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12:9-21/ 상한 갈대:하나님의 긍휼 / 한경직 목사 2014-08-22 21:43:41 read : 1428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마 十二․二十-二十一)
이 말씀은 이사야 四十二장 三절의 인용입니다.
거기 여호와의 종 곧 메시야에 대한 예언으로서 메시야의 온유한 성품에 대한 묘사의 일절 입니다. 성경에 갈대에 대한 말이 더러 있습니다. 우리 주님도 일찍이『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들에 나갔더냐? 바람에 불리는 갈대냐?』하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구약에는 종종 갈대 같은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는 경고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신다고 하는 말씀이 또 있습니다. 갈대는 약한 것입니다. 약한 것의 한 상징입니다. 갈대 같은 애굽이라고 하는 말도 약한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는 뜻입니다.『바람에 불리 우는 갈대더냐?』하는 말씀도 역시 그 의미가 포함 된 줄 생각합니다.
깊은 의미에서 우리 인간은 한 갈대입니다. 약합니다. 우리가「철권」이니 혹은「철각」이니「쇠주먹」이니 혹은「쇠다리」니 이런 말을 쓰지마는 인간의 체력이란 그리 튼튼하지 못합니다. 철석같은 의지라고 하는 말을 우리가 쓰지마는 인간의 의지는 약합니다. 이사야 四十장에 보면,
『땅의 거민 들은 메뚜기 같으니라』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도 약하다고 하는 뜻일 것입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다고 하는 말씀도 인생의 무상함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동시에 또 약한 면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우리 동양에 내려오는 초로인생(初露人生)이란 말이 있습니다. 풀에 이슬 같은 인생이라는 이 말도 역시 인생의 무상함과 연약함을 우리에게 여실히 표현해 주는 말입니다. 갈대는 이렇게 약하니 상하기 쉽습니다.
모든 바람에 꺾이기 쉽습니다. 짐승이 한 번 지나가도 스쳐서 혹은 밟혀서 상하기사 쉽습니다. 인간이 역시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생의 폭풍우에, 혹은 천재와 지변에, 혹은 전쟁, 혹은 계속되는 혁명, 역경, 기근, 여러 가지 사고 등에 스치고 밟혀서 문자 그대로 육체가 상하고 심령이 깨어집니다. 누구나 상할 갈대입니다.
겉으로는 평온한 것 같지마는 그 속을 사실 알고 보면 어디나 상처가 없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더욱이 갖은 유혹과 시험이 많은 이러한 세상에서 그 심령이 더럽힐 대로 더럽혔고, 상할 대로 상해서 신음하는 소리, 비명의 소리가 없는 가슴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다 상한 갈대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이 상한 갈대를 흔히 돌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꺾어 버리고 밟아 버리는 것이 보통이 아닐까 싶습니다. 상한 그릇은 내어버립니다. 병든 짐승은 혼자 죽으라고 내버려둡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매일 보도되는 우리의 사회 실정을 여러분이 보십니다.「적자생존」이니「자연도태」니「약육강식」이니 이런 말을 인류사회에까지 적용하게 끔 된 세상입니다. 생존경쟁에 낙오한 자는 넘어집니다.
상합니다. 죽습니다. 어떤 때에는 감옥에서 썩습니다. 심지어 상이 군이 예비역 대령이 분신자살을 하게 끔 됩니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사는 이 사회의 냉혹한 현실입니다. 그런데 여기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신 것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그 상한 갈대를 회복하여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는 가시는 곳마다 몸에 상처를 입은 사람을 고쳐 주시기를 힘썼습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가 읽은 말씀 가운데서도 그렇게 바리새인들이 반대하는 것을 불구 하시고 손 마른 자를 불쌍히 여겨서 고쳐 주셨습니다. 문둥이를 깨끗케 하셨습니다.
