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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딤후4:1-8/ 기독교의 사생관 / 한경직 목사
    2014-08-23 08:27:37   read : 1286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키었으니.』(딤후 四․六, 七)

    디모데 후서는 사도 바울의 모든 서신 가운데 가장 마지막 서신으로 알려집니다. 지금 읽은 이 말씀은 마지막 서신 가운데도 마지막 말씀입니다. 이 때에 사도 바울은 이미 나이 많은 때입니다. 이 편지를 쓰는 곳은 로마 감옥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환경으로 보아 오래지 않아 순교의 피를 흘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예감하면서,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주시는 권면의 말씀이 이것입니다.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며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그러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말씀을 여기에 했습니다.『관제와 같이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키노라.』

    이 두 구절 말씀 가운데서 사도 바울의 사생관, 죽음과 삶을 어떻게 보았으며, 특히 八절 가운데서 죽은 후에 영원한 세계에서 될 일을 어떻게 묘사했는지에 관해서 깊은 진리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먼저 六절에서 사도 바울은 죽음이 점점 다가올 때, 이 죽음이란 엄숙한 사실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여기에 말씀하시기를『관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음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관제로 보았습니다. 그 뜻은 옛날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 제물을 가져다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물 가운데 액체를 드릴 때는 그런 제사를 전제 혹은 관제라고 불렀습니다. 제단에 부어 드리니까 관제라는 이름으로 드렸습니다.

    여기 사도 바울은 자기가 장차 당할 순교의 죽음을 하나님의 제단에 최후로 부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로 보았습니다. 물론 그의 일상생활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이었습니다.

    그는 일찍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다음부터는 그에게 있는 모든 것, 즉 그의 재능, 그의 시간, 그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제는 그의 생명, 피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제단에 붓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는 죽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최후의 제사로 보았습니다.

    로마서 十二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모든 믿는 사람에게 이렇게 권면 했습니다.『너희는 하나님께 산 제사를 드려라.』너희 몸으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만한 사 제사를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문자 그대로 자기 생활에 있어서 모든 것을 산 제사로 드렸습니다. 마지막 죽음까지 하나님께 최후로 드리는 제사이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 뿐만이 아니고 참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의 생활은 다 이런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매일 매일의 우리의 생활이 하나님께 향내 나는 제사의 생활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이 최후의 죽음은, 순교는 말할 것도 없고 보통 죽음이라 할지라도 죽음 자체가 최후의 생명을 하나님께 부어 바친 제사인 것입니다. 그는 죽음을 이렇게 보았습니다. 이것이 죽음에 대한 모든 성도의 견해일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구나.』죽음을 떠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도 흔히 누가 죽었다 하면,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비슷한 사상입니다.

    죽음을 하나의 떠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성경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떠난다고 하는 말의 본래 헬라 말「아나루시스」라는 말의 깊은 뜻을 생각해 보면, 사도 바울이 우리가 사상할 수 없는 깊은 죽음에 대한 의의를 생각하면서 이 말을 쓴 것이 분명합니다.

    가령 떠난다고 하는 원어의 뜻 가운데 하나는 멍에를 벗긴다고 하는 뜻이 있습니다. 소나 말이 수레를 메고 먼길을 가다가 그 일을 다 마친 다음에는 멍에를 벗어 놓습니다. 혹은 소가 밭을 갈다가 그 밭을 다 간 다음에는 소의 목에서 쟁기의 멍에를 벗어 놓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에게로부터 사명을 받은 후에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목에 메워 준 멍에를 메고 일생을 산 것이었습니다.

    그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수고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멍에를 벗어 놓게 되었습니다. 벗어 놓고 쉬게 되었습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수고를 벗어 놓고 안식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된 성도의 죽음이 다 이런 것입니다.

