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12:6-21/ 온유한 자와 복 / 한경직 목사 2014-08-22 23:26:47 read : 1390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오늘의 말씀은 산상보훈(山上寶訓) 중 셋째 되는 축복이올시다. 오늘 이 여덟 가지 복 가운데 셋째로 말씀하신 온유한 자와 그들의 받을 축복에 대하여 생각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이 말씀도 얼른 보기에는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의 생각대로 말한다고 하면 『강포(强暴)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세계를 정복할 것임이요.』아마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적당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꼭 같은 말씀을 시편 三十四편 十一절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和平)으로 즐기리로다.』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온유(溫柔)는 성신의 아홉 가지 열매 가운데 하나로서 갈라디아서 五장에 역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이 온유한 자의 축복을 생각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온유한 자는 어떠한 분들인가, 이런 것을 생각할 때에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마음 가운데 들어오는 생각은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가장 온유하신 분이라 하는 생각입니다. 마태복음 十一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친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四十二장에는 장차 오실 메시야의 모습을 예언한 가운데 마태복음 十二장에도 여러분이 지금 읽으신 대로 장차 오실 분은 상한 갈대도 꺽지 아니하시고 꺼져 가는 등불 혹은 심지도 끄지 아니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온유하신 성품을 가르치신 것인 줄 생각합니다. 이사야 五十三장에 보면 또한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그는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도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며 마치 도수 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 하였도다.』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하신 모습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예수를 어린양에 비유하였습니다. 역시 온유하신 성품을 가르치신 것인 줄 생각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二장에 이렇게 주님에 대하여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란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으니…』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온유한 모습과 십자가의 수난을 기록한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시는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한 번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에 사마리아의 어떤 동리를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그 동리에 들어가니 그들은 유대 사람인 줄 알고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요한과 야고보 두 형제가 매우 격노해서 이런 사람들을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서 전멸시키자고 하는 진언을 주님께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를 책망하시고 아무 말도 없이 다른 동리로 가셨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하신 성품과 온유하신 생활을 문자 그대로 보여 준 사실이올시다.
온유한 자들은 어떠한 이들인가. 먼저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겸손합니다. 얼른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 대하여 누가 겸손하지 아니하리오 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겸손하지 못한 사람이 많고 하나님께 대하여 겸손하지 않게 행동하는 때도 많이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의 경륜에 대하여 원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어떤 섭리 가운데서 어떠한 불행이 나에게 미치고, 어떠한 재난이 나에게 미치고, 어떠한 실패가 나에게 오고, 어떠한 슬픔이 내 가슴에 스며 온다 할지라도 온유한 사람은 불평하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러한 일을 허락하시는가. 반항하지 아니합니다. 자포자기하지 아니합니다. 낙심하지 아니합니다. 어떠한 환경을 당하든지 하나님의 허락하시는 바이면 조용히 참고 견디는 것이 온유한 사람들의 하나님께 대한 태도입니다.
온유한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이면 또한 순종합니다. 전에 요셉이 그렇게 형들에게 팔리어서 애굽에 가서 고생하며 말할 수 없는 억울한 환경 가운데 있었지마는 요셉은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원망을 품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 곳에서 순종하고 자기의 일을 했을 뿐입니다. 심지어 욥같은 사람은 자기의 책임이 아니지만 전혀 알지 목하는 어떤 이유에 의해서 갑자기 모든 재산이 없어지고 심지어 자기 사랑하는 자식까지 없어진 때에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다만『여호와 주시고 여호와 거두시니 오직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그 말밖에 남긴 것이 없습니다.
온유한 심령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하여 불평하지 아니하고 반항하지 아니하고 낙심하지 아니하고 오직 참고 견디며 범사에 순복(順服)합니다.
몇 주일 전에 칼빈 선생의 생활을 말할 때에도 이미 말했지마는 그이가 이태리에서 스트라스버어그 라고 하는 곳에 가기 위해서 하루 밤 쉬기 위하여 제네바에 들렸습니다. 그 때 제네바에서 종교 개혁을 시작하기 전부터 알던 친구 윌리암 파렐이 찾아 와서 지금 제네바에 당신이 필요하니 스트라스버어그로 갈 것 없이 여기서 같이 손잡고 일하자고 강권하였습니다.
칼빈 선생은 그 때에 학구 생활을 원했습니다. 조용히 앉아서 영구하고 공부해서 책을 쓰기를 원했습니다. 활동하는 그런 자리는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강경히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윌리암 파렐 이 강권할 때에 칼빈 선생은「혹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나서 겸손하게 순복 하였습니다.
