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1-14/ 성탄의 깊은 뜻 / 한경직 목사 2014-08-23 00:28:34 read : 1388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一․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一․十四)
이 두 구절은 성경에 가장 유명한 구절 가운데 속하는 구절들입니다. 그 뜻이 깊습니다. 무궁무진합니다. 사실 제한된 인간의 이성으로 그 뜻을 다 캐어낼 수 없는 구절들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대로 이 뜻을 잠깐 생각하여 보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들에게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두 구절가운데 말씀이라고 하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내용을 보아서 이 말씀은 곧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를 왜 말씀이라고 사도 요한 이 지적하였는가?
그것은 그때에 유대교적 배경도 없었고, 헬라 철학의 사상적 배경도 없어서 그 시대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알리는데 말씀이라고 하는 로고스(Logos)가 제일 적절해서 이런 말을 쓴 줄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는 이런 배경을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는 절 압니다. 가장 간단하게 생각해 보면 왜 그리스도를 말씀이라고 하셨나? 두 가지 이유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첫째는 말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제가 여기 나와 서서 입을 봉하고 그저 서 있다고 하면 여러분께서 제 속에 있는 생각을 아실 도리가 없습니다. 내가 말을 하니까 여러분께서 내 생각을 알 수 있습니다. 말은 생각의 표현입니다.
둘째로 조금 깊이 생각하면 실상 말이 곧 생각입니다. 말은 마음속에서 조용히 하면 그것이 생각입니다. 생각을 남이 알아듣게 하면 그것이 말입니다.
왜 그리스도를 말씀이라고 하셨는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가 우리 사람의 생각과 말의 관계와 비슷합니다. 그리스도는 우주의 생각인 하나님을 우리에게 나타내십니다. 여실히 나타내는 것입니다. 말은 곧 생각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실상은 하나님과 하나인 까닭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하나님을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가 우리 인간은 일찍부터 하나님을 찾는 동물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종교성이라고 합니다. 우리 인간에게 이 종교성이 있기에 짐승과 다릅니다. 영원히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구약성서 가운데 욥기라고 하는 책은 특별히 인간 심령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는 인간의 생생한 체험의 기록입니다.
욥기 二十三장에 보면 욥이 부르짖기를『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인간이 하나님을 찾아 애쓰는 그 깊은 탄식이 여기에 있습니다.
옛날 애굽 어떤 신전 정문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 있었다고 합니다.『나는 현재에도 있고 과거에도 있었고 장래에도 있으리로다. 그러나 아무 육체나 내 얼굴의 수건을 벗겨 본 이는 없느니라.』하나님의 얼굴에 가리워진 수건을 인간으로서 벗겨본 이는 없습니다.
사도행전 十七장에 보면 헬라 사람들이 많은 우상을 섬기며 많은 신을 섬기는 가운데 알지 못하는 신의 단을 쌓은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헬라 모든 철학자들과 모든 종교가들의 절망적인 고백입니다. 그 많은 철학과 종교 사상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우주 안에 계시고 우주를 초월해 계시지마는, 역시 하나님은 이 우주 안에 감추어졌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한국 청년으로서 미국에 가서「순교자」라고 하는 책을 써서 인기를 끌었다고 하는 신문기사를 여러분이 다 읽으셨겠고, 또「순교자」라고 하는 책을 읽어 본 이도 많을 줄 압니다.
그 책이 인기를 끈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아마 六․二五를 배경으로 하고 쓴 까닭이요, 또 한 가지는 그 가운데 인간의 심령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는 이 욥기와 비슷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석한 것은 결국 이 책에서 하나님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물질문명에 중독 된 현대 인간들의 소위 현대 실존주의의 절망적인 고백을 이 책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결국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마치 내 생각을 내가 말하기 전에 여러분이 찾아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생각은 말하는 이가 있어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었습니다.
그리해서 요한 복음 一장 十八절에 보면『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獨生) 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 一장 一절 이하에는『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나타내며 보여주시는 까닭으로 그리스도를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우리에게 나타낼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가 누구기에 능히 하나님을 우리에게 나타내셨는가? 거기 대한 대답이 요한 복음 一장 一절에『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태초부저 계셨습니다. 여기「태초」라고 하는 말은 창세기 一장 一절에『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하는 그 태초보다 훨씬 초월하는 태초입니다. 창세기 一잘 一절의 태초는 오래 전은 오래 전이지마는 역사상의 한 시점에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했습니다. 여기에 태초라고 하는 말은 그것을 초원해서 그리스도는 영원부터 계시다고 하는 뜻입니다. 우리 신학 상으로 그리스도의 선재(先在)의 교리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보니『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하였습니다. 신학 상으로 보면 한 하나님이시지마는 그 안에 다른 품격으로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곧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성부와 성자의 사랑의 관계로써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같이 계셨습니다.
