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일4:7-21/ 둘째 되는 큰 계명 / 한경직 목사 2014-08-23 19:17:47 read : 1522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十二․三十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교훈은 본래 구약 레위기 十九장 十八절에 있습니다. 두 주일 전에「크고 첫째 되는 계명」을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은『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그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둘째로 우리에게 교훈 하시는 말씀이 레위기 十九장 十八절에 있는 이 말씀,『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말씀이올시다.
하나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가르친 계명이올시다. 둘째는 우리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대한 의무를 가르쳐 주신 계명이올시다.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 두 가지는 분리할 수 없습니다.
곧 신앙과 도덕, 이 두 가지는 언제나 같이 가야 되는 것이올시다. 이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의 같은 점은 두 계명이 다 하나님의 명령이올시다. 또한 두 계명이 다 같이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조금 다른 점도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표준에 있어서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첫째 계명은, 너희 마음과 목숨과 성품과 힘을 다하라. 다시 말하면 네 자신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라. 둘째 계명은, 네 이웃을 사랑하되 그 표준은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그 점이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오늘 이 크고 둘째 되는 계명을 생각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 마음속에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十장에 기록한 대로 우리가 읽어보면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질문을 하였습니다.『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질문에 대하여 우리 주님께서 이어 반문한 말씀이『율법에 어떻게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배웠느냐?』그는 율법을 잘 아는 사람이올시다. 그는 이 두 가지 계명으로 대답하였습니다.『첫째는 마음과 목숨과 모든 것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는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대답이 네 말이 옳도다, 그대로 행하면 네가 살리라.』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이 율법사가 계속해서 묻는 말이, 자기를 옳게 보이고자 원해서 계속해서 묻는 말이『그러면 누가 내 이웃이오니까?』 이 점을 물어보았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유명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어서 거기 대한 해답을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중이었습니다. 물론 그 사람이 유대 사람이올시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대단히 험한 길이고 인가가 별로 없는 그러한 지대입니다. 얼마쯤 내러 가다가서 강도 무리를 만났습니다. 매를 맞고 돈을 다 빼앗기고 옷을 찢기고 인사불성이 되어서 길가에 넘어졌습니다.
마침 그 때에 예루살렘에 올라왔다가 여리고로 내려가던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보기는 보았지마는 보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 다음에 역시 성전에서 일을 흔히 보는 례위 사람 하나가 우연히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이 례위 사람도 역시 불한당 만난 이 사람을 보기만 하고 그저 지나갔습니다.
그 후에 우연히 지나간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유대 사람이 흔히 상종도 잘 하지 아니하는, 유대 사람이 흔히 멸시하는 이방인, 거의 이방 사람으로 취급하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지나가다가 이 불한 당 만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겨서 자기가 타고 가던 짐승에서 내려서, 그 사람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자기의 옷을 찌어서 상처를 싸매어 주고, 자기가 탓 던 짐승에 그 사람을 태워서 주막까지 와서, 하루 저녁을 같이 자면서 치료를 해주었습니다.
그 이튿날 아침에 떠날 때에 돈 얼마를 주인에게 주면서 하는 말이『내가 돌아올 때 부족하면 갚을 터이니 이 사람을 잘 치료해 주기를 바란다.』그리고 사마리아 사람이 주막을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율법사에게 물으시는 말씀이『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가운데 누가 이 불한당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겠느냐?』율법사가 할 말이 있습니까?『자비를 베푼 그 사람이올시다.』다시 말하면 사마리아 사람이올시다.
여기 계명이『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웃은 누구입니까? 그때 흔히 바리새인들은 이웃은 물론 내 가까이 사는 사람들, 내 동리 사람들, 이웃의 범위가 널 대야 같은 동족들, 유대인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 같은 혹은 헬라 사람 같은 사람, 이방 사람들은 원수라고 생각하던 때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그 때에 율법사에게 가르쳐 주신 말씀은 이웃이라고 하는 것은 국경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우연이나 여러 가지 관계로 나와 가까이 접촉하게 되는 이는 다 우리의 이웃입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친척이나 친구나 한 동리에 사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상점에서 만나는 사람, 공장에서 만나는 사람, 학교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 교회에서 접촉하는 사람, 누구든지 접촉하게 되는 사람은 다 우리의 이웃입니다.
여기에는 인종의 차별도 없고, 국경도 없고, 더욱이 오늘날과 같이 통신이 발전되고 교통의 모든 기구가 발단된 오늘날에 있어서 세계가 다 한 이웃이 된 이러한 때에 예수 님의 이 교훈이 얼마나 적절한 것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웃은 민족도 초월하고 국경도 초월하고 계급도 초월하고 누구든지 우리와 접촉하게 되는 그 사람이 우리에게 이웃이 됩니다. 자! 여기에 이 계명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네 이웃이면 사랑하라는 말이올시다.
