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 : 2026년 11월 01일 (일요일)      로그인      회원가입
Home [요한복음]    설교 뒤에는 설교자가 있다 /죽음 기억하는 교회⋯ 생명·부활 체험 공간으로               신임 목사 114명 새출발 / 탈북어민 강제북송’ 항소심, 정의용·서훈 징역 1년 6개월               극동방송, 창사 70주년…국내외 인사 600여 명과 감사 나눠 /               스틸 대사·브런슨 한미연합군사령관, / 이민규 칼럼] 총회와 교회               예장고신총회장 신진수 목사 /내 노래는 사탄의 음악               젤렌스키 "북한군 포로 2명 한국 이송               “AI 시대, 인간은 누구인가”               제76회 총회 폐회…“복음으로 서로 위로하고 회복해야”               목사·장로 정년 연장, AI 활용 윤리 뜨거운 이슈 / 이민규 칼럼] 총회를 준비하며               교회건축 기행 새문안교회 / 자두, "나 목사 아내 될 수 없어" 오열하자.              

  홈     강대식     강문호     계강현     고신일     고재성     곽선희     곽창대     권오선     권오진     김경진     김광일     김기석     김도완     김명혁     김병삼     김삼환     김상복     김상수     김성광     김성수     김승규     김양인     김영훈     김용혁     김원효     김은호     김의식     김재곤     김정호     김종철     김진수     김진흥     김창규     김창진     김형익     김홍도     남수연     노창영     노환영     류영모     명설교(A)     명설교(B)     명설교(C)     문기태     박병은     박봉수     박신진     박요한     박일우     박진호     박한응     박형근     배영진     배의신     배진기     배혁     서명성     서진규     석기현     손재호     송기성     스데반황     신만교     신현식     안두익     안효관     양인국     양향모     염두철     오주철     오창우     옥한흠     우남식     원영대     유기성     유민용     유은호     유장춘     유평교회     이강웅     이건기     이국진     이규현     이기복     이대성     이동원     이동희     이백민     이삼규     이상호     이성우     이성희     이양덕     이영길     이영무     이영훈     이우수     이윤재     이은규     이익환     이일기     이재철.박영선     이재훈     이정원     이정익     이종철     이준원     이지원     이하준     이한배     이호준     임현수     장부완     전승문     정근두     정오영     정준모     조봉희     조상호     조성노     조영식     조용기     조학환     조향록     주준태     지성래     지용수     차용철     채수일     최동규     최인근     피영민     피종진     하용조     한경직     허창수     홍문수     홍순관     홍정길.임영수     홍종일     외국목사님     .     괄사(왕)     기도문     (1)새벽     새벽.금언     인물설교     상식/주일     장례,추도.심방     가정설교     영문설교     목회자료/이단     교회규약     예화     성구자료     강해설교     절기설교     창립,전도,헌신,세례.주례사     어린이.중고등부     << 창세기>>     출     레     민     신     수     삿     룻     삼상     삼하     왕상     왕하     대상     대하     스     느     에     욥     시     잠     전도     아     사     렘     애     겔     단     호     욜     암     옵     욘     미     나     합     습     학     슥     말     <<마태복음>>     막     눅     요     행     롬     고전     고후     갈     엡     빌     골     살전     살후     딤전     딤후     딛     몬     히     약     벧전     벧후     요일     요이     요삼     유     <<요한계시록>>     말씀별설교     제목별설교     A)행사,심방     B)행사심방     예수님행적설교     성구단어찾기     이야기성경     설교(틀)구성하기     자주사용하는본문     구약사건     신약사건     구약삽화     신약삽화  

:: 로그인 ::
 ID   
 PASS   
로그인  회원가입
Home
  설교작성법(여기누르면 다나옴)
  설교잘하는 방법(여기누르면 다나옴)
  김기홍 설교학
  동영상.간증자료(여기누르면 다나옴)
  교계 뉴스 ------- (전체보기)
  생활전도(여기누르면 다나옴)
  전도편지
  참고 설교(성구)
  장례식 설교(내부에 많이있음)
  웃음치유와 영업
  기타