    세상에 있을 때에 우리가 다 무거운 멍에를 메고 삽니다. 우리가 그 의무를 다 마친 다음에는 그 멍에를 벗어놓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갑니다. 또 여기 떠난다는 어원의 의미 가운데는 고랑을 풀어놓는다고 하는 뜻이 있습니다. 죄수에게 고랑을 채우지 않습니까? 고랑 채웠던 것을 풀어놓는다고 하는 뜻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뜻을 분명히 생각한 줄 압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그 때에 고랑은 아니지만 쇠사슬을 한 손에 채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감옥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 떠난다고 하는 말은 지금 내 손에 매여 있는 쇠사슬을 풀어놓고 하나님 나라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고 하는 뜻이 이 가운데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 그는 로마 감옥을 벗어나서 천국에서의 해방을 맞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다 감옥에는 있지 않지만 깊은 의미에서 생각할 때에,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것은 어떤 고랑에 채워 있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많은 제약을 받습니다. 육신의 제약을 받습니다. 세상에 살 때는 환상경의 제약을 받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의 제약을 받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습니다.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제약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는 모든 제약을 벗어 놓고 하늘나라의 해방과 자유를 맛보게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때는, 근심과 걱정과 고통에 매여 살지마는, 우리가 최후로 내 임무를 마치고 하늘나라에 갈 때에는, 그 모든 고난을 벗어 놓고 하나님 나라에 가서 자유와 행복과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이것이 성도의 죽음인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이 말씀은 깊이 연구해 보면, 장막의 줄을 풀어놓는다고 하는 뜻이 있습니다.

    여러분,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난 때는 장막 속에서 살았습니다. 어떤 곳에 가서 얼마쯤 살다가 장막을 걷게 되면 장막 줄을 풉니다. 풀어서 장막을 거두어 또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갑니다. 얼마쯤 살다가 또 다른 곳으로 갈 때는, 장막 줄을 풀어 장막을 거둬 이전하게 됩니다.

    이렇게 광야를 다 지나가서 가나안 복지에 들어갔습니다. 가나안 복지에 들어간 다음에는 장막 속에 살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는 집에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여행을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장막 줄을 푼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장막 줄을 마지막으로 푸는구나 생각하고, 이 장막 줄을 최후로 풀고 이제는 장막 속에 살 것이 아니고 내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어 주신 영원한 집으로 갈 때가 가까웠다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 뿐만 아니고 참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다 공통된 경험일 줄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이 세상에서 한 나그네로서 장막 집에 거주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을 다 산 다음에는 마지막으로 장막 줄을 풀어서 거두어 가지고, 이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어 주신 온전한 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의 죽음인 것입니다.

    한 가지 뜻만 더 생각합니다. 여기 떠난다고 하는 뜻은 닻줄을 푼다고 하는 뜻이 있습니다. 배가 어느 항구에 들어가면 닻줄을 먼저 내립니다. 그리고 항구에 머물어 있는 동안에는 닻을 그대로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배가 그 항구를 떠나게 될 때는 닻줄을 거둡니다. 그리고 넓은 바다를 향합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에서 떠날 기약이 가까웠다고 하는 생각은 아마 이런 생각도 했을 것으로 압니다.

    사도 바울은 사실 바다 여행도 많이 한 사람입니다. 바다의 위험도 잘 아는 사람입니다. 배를 타고 여러 곳에 다닌 분입니다. 여러 항구에 들렷다가 는 닻줄을 풀어 떠가가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이 장망성 멸망성의 항구에서 닻줄을 풀어 거두어 가지고 하늘나라의 영생한 곳으로 떠날 기약이 가까웠다 생각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헤매다가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복지에 온전히 도달한 것처럼 나는 닻줄을 거두어서 요단강을 건너갈 기약이 가까웠다. 가나안 복지에 가서 영원한 축복을 받을 때가 가까이 왔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죽음에 대한 견해입니다.

    이것이 모든 기독신자들의 죽음에 대한 견해입니다. 여러분, 지금가지는 죽음을 어떻게 보고 살아왔는지는 모르지만 이제부터 참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는,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것이라는 것을 깊이 기억합시다.