셋째로 하는 말씀이『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삼위일체를 가르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곧 하나님은 하나, 성부 성자 성신의 삼위가 있으나 실상은 한 몸 일체를 말합니다.
왜 그리스도만이 이 하나님을 우리 인간에게 나타낼 수 있었겠는가? 그리스도는 이렇게 영원 전부터 계신 분이요, 곧 하나님과 한 분이신 까닭입니다. 물론 이 진리는 인간의 제한된 이성을 초월하는 진리로서 우리가 다 해득하기는 어려운 진리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는가? 하나님을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내셨는가?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셨는가? 一장 十四절이 거기 대한 대답을 우리에게 줍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이렇게 선언하였습니다. 이 영원 전부터 계시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진리야말로 천사도 놀랄 만한 진리입니다. 사실입니다.
영원부터 계신 이 말씀, 하나님과 함께 계신 이 말씀, 아니 곧 하나님이신 이 말씀이 육신이 되셨습니다. 육신을 입었습니다. 육신 곧 물질,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갈 이 육신이 되셨습니다. 시간과 공간에 제약되는 이 육신, 약하고 썩을 인간이 되셨습니다. 실로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사실입니다.
이 일은 너무 놀라와서 사실 초대교회에서도 이 진리를 그대로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런 이들은 소위「가현론(假現論)」을 주장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입은 육신은 실상 우리 인간의 물질인 육신과는 다르다. 곁 모양만 물질과 같았다』고 이렇게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 은 요한 一서에서 그런 사상이야말로 이단(異端)이라고 배격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사실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었다고, 화육(化肉)이 되셨다고, 화신이 되셨다고, 수육을 하셨다고, 이렇게 분명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 사실이야말로 신비의 신비요, 오묘(奧妙)의 오묘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기독교사상의 중심이 되는 큰 신비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아멘 하고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 되셔서, 또 참 사람이 되셔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오셔서는 여기 기록하기를『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말씀하였습니다. 여기 거하신다고 하는 그 뜻은 본래 글자의 뜻이 장막을 친다고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출애굽기를 읽은 분은 다 아십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올 때에 천막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많은 천막 가운데는 큰 천막이 하나 있었는데 이것은 성막(聖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성막 위에는 낮에는 구름이 항상 임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밤에는 구름이 빛으로 변해서 불기둥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성막 위에 임재(臨在)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의미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올 때에 이렇게 하나님께서 장막 가운데 친히 임재 하고 계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주시고 보호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옛날의 한 그림자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될 때에 하나님 자신이 육신의 장막을 입으시고 이 인간세상, 광야 같은 세상에 친히 오셨습니다. 같이 주무시고, 같이 일어나시고, 같이 잡수시고, 마시면서, 같이 살았습니다.
이러시면서 병자를 고쳐주시고, 슬픈 자를 위로해 주시고, 죄 있는 자를 사하여 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시고, 마지막에는 만민의 죄를 대속(代贖) 해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또한 다시 사신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면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어떠한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까?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마는 가장 간단하게 사도 요한의 기록을 보면, 세 가지 면을 특별히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첫째는『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고 보여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성품, 그리스도의 말씀, 그리스도의 생활, 그리스도의 행하신 모든 일은 오직 사랑입니다. 그는 원수까지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은 사랑이신 것을 압니다.
둘째는『하나님은 빛이시라』고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에게는 털끝만큼도 어두운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우주와 인간의 깊은 참된 이치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윤리와 도덕, 인간의 갈 옳은 길을 우리에게 비추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빛이신 것을 우리는 보고 깨닫습니다.
셋째는『하나님은 생명』인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에게는 죽음이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 가지 일을 하셨지마는 장례식 거행했다고 하는 이야기는 하나도 없습니다. 언제든지 죽은 자를 만나면 살려 주셨습니다.
