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一․八-九)
오늘은 금년 렌트(사순절)기간의 첫 주일입니다. 또 우리가 어제 국가적으로 노동절을 다 지켰는데 특별히 근로 대중을 생각하면서 기도하는 주일이올시다. 또한 본 교회로서는 교육 주일로 특별히 기키면서, 우리 교회 안에서 어떻게 하면 우리 자녀들을 좀더 바른 교육을 시킬 수 있는가 생각하며 기도하는 주일이올시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 을 통하여 말씀하신 그 말씀에 의지해서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 복음만 쓰지 아니하였습니다. 요한 一, 二, 三서를 쓰고 또한 요한 계시록까지 쓰신 분입니다. 지금 우리가 요한 一서 一장을 읽었습니다.
거기 보면 잠깐 문안이 있은 후에 사도 요한 이 우리 신앙생활이란 무엇인가 가장 간단한 이를테면 정의를 우리에게 줍니다. 신앙 생활은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및 그 아들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는 것이요 또한 그와 사귄 이들이 피차에 서로 사귀는 것이라고 말씀하여 주십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에 대하여 가장 알아듣기 쉽게 어떤 분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역시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곧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빛이므로 털끝만큼도 어두운 것이 그에게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태양에도 흑점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흑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과 사귀었다 하고 어두운데 행하면 그 사람은 단순히 거짓말하는 사람이라고 지적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그 뜻은 빛은 진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는 그릇된 것이나 거짓이 없습니다. 또한 이런 것들을 용납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빛은 지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무소 부재하시며 모르시는 것이 없으신 하나님이올시다.
하나님은 빛이시므로 그이 앞에는 조금도 감추인 것이 없이 적나라하게 나타날 것뿐입니다. 빛은 역시 순결을 의미합니다. 불결한 것이나 더러운 것이 있을 수 없고 용납될 수도 없다고 하는 말씀이올시다.
그러면 이와 같이 빛 되시는 하나님과 우리 인간이 사귀려고 하면 어떠한 기초 위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사귈 수 있겠느냐?
여기에 대한 사도 요한 의 대답은 우리가 내 죄를 깨닫고 죄를 회개하며 죄를 고백하는 가운데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을 사귈 수 있다고 하는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오직 죄를 회개하는 그 마당에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과 사귈 수 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회개와 사죄」라고 하는 제목 아래서 회개란 것이 어떤 것인지 이런 점을 생각해서 하나님께 이제 우리 각 사람에게 친히 말씀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회개 가운데는 간단히 말하면 새 가지 요소나 혹 세 가지 계단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첫째는 내가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는 계단이올시다. 먼저 죄를 깨달아야 회개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여기 있는 말씀과 같이 죄를 자백하는 것입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죄 있는 것을 가리우지 말고 가리울 수 없는 하나님 앞에서 여실히 자백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세례 요한이 특별히 지적한 바와 같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있어야 됩니다. 그것은 입술로만 자복하는 것이 아니고 참된 자백이어야 합니다. 회개는 죄에서 떠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에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할 수만 있으면 내 죄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주었다고 하면 그 손해난 것을 보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첫 단계를 생각해 보세요. 내 죄를 깨닫고 내 죄를 알아야 회개할 수 있습니다. 여기 요한 一서 一장 八절에는 이 진리를 부정적 형식으로 우리에게 기록하였습니다.『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진리가 없습니다. 아마 옛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 모양입니다.
오늘날도 죄가 없다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단순히 무지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율법도 모르고 자기 자신의 생활도 몰라서『나야 무슨 죄가 있나』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깊은 죄악에 빠져서 죄를 먹고 마시면서도 소경이 되어서 길을 못 보는 것처럼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사특(邪慝)한 지혜로써 죄의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후 二-三 세기에 교회를 소란하게 하던 소위 영지주의자(노스티시즘이라 합니다)들은 주장하기를,『사람이란 영과 육이 합해서 사람이 되었는데 육은 물질이요, 영은 선하지마는 물질은 악해, 그러니까 내가 죄를 지었지마는 이것은 육신이 지었어! 이것은 육신의 책임이지 내 책임은 아니다.』이렇게 되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요사이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죄를 지은 후에 여러 가지 다른 데로 책임을 돌립니다. 어떤 때는 이것을 유전의 책임이다, 나는 유전이 나빠서 이런 죄를 짓게 되었다고 하면서 자기는 죄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사람은 환경의 책임이라고 합니다.