여기 어떠한 이웃은 사랑하고, 어떠한 이웃은 사랑하지 말라는 말 아닙니다. 이웃이면 누구든지 사랑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유대 사람이나 사마리아 사람이나 그것을 분별할 여유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접촉하게 되는 사람은 사랑하라. 이 뜻은 내 이웃이라면 유식하든지 또 무식할지라도 사랑하란 말입니다. 이 뜻은 내 이웃이 혹 부자든지 혹은 가난할지라도 사랑하란 말입니다. 어떤 때는 혹 부한 이웃을 사랑하기 쉽지마는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그 반대될 때도 있습니다. 부자 이웃을 사랑하기가 대단히 어렵고 오히려 가난한 이웃이 사랑하기 쉬울 때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성공할 때만 그 이웃을 사랑하란 말 아닙니다. 그 이웃이 어떤 사업에 실패할 때에도 사랑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그 이웃이 내게 채권자가 될 때만 사랑하란 말이 아닙니다. 또 이웃이 내게 채무자가 될 떼에도 사랑하란 말입니다. 어떤 때에는 나의 채권자도 사랑하기가 어려운 때 많아요. 그러나 어떤 때에는 내 채무자를 더 사랑하기 어려운 때도 많아요. 채권자가 되든지 채무자가 되든지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는 그 말입니다.
혹은 어떤 때는 내 이웃이 나의 하는 사업에 경쟁자가 될 때가 있을 수도 있는 줄 압니다. 특별히 이웃에게 그런 줄 알아요. 나의 하는 사업에 경쟁자가 된다고 할지라도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어떤 때는 나에게 유익을 주는 이웃은 사랑하기 쉽지마는 손해 주는 이웃은 사랑하기 어려운 줄 알아요. 그러나 손해 주는 사람이라도 이웃을 사랑하란 그 말입니다. 사실 이웃은 선하든지 악하든지 사랑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예수 님 말씀대로 하면 원수라도 사랑하라고 하는 그 말이올시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그러면 이웃을 사랑하되 그 표준은 무엇인가?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우리가 잠깐 알아듣기 쉽게 생각해 보려고 하면 우리가 우리 몸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그것을 생각해 보면 이 계명의 뜻을 알아듣기 쉽습니다.
우선 소극적으로 생각해 보면 우리가 다 우리 자신을 얼마나 사랑합니까? 우리 자신은 무엇 잘못하는 것이 있을지라도 항상 양해해 주고 항상 용서하여 줍니다.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안 했을지라도
『그거야 하기 싫어서 안 했나? 그저 부득이해서, 그 때에는 너무 피곤해서 못했지.』혹 어떤 때 안 할 말을 하고도,『아, 그거야 뭐 하고 싶어서 말했나, 거야 상대방이 먼저 잘못하니까 그런 말이 나왔지!』그저 내 자신에 대해서는 항상 늘 양해해주고 항상 용서해줍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말은 네 이웃에 대해서도, 네 이웃이 잘못해도, 네 이웃이 무슨 실수가 있을지라도 항상 양해해주고 네 자신에 대해서 용서해 주는 것만큼 용서해 주어라 하는 그 말씀이올시다.
또 항상 우리는 내 자신에 대해서는 늘 잘못할지라도 노하기를 더디 합니다. 또 어떤 때는 노하는 때가 혹 있다고 할지라도 그 노가 오래 가지 아니합니다. 어떤 때는 무엇을 잘못하고 사실 내가 내 자신을 책망할 때가 있지요.『내가 못된 놈이야. 내가 잘못했어!』이렇게 내 자신에 대해서 노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노함은 오래 가지 아니합니다.
잠깐 동안 있다가 그 노함은 곧 풀립니다. 내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말은 내 이웃에 대하여 노할 일이 있을지라도 할 수 있는 대로 조를 더디 하고, 혹 노하는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노를 오래 품지 말라고 하는 그 말씀이올시다.
그러기에 성경을 보면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고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언제든지 우리가 내 이웃에 대한 분한 마음을 내 마음가운데 풀지 아니하고 오래 두면 내가 손해를 받고 내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떠나고 마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부터 근 三十년 전에 청년 전도사로 신의주 제二교회에서 일 볼 때에 여기 우리 가운데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곽산(郭山)에 김진근 목사님이라고 계셨습니다. 그 목사님이 한 번 신의주에 들어오셔서 저하고 조용히 함께 이야기할 때에 자기 경험담을 이야기해 준 그 말씀이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습니다.