설교내용검색

성경 찾기

네이버.다음.구글


검색



Daum


(방송)설교 교회

해외교회사이트

예배와 찬양


목회자 컬럼
  • 교회와신앙칼럼
  • 뉴스미션칼럼
  • 뉴스엔조이칼럼
  • 당당칼럼
  • 기독공보칼럼
  • 기독목회칼럼
  • 크리스천칼럼
  • 타임즈칼럼
  • 김명혁목사
  • 김형준목사
  • 양인순목사
  • 이동원목사
  • 조현삼목사
  • 밤중소리

  • Home > 요한복음(전체리스트)

    요20:19-29/ 도마의 의심과 신앙 / 한경직 목사
    2014-08-23 00:44:30   read : 1363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二五․二十八)

    오늘 아침은 이 도마의 의심과 신앙에 대해서 생각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에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도마의 의심을 자세히 살펴보십시다. 먼저 도마의 태도를 자세히 보십시다.

    열 제자들의 증거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눈으로 보기만 해서도 믿을 수 없노라고 말했습니다. 꼭 내 손으로 만져 보고야 믿겠다고, 다시 말하면 체험해 보고야 예수 님의 부활을 믿겠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것은 현대인의 사고 방식과 매우 근사한 바가 있습니다. 특별히 과학자의 태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도마의 의심은 현대인을 대표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이런 태도에서 우리는 도마의 인품을 짐작 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어떠한 사람입니까?

    어떤 이는 이성보다도 감정이 풍부한 이가 있습니다. 이런 이는 무슨 말을 듣고 감동만 받으면 깊이 생각하지 아니 하고 곧 따라갑니다. 이런 이들은 비교적 신앙에 쉽게 들어옵니다. 그러나 이런 이들은 잘못되면 미신과 사교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도마는 이런 사람은 아닙니다. 감정보다도 이성의 인물입니다. 무엇에나 이성으로 생각하여 보고 믿는 분입니다. 이런 분은 얼른 신앙에 들어오기가 어렵지마는 한번 들어오면 든든히 섭니다. 이런 의미에서 도마는 현대 지성인의 대표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부활이란 사실이 이성으로 얼른 이해하기가 곤란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의 부활을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도마의 중심을 알아야 합니다. 도마는 예수를 사랑하던 제자였습니다.

    요한 복음 十一장 十六절을 보면『우리도 같이 가서 죽자.』이런 말을 도마가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요단강 저편에 계실 때에 베다니 마을 마리아로부터 자기 오빠의 병이 매우 중하니 빨리 와서 병을 고쳐 달라는 말을 듣고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차비 합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은 매우 위험한 사지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직감한 도마는 그렇게 위험한 곳이니 우리도 같이 가서 죽자고 외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도마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러나 부활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초자연적 사실이므로 그는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상습적인 회의주의자의 의심이 아니고 믿기를 원하나 의심할 수밖에 없는 말하자면 정직한 의심이었습니다. 테니슨은 일찍이 말하기를『정직한 의심에 믿음이 더 많다』고 했습니다. 도마의 의심은 이러한 의심이었습니다.

    이제는 도마의 신앙을 생각하십시다. 이렇게 의심하던 도마가 어떻게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었습니까? 여러분 이미 읽은 말씀을 다시 한번 자세히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여기 보니『여드레를 지나서...』란 말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곧 다음 주일 저녁입니다.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모였는데 도마 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 전 주일은 도마가 없었는데 이번에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오셔서, 가운데 서서 도마에게 특별히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내밀어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넣어서 내 옆구리를 만져보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면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을 때 도마는 꿇어앉아서『내 주시요. 내 하나님이 십니다.』이렇게 자기의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이런 도마의 신앙 고백은 지성인일지라도 과학적 태도를 가진 분이라고 하더라도 참된 신앙에 들어올 수 있다고 하는 증거가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몇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첫째는 제자들이 모인 곳에, 다 같이 모인 곳에 도마도 와서 그 의심을 풀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제자들이 모인 곳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신 사실입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두 세 사람이 있는 곳에 주님께서 있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상황 아래서 도마가 주님을 대면하게 될 때에 모든 의심은 자연히 해소가 된 것입니다. 이 사실들은 우리에게 항구적인 교훈을 줍니다.