그 후에 된 일을 보아도 역시 그렇습니다. 三년 동안 제네바에서 자기 딴엔 열심히, 양심적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제네바 서민은 오히려 불평을 품기 시작해서 마지막에는 시 회의에서 칼빈과 파렐을 추방하기로 결의했습니다. 그러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공손히 당신 네 들이 그러면 우리가 떠나겠습니다―하고 그 곳을 떠나서 오래 가기를 원하던 스트라스버어그로 간 것입니다.
三년 후에 다시 제발 오라고 사람이 와서 간청할 때에도 또 온유한 마음으로 그저 당신이 정 원하면 또 가지요―다시 제네바로 왔습니다. 칼빈은 약한 사람이 아닙니다. 내강한 사람입니다. 그렇지마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뜻이면 순종하려고 하는 온유한 근본적인 그리스도의 성품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예수 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아버지여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나에게서 떠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 주시옵소서.』하였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합니다.
그리고 온유한 사람은 역시 사람에 대해서도 온유합니다. 삶에게 대하여는 어떻게 이것이 나타나느냐, 우선 글자의 뜻대로 부드러운 것으로 나타나는 줄 압니다. 성경 말씀에도 유수한 대답이 분노를 쉬게 한다고 그랬습니다.
우리 동양에 옛날부터 내려오는 속담 가운데도「툭해서 다르고 탁해서 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드러운 것으로 나타납니다. 같은 눈으로 보지만 다정한 눈길로 볼 수도 있고 혹은 눈에서 칼날이 나오게 볼 수도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사람에게 대하여 부드러운 것으로 나타날 줄 생각합니다. 또한 온유한 사람은 자연히 사람에게 대하여 온유합니다.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아는 것처럼 태도를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든지 온유와 겸손은 한 쌍둥이 같아서 온유한 사람에게는 역시 겸손(謙遜)이 따라다니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온유는 사람에게 대하여 인내로 나타납니다. 성날만한 일이 있어도 참고, 괴로운 일이 있어도 참고, 나를 중상하는 사건이 생겨도 참고, 나를 여러 가지로 모략하고 괴롭게 굴지라도 온유한 사람은 곧 반항하거나 원수 갚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잘 참아서 견딥니다.
이것이 온유한 사람의 성품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온유한 사람은 사람에게 대하여 어려운 것을 잘 참을 뿐더러 용서하여 줍니다. 다른 사람이 잘못 했을지라도 그 사람이 알지 못해서 그와 같은 일을 하는 것으로 여기고 원수라고 생각을 하지 않고 용서해 줍니다. 일곱 번씩 용서해 줄 뿐더러 예수 님의 말씀과 같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려고 하는 태도를 가질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온유한 사람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악을 선으로 갚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기록한 바와 같이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오히려 자기를 해롭게 하는 원수에게 대해서도 오히려 복을 빌 것입니다.
이것이 온유한 사람이 하나님께 대해서 가지는 태도요, 이것이 온유한 사람이 사람에게 대해서 가지는 태도입니다. 이 모든 온유하신 성품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 성품과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에서 꼭 이와 같이 나타난 것입니다. 온유한 이는 이러한 분입니다.
그 다음에는 온유한 자의 축복을 생각하고자 합니다.『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입니다.』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세상 사람은 흔히 강한 자가 이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옛날 우리 동양에서도 유능승강(柔能勝强)이란 말이 있습니다. 유한 것이 능히 강한 것을 이긴다고 하는 뜻입니다.
옛날 동양성현 가운데도 이력복인과 이심복인(以力服人 以心服人) 즉 사람이 힘으로서 다른 사람을 복종시키는 것과 마음으로 복종시키는 것, 이 두 가지를 비교해서 말할 때에 이력복인은 잠깐이요, 이심복인은 영구하다고 하는 진리를 깨달아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여기 아이들이 읽기 좋아하는 옛날 우화 가운데서 이런 이야기를 들으신 줄 압니다. 강한 바람과 햇빛이 한 번은 내기를 했다고 합니다. 네가 더 힘이 잇느냐, 내가 힘이 더 잇느냐, 그래서 내기를 했는데 어떤 점잖은 사람이 외투를 입고 모자를 쓰고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람과 햇빛은 누가 저 삶의 모자와 외투를 벗길 수 있는가, 누가 힘이 더 있는가, 내기를 해보자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바람이「내가 힘이 더 있지. 내가 먼저 벗길 테니 보라.」고 하고는 바람을 갑자기 일으켜서 바람을 불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가다가 「이거 바람이 분다.」하고는 모자를 꽉 내려씁니다. 그래도 그래도 바람이 자꾸 부니까 하나만 채웠던 외투 단추 세 개를 다 채웁니다. 그래도 바람이 부니까「바람도 참 심하다.」고 하면서 두 손으로 모자를 꽉 부여잡고 걸어갑니다.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모자를 벗지 않고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외투를 벗지 않습니다. 결국 강한 바람은 사람의 모자와 외투를 못 벗겼습니다.
