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마 十八․二十二)
『주여 형제가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하고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교의 랍비들이 세 번까지 용서해 주라고 교훈 하였습니다. 여기의『일곱 번까지 하리이까?』라고 물은 것은 그 배가 더됩니다. 베드로는 그만하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넉넉한 줄로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얼른 대답하는 말씀이『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 유명한 무자비한 종의 비유인 一만 달란트 빚진 종의 비유를 말씀하여 주신 것입니다.
어떤 임금에게 종들이 많이 있는데 그 종 가운데 하난가 一만 달란트의 빚을 졌습니다. 여기 한 달란트는 지금의 돈으로 약 一000불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一만 달란트면 一천만 불 가량 됩니다. 그것을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약 三十억 원이 될 것입니다. 굉장한 빚을 졌습니다. 이 빚을 갚으라고 하나 이 종은 갚을 길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임금이 이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두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에 그 종이 간절히 빌었습니다. 좀 참아 주시기를 바란다고 빌었습니다. 그러니까 임금이 불쌍히 여겨서 그 많은 빚을 그저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이렇게 탕감을 받은 이 종이 나오다가 자기에게 빚을 진 동관 하나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 동관은 백 데나리온을 빚져 있었습니다. 백 데나리온은 미화로 약 二十불 됩니다. 우리 한국 돈으로는 약 六천 원쯤 됩니다.
그는 빚진 동관의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했습니다. 동관은 내게 지금은 돈이 없으니 조금 참아 주면 내가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안 된다고 하면서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 동관을 옥에다가 집어넣었습니다.
그 후에 그 소식을 임금이 들었습니다. 임금은 노해서 그 종을 다시 불러서,『이 악한 종아 네가 그렇게 많은 빚을 내게 젓는 데도 네가 빌기에 불쌍히 여겨 네 빚을 탕감해 주었는데 너도 네게 빚진 사람에게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고 하면서 그 종을 다시 옥중에 넣고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가두어 두었다는 얘기입니다.
오늘 이 시간 이 말씀 가운데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용서에 대한 교훈을 받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서 귀중한 교훈을 몇 가지 우리에게 주십니다.
첫째는 우리 믿는 사람들이 다른 형제가 지은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여기서 임금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一만 달란트를 빚진 종은 우리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왜 다른 형제가 지은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죄를 용서함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나에게 죄를 지을 때에도 용서해 줄 당연한 의무가 있습니다. 왜 일흔 번씩 일곱 번, 다시 말하면 무제한으로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함을 받은 죄는 그야말로 一만 달란트, 三十억 원에 해당하는 죄였습니다. 이것을 무제한으로 용서함 받았으니 또 우리도 남의 죄를 무제한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는 죄인의 괴수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 뿐만이 아닙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다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한국에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 가운데『사람이 하루를 살 때에도 죽을 죄 한 번은 짓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법을 다 어긴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율법의 요구대로 우리에게 갚아 주신다면 구원 얻을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말하자면 一만 달란트의 무제한의 죄 사람을 받았으니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무제한의 용서를 해 줄 의무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 지은 죄를 생각하면 실상은 백 데나리온, 六천 원에 불과합니다. 나는 한량없는 죄 사함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는데 다른 형제가 내게 짓는 죄는 기껏해야 백 데나리온에 불과합니다. 이런 적은 죄를 우리가 용서해 주지 아니하면 우리도 여기에 나타나는 무자비한 종, 즉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하는 종이 되기 쉬운 것입니다.
먼저 이렇게 다른 형제의 죄를 사하여 주는 것은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당연한 의무라고 하는 것이 이 비유를 통한 분명한 가르침입니다.
둘째 이 비유를 통해서 가르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형제의 죄를 용서하는 것은 내 죄를 용서함 받는 데 필수조건이 된다는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이 비유를 통하여 형제의 죄를 용서하는 것은 내가 용서를 받는데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인이 빚을 탕감해 주었던 종을 다시 불러다가 그 빚을 다 갚기까지 옥졸에게 붙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결론으로 하신 말씀이『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엄숙하고 무서운 교훈입니다.