『내 처지가, 그저 내 입장이 내 죄를 짓게 말들었어! 나에게야 책임이 있나!』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회에다 돌립니다. 국가에다 돌립니다.『나 사는 사회가 나를 꼭 이렇게 만들었다! 사회가 책임이 있고 국가가 책임이 있지 나는 죄 없다』고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여러분 얼마 전에 신문지상에도 굉장히 떠들어 잘 알지마는 유대 사람 六백만이나 학살한 아이히만 같은 사람, 이스라엘 법정에 서서 당당히 주장했습니다.
『내가 죽이기는 죽였지만 그야 내 책임인가? 나찌스의 책임이지. 나야 죄가 있나? 죄 없다』고 이렇게 사람들은 사특한 지혜를 써서 죄를 짓고도 죄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것으로써 아담과 하와의 자손이라고 하는 것을 증명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창세기 三장에 보면 아담이 죄를 지었습니다. 금과를 따먹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서『아담아, 어찌하여 네가 이 금과를 먹었느냐?』곧 대답하는 말이 여호와께서 주신 그 여자가 그것을 나에게 주므로 내가 먹었습니다.
여자를 만나서『어찌하여 네가 그 금과를 주었느냐?』여자에게 책임을 추궁했습니다. 여자는 이내 대답하는 말이『그것 제가 그렇게 했나요? 뱀이 나를 꾀어서 그렇게 말들었지요.』저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죄라고 하는 것이 별 것이 아니고 우리 인간이 진화되기 전에 가졌던 습성이다. 그것이 무슨 죄가 되나?』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 가운데는,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죄 없다고 하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주후 四세기 어거스틴 때에 영국의 신학자 펠라기오(Pelagius)라고 하는 사람은『사람이 자기가 짓는 죄는 있지마는 원죄는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 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자기네가 율법을 잘 지키고 의식을 온전히 지킨 까닭으로 자기들에게는 죄가 없는 줄 생각했습니다. 독선주의에 빠져서 남의 죄는 보고 자기의 죄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그릇된 신비주의자들 가운데, 혹은 사교 도들 가운데『나는 벌써 온전한 사람이 되었는데 무슨 죄가 있나?』그래서 어떤 사람은『나는 예수다! 나는 새 주다.』혹은 자기는 무슨 감람나무라고 하여 죄 없다고 주장을 하였습니다.
내가 이북에서 들을 때 어떤 사람들은 그런 그릇된 신비주의에 젖어서,『우리는 다 온전히 중생하고 이제는 온전해졌고 죄 하나도 없는데 우리 같은 사람은 남녀 신도가 다 한 방에서 동숙해도 좋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말합니다.『누구든지 되 없다고 하면 이런 사람들은 자기를 속이는 것 뿐이라.』고 남이 속이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속이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손바닥 같이 분명히 내려다보십니다.
죄 없다고 하는 사람은 마치 매에 쫓긴 꿩이, 쫓기다 못해서 숲 속에 머리를 박고서 몸통과 깃은 다 내어놓고서 조 혼자 숨은 줄 알고, 자기는 숨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속이는 것뿐입니다.
진리가 그 속에 없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무서운 죄를 짓고도 맨 처음에는 죄 없다 생각하고 평안히 앉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단을 보내서 비유를 베풀어서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죄를 지적할 때에야 죄를 깨달았습니다.
『제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내가 내 죄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무서운 죄를 짓고도 죄 없는 줄 알고 그냥 앉아 있는 사람들도 종종 있습니다. 먼저 내가 내 죄를 깨달아야 회개할 수 있습니다. 먼저 나는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깨달아 아는 그 점이 회개의 첫 발걸음이올시다.
영국의 유명한 선교가 스펄전(Spurgeon)목사는 일찍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우리가 어떤 때에 나는 참 죄인이다. 나는 참 나쁘다, 나는 악하다,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기억하여라! 당신은 그것보다 더 악하다고 하는 사실을.』
사실 우리가 어떤 때에는 나는 죄인이다라고 내 죄를 깨닫고 부끄럽게 알고 탄식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당신을 보실 때에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것보다 더 악한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미국의 초대 역사의 유명한 인물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라고 하는 목사가 있습니다. 프린스턴 대학 초대 학장 가운데 한 분입니다. 그이의 설교 가운데「흉악한 벌레 같은 죄인」이란 말을 썼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후에 비평했습니다.「아 그 너무 과한 말을 썼다.」고.
그러나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하나님 앞에는 숨기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날 적부터 지금까지 우리의 말과 우리의 행동과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사상을 다 알고 있습니다. 손바닥 같이 현재와 같이 보고 계십니다.
