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 20․7)
첫째 계명은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있게 말 찌니라. 이것은 일신론(一神論)에 대한 계명이올시다. 제二계명은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계명이올시다. 제三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사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계명이올시다. 우리 믿는 사람이 하나님께 대해서 가질 자세는 경외의 자세인 것입니다.
현대인은 이름을 지을 때에 별로 그 뜻을 생각지 않는 것 같습니다. 흔히 항렬을 따라서 이름을 짓곤 합니다. 그러나 옛날 이스라엘인들은 달랐습니다. 이름마다 반드시 뜻이 있었습니다. 가령, 아브라함 하면「큰 이버지」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삭은「웃는다」는 뜻입니다.
야곱을 이스라엘로 고친 것은 그 뜻이「승리자」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시몬의 이름을 고쳐 베드로라고 한 것은「반석」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도 뜻이 있습니다.『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 백성을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 기슭에서 자기를 여호와로 나타내실 때에 뜻이 있었습니다. 그 뜻은 「영원 자존자(自存者)」였습니다. 옛날에 있어서 이름은 본인을 대표할 뿐더러 그의 성품과 생활 전부를 이름으로 표시했습니다.
요리문답 제五十四문에『셋째 계명의 명하는 것이 무엇이뇨?』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에 대한 대답은『제 삼 계명의 명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과 칭호와 속성과 규례(規例)와 말씀과 행사를 거룩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이것이 바로 간략한 셋째 계명의 뜻입니다.
이 계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가 없습니다. 산상보훈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실 때에『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고』하였습니다. 누구의 이름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이올시다. 우리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제일 먼저 할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하여 달라고 할 것입니다.
성경은 교훈 합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자기 자신을 나타내실 때에 처음으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곳에 경외가 있어야 합니다.
여호수아의 경험 가운데도 그가 여리고성 가까이 했을 때에 길가에서 여호와의 군대장관을 만났다는데 그 때에 하시는 말씀이『네가 선 땅은 거룩한 땅이니 네발의 신을 벗어라.』고 하였습니다.
언제나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때에는 발에서 신을 벗어야 합니다. 공경하는 마음이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잠언에 보면『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하였습니다.
시편 四장 四절에는『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 찌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 찌어다.』는 교훈이 있습니다.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계 모든 거민(居民)은 그를 경외할 찌어다.』(시 三十五․八)『하나님은 거룩한 자의 회중에서 심히 엄위(嚴威)하시오며 둘러있는 모든 지위에 더욱 두려워할 자심이라.』(시 八十九․七)
우리가 제 삼 계명을 바로 지키려고 하면 명심할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이름을 항상 존경해서 경하게 사용하지 말 것입니다.
거룩하신 이름을 남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한국에는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풍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를 존경하는 뜻에서인 것입니다. 그러하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이름을 얼마나 존경할 것이겠습니까?
옛날 이스라엘인들은 성경을 읽을 때에「여호와」라는 이름이 나오면 감히 읽을 수가 없어서 항상「아도나이」라고 읽었습니다. 다만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서 온 백성을 위해 기도할 때에만「여호와」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우리가 현재도 이렇게 할 것은 아니나 그 정신만은 배워야 할 것입니다.
서양인들 중에 이야기하다가 성나는 일이 있으면 공연히 아무 뜻 없이 하나님의 이름이나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계명을 범하는 것입니다. 한국에 그런 풍속이 없는 것은 다행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해서는 안 됩니다. 헛되이 불러서는 안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거룩한 이름을 악용해서는 안 됩니다. 옛 사람들이 맹세할 때에는 흔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했습니다. 자기의 진실을 표현하는데 하나님의 이름을 빌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악용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너무 흔해서 예수 님께서는 맹세치 말라고 했습니다. 하늘로도 맹세치 말고 땅으로도 말고 네 머리로도 맹세치 말라고 하였습니다. 『예면 예 아니면 아니 요라고 하라.』하였습니다. 맹세를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신약시대에 와서도 하나님 앞에서 엄숙히 약속하는 일은 있습니다.
