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이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비천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가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四․十一-十三)
이 몇 절 가운데서 사도 바울이 스스로 말한 자기 생활에 대한 간증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는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을 배웠다고, 그래서 비천(卑賤)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간증합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자족의 비결을 배우는 것은 매우 필요합니다.
자족이란 말에 반대되는 말은 불만 불평 혹은 원망 이런 말들일 것입니다. 불만과 불평도 어떤 경우에는 필요합니다. 가령 무식한 이가 그 무식한데 대한 불만이 있을 때에 공부할 의욕이 생길 것입니다.
혹은 극빈한 가정이 그 빈곤에 대한 불만이 있을 때에 가정생활을 개선하기 위해서 좀 더 노력을 하게 될 것입니다. 불의, 부정 부패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있을 때에 사회정의를 위해서 그 국민들이 좀 더 투쟁을 하게 될 것입니다. 범사에 개선할 것은 개선해야 되고 향상할 것은 향상하도록 노력을 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때로는 내 자신이 고칠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는 불가항력의 경우를 당할 때가 있습니다. 가령 불치의 병, 불구의 몸, 피할 수 없는 짐, 부득이 저야 할 내 십자가, 부득이 당하여야할 고난, 부득이 당해야할 환경 혹은 역경. 이런 때에 계속해서 불만, 불평, 원망만 한다고 하는 것은 백해(百害)무익(無益)입니다. 백 번 해가 있을지언정 한 푼의 이는 없습니다.
우선 아무 쓸데가 없습니다. 원망한다고 짐이 가벼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쓴잔이 달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괴로움이 적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환경이 변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내 자신에게만 악영향을 줄 겁니다.
얼굴에는 주름살 하나라도 더 생기게 되고 머리에 흰머리가락 하나라도 더하게 됩니다. 원망이 많은 사람이 그렇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다른 이에게도 악영향을 줍니다. 가정에 이런 불만과 원망을 하는 가족이 하나만 있어도 온 가족이 불안해집니다.
가정의 주부가 이런 여자라고 하면 남편의 마음이 불안하여 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아이들도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기를 싫어하게 됩니다. 집이 넉넉하나 안 하나 간에 가족의 비결을 배워야 가정이 화평합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범한 죄 가운데 하나는 이 원망의 죄올시다. 그들은 부득이 광야를 지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가나안 복지를 들어가려면 광야를 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광야에, 물론 불편한 점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은 불만과 불평을 계속했습니다.
애굽에서 떠나지 않았다면 좋은 것 아닌가 ? 아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고기가마 옆에서 살았는데 먹을 것이 없다. 마실 물이 없다. 모세를 원망하고 계속해서 원망했습니다. 결과는 그들의 대부분이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지를 못했습니다.
신앙 생활이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이 세상에서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여러 가지로 불편한 점이 많습니다. 우리가 자족의 비결을 배워야 영원한 안식에 들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자족의 비결을 어디서 배울 수 있습니까 ?
우리 동양의 성현도 이 가족에 대한 교훈을 많이 했습니다. 가령 경행록 이란 책에 보면 지족가락이요 무탐즉우(知足可樂 無貪卽憂)라는 말이 있습니다. 족한 것을 알면 가히 즐거워할 수 있고 탐하기를 힘쓰면 근심만 더한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혹은 이런 말도 했습니다. 지족(知足)자는 비천하여도 영락이요 부지족자는 부귀라도 역운(逆運)이라. 족한 줄을 아는 사람은 빈천하여도 또한 즐겁게 살고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부귀한 자리에서도 늘 근심만 한다.
또 이런 말도 했어요. 지족상족이면 종신불욕하고 족할 줄을 알아서 항상 족하게 여기면 종신(終身)토록 몸에 욕됨이 없고 지지상지면 종신불치라 그칠 때를 알아서 항상 그칠 줄을 알면 그는 종신(終身)토록 몸에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는다.
우리 동양의 성현들도 자족을 배우라고 권면 했습니다.
여기 서양의 철학자들을 보면 동양의 철학자들 보다 더 강조해서 가르쳤습니다. 특별히 헬라의 철학 가운데 스토익파 에서는 자족이란 말, 바로 이 성경에 나오는 말입니다. 아우타, 아우타케이아 란 말인데 자족이란 마음 즉 스스로 족하다고 여기는 마음을 아주 강조해서 가르쳤습니다.
사실 스토익파 윤리의 최고 목적은 자족에 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이란 어떤 물건이나 어떤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족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방법을 두 가지로 제시했습니다.
첫째는 자족을 배우려면 먼저 네 욕망을 제거해 버려라. 둘째는 네 감정을 제거해 버리라고 가르쳤습니다. 욕망을 제거해 버리라. 자족이란 물질을 많이 소요하는 데 있지 않고 욕망을 주리는 데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인 줄 압니다.『가장 부한 이가 누구입니까.』하고 어떤 이가 소크라테스에게 물으니 그 노인이 얼른 대답하는 말이『가장 적은 것에 자족하는 사람이니라.』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전에 디오게네스라고 하는 스토익 파에 위대한 성자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일생토록 몸에는 짧은 바지 하나만 걸치고 살았고 자기 집도 없이 밤에는 산기슭에 가서 나무통 속에서 잤다고 합니다. 한 번은 헬라의 왕이 이 성자를 찾아보려고 왔습니다.
성자의 형편을 본 왕은『당신이 무엇을 원하십니까? 원하는 대로 내가 다시 올릴 터인데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씀해 보시오』하고 말하니 이분이 하는 말이『나는 원하는 게 하나도 없소. 거저 왕께서 지금 내 앞에 서 계시니까 햇빛이 좀 가리워 지니 다만 좀 비켜 서 주시오』라고만 대답했답니다.