중풍병자를 일으키셨습니다. 소경을 보게 하였습니다. 절름발이를 걷게 만드셨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마음의 상처를 입은 자의 그 상처를 고쳐주기 위해서 많은 애를 쓰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음 상한 사람을 불러서 상처를 고쳐 주시기를 힘쓰신 것입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우시며 마음에 슬픔을 당한 이들을 위로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죄로 상한 인간을 꺾어 버리지 않으시고 회복케 하셔서 구원하시는 것이 우리 주님의 사명이었습니다. 여러분께서 요한 복음 八장에 기록된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잘 아십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한번 가르치실 때에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붙잡혀온 여자를 예수님 앞에 끌고 와서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모세의 법률로 말하면 이런 여자는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께서는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예수 님께서는 대답하시지 않으시니 이들은 속히 대답하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간음하다가 붙잡혀온 여자, 문자 그대로 상한 갈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아주 꺾어 버리기를 재촉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얼마 후에 조용히 머리를 들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되 없는 자 있거든 먼저 돌을 들어 저 여자에게 던지라.』
그리고 다시 머리를 숙여서 땅을 보시고 무슨 글자를 씁니다. 얼마쯤 후에 머리를 들어보니 한 사람 두 사람 슬며시 그 곳에서 다 헤어지고 그 여자만 홀로 섰습니다.『너를 정죄(定罪) 하던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갔느냐? 나도 너를 정죄 하지 아니하리니 돌아가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이른 아침 디베랴 바닷가의 일곱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기록을 우리가 요한 복음 마지막 장에서 보게 됩니다. 그 때에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같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한 마리도 잡지를 못했습니다. 돌아올 때에 어떤 분이 나타나서,
『그물을 오른 편으로 던지라』고 하는 말을 듣고 그 편으로 던지니 뜻밖에 많은 고기가 잡혀서 그물이 찢어질 지경입니다. 예수님인 줄 제자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재빨리 언덕으로 혹은 헤엄을 쳐서, 혹은 배를 타고, 예수 님 선 곳으로 갔습니다. 그 때 베드로도 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잡히실 때 베드로는 면목이 없었습니다. 장담하고 큰 소리쳤지만 그대로 하지 못하고 주님께서 붙잡히는 그 저녁에 정작 예수 님을 부인했습니다. 한 번뿐 아니고 세 번씩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실수를 한 베드로가 예수님의 얼굴을 대하니 자연히 머리가 숙여지고 풀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상할 갈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제자에게 다른 말씀을 묻지 않았습니다. 다만 조용히 베드로에게 하시는 말씀이『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믿음을 물었다면, 용기를 물었다면, 대답할 말이 없었겠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물었습니다. 다른 것 다 부족하지만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이 그 마음에 있은 것은 사실입니다. 주님은 제자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아십니다. 이렇게 세 번 묻고『내 양을 치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회복해서 귀한 직분을 다시 맡긴 것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갈대로 종이를 만들어 글을 썼습니다.
혹은 갈대로 피리를 만들어 노래를 불렀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상한 갈대 같은 사람을 꺾지 않으시고 다시 회복하여서 귀한 진리의 글을 쓰게 만들고 귀한 하늘나라의 노래를 만드셨습니다. 이와 같이 상한 갈대 같은 베드로를 다시 회복해서 오순절 하루아침에 三천 명을 불러서 회개시키는 위대한 사도를 만든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상할 대로 상한 어거스틴 같은 청년을 불러 회복시켜서 一천년간의 기독교사상을 지배할 수 있는 위대한 신학자를 만든 것입니다. 진리의 붓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빈궁과 실패와 병과 슬픔과 죄에 상한 인간들을 불러서 죄를 사해 주시고 회복시켜 하나님 나라의 귀한 일꾼을 삼고 하나님의 꽃동산에 귀한 꽃을 삼는 것이 우리 주님의 하시는 일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가 이 자리에 와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배하게 되는 것도 오로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주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하나 하나가 다 상한 갈대가 아닙니까?