    죽음은 무엇이요? 하나님께 최후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죽음은 무엇이요? 세상의 멍에를 벗어놓고 하늘나라에 가서 자유와 해방을 누리는 것입니다.

    죽음은 무엇이요? 손에 채웠던 고랑을 풀어놓고 온전한 자유를 하늘나라에서 얻는 것입니다. 죽음은 무엇이요? 장막 줄을 풀어 가지고 영원한 하나님이 계신 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죽음은 무엇이요? 마지막으로 닻줄을 거둬 가지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것입니다.

    죽음이 온다고 하여도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근본 생명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오직 환경만 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은 영원히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죽음에 대한 깊은 뜻입니다.

    둘째로는 사도 바울이 자기 삶을 어떻게 보았는지 분명히 자백을 하였습니다.『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즉, 싸움으로 보았습니다.『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경주로 보았습니다.『나의 믿음을 지키었으니』지키는 청지기의 생활로 보았습니다.

    다시 생각해 봅시다. 선한 싸움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전쟁의 싸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운동선수가 운동할 때 싸우는 싸움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데는 씨름이란 말로 표현했습니다. 씨름도 우리 한국 씨름처럼 얼른 결판이 나는 것이 아니라, 영어의 레슬링입니다.

    서양 사람의 씨름처럼 오래 하는 것입니다. 그 레슬링을 생각하면서 이런 말을 쓴 것이 아마 분명합니다.

    운동선수는 언제든지 규칙대로 싸워야 합니다. 규칙을 지키면서 싸워야 하므로 정직하게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온 정력을 다해서 최선을 다해서, 싸워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스포츠맨의 정신입니다. 선한 싸움이라고 하는 말은 참된 스포츠맨의 정신을 가지고 싸우는 싸움입니다.

    우리가 생의 길을 가려고 하면 끊임없이 두 가지 싸움을 하여야 합니다. 첫째는 내 안에서 이 육을 근거로 하고 일어나는 모든 욕심, 욕망, 정욕 등 이런 모든 악의 세력에 항거해서 끊임없이 싸워야 합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이 세상은 악한 세상입니다. 악한 마귀가 우는 사자를 찾아다니는 세상입니다. 밖으로 들어오는 유혹과, 밖으로 들어오는 악의 세력에 항거해서 끊임없이 싸워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생을 이런 싸움으로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싸움을 싸우십니까? 여러분 중 싸움에 패한 분은 없습니까? 다시 일어나서 선한 싸움을 싸워야 바로 삽니다.

    또한「달려 갈 길을 마치고」라는 말씀은 운동경기 가운데 특별히 경주를 생각합니다. 경주 가운데 제일 유명한 경주는 말할 것 없이 마라톤 경주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해서 마라톤 경주가 시작되었는지 기억하십니까? 혹 모르는 분도 계실는지 모르지요. 옛날 동방의 강국 파사가 일어나서 모든 근동 일대와 유럽까지 점령하려 할 때에, 근동일대를 모두 점령하고는 말머리를 서편으로 돌려서 헬라를 정복하려고 백만 대군이 쳐들어갔습니다.

    그 때의 헬라의 여러 작은 나라들은 협력해서 연합군을 조직해 가지고 이 강한 군대 파사와 싸우기 위해서 진군을 했습니다. 마라톤이라 하는 조그만 촌에서 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이 전쟁은 그 당시 역사로 보면 역사적 의미가 있는 전쟁이었습니다.

    만일 그 때에 헬라가 패전하였다고 하면 역사에 나타난 헬라 문화의 꽃이 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운명이 심히 위태로울 때였습니다. 이 때 헬라 군인들은 전력을 다 해서 최후까지 싸웠습니다. 그래서 이겼습니다. 그 때 사령관은 너무 기뻐서 자기 부하 하나를 택해서 얼른 이 소식을 아덴에 전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 군인은 이 소식을 가지고 기뻐서 밤새도록 뛰고 졸일 뛰어 아덴에 와서 문을 들어서면서 여러 사람에게 외친 말이『기뻐하시오, 우리가 승리했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기진맥진하여 쓰러져 그 자리에서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마라톤 경주입니다.