햇빛은「그게 무슨 힘이냐? 내가 벗길 테니 보라.」바람이 잔잔하고 조용해 졌습니다. 햇빛이 따뜻하게 쨍쨍 비칩니다. 이 사람은 길을 가다가「아이고, 날도 대단히 덥군」그 다음도 그냥 햇빛이 비치니까「이거야 더워서 견딜 수 있나.」하고 모자를 훌떡 벗었습니다.
그래도 햇빛이 비추므로「오늘은 외투가 쓸데없구먼.」하고는 외투를 벗었습니다. 그래서 강한 바람 보다 따뜻한 햇빛이 이겼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 유럽을 석권하던 나폴레온이 마지막에 센트 헤레나라고 하는 작은 섬에 정배(定配)가서 마지막을 마칠 그 시각에 몇 마디 남긴 말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마디 말은『나는 칼로서 온 유럽을 정복하였지만 결국은 실패하였노라.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사랑으로서 온 인류를 정복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생물계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생물계에는 강한 것만이 사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이니 적자생존(適者生存)이니 자연도태(自然淘汰)니 생물계에는 강한 것이라야 산다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깊이 연구해 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닙니다. 이 지구의 역사를 연구하는 지질역사를 연구해 보면 우리 사람이 지구에 나기 전에 큰 짐승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파충류에 속하는 맘모스와 공룡 같은 큰 짐승들이 지구 위에서 많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많던 무섭고 강한 그런 짐승들이 지금은 거의 다 없어졌습니다.
멸종되었습니다. 이곳 저곳에서 혹 뼈만 남은 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뉴욕 박물관에 가 보면 옛날의 큰 공룡의 뼈를 지금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룡은 볼 수 없습니다. 강한 짐승들은 다 없어졌습니다. 오히려 약하게 보이던 짐승들은 이 땅 위에 지금도 살고 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말하면 이리와 개는 같은 종류에 속합니다.
사실 이리와 개를 보면 같이 생겼습니다. 본래 똑같은 종류였습니다. 그런데 이리 가운데서 어떠한 종류가 성질이 변한 것입니다. 온순해 졌습니다. 그래서 그 놈은 개가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는 포악한 이리는 이 세상에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혹 동물원에 가야 더러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질이 변해서 온유하게 된 개는 세계 어느 곳에 가든지 다 찾아 볼 수 있고 사람들에게 총애를 받고 있습니다.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한다고 하는 말이 얼른 듣기에는 마음 가운데 들어오지 않지만 깊이 생각하면 그 원리를 우리는 어느 방면에서든지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리와 같은 히틀러, 이리와 같은 무솔리니, 이리와 같은 스탈린이 온 세계를 거저 점령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유한 자가 결국은 세계를 얻을 것입니다.
지금 이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땅이 어디냐고 물어 본다면 아마 북미 대륙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보통 그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십니까? 이상한 것은 그 북미 대륙은 누가 차지했습니까?
지금으로부터 근 삼백여 년 전, 저 영국에서 자기네의 신앙 때문에 핍박을 받아 그 나라에서 살 수 없게 되어 화란으로 갔었으나, 거기서도 한 이년 동안 살아볼래 야 살 수 없어서 다시 화란을 떠나 작은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一六二0년에 폴리마우드 라는 바닷가 바위에 내린 청교도 一二0명과 그들의 자손이 지금 제일 아름다운 대륙을 기업으로 받아 살고 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사실 온유한 사람은 물질이 적거나 많거나, 이 세상에서도 참된 축복을 받습니다. 의인의 적은 물질이 악인의 많은 물질보다 복이 됩니다. 의인의 오막살이가 악인의 대궐보다 복이 됩니다, 의인의 나물밥이 악인의 송아지를 잡은 진미보다 더 복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온유한 심령 곧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심령에게는 온 세계가 아버지의 집입니다.「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은 세계가 내 아버지의 세계요, 주님의 세계입니다. 온유한 자가 복을 받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말씀 그대로 이루어질 날이 있을 줄 압니다. 우리가 사는 이 지구, 이 땅은 언제든지 죄로 말미암아 불로 멸망 받을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새 하늘과 새 땅은 오직 온유한 사람만이 기업으로 받을 것입니다.
이 온유한 마음과 성품을 우리가 어디서 얻을 수 있겠는가. 여러분, 산상보훈을 다시 한 번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복이 무엇입니까?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습니다. 먼저 내 자신을 바로 알아서 마음이 가난해야 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내 허물과 내 죄를 깨달아서 간절한 마음으로 애통하며 회개하고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하나님의 죄 사함을 받아야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한 가운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연히 온유한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또 언제든지 가장 온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의 멍에를 메고 그를 배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