다른 이야기가 아니고 그 김 목사님이 그 때 신학을 다 마치고 노회(老會)에서 이제 목사 장립(將立)을 받기 위해서 시취(試取)를 하는데 그 때 노회에서 시취하는 법은 시취 위원이 따로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노회 앞에서 아무나 이 사람도 묻고 저 사람도 묻고 그저 물어서 대답을 잘해야 그 다음에는 목사 장립을 시키던 때라고 합니다.
그저 그렇게 시취를 자기와 어떤 다른 분하고 두 분이 받았습니다. 아 그래서 묻는 말을 자기 생각에는 무던히 애써 다 대답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여러 목사님들의 태도를 보니까 한국 목사들의 태도는 아 그저 뭐 목사 장립 할만하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 분위기가 거의 그저 될 듯하더니 아 마지막에 어떤 선교사 하나가 있어서 무슨 말을 하는고 하니『거 나 보기에는 이 사람들이 아직까지 목사 장립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줄 생각합니다.』하면서 반대를 합니다.
아 그러니까 그 때는 특별히 선교사의 발언은 대단히 소중히 생각하던 때인데 여러 한국 목사 장로들이 대체로 다 될 줄 이렇게 공기가 돌아가더니, 아, 이 선교사의 말 한 마디에 공기가 갑자기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는『한 노회 기간 동안 연기하기를 동의합니다.』『재청합니다.』이렇게 되니까 그만 목사 장립을 못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 일을 당하고 이제 자기 숙소로 가만히 돌아오게 되니까 자기 마음속에 분한 생각이 났단 말입니다.
『아니 선교사로 와서 복음이나 전할 것이지 남의 목사 장립하는 데까지 참견할 것이 무엇 있나?』분한 생각이 들어간단 말입니다.
그러나 얼마 수에 그날 저녁 이 일을 가만히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생각을 해보니까,『그 목사와 자기와 무슨 사혐(私嫌)은 조금도 없는데 그 선교사가 그와 같이 말을 한 것을 보면 아무래도 그는 경험 많은 선교사인데 내가 아직까지도 좀 부족한 점이 있기에 한 동안 기다리라고 하겠지. 그것이 무슨 나를 미워한다 든 가 다른 생각으로 그런 것이 아닐 것 아닌가.』
이렇게 말하자면 양해가 되었고, 그리고『그 선교사가 내게 불리한 말을 했지마는 나는 이 노한 마음 분한 마음을 오래 품지 않겠다.』하고 그것을 양해를 했단 말입니다. 그랬는데 그 때 똑같은 일을 당한 다른 한 분은 그 양해가 도무지 되지 않았습니다.
한 달 후에 만났는데도 그 때도 아직까지 분한 마음을 품고,『에이! 그 선교사, 그놈!』아, 그저 그 분한 마음을 풀지 못하고 그냥 오래 가지고 있더라고 말했습니다.
길게 이야기할 필요 없지마는 하여간 그 후에 그 다른 분은 결국은 교회 일을 보지 않게 되었더랍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좌우간 우리가 무슨 일로 분한 마음이 들어오든지 이 분한 마음을 풀지 아니하고 오래 두면 손해는 결국 내가 본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서 떠난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결국 내 이웃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는 태도입니다. 내가 내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죽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도 용서해 주지 않겠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내가 나 자신을 용서하면 내가 다른 사람도 용서해야 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 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 시기하는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 자신 잘 되는 것을 시기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언제든지 시기라고 하는 것은 사랑이 부족한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시기는 현미경으로 사람을 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 물 같은 것도 보통 눈으로 보면 맑지마는 현미경으로는 암만 맑은 물이라고 자세히 살펴보면 그 속에는 더러운 벌레도 많고 그 외에 여러 가지 더러운 것이 많습니다. 시기의 눈으로 사람을 보면 암만 좋은 사람이라도 여러 가지 결점이 많이 나타난다 하는 그 말입니다.
그 대신 사랑은 망원경으로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방금 저 사람이 좀 부족한 것이 있지마는 이 앞에는 대단히 좋은 사람으로 될 것이다. 이렇게 항상 사람은 멀리서 보아야 합니다. 내가 내 자신을 사랑으로 본다고 하면 내가 다른 이웃도 사랑으로 보아라 하는 그 말이올시다.