이런 하나님 앞에 우리가 앉았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려다보실 때에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생각, 모든 상상, 모든 공상, 모든 망상, 야심, 음욕, 허영심, 공명심, 교만, 시기, 욕심, 이것이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타날 터이니 사람처럼 흉악한 벌레가 어디 있겠어요? 흉악한 벌레 이상으로 흉악한 것이 우리 인간인 것이올시다.
기억하세요. 하나님은 빛이신 까닭에, 진리이신 까닭에 언제든지 진리의 기초 위에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과 사귈 수 있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더러운 죄인입니다. 내가 죄인 된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이대로 고백할 때에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과 사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에 있는 말씀대로『의인은 없나니 곧 하나도 없나니라.』하나님 앞에서는 죄가 더 중하고 덜한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흉악한 벌레와 같은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될 것입니다.
둘째는 이 죄를 자백하라고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고 의로우사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의 불 의한 것을 깨끗하게 씻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더러운 죄인인데도 불구하고 사람의 한 가지 버릇은 언제든지 죄를 가리려고 합니다. 죄를 숨기려고 합니다.
죄를 숨기기 위해서 또 다른 죄를 짓습니다. 언제든지 얼굴에는 분을 바르려고 합니다. 우리의 생활에 횟물 칠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당시 바리새 교인들을 항해서『이 회칠한 무덤 같은 자들아!』책망했습니다. 항상 가리려고 합니다.
사도 요한 이 우리에게 권면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가리려고 해도 가릴 수 없는, 즉 죄를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내어놓으라고, 고백하라고 숨기지 말라고 합니다.
만일 자기의 병을 완전히 고치기를 원하는 환자가 자기가 신임하는 의사에게 가서 조금도 숨김없이 내게는 이런 느낌이 있고 어디가 아프고 내 속에 어떤 곳이 약한 것 같다고 솔직히 다 내어놓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이 죄를 자백하여야 하나님께서 그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자백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다 예배하려 예배당에 나왔지마는 우리가 과연 하나님을 만날 만한 자리에서 우리가 예배를 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유명한 비유를 다 기억하시지요? 그 때에 바리새인이 기도하는 그 태도와 그 내용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도한 내용을 보면『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討索)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모든 수입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이렇게만 기도했습니다.
이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섰습니다. 기도의 내용을 보아도 죄의 자백은 하나도 없습니다. 못했습니다. 자기 자랑뿐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죄 사함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과 사귀지 못했습니다. 성전 뜰만 밟았습니다. 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자리에 서지 못했습니까?
그러나 세리의 태도와 기도의 내용을 보십시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면서 부르짖는 말이『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멀리서 감히 눈도 못 들고 가슴을 치면서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세리는 죄인으로 섰습니다. 세리는 자기의 죄를 고백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그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고 돌아갔다고 하였습니다. 죄를 자백하여야 됩니다. 죄를 자백하는 사람은 이렇게 언제나 겸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겸손하고 사람 앞에서도 겸손합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도 말하자면 이 죄의 고백과 같이 세례를 받습니다.『나는 아무래도 죄인이므로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야 돼! 그러니까 세례를 받아야 돼!』
『나는 교회에 다니기는 하지만 세례 받을 필요야 뭐 있나!』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아직도 그는 의인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 섰습니다. 의인으로 나와 섰으니까 물론 죄의 용서를 받을 것도 없지요. 우리가 성찬에 참여하는 것도 우리의 행동으로서 우리가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고백하는 태도입니다.
『나는 죄인이므로 내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어! 십자가의 보혈로만 구원을 얻어! 나를 위해서 죽으신 주님의 살과 주님의 피 공로로만 내가 구원을 얻어! 그러니까 내가 한 번이라도 어떻든지 성찬에 참여하여야 되지 않겠는가?』
성찬에 참여하는 것도 우리 행동으로서의 고백이올시다. 죄를 고백하여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나의 있는 대로 다 내어놓아야, 고백을 하여야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사도 요한 은 여기서 설명하지 않지마는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을 통해서 분명히 가르친 진리를 한 가지만 더 말하겠습니다. 그것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됩니다.
입술로만 죄는 자복하는 것은 부족합니다. 눈물을 흘릴지라도 눈물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눈물의 열매가 맺어야 합니다. 열매는 어디서 나타납니까? 내가 과연 죄를 지었다고 하는 것을 깨닫고 내 죄를 사실 자백하면 그 죄에서 떠날 것입니다.
회개라고 하는 것은 떠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씩 부인하고 자기가 죄 지은 줄 안 다음에 곧 회개한 것이 분명합니다. 무엇으로 분명합니까? 그 자리를 곧 떠났습니다. 떠나서 애통하면서 죄를 자백하였습니다.