가령 목사나 장로 집사가 안수 받을 때 하나님 앞에서 엄숙히 약속합니다. 결혼식 할 때에 신랑 신부가 하나님 앞에서 엄숙히 약속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약속하고도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는 것입니다. 약속은 꼭 지켜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이 계명은 하나님의 이름 뿐 아니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경외의 자세로 대하라는 교훈입니다.
가령 예배하는 이 집을 성전이라 할 때 그것은 이 집이 하나님께 속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아래 있는 집입니다.
전도서 五장에『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 찌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愚昧者)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라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니라.』고 했고 하박국 二장 二十절에는『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 찌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전에 들어설 때에 우리의 발을 삼가 합니까? 예배당에 늦게 들어오면서도 거리에서처럼 발을 쾅쾅하면서 걷는 이는 없습니까? 예배당에서 말을 삼가 합니까? 예배당에서 거리에 앉은 것처럼 떠드는 이는 없습니까?
우리는 가정에서 아이들을 지도할 때에도 경외하는 태도를 갖도록 지도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 구내와 성전 안은 항상 깨끗하고 정돈되어야 합니다. 함부로 종이조각을 버리지 맙시다. 하물며 주보를 내어 던져서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에게 속한 모든 것에 우리는 경외의 자세를 가지고 대할 것입니다.
성전은 거룩한 집입니다. 찬송도 경외의 태도로 불러야 합니다. 찬송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이따금 듣는 대로는 어떤 교회에서 분쟁이 일어나면 한편에서는 설교하고 다름 한편에서는 찬송을 벼락 같이 불러서 설교를 방해한다고 합니다. 찬송을 싸우는 도구로 사용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하는 입술은 악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학생 시절에 대동강 둑에 나가보니 젊은 청년들이 만취하여 부르는 노래가 찬송인 것을 들었습니다. 타락한 청년들의 소행임이 분명했습니다. 기도도 경외의 태도로 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 자세에 있어서는 물론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혹은 서서 혹은 앉아서도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언제나 경외의 태도가 따라야 할 것입니다. 어떤 이는 기지개를 하면서 기도하는 이도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언제든지 진실이 없이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하는 것은 주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는 것입니다. 기도에 경외가 따라야 합니다.
말라기 一장 十三절에 보면『만 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煩弊)스러운고 하며 코웃음을 하고 토색(討索)한 물건과 저는 것과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 같이 헌물(獻物)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안 받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옛 사람들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 때에는 소나 양을 드리되 흠 없고 깨끗한 놈을 골라서 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말라기 시대 사람들은 타락해서 병든 짐승 등을 드렸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받으실 리 만무했습니다.
우리는 헌금할 때에 그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데 얼마마한 경외를 갖고 드립니까. 미안한 말씀이지만 얼마 전 어떤 수금 집사에게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그저 헌금 주머니 열어 보면 지금도 십 원 짜리 가 가득합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세요. 헌금은 내 생활의 형편에 따라 정성을 다 할 뿐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그런데 이 십 원 짜리 가운데 보면 노닥노닥 다 해어지고 꼬기 꼬기 꾸겨진 것이 너무 많아서 이것을 하나하나 펴서 넣느라고 시간이 많이 걸려 큰 걱정』이라는 것입니다.
헌금은 누구에게 드립니까? 만 왕의 왕 되신 하나님의 손에 가져다 바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모든 축복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여 드리는 것이 헌금이올시다. 우리가 어떠한 태도로 얼마마한 정성으로 헌금을 드립니까? 헌금을 갖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대부분이 찬송과 성경을 가지고 오신 줄 압니다. 이 성경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올시다. 하나님의 이름이 이 성경 속에 여러 번 기록되었습니다. 이 책을 소중히 다룰 줄 알아야 합니다.