그 주님께서는 산상보훈에서도 꼭 이대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해 주지 아니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해 주시지 아니 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심지어 주기도문을 가르칠 때에도 죄 사함을 받기 위하여 기도하는 조문에는 이런 교훈을 비추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야고보 二장 十三절에는『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고 하였고 산상보훈의 여덟 가지 복을 가르쳐 주실 때에는 예수 님께서 친히『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 사함을 받기 원합니까? 그러면 우리가 형제의 죄를 용서해 줄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부득이 한 일입니다. 불가불 꼭 해야 할 일입니다. 왜? 그래야 내 죄를 사함 받는 것입니다.
셋째로 이 비유를 생각할 대에 배울 진리가 또 한 가지가 있는 줄 압니다.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되 속히 용서해 주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때에는 용서를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도 오래 가기가 쉽습니다. 그렇게 되면, 즉 우리가 남을 미워하는 마음, 원망하는 마음을 오래 품게 되면 그만큼 내 자신에게 큰 손해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옛날 신의주에서 전도사로 처음 교회 일을 볼 때에 박산읍 교회에서 시무 하시던 김 진근 목사님이 한 번 우리 교회에 오셔서 삼일기도회 저녁에 말씀을 하시고 그 후에 저와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 이야기 가운데 지금까지 제가 잊지 못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기가 목사가 되기 위해서 평북 노회에서 목사 시취(試取)를 받던 이야기였습니다. 지금은 시취 위원이 따로 있어서 조용히 하지마는 그 때는 노회 석상에서 여러 명이 물어 보아서 합격해야 목사 안수를 하던 때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와 다른 젊은이 한 사람과 같이 시취를 했는데 앞에 세워 놓고는 여러 사람이 이것저것을 다 물었습니다. 자기 생각에는 대답을 무던히 잘한 줄 알았고 공기를 보니 통과될 것 같더니 마지막에 선천에 있던 어떤 선교사 한 분이 일어나서 하는 말이『내 생각에는 아직 이 두 형제가 목사 될 자격이 없는 줄 생각해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는 선교사의 발언권이 아주 강하던 때인지라 그가 그 말을 하자 공기가 싹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한 노회 기간 보류하기로 동의, 재청해서 가결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목사 시험에 낙제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곳을 내오려니 자기의 마음속에 선교사에 대한 분한 마음이 들어갔답니다. 그 날 저녁에 자려고 하니 잠이 잘 안 오더래요. 그래 잠을 못 자고 다음날 새벽기도회에 나가서 기도하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선교사와 자기 사이에 어떤 혐오가 있던 것도 아닌데 선교사가 그렇게 말한 것은 사실 나에게 부족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내가 오해를 했구나 하고는 그 분한 마음을 풀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평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그 이튿날 함께 시험보다 낙제한 그 청년을 만났답니다. 만나 보니 그이는 아직까지도 분한 마음이 그냥 있더랍니다.『그 못된 선교사 그 놈!』하면서 욕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몇 달을 가도 그 분은 분을 풀지 못하더니 반년 후에 다시 시험을 쳐서 두 분이 다 목사가 되기는 됐는데 그 사람은 그 후에도 계속 선교사에 대해서 욕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몇 해 후에 그 분은 교회 일을 보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사실 우리가 남에게 대해서 원망하는 마음, 미운 마음을 늘 가지고 있으면 우리 속에 은혜가 없어집니다. 분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그 속에 성령께서 오래 계실 수가 없습니다. 내가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현대 심리학과 의학이 발달된 요즈음에 있어서는 이런 분한 마음, 시기하는 마음을 오래 품으면 심적 또는 육체적으로 갖는 손해가 있다는 것이 밝혀져 있습니다.
스텐리 존스 박사의 저서를 보면 그런 실례를 많이 열거했습니다. 가령 어떤 젊은 여자가 하나 있는데 그는 무엇을 먹기만 하면 도로 토하고 맙니다. 의사가 아무리 위를 검사해 보아야 아무 병도 없었습니다. 심리적으로 그 여자를 분석해 보니 그 속에 자기 시어머니에 대한 미운 마음이 가득해서 결국은 육체적으로 그런 고장이 생긴 것이었습니다.
또 어떤 젊은 여자가 갑자기 오른 손을 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의사들이 아무리 진찰을 해 보아야 아무 병도 없었습니다. 심리적으로 진단을 해 보니 자기 어머니에 대한 증오감으로 인해서 그 손으로 어머니를 때릴 마음이 가득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해소시킨 다음에는 곧 팔을 쓰게 되었답니다.