참 회개는 죄의 자리에서 떠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완전히 떠났다고 하는 것은 내 죄로 말미암아서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입혔으면, 할 수만 있으면 그것을 보상합니다. 참 회개에는 보상이 따라 갑니다.
우리는 삭개오가 완전히 회개한 줄 분명히 압니다. 삭개오는 예수 님 앞에서『아이고 내가 죄 많이 지었습니다. 나는 죄인이올시다.』
이렇게만 자백한 것이 아닙니다.『주여 보시옵소서! 내 재산의 절반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주겠습니다. 내 재산 가운데 불의 한 재산 많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토색한 것은 구약의 율법대로 四배나 갚겠습니다.』참 회개에는 보상이 따릅니다.
구약의 율법을 보면 구약 시대의 어떤 사람은 죄를 짓고 그 죄의 사함을 받으려면 두 가지를 하라고 했습니다.
첫째는 보상할 수 있는 대로 보상을 하고, 둘째는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속건 제를 그려서 죄 사함을 받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二十二장 첫 절을 보면 어떤 사람이 가령 다른 사람의 양을 한 마리를 도적질하여 왔다고 하면 그 죄 사함을 받으려면 네 마리를 갚아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속건 제를 드릴 때 죄 사함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만일 소를 한 마리 훔쳐왔으면 다섯 마리를 갚아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속건 제를 드려야 죄 사함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토지나 포도 원이나 여러 가지를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쳤으면 그 손해 끼친 것을 돌려줄 것은 물론 다섯 배를 첨가해서 갚아준 다음에 예물을 가지고 와서 속건 제를 드려야 죄 사함을 받을 것입니다.
이 원리는 옛날과 오늘날일지라도 변하지 아니합니다. 내가 참으로 입으로 고백하고 할 수만 있으면 나로 말미암아 어떤 사람이 손해를 받았으면 그 죄에 대한 보상을 하여야 우리가 참 회개하는 것이요 그래야 하나님의 용서함을 받을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가 디 엘 무디라고 하는 사람이 한 번은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가 어떤 곳에서 부흥회를 가졌는데 하루 저녁 설교를 마치고 자기 집에 돌아왔습니다. 어떤 청년이 찾아와서 자기를 보기를 원해요. 어떻게 찾아왔느냐고 물어보니 그 청년은『저는 어떤 회사에서 회계 일을 보는 사람입니다.
내가 그 재무를 보는 가운데 제가 큰 시험에 들어서 주인의 돈 一,五00 달러를 훔쳤습니다. 오늘 저녁 말씀 듣고 내가 꼭 이 죄를 회개하여야 되겠는데 一,五00달러를 훔쳐서 얼마는 쓰고 지금은 남은 것이 九五0달러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 있으면 제가 다 가져다 올리겠는데 九五0달러밖에 없으니 이건 가져다 올릴 수가 없고, 그래서 제 생각은 이것을 가지고 좀 몰래 장사를 해서 이를 남겨서 一,五00달러가 다 된 다음에 이것을 완전히 주인에게 갚으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이렇게 의논합니다.
그 때 무디 선생 하는 말이『그저 그 생각도 할 수 있기는 있지마는 내 생각에는 그 도적질한 돈으로 장사를 해야 그 장사가 잘 안 될 것 같애! 그러니까 그 남은 것이라도 갚을 수 있는 대로 우선 갚아 드리세요. 그러면 아마 그 주인이 용서해 줄 것입니다.』그러니까 그이 하는 말이『아, 저는 부끄러워서 감히 갈 수 없으니 무디 선생님 저와 같이 가 주십시요.』
그래서 이튿날 그이와 같이 회사 주인을 찾았다고 합니다. 가서 무디 선생은 먼저 들어가서 그 사정 이야기를 다 하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다 듣더니 그 주인이『아, 나는 그이가 그런 일 한 것을 전연 몰랐었다』고
『그러나 이번에 그이가 회개하는 말을 들을 때에 참 내 마음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며『뭐 그 九五0달러 있으면 그냥 가져오면 내가 다 용서해 주겠다.』그 다음에 그 청년을 청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셋이 같이 앉아 기도를 하고 온전히 주인은 그 청년을 용서해 주고 그 다음부터 그 청년은 옳은 신앙 생활을 했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참 회개에는 할 수만 있으면 보상이 따릅니다. 제 교역 생활에 있어서도 이북에 있을 때에 또는 이남에 있을 때에 여러 청년들이 와서 자기가 이와 같이 남의 것, 남의 물건 안 가질 것을 가졌다고 저에게 와서 자복을 하면서 도로 돌려준 경우가 많습니다.