약 二년 전에 편지를 받았는데 어떤 청년이 분개해서 제게 보낸 것입니다. 편지가 아주 두툼해요. 그래서 열어 보니까 그 내용은 이러했습니다.『목사님, 동봉해 보내는 이것 좀 보세요. 제가 어떤 친구와 함께 산으로 놀러 가기 위해서 과자 한 봉지를 사 갖고 가서 뜯어먹다가 그 친구가 과자 봉지를 자세히 보더니 이거 성경책이로구나. 어떤 사람이 성경책 팔아서 과자 봉지로 만들었군.』
하고 말한 때 저의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듯 했습니다. 성경이나 신문이나 잡지나 그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인쇄된 것이므로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경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제가 한 가지 더 분명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을 그리스도 인이라고 말합니다.「크리스천」그리스도 인이란 무슨 말씀입니까?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칭호올시다. 예수님의 이름이 우리 믿는 사람들에겐 다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님의 거룩한 이름을 우리 등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내 자신에 대해 경외(敬畏)히 여김이 필요합니다. 영어에 self-respect 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자기 자신을 존경할 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 내 자신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으로 부름을 받는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피로 산 그리스도에 속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름을 받는 내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을 더럽히지 않아야 합니다. 이러한 귀중한 자신을 죄로 향하게 할 수 없습니다. 더럽힐 수 없습니다. 내 자신만 더럽힐 뿐만 아니라 거룩한 주님의 이름까지도 더럽히게 하는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에스겔 三十六장 二十三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열국(列國)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은 이름 곧 너희가 그들 중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거룩하게 할지라.』그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열국 가운데 살면서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가진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죄를 많이 지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더럽힘을 입었습니다.
오늘날은 이런 일이 없습니까? 오늘날 이 시대, 이 사회 가운데서 예수 님의 이름으로 불리 우는 그 거룩한, 존경해야 될 만한 그 자신을 갖고 바로 처신하지 못하고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경우는 없습니까? 조심해야 합니다.
나의 사교 생활을 조심해야 합니다. 직장 생활에도 조심해야 합니다. 장사 생활에도 조심해야 합니다. 언행을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잘못 하면 하나님의 이름, 우리 주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계명을 주시면서 마지막으로 첨가한 경고의 말씀을 들어봅시다.『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니 아니하리라.』『면죄하지 아니하리라.』무슨 말인가 하면 자기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반드시 형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라기 二장 二절에는『만 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 복을 저주하리라.』
신명기 二十八장 五十八절에는『네가 이 율법에서 기록한 이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고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너희 재앙과 너희 자손의 재앙을 극멸하게 하시리라.』고 경고했습니다.
레위기 二十四장을 보면 아버지는 애굽 사람이요 어머니인 젊은 사람이 누구와 싸움을 하다가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했습니다. 그 때에 그 사람을 돌로 쳐죽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레위기 二十四장 十六절에는『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는 자는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라 외국인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죽일지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물론 모세의 율법이요 또한 우리가 지금 이대로 실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원칙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면 형벌이 따라옵니다.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고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까? 몇 가지 기억할 사실들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으로 어디나 계시고 무엇이나 아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언제나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나는 못 보나 하나님은 다 보십니다.
또 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이올시다.『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하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공의라고 하는 말은 죄를 벌한다는 뜻입니다. 빛의 하나님이올시다. 그에겐 어두움이 없습니다.
이사야가 성전에 가서 예배하다가 이와 같은 하나님을 환상으로 보았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는 스랍들의 찬송을 들었습니다. 이 찬송을 들을 때에 이사야는 화로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보았다고 탄식하였습니다. 이 때에 제단으로부터 숯불이 스랍의 손을 통하여 왔습니다.
그리하여 입술을 지지고 죄 사함을 받은 기록을 우리는 읽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직면하게 될 때에 우리는 다 이사야와 같이 나는 죄인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그 십자가의 보혈로 말미암아 죄 사함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행실이 깨끗하게 될 때에만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