운동이었습니다.
여러분, 앞이 보이지 않을 때에 위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읽어보신 분도 많이 계신 줄 알지마는 못 읽어 본 이는 이제라고 사다 읽오 보십시오.「천로역정」이라고 하는 유명한 책이 있지요. 그것은 누가 어떻게 해서 썼는지 여러분은 기억하시지요. 청교도 운동을 영국성공회에서 핍박하였습니다. 한 청교도가 성공회 허락 없이 전도한다고 붙잡혀 가서 감옥에서 十二년 동안이나 갇혀 있었습니다.
젊은 사람이 복음 전파하다가 전도 못하고 감옥에 가서 젊음을 허송하게 되니 얼마나 슬펐겠습니까! 그러나 이 죤 번연(John Bunyun)은 그 가운데서 은혜를 받아서「천로역정」이라는 책을 써서 十二년 동안 다니며 전도하는 것보다 책을 통해서 몇 배의 많은 생명을 구원했다는 것입니다.
오산 학교를 창설한 남강(南岡) 이 승훈 선생께서 一0五인 사건으로 감옥에 들어가실 때에 신약성서를 백독(百讀)하였다고 합니다. 감옥에서 위를 바라보았습니다.
우리가 인생 길을 걸어가노라면 어떤 때 슬픈 일을 당합니다. 하늘 같이 믿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도 하고, 천사처럼 믿던 어머니가 먼저 세상을 떠나기도 합니다. 주안에서 한 몸이 되었던 남편이 먼저 가는 수도 있고, 한 몸이 되었던 아내가 먼저 가는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큰 슬픔의 막다른 골목을 만나게 되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눈을 들어 위를 바라보세요. 하나님을 앎으로써 하나님께 대하여 기도하세요. 외로부터 반드시 위로가 내려옵니다. 새로운 소망이 우리에게 옵니다. 새로운 능력이 우리에게 옵니다. 새로이 갈 길을 열어주십니다.
우리가 인생 길을 다 걸어가면 마지막에 죽음의 막다른 골목에 당도합니다. 예외가 없어요. 나이 젊었다고 아직 멀었다는 것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그 때 어떻게 하려고 합니까? 사도행전 七장을 읽어보세요. 스데반이 젊은 집사로서 교회를 봉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다가 유대 사람의 큰 핍박을 받고 돌에 맞아서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스데반이 어떻게 했습니까? 얼굴을 들어서 하늘을 바라보았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보였고 예수님께서 그 우편에 서셔서 자기를 내려다보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모습으로 변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생의 막다른 골목, 죽음을 당할 때에 우리가 바라볼 것은 오직 눈을 들어 주님의 얼굴입니다. 주님께서 계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영접하십니다. 주님께서 아버지의 집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계 제二차 대전의 역사를 본다면 초기에 나치스가 굉장히 강한 군대를 가지고 불란서를 두 주일만에 석권해 버렸습니다. 마지노 선도 다 없어졌습니다. 그 때 도와주려고 건너가던 三十만 영국 군인이 도보해협 기슭에서 뒤에는 기갑부대가 오고 위에는 독일의 폭격기가 폭격을 하는 말 할 수 없는 큰 위기를 당했습니다.
런던은 끊임없이 폭격을 받습니다. 캄캄한 날입니다. 그 때 영국에서 무얼 했는지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영국 정부는 기도 일을 선포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때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자,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자. 기도 일을 선포했습니다.
하나님께 온 국민이 합심하여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때에 위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나 가족적으로나 생의 막다른 골목을 우리가 종종 당합니다. 국가적으로도 막다른 골목을 혹 당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의 정세를 보면 그 비슷한 느낌이 없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을 바라볼 수 없을 때 위를 바라봐야 합니다.
인간의 힘이 부족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인간의 지혜가 부족할 때에 하나님의 지혜를 이지 하여야 합니다. 인간의 뜻이 합하지 않을 때에 하나님의 뜻에 꼭 합하도록 해야 합니다.
『여호와를 앙망(仰望)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를 펴고 올라감 같으리요. 다름 질 해도 곤 고치 아니하고 걸어가도 피곤치 않으리라』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四十五장 二十二절에『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 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하나님을 앙망하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믿음의 주여, 또한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