안 가질 돈을 썼다가서 그 돈을 도로 찾아준 예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관청의 공무원으로 있는데 다른 사람이 다 받으니까는 뇌물을 다 같이 받았다가 그 후에 양심이 너무 무거워서 다시 돌려주려고 하니까는 그 사람을 찾을 수도 없고 그러니 내가 이 돈을 연보를 하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이런 문제를 가지고 와서 의논한 청년들도 있습니다. 참 회개에는 할 수만 있으면 보상하는 것이 참 회개의 열매입니다. 저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전에 어떤 여자가 어려서 남의 집에 식모 노릇을 합니다. 아마 그 때 그 주인집이 안 믿는 집이었던 모양입니다. 술을 두 병 훔쳤습니다. 그 후 이 여자는 장성해서 출가하여 아들 딸 낳고 잘 삽니다.
또 그 후에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죄를 다 자복하고 옳은 생활을 꼭 하려고 하는데 항상 이 여자의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언제나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는 그 술 병 둘이 떡 나타나곤 합니다.
하나님께 고백은 하였지만 그 술 병 둘은 그냥 있거든요. 아,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은가. 생각하다 못해서 목사와 의논을 하고서 그거 별 수 없으니 그런 경우에는 그 술 두 병 아주 갖다 주라고. 아, 가져다주려니 그 주인집 할아버지 할머니 다 세상을 떠나고 없단 말이요. 그 자손들만 사는 집에 가서 그런 이야기를 다 하고 술 두 병을 도로 갖다 주었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야 마음이 평안했습니다.
이렇게 보상할 수 있는 경우면 보상하면 감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심히 이런 문제를 생각할 때에 마음이 무거운 것은 어떤 죄는 보상하려야 보상할 수 없는 죄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이 명예를 훼손한 다음에 그 명예를 어떻게 다시 온전히 회복해 줄 수 있는 길이 있습니까?
바로 몇 달 전에 어떤 여자 청년이 예배 필한 다음에 저를 보자고 했습니다. 그 여자의 사정을 들으니까 어떤 회사에 근무하는 여자입니다. 그의 집은 잘 믿는 가정입니다. 그러나 그 회사에 책임자로 있는 사람이 큰 시험에 빠졌습니다. 이 여자를 그르쳤습니다.
마음 가운데 무거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그가 아무래도 이 자리에 꼭 떠나고 새로운 생활을 하여야 되겠는데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말했습니다. 곧 그 자리를 떠나도록 기도를 하고 그 상대자도 내가 만나고 그 사람에게 꼭 회개하도록 권면을 했습니다.
톨스토이의 유명한「부활」이라고 하는 소설을 기억하실 줄 압니다. 청년 귀족이 자기의 정욕을 만족하게 하기 위해서 철없는 여자를 그르쳤습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이 여자는 그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타락하고 타락해서 윤락 여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큰 죄에 빠지고 또 빠졌습니다.
그 후에 이 청년이 알고 보니 몇 해 전에 자기가 그르친 여자올시다. 이 여자를 다시 회복해서 좋은 여자를 만들기 위해서 이 청년이 온갖 수고를 다 합니다. 그러나 일생을 그르친 그것을 다시 보상해 줄 서 있어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가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멀리해야 됩니다. 어떤 죄는 아무리 내가 보상하려고 해도 보상할 수가 없습니다. 나의 일생을 그르쳐 준 죄를 무엇으로 보상합니까?
슈바이처가 아프리카에 가서 전도한 동기 가운데 하나는 백인들이 흑인들에게 죄를 너무 많이 지어서 내가 이 보상의 하나로서, 백인의 하나로서 나아가서 이 사람들을 참으로 봉사해 보겠다는 그 정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가 개인으로 보상할 수 없으니 사회적으로 봉사하겠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자기의 죄를 깊이 참회하는 가운데 자기의 일생을 어떤 공공 사업이나 자선 사업이나 문둥병 자를 위하여, 걸인들을 위해서 일생을 바쳐서 참회의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 회개에는 이 보상이 따릅니다. 먼저 죄를 깨닫고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며 이 죄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남겨진 손해를 할 수 있는 대로 보상할 때 그것이 참 회개입니다. 그는「미쁘셔서」약속대로 지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는 이에게 약속대로 죄를 용서하여 주십니다. 시편 三十二편을 기록한 저자는 이런 자기의 체험을 기록하였습니다.
『내가 토설(吐說)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衰)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그리고 끝에『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참으로 죄를 회개하고 자복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받을 때에 우리의 마음속에 참 기쁨이 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