그리고 그 다음에 있는 말씀도 잠깐 생각하십시다.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좀더 언어의 글자대로 번역하면『연기 나는 삼대를 끄지 아니한다』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불꽃은 없습니다. 그라나 불티는 아직 남았습니다. 적은 불티만 남았으니 연기만 납니다.
이런 작은 불티를 예수 님께서는 멸하지 않으시고 사랑의 숨결로 불어서, 성령의 바람으로 도와서, 불을 다시 일으키고 큰 빛을 발할 수 있는 등대를 만든다고 하는 뜻입니다. 두 가지 뜻으로 생각할 수 있는 줄 압니다. 하나는 아무리 사람의 눈에는 소망이 없어 보이지만 인간의 그 깊은 속에는 이 작은 불티가 있습니다.
양심이 아주 죽지는 않습니다. 그 마음속 어느 구석에 진(眞) 선(善) 미(美)에 대한 등경(燈檠)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작은 불티를 일으켜서 회개케 하시고 새 사람을 만드십니다. 예수 님 당시에 여리고에 살던 사람은 아마 삭개오라고 하는 사람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세리 장으로 유명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삭개오를 매국 자로 인정을 했습니다. 유대 사람의 돈을 거둬다가 이방 로마 사람에게 바칩니다. 그것도 여러 가지 불의와 토색(討索)을 행합니다. 탐관오리(貪官汚吏)입니다. 돈만 압니다. 권세에 아부하는 사람입니다.
소망 없게 보였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이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고 하는 말을 듣고 역시 거리에 나왔습니다. 키는 작고 사람은 많아서 볼 수 없습니다. 예수를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 뽕나무 꼭대기에까지 올라간 것을 보면, 삭개오의 마음에 의를 사모하는 작은 불티가 있은 것만은 사실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꺼져 가는 등불을 다시 돋우어서 큰 들불이 될 수 있는 아브라함의 아들로 회복시킨 것입니다. 토색한 것을 사 배나 갚아 주고 재산의 절반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해 주고 온전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회복시킨 것입니다.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십니다.
원래「이 꺼져 가는 심지」라고 하는 뜻은「작은 믿음」을 의미하는 줄 생각합니다. 작은 불티같은 믿음이 있습니다. 이 믿음은 너무 작아서 불을 발하지 못합니다. 빛을 발하지 못합니다. 남을 위해서 무슨 봉사를 하지 못합니다.
주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하지도 못합니다. 또 불티만 있으면 연기만 납니다. 그 연기는 우리 눈만 쓰리게 하여서 오히려 방해가 됩니다.
이 작은 믿음은 말하자면 그 연기가 많이 있습니다. 의심의 연기가 있고, 근심의 연기가 있고, 불평의 연기가 있고, 그리해서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방해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보통사람은 이런 작은 믿음을 멸시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이와 같은 믿음을 멸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리 작은 불티라도 다시 돋우어서 빛을 발하게 만드십니다.
예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오실 때에 간질병 앓는 아들을 데리고 온 어떤 아버지가 예수님께 부탁한 말씀을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제 아들이 중병을 앓아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이 애를 고쳐 달라고 했더니 고치지 못했습니다. 혹 당신께서 무엇을 하실 수 있으면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 앞에 나와서, 『아 당신께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으면……』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것이 믿음입니까? 반신반의하는 그런 믿음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 님께서 어떻게 하신 줄 아십니까? 그 말씀을 듣자마자 이내 하시는 말씀이,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는 것이 없느니라』는 말씀을 할 때에 그 사람은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주여 내가 믿습니다. 내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세요.』반신반의하는 작은 불티같은 믿음을 돋우어서 확실한 믿음을 만드셨습니다.
예수 님께서 이와 같은 일을 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여러분, 의심하던 도마의 이야기를 모두 잘 아시지요. 열 한 제자만 있을 때에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 후에 도마가 외출했다가 돌아왔습니다.