    첫째는 누구든지 신앙문제에 있어서 의심이 있으면 다른데 먼저 가지 말고 성도가 모이는 교회에 먼저 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가는 것보다도, 무슨 산에 가는 것보다도, 무슨 책을 보는 것보다도, 성도가 모이는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둘째는 참 신앙을 가지는 성도가 모이는 교회는 지금도 주님께서 항상 같이 임재(臨在)하시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약속을 지키십니다. 지금도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셋째는 이와 같이 성도의 모임 가운데서 우리의 심령이 부활하신 주님을 직면하게 될 때에는 무슨 의심이든지 자연히 해소가 됩니다. 사실 정직한 의심이 있는 이에게는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특별한 증거를 보여 주십니다. 혹은 찬송을 통해서 혹은 기도를 통해서, 성경을 통해서 혹은 설교를 통해서 성령의 체험과 중생을 통해서 의심을 해소시켜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편 七十三편을 기억하시는 분이 몇 분이나 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거기 보는 七十三편을 기록한 시인이 큰 의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을 볼 때 악한 사람이 더 잘 살고 의인이 핍박을 받는 광경을 보고 이 시인은 하나님의 공의와 섭리를 크게 의심해서 고민했습니다.

    시편을 계속 읽어보면 그러다가 이 시인은 성소에 들어가서 예배할 때에 모든 것을 깨닫고 의심이 소멸되었습니다. 성소에서 예배할 때에 의심을 풀은 것입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이 다 믿음이 있기에 이 자리에 나온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운데 혹 의심을 품고 나오신 이가 계십니까? 그러면 이 성소 안에서 의심을 풀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무슨 의심이 있으면 주님 앞에 다 내어놓으시고 주님 앞에서 여러분의 의심을 한번 잘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가운데 정직한 의심을 가진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의심 가운데는 그렇지 못한 의심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종류의 의심이 있습니다. 가령 유행성 의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슨 말인고 하니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二十세기는 의심의 세기라, 과거의 종교나 도덕이나 사상이나 전통은 모두 한 번은 의심해 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세상에 살게되니 남이 의심하니 거저 나도 따라가는 유행성 의심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과 같은고 하니 유행성 홍콩감기에 걸린 사람과 마찬가지요 다른 사람이 감기 들린다고 나도 감기 들릴 필요야 무엇이겠습니까? 만일 그런 의심에 걸린 사람이 있으면 어서 해소해 버려야 하겠지요.

    또 다른 말이 없어서 이런 말을 쓰는데 의심 가운데는 허영적 의심이 없지 않습니다. 요새 어떤 청년들은 지성이라고 하는 말을 혹 오해하는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지성인은 의심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런즉 나도 지성이니까 아무래도 의심을 좀 가져야지! 그것이 지성인의 표니까, 하고 오해하는 이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이올시다. 참 지성인은 처음에 의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성을 통해서 보다도 깊은 신앙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파스칼이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뉴우톤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역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또 어떤 이는 상습적으로 항상 의심을 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따금 신문을 읽는 줄 압니다. 어떤 분은 의처증이 있답니다. 자기 아내를 의심합니다.

    어떤 아내는 의부증(疑夫症)이 있어서 자기 남편을 자주 의심합니다. 그것은 곤란합니다. 어떤 사람은 문을 한번 걸고도 다시 만져 봅니다. 바로 걸렸는지 의심이 나서요. 어떤 이는 一00원어치 물건을 사고 영수증을 달라고 합니다. 또 달라고 할까 봐서, 의심이 나서 말입니다.