『욕망을 죽이라』이렇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또 그들을 좀 더 아주 극단으로 나가면서 모든 감정을 제거해 버리라고 할 뿐 아니라 애정의 감정까지도 제거해 버리라. 자기의 자신이나 다른 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무관심하게 되기까지 모든 감정을 없애 버리라고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스토익 철학의 유명한 사람 가운데 하나인 에픽페터스란 사람은 이렇게 예를 들어서 가르쳤습니다. 가령 우리가 밥을 먹을 때 쓰는 그릇이나 컵이 하나 깨어진다고 하자.
「그러면 그까짓 것 깨어지면 뭘 하나 나는 거기에 관심이 없노라고 얘기하라」그러다가 가령 우리 집에서 기르는 개나 고양이가 죽거든「그까짓 것 죽어도 난 관심 안 해.」그러다가 네 다리가 부러지든지 팔이 상해도「아, 그까짓 것 뭘 하나 나 상관 안 해.」
마지막에는 심지어 자기의 가장 가까운 이가 불행하게 되어도 심지어 세상을 떠나도「난 상관없어, 난 무관심이야.」「이렇게 될 때까지 무관심 상태에 들어가라 그러면 자족의 경지에 들어간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인간을 목석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사실 그런 까닭으로 실패했습니다. 이들은 인간의 의지력으로 또 모든 욕망을 억제하고 또 감정을 제거하는 소극적 방법으로 자족의 마음을 성취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왜? 인간의 의지는 약합니다. 인간은 감정이 없는 목석이 아닙니다. 나무나 돌이 아닙니다. 인간은 욕망이 있는 존재요 인간은 감정이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바울이 어디서 자족의 비결을 배웠는가? 바울이 어떠한 환경 가운데서 자족의 비결을 배웠는가를 여러분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바울의 생활 환경이 어떠했는가를 잠시 들어보세요. 고린도 전서 四장 十一절 이하에 바울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하며 후욕(詬辱)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에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이런 환경에서도 그는 자족의 생활을 했습니다.
또 좀 들어보시겠습니까 ? 고린도 후서 十一장 24절 이하에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유대인에게 四十에 하나 감하는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笞杖)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에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런 환경 가운데 어떻게 자족의 생활을 바울이 할 수가 있었습니까? 그 비결이 어디 있었습니까 ?
그것은 여러분이 이미 들었습니다. 빌립보서 四장 十三절에 그는 기록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그는 그에게 능력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리스도는 어떤 환경에 그가 처해 있든지 간단없이 힘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갈라디아서 二장 二十절에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그이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셨습니다.
혹은 골로새서 一장 二十절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그리스도께서 비밀히 그의 마음속에 계셔서 언제나 영광스러운 소망을 공급한 것입니다.
피난 때에 제주도에 가서 구경하신 분이 많은 줄 생각합니다. 제가 제주도 한림이라는 데를 한 주일 가 있어 보았는데 그 곳에 가보면 물을 길러 어디로 가는고 하니 다른 데로 가지 않고 바다로 나갑니다.
물이 들어오면 바다뿐인데 밀물만 나가면 바다 속에 우물이 있고 그 우물 속에는 생수가 콸콸 나와서 곧 우물에 가득 찹니다. 그래서 바다 속에 들어가서 맑은 물을 길어다가 먹습니다. 바울이 사는 환경은 이와 같은 역경이지마는 그의 속에는 주님께서 계셔서 언제나 간단없이 생수가 솟아 나왔습니다.
여기에 그의 비결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늙고 감옥에 앉았고 몸에는 언제나 찌르는 가시가 있었고 장래의 전망은 네로의 칼날뿐이었으나 그는『주 예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 하노니 기뻐하라.』고 말했습니다. 그 안에 생수가 솟아났습니다.
며칠 전 저녁에 루우마니아 사람인 법부란트 목사께서 자기의 신앙 간증을 우리교회에서 했지요. 그가 공산당 감옥에 들어가서도, 그런 무서운 속에서도 무서워하지 않고 기쁨으로 지낸 생생한 간증을 우리가 다 들었습니다.
자족의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비천함에 처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가난하다고 불평하지 맙시다.
우리 주님은 일찍이 말씀하셨습니다.『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노라.』우리가 늘 가난하게 살려고 애쓸 것은 아니지마는 기억할 것은 불 의한 재물로 호화롭게 사는 것보다는 가난하게 사나 옳게 사는데 참된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비천할 때에 어떻게 처해야 되는 지를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풍부에 처할 줄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옛날 아합 왕 같은 이는 일 국의 왕으로서 모든 소유가 있었건마는 자기 집 옆의 나봇의 포도동산을 탐내서 자족을 모르고 남의 포도 동산을 탐내다가 큰 죄를 범하고 마지막에는 그 가족이 멸망을 당한 얘기를 우리가 성경에서 읽어봅니다.
「거 아무개는 만족을 몰라.」이란 말을 우리가 간혹 듣습니다. 만족을 알고 살아야 합니다. 한 가정의 남편도 만족을 좀 알고 살아야 합니다. 아내도 만족을 좀 알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디모데 전서 六장 六절에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족할 줄 아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敬虔)의 큰 이익이 온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히브리서 十三장 五절에는『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사실 불평과 원망은 내 심령상태가 고갈한 증거입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에 영접하세요. 그리스도와 동행하세요. 그리스도로 생명의 양식을 삼으시고 생명수로 삼으세요. 그리하면 어떠한 환경에서나 어떠한 십자가를 지거나 기쁘고 감사한 나날을 보낼 수 있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이것이 자족한 생활의 비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