    사도 바울이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라는 말은 사명의 뜻도 생각하면서 말씀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다 경주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습니다.

    이 사명을 다해서 끝까지 전 코스를 마치겠다고 하는 결심이 언제나 그에게는 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특별히 여러분을 택해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삼았으면 하나님께서 여러분 하나 하나를 통해서 할 일이 꼭 있습니다. 그 일을 다 마치는 것이 마라톤 경기장에서 전 코스를 다 마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의 경주를 하다가 중간에 쓰러진 사람은 없습니까? 달려갈 길을 마쳐야 합니다. 그래야 삶을 옳게 삽니다.

    다음은「믿음을 지켰으니」라를 말씀입니다.

    이것은 청지기로 생각합니다. 청지기의 직분은 자기가 맡은 일을 잘하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 님을 만난 다음부터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귀한 보배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그는 이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애썼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권면 하였습니다. 경고도 했습니다. 갈라디아 一장 六절 이하를 보면 그 때 갈라디아 교인들 가운데 자기의 믿음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리라.』

    여기에 사도 바울이 받은 바 복음의 진리를 간수하기 위하여 얼마나 굳은 결심이 있었나 하는 것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믿음을 지킵니까? 여러분이 맡은 바 믿음을 지킵니까? 믿음을 도둑질하는 절도도 많고 믿음을 강제로 뺏으려고 하는 강도도 많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떠한 핍박이 있든지, 어떠한 환난이 있든지, 어떠한 비난이 있든지, 어떠한 위험도 무릅쓰고 그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은 경주와 같다고 하지만 보통 경주와 다른 횃불경주와 같습니다. 횃불을 들고 달려가는 경주입니다. 이 횃불을 끄지 말고, 횃불을 활활 타오르게 하면서 마쳐야 하는 경주입니다. 찬송가에 있는 말씀과 같이,

    『금보다 귀한 믿음은 큰 보배되도다. 천당의 귀한 영생 복 믿음이 얻겠네.』

    믿음이 있어야 영생 복을 얻는 것입니다. 믿음을 끝까지 풍성스럽게 지키는 청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다 믿음을 지킵니까? 지키십시다.

    이 믿음을 아직도 얻지 못한 이가 있습니까?

    그러면 믿음을 받으세요. 이와 같은 삶을 산 이에게 하나님께서는 의의 면류관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어떤 때는 생명의 면류관이란 말을 썼고, 어떤 때는 영광의 면류관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이것은 다 일종의 비유입니다. 그 때에 경기대회에서 승리한 사람에게는 감람나무 가지로 면류관을 만들어 씌우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런 면류관은 며칠 지나면 다 시들어 버립니다.

    이 영적 경주 장에서 승리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시들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생의 면류관을 준비해 두신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 뿐만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예수를 사랑하고, 예수를 나타내기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같은 면류관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죽음을 어떻게 보았습니까? 삶을 무엇으로 보았습니까?

    참된 의인의 생활은 길이 되시고 진리가 되시고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을 내 마음 가운데 영접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그 때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 싸움은 시작됩니다. 그 때부터 달음질은 시작됩니다. 이 때부터 청지기의 생활이 시작됩니다.

    여러분, 다 주님을 영접하십니까? 한 분이라도 영접하지 못한 분이 계시면 이제 영접 하십시오. 여러분, 주님을 영접했습니까? 그러면 선한 싸움을 싸우세요. 낙심하지 마시고 달려갈 길을 마치세요. 중도에 쓰러지지 마세요. 끝까지 믿음을 지키세요. 이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의 사생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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