또 자기 자신이 부활했습니다. 하나님께는 죽음이 없으시다 고,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 요,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하나님 안에서는 다 산다고, 하나님은 생명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면 성탄의 깊은 뜻과 그 정신은 무엇입니까? 가장 간략하게 세 가지로 기억할 수 있는 줄 압니다.
첫째는 성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 죄악 세상에 오신 사실을 우리가 기억할 것입니다. 전에도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 전에는 하나님께서 종들을 보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엘리야도 하나님의 종입니다. 이사야도 하나님의 종입니다. 여러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집의 종들을 인간을 위해서 보내서 진리를 전파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될 때에, 하나님의「삼위일체」의 한 분이신 그 아들이 친히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죄와 고통과 사망에 허덕이는 인류를 구하시려고 친히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세상을 방문하셨습니다. 성탄의 정신은 친히 오시는 것입니다.
병자에게 약을 보내서 도와주는 것도 좋지마는 그 약을 친히 가지고 가서 치료해 주는 것이 성탄의 정신입니다. 슬픈 자에게 대신 사람을 보내서 위로하는 것도 좋지마는 내가 친해 가서 위로하는 것이 성탄의 정신입니다.
가난한 형제에게 금품을 보내서 도와주는 것도 좋지마는 내가 친히 가서 도와주는 것이 성탄의 정신입니다. 돈을 내서 전도 인을 세워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도 좋지마는 내가 친히 가서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성탄의 정신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셨습니다. 화신, 화육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다만 하나님은 사람이라고만 가르쳐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친히 사랑의 화신이 되셔서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말씀, 그의 생활, 그의 행사는 다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를 보고 사랑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생명을 설명만 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 자신이 생명의 화신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직접 보여주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친히 말씀하시기를『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는 진리에 대해서 단순히 설명만 하지 않았습니다. 친히 말씀하시기를『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말씀했습니다. 가는 진리의 화신입니다.
성탄의 정신은 신령한 의미에서 유지되는 것입니다. 화신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에 대한 사상이 좋지마는 사상만은 부족합니다.
사랑이 내 몸에서 육을 입어서 실천이 되어야 합니다. 왜 일생동안을 아프리카 정글 속에 가서 흑인들의 헌데를 씻어주며 그들의 병을 치료해주는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를 온 세상이 존경합니까? 그의 생활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다시 육을 입었습니다.
정의도 육을 입어야 합니다. 왜 오늘날 미국의 흑인으로서 민권운동의 지도자인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온 세계가 존경하고 그에게 노벨 평화상을 주었습니까? 그의 생활에서 정의가 육을 입었습니다. 정의감만은 부족합니다. 정의감이 육을 입어서 실현이 되어야 합니다. 왜 三․一운동을 일으킨 三十三인 우리 민족 대표를 우리가 존경합니까?
그들의 생활 가운데는 자유와 독립의 정신이 육을 입었습니다. 관념만은 부족합니다. 사상만은 부족합니다. 고상한 관념과 고상한 사상이 육을 입어서 이 사회에서 오늘날 실천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탄의 정신입니다. 관념적 신앙만은 부족합니다. 육을 입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는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친히 육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시도 마구간에 먼저 오셨습니다. 이것은 절대로 우연이 아닌 줄 압니다. 온 세상이 다 마구간이라고 할 수도 있지마는 이 세상 가운데도 가장 천한 데 먼저 왔습니다. 이것이 성탄의 정신입니다.
불쌍한 사람 가운데도 가장 불상한 사람을 먼저, 가난한 사람 가운데도 가장 가난한 사람을 먼저, 불쌍한 사람 가운데도 가장 불쌍한 가장 가난한 사람을 먼저, 병중에 있는 이 가운데도 가장 슬픔이 큰 사람을 먼저, 죄인 가운데도 죄가 큰 사람을 먼저 방문하는 것이 성탄의 정신입니다.
一九六四년의 성탄을 우리가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정신으로 이 성탄을 맞이하려고 합니까? 우리가 성탄의 깊은 뜻을 깨닫습니까? 하나님이 친히 오신 이 사실, 하나님이 친히 인간을 방문하신 이 사실, 육을 입고 오신 이 사실, 마구간을 먼저 방문한 이 사실을 우리가 기억합니까?
우리 개인으로, 우리 가정으로, 우리 각 구역에서, 우리 교회 전체가 금년은 이 성탄의 정신으로 금년의 성탄을 맞이해야 될 것입니다. 그래야 크리스마스에 오신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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