    이것은 병적입니다. 어떤 이는 성경을 항상 읽으면서도 의심합니다. 이건 병적입니다. 이런 이는 신경과 의사에게 보이는 것도 좋고 이런 이는 주님께 솔직히 죄를 사함을 받고 고쳐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의심은 그것이 의심이기는 하지만 지적 원인이 아니고 도덕적 원인에 기인하는 의심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마음속에 저지른 숨은 죄가 있어도 성경의 진리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성경이 다 옳으면 양심이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그 때 예수님의 말씀이『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이는 마음을 청결케 해야 합니다.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너희 마음을 깨끗케 하라』고 야고보는 외쳤습니다. 실상은 숨은 죄가 있어서 교회에 나오기는 나오지마는 여러 가지 의심을 가지는 이가 있습니다. 죄를 회개하여야 이런 의심은 자연히 해소됩니다.

    물론 이런 종류의 의심 이외에 정직한 의심이 많이 있습니다. 자 이런 정직한 의심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할 것입니까? 간단하게 세 가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첫째는 우리 인간의 제한성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의 모든 것이 다 제한이 됐는데 우리 이성도 제한이 됐습니다. 어디까지만 생각할 수 있고 그 이상은 생각 못합니다.

    무궁대란 말을 우리가 하지마는 무궁대의 관념은 모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 우주에는 큰 신비가 있어서 이 모든 신비를 좁은 이 성으로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다 깨달아 알 수 없다고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 로마서 十一장 三十三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 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하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주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음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영원히 있으리로다.

    아멘.』 우리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다 깨달아 알 수가 있습니까? 그렇다고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링컨의 유명한 말 가운데『이성으로 깨달아 알 수 있는 건, 알 수 있으니까 그대로 행하고, 깨달아 알 수 없는 건 믿음으로 받아서 그대로 행하면 살 때도 바로 살고 죽을 때도 바로 죽을 수 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옳은 태도입니다. 신비에 대한 바른 태도입니다.

    둘째는 여러 가지 의심이 일어날 때에, 그러면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먼저 찾아서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필요합니다. 전에 미국에 호레이스 굳스내리란 유명한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 분이 대학생 시절에는 무신론자로 자처했습니다.『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믿지도 못하겠어.』

    이런 의심 가운데서 그 이는 무엇을 생각했느냐 하면『내가 무엇을 믿을 수 있나?』가만 생각해 보니 하나님께서 이 우주에 계신 것은 분명히 모르겠지마는 이 세상에 의와 불의가 있는 것은 사실이거든요. 그러면 나는 꼭 의를 행하겠다. 어디서나 꼭 의만을 행하겠다고 결심하고 의의 길을 따라갔다고 합니다.

    결국엔 하나님도 믿게 되고 목사가 됐습니다. 여러 가지 의심이 날 때, 밑바닥에 들어가서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서 거기 진실히 믿고 그대로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데카르트란 불란서의 유명한 철학자가 있는데 이 분의 인식론을 보면 그가 안다는 모든 것을 의심했습니다.

    우리는 오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을 아는데 이 오관이란 것을 확실히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기 속에서 생각하는 것만은 의심할 수 없단 말입니다. 그리고 생각하는 자신이 있다는 것도 의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말이 있지 않아요.『나는 존재한다. 내가 생각하기 때문이다.』거기서부터 시작해서 자기 자신을 깨닫고 우주에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해 나가는 것은 마치 캄캄한 밤에 작은 등불을 가지고 길을 걸어가는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등불이 적으니 내 주위에 대여섯 자밖엔 안 비추입니다. 그러나 그 대여섯 자 만 되는 그 등불 안에서 길을 바로 가세요. 그러면 그 등불이 다시 다섯 자를 비추어 줍니다. 그러면 우리는 점점 옳은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중요합니다. 내가 확실히 믿는 것을 그대로 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셋째로 중요한 것은 믿되 일하면서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도도 하고 봉사도 하고 여러 가지로 심방도 하면서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 복음을 읽어보면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외칠 때에 예수님께서 오시니 세례 요한이 무어라고 간증했습니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했습니다. 예수 님께서 메시야가 되는 것을 확실히 믿고 간증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압니까? 세례 요한이 잡혀 옥에 갇혔습니다. 아무 것도 안하고 가만히 갇혀 있게 됐습니다. 여러 가지 궁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에 예수 님이 과연 메시야인가 의심까지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제자를 보내서 예수 님에게 묻지 않았습니까?『장차 오시겠다고 한 이가 당신입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릴 것입니까?』의심이 생겼습니다. 일 안하고 가만히 앉은 가운데서 의심이 생겼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은 말했습니다.