한국에서도 우유를 많이 먹기 시작하지마는 성난 소에게서 짜 낸 우유를 먹으면 해롭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몇 해 전에 미국에서 어떤 농장에 가보니 젖 짜는 방을 아름답게 꾸미고 거기에 음악을 틀어 놓은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성이 난 어머니가 아기들에게 젖먹이는 것을 본 일이 있지요? 그거 아마 좋지 않을 것입니다. 성난 기분 가운데서 나오는 젖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우리의 심리적 상태가 육체에 직접 영향을 줍니다.
한국에는 전부터 이런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사촌이 밭을 사면 배를 앓는다.』어려서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오랫동안 깨닫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심리학을 배우고 생각해 보니 꼭 그렇겠어요. 사촌은 밭을 샀는데 나는 못 샀다는 시기하는 마음이 가득할 것 같으면 위액이 제대로 분비되지 못할 것입니다. 자연히 소화불량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배가 아프게 되겠지요.
사실 위궤양이니 하는 병은 육체적 원인보다도 마음의 불안에서 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곧 용서해 주지 아니하고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은 내 자신에게 큰 손해가 됩니다. 그래서 성경 골로새 三장 十三절에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에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했습니다.
분한 마음을 오래 품고 있으면 내가 손해를 받습니다. 연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한 분이라도 이런 기분 가운데 계시는 이가 혹 있으면 이 시간에 다 용서하시고 풀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넷째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고귀한 인격에까지 장성하기 위해서 우리 형제의 죄를 용서해야 합니다. 에베소 四장 十五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귀한 인격과 생활이, 특별히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데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동네를 지나가시다가 날이 저물어 그 제자들과 함께 동네에 잠깐 머문 일이 있지요.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들이 유대 사람인 줄 알고 유숙하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그때에 야고보와 요한 이 예수 님에게 무어라고 말하였는지 여러분은 기억하십니까?
『선생님, 하나님께 기도를 해서 불을 내리어 이 동네를 멸망하게 합시다』라고 했습니다. 요한 과 야고보가 나쁜 사람이어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요사이 우리가 예수를 따른다고 하지마는 이런 일을 당할 때에 같은 생각이 얼른 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오히려 그들을 책망하시고 조용히 다른 동네로 가셨습니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끌고 왔습니다. 『선생님, 모세의 법대로 하면 이런 여자는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님은 무엇이라고 하시겠습니까?』
오기가 등등해서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신 것을 다 아시지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들어 저 여인을 쳐라』하셨습니다. 그 말씀 하나로써 그 여자를 구원하시고 그 여자의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하였지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디베랴 바다에서 베드로를 만났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뭡니까?『네가 담대하다고 뽐내드니 그게 무슨 짓이냐?』고 이야기 하셨습니까?
아닙니다.『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며 사랑을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내 양을 치라』고 하시며 베드로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같이 못 박힌 살인 강도가『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라고 회개할 때에『네가 오늘날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시며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자기를 십자가에서 못박는 이들을 위해서 하신 기도가 뭡니까?『아버지여, 이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향나무는 자기를 꺾는 도끼에 향수를 뿌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문자 그대로 향수를 뿌리신 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좀 더 그리스도를 본받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구약의 모든 인물 가운데 가장 예수와 같은 인물은 요셉이라고 합니다. 왜? 요셉이 자기 형들의 죄를 용서해 준 까닭입니다.
서반아에 이런 속담이 있다고 합니다.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악마가 하는 일이요. 악을 악으로 갚는 일은 인간들이 하는 일이요. 악을 선으로 갚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본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소 四장 三十二절에『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옛날부터『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은혜는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내가 손해보고 천대받은 것은 잊어버리기 어렵습니다. 심지어 가족간에도, 친척간에도, 친구간에도, 적은 일로 혐의를 품고 살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우리 신앙 생활에 암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스펄존 목사는 일찍이 이렇게 외쳤습니다.『용서하라. 잊어버리라. 미친개를 파묻을 때에 꼬리를 내 놓지 말아라』무슨 말인고 하니 혐의를 아주 없애라는 말입니다.
어떤 분이 아브라함 링컨을 평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의 마음은 바다 같이 넓으나 남의 혐의를 둘 방은 없었다.』모든 혐의를 아주 잊어버릴 수 있는 그 자리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는 힘써야 할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힘써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하나 하나의 개인적 생활에 있어서 이와 같은 은혜를 주시기 바랍니다. 이 마음이야말로 하나님의 마음이고 그리스도의 마음인 것이올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