열 제자가 이구동성으로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를 보았노라고 간증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도마는 믿지 않는다고 했습니다.『나는 못 믿겠어! 나는 친히 내 눈으로 보고 내 손으로 만져보고 그래야 믿지, 난 못 믿겠어』 의심했습니다.
의심하던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을 주님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다시 도마가 있을 때에 나타났습니다. 다른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너 도마야,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를 만져보고 내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만져보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 있는 자가 되라』고 말씀했습니다. 도마가 친히 만져본 후에 엎드려서 하는 말이, 『나의 주님이시여! 나의 하나님이로소이다.』
작은 의심이 나는, 연기 나는 심지 같은 그 믿음을 돋우어서 튼튼한 믿음의 사람 도마를 만들었습니다. 그 때부터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거를 예루살렘에서만 하지 않았습니다. 팔레스틴에서만 증거하지 않았습니다. 멀리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하여서 오늘날「말토마쳐지」라고 하는 큰 교회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작은 믿음을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혹 여러분 가운데『나는 도무지 믿음이 너무 작아, 나는 의심도 많아』 이렇게 작은 믿음을 가졌다고 낙심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저 주님께 가까이 오시기만 하면 됩니다. 기도를 좀 더 힘쓰세요. 주님 앞에 좀더 가까이 나오세요.
성경을 좀더 많이 보세요. 그러면 주님께서 작은 믿음, 의심 있는 믿음의 그 불을 돋우셔서 점점 불길을 크게 만드시고 마지막에는 다른 사람에게까지 빛을 미칠 수 있는 큰 믿음의 등대를 삼으실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혹 우리가 이런 작은 믿음이라고 멸시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무엇 좀 의심한다고, 어떤 사람이 나 믿는 것과 좀 다른 얘기한다고, 어떤 사람이 좀 부족한 습관이 있다고 멸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와 같은 믿음일수록 잘 돋우어서 튼튼한 믿음을 만들고 큰 등대를 만드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일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고, 그 갈대를 회복하시고, 그 희미한 불을 돋우어서 큰 등대를 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정신입니다.
우리가 어느 때에 이와 같은 정신 가운데서 살지 아니 하리 오 마는 특별히 이와 같은 계절을 맞아서 주님의 이 정신을, 이 성품을 우리도 좀 배워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이와 같은 계절에 병난 사람들을 위해서, 그 가난한 형제들을 위해서, 모든 죄인들을 주님 앞에 구원해 내기 위해서 우리의 최선을 다해야 되겠습니다.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것도 이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쌀을 모으는 것도 이러한 목적이 있는 까닭입니다. 이 계절에 작은 믿음 있는 이들을 북돋워 주어야 되겠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솔선수범해서 상한 갈대, 스치고 밟힌 불쌍한 이들을 함께 붙들어 주어야 되겠습니다.
미국에 유명한 여류 소설가 펄벅 여사가 한국에 대한 소설을 쓰셨지요. 펄벅 여사는「더 리빙 리드(The Living read), 살아 있는 갈대」에서 우리 민족을 갈대로 보았습니다. 갈대로 삼아 있다고 하니 소망은 있습니다.
그러나 매우 상한 갈대입니다. 三八선으로, 六․二五로, 거듭되는 혁명으로, 거듭되는 실정으로, 경제파탄으로 상했습니다. 그 상처가 깊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낙심하고, 어떤 이는 절망하고, 자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범죄는 더욱 더 격증해 갑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해외로 피하려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 상한 갈대를 구할 이가 누구며, 이 꺼져 가는 민족의 혼을 다시 북돋울 이가 누구입니까? 오직 예수 님뿐이며 우리 주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오직 예수 님만이 우리 민족을 다시 살려 밝은 빛을 비취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다 주님께 나와서 새 사람이 되어야, 주님의 정신을 가지게 되어야, 제三공화국도 바로 건설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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