    『의심은 영적 소화불량에서 오는 영적 상태다.』여러분 가운데는 그런 의심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까? 사실 분주한 사람은 그런 의심을 가질 겨를이 없습니다. 사실 저도 학생 시절에는 의심이 상당히 많더니 실지로 교회를 봉사하게 되니 의심할 겨를이 없습니다. 일하면서 믿어야 의심이 해소됩니다. 여러분께서 설교를 듣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들을뿐더러 그 대로 나가서 행해야 합니다. 그런 이는 의심이 없어요.

    도마에 대해서 우스운 이야기를 다 잘 아시지요. 이건 이야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도마가 그 후에 의심이 생겼습니다. 다시 의심이 생겼단 말입니다. 의심을 풀어야 되겠는데 어떻게 풀까? 아 믿음이 많은 베드로한테 가 보자. 베드로한테 가보니 전도하는데 분주해서 만나 이야기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바울한테 가보니 더 분주하게 전도하고 있습니다. 도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돌아오다 무슨 생각이 났어요. 베드로도 잘 믿고 바울도 잘 믿어서 열심히 전도하는데 왜 나는 의심하며 돌아다닐까? 나도 가서 일하여야 되겠다. 그래서 저 인도로 갔습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인도로 가서 전도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인도에는 지금까지 말토마 교회라고 성 도마의 교회가 있습니다. 그의 무덤이 인도 마드라 시에 있습니다. 일하는 가운데 의심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큰 신앙가도 일시적으로는 의심할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 같은 이도 일시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한 적이 있습니다. 루터 같은 이도 일시적으로 낙심하고 의심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 이런 이들은 모두 의심을 통해서 보다 더 큰 신앙에 들어갔습니다. 의심이 나는 것은 도마와 같이 더 큰 신앙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그러나 의심을 오래 품을 것은 아닙니다. 의심은 기계에 모래와 같습니다.

    눈에 티와 같습니다. 밭에 가라지 와 같습니다. 의심하는 환자는 병이 잘 안 낫습니다. 부부가 서로 의심하면 화평하지 못합니다. 의심하는 군대는 승리를 거두지 못합니다. 의심하는 기도는 응답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적게 믿는 자여 왜 의심하느냐고 책망했습니다.

    예수 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한 것을 믿고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야고보 장로는『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했습니다.

    기도할 때 의심하지 맙시다. 사도신경을 의심하지 맙시다. 성경의 교훈을 의심하지 맙시다.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때가 오는 것을 의심하지 맙시다. 세상 끝날 까지 내가 항상 너희와 같이 있으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맙시다. 예수는 나의 주요, 나의 하나님이 되는 것을 의심하지 맙시다.

    기독교 신앙은 어제나 오늘만의 신앙이 아닙니다. 영원한 진리에 대한 신앙입니다.









    독자 설교

    설교작성하기 (3년 후에는 자동삭제됩니다.)
    이 름 E-mail
    제 목



    프린트하기 기사메일보내기 독자설교


    이전으로
    요한복음
     | Home | 사이트맵 | 설교검색 | 설교전체보기 | 설교쓰기 |___ | 
    Copyright by 본 설교신문 자료를 다른사이트로 무단복사 절대금합니다(추적장치가동)/ 김효자 /사업자번호831-29-0156/서울시강남구도곡로1길14 /통판:서울강남01470/문자로 질문바람010-4394-4414 /E-mail:v919@naver.com   Contact Webma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