이것은 소극적으로 하는 말이지마는 적극적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우선 우리 자신을 얼마나 귀하게 여깁니까? 주리면 먹이고 목마르면 이내 물 가져다 마시고 추우면 이내 외투 가져다 입히고 더우면 부채질해주고 피곤하면 이내 자리에 뉘어서 쉬게 하고 병나면 이애 약 가져다 먹이고, 혹 다른 사람에게 오해받으면 변명하느라고 분주히 돌아다닙니다.
자, 우리 자신에 대해서 우리가 그러합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고 하는 말은 내 자신을 이렇게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내 이웃도 소중히 여겨라 하는 그 말씀이올시다.
다시 말하면 내 자신을 보호하고 보양하고 평안하게 하고 건강하게 하고 대접받게 하는 것처럼 내 이웃도 보호하고 보양하고 평안하게 하고 할 수 있는 대로 내 이웃의 명예나 생명이나 재산을 보존하고 보호하도록 최선을 다하라 하는 그 말이올시다.
우리가 이렇게 이 계명을 생각할 때에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오는 생각은, 누가 이 계명을 능히 지킬 수 있겠는가? 아마 이 생각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성경의 교훈을 그대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제 자신이 이 계명을 지킬 수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제가 아는 것은 교역자의 책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가르치는 것이 제 책임인 줄 알아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우리가 능히 이렇게 살 수 있을까, 표준이 너무 높지 아니한가 하는 그런 기분이 다 있는 줄 생각합니다.
혹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여 보셨습니까? 그 표준을 좀 낮출 수 있으면 좋지 않겠는가? 누구나 실행할 수 있게 그 표준을 얼마쯤 낮춘다고 하면 좋을 것 같습니까?
자, 가령 하나님께서 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너희 짐에서 먹이는 고양이만큼 사랑해라. 자, 그렇게 표준을 좀 낮추어 말했다고 하면 여러분 그대로 다 실행할 것 같습니까? 아마 그렇게 표준을 낮춘다고 할지라도 그대로 실행하는 이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어떤 부인들 보면 고양이를 굉장히 사랑합니다. 그만큼 이웃을 사랑했으면 다른 사람에게 성자라고 하는 말을 듣겠단 말입니다. 또 어떤 자기 집에서 기르는 개를 사랑하는 것 보면 굉장히 사랑한단 날입니다.
이웃을 사실 우리가 기르는 개만큼이라도 사랑한다고 하면 아마 그 사람 남에게『아, 그 사람 참 보통 사람 아니라.』고 칭찬 받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런 계명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다 누구든지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든지 이 계명을 지킴으로써 구원 얻으리라고 한다면 구원을 얻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복음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 도리를 전파하게 되었습니다. 구원 얻는 것은 믿음으로 얻습니다. 행함으로 얻는 것은 안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과연 구원을 얻었다고 하면 구원을 얻은 사람의 생활의 최고의 표준은 이것입니다.『내 이웃을 사랑하되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왜 그런고 하니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사랑의 하나님이올시다. 우리는 이 사랑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면 우리 생활의 특색이 아무래도 사랑으로 나타나야 될 줄로 생각합니다.
여러분, 현재 전 인류가 당면하는 최대의 문제들이 어떤 것인가 혹 생각해 보았습니까? 물론 우리 한국 사람에게는 남북을 통일하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남한을 재건하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물론 세계적으로 볼 때에 라오스 문제도 큰 문제입니다.
혹은 베를린 문제도 큰 문제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근본적으로 들어가서 이 二十세기의 현대 문명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혹은 세계 인류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세계 인류와 현대 문명을 보존하는 방법이 어디에 있는가? 이런 문제는 온 세계 사람들이 당면하는 제일 큰 문제입니다.
이런 시대에 있어서 여러분 또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전 인류를 향하여 하시는 말씀이 많겠지마는 특별히 이런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전 인류에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일까를 여러분은 생각해 보셨습니까? 아마 여러 가지 말씀이 있겠지마는 그 가운데 하나는 이 계명인 줄 생각합니다.『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하여라.』
우리 인류가 내 이웃의 생명을 내 생명과 같이 귀한 줄 알고 내 이웃을 도와주기를 내 자신과 같이 도와줄 줄 아는 이와 같은 자리에 이르기 전에는 결국은 이 현대의 문명과 세계 인류를 보존할 길이 어디 있습니까? 찾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전 세계 문제를 생각할 때만 그런 것이 아닌 줄 압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에서 당면하는 여러 가지 문제가 많지마는 이 모든 문제를 생각할 때에도 하나님께서 오늘날 한국의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다른 말씀도 많겠지마는 이 말씀이 적어도 그 가운데 가장 귀한 말씀 가운데 하나일 줄 생각합니다.
『너희들이 어떻든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을 우리들이 먼저 배우고 우리들이 먼저 행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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