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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과 돈(7)
    2001-12-11 07:33:21   read : 1581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마태복음 6:19-34



    92년도 올림픽이 끝 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미국에서 목회를 하시는 선배 목사님 한 분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호텔에서 텔레비전을 보신 이야기를 하셨는데 목사님은 그 텔레비전에서 한국의 아이들이 10만원이 넘는 고가의 운동화들을 신고 다녀서 그것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는 내용의 방송을 보신 모양이었습니다. 10만 원짜리 운동화는 지금도 비싼 운동화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당시는 정말 고가의 운동화였습니다.
    그 목사님은 저에게 '김 목사 정말 한국의 아이들이 그렇게 비싼 운동화들을 신고 다니나?'라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그때 그렇게 비싼 운동화가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아이들에게 그런 운동화가 있는가를 물어 보았습니다. 무슨 운동화가 10만 원이 넘는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래서 또 아이들에게 너희 학교에도 그런 운동화 신고 다니는 아이들이 있는가를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아이들은 '우리만 빼놓고는 다 신어요'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너희들은 왜 그런 운동화 사 달라고 하지 않았느냐?'라고 물었더니 '사달라고 해봤자 안 사주실껀데요 뭐'라고 대답을 하여 그냥 웃고 말았습니다.
    교회 사무실에 나아와 아이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비싼 운동화를 사달라고 조르지 않아서 고맙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왜 그런 운동화를 신어서는 안 되는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쓸데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황영조 선수가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땄었습니다. 그런데 그 황영조 선수가 속해 있던 코오롱이라는 회사에서 1억 원을 들여 황영조 선수의 발에 맞는 운동화를 만들어 준 일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 대하여 여러 가지 말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그 이야기를 하면서 내 생각은 그것은 절대로 지나친 일이 아니라고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쓸데없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1억 원이라고 하는 돈이 들어도 그 때문에 기록을 조금이라도 단축할 수 있고 그 때문에 은 메달을 금 메달로 바꿀 수 있다면 그것은 절대로 지나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10만 원짜리 운동화를 신으면 안 된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필요하면 10만 원이 아니라 1억 원짜리 운동화도 신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너희들이 10만 원짜리 운동화를 신으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물었습니다. '기록을 단축하기 위함이냐 아니면 국위를 선양하기 위함이냐?' 그것이 아니고 기껏해야 '나는 10 만원짜리 운동화를 신는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아이들에게 일러 주었습니다. 10만 원짜리 운동화를 자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가 10만 원도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너희들은 신발을 자랑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너희 자신을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사람의 행복과 성공은 가치 있는 것을 소유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가 가치 있는 존재가 될 때 얻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복은 소유 가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 가치에 있는 것입니다.

    미신적인 신앙의 목표는 소유 가치를 높이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 신앙의 목표는 존재 가치를 높이는데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어도 부자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 목적이 소유 가치를 높이는데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으면 존재 가치가 높아집니다. 예수를 제대로 믿으면 사람이 천하보다 귀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많은 사람들 중에 그와 같은 바른 목적을 가지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막연히 미신적인 축복을 욕심내며, 그것만을 기도하며 예수를 믿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소유 가치를 위하여 존재 가치를 팝니다. 존재 가치를 팔아서 소유 가치를 높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에 그처럼 바보 스러운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를 묻는 부자 청년에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고 너는 나를 좇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우리는 소유 가치를 팔아 존재 가치를 높이라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에릭 프롬은 인간을 소유형의 인간(having mode)과 존재형의 인간(being mode)의 인간으로 나누어 생각했습니다. 소유형의 인간이란 삶의 의미와 목적을 더 많은 것을 소유(to have)하는데 두고 사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고 존재형의 인간이란 삶의 의미와 목적을 인간답게 존재(to be)하는데 두고 사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의 관심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입니다. 세상에는 소유 가치는 높으나 존재 가치는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소유 가치는 낮으나 존재 가치가 높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 누가 정말 잘 사는 사람이냐를 묻는다면 그것은 의심할 것 없이 소유 가치는 낮으나 존재 가치가 높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둘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면 바로 소유 가치는 낮으나 그래서 가난하고 좀 세상에서 불편하게 살기는 하지만 존재 가치가 높은 삶을 선택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 하나를 더 생각하고 넘어가야만 합니다. 이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쉽게 빠지는 함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무조건 소유 가치가 높은 사람은 존재 가치가 낮은 사람으로 여기는 것과 존재 가치가 높은 사람이 되려면 무조건 소유 가치가 낮은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편견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소유 가치는 높으나 존재 가치가 낮은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 무조건 소유 가치가 높은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소유 가치도 높고 존재 가치도 높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부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얼마든지 그와 같은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만 합니다.
    소유 가치가 높으면 무조건 존재 가치가 낮아진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소유 가치는 존재 가치와 비교할 때 낮은 가치라는 것뿐이지 소유 가치는 무조건 무가치한 것이고 악한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유 가치를 선으로 보는 것도 어리석은 생각이지만 소유 가치를 무조건 악한 것으로 보는 것도 그에 못지 않은 어리석은 생각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은 존재 가치보다 소유 가치를 더 중히 여기는 어리석은 인간의 욕심 때문에 많이 악해지고 혼란스러워 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무조건 소유 가치를 악한 것으로 보는 어리석은 인간의 편견 때문에 어지러워 진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극단적인 치우침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지 돈을 무조건 악한 것으로 보고 멀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부자가 되는 것을 신앙의 목표로 삼지 않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것을 신앙의 목표로 삼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자가 되는 것은 신앙과 인생의 목표와 목적으로만 삼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가난한 사람으로 사는 것보다는 부자로 넉넉하게 사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순종하여 산다면 세상은 절대로 가난한 세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빈곤은 사실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자신의 욕심을 따라 잘못 살아서 나타난 현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부를 천하고 악한 것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껏 부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회적으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여 온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나라만 해도 士農工商이라고 하여 돈을 버는 상인을 가장 천한 천민으로 취급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무역업자를 경멸하였으며 한때 일본에서도 돈을 버는 사람은 접촉이 금지된 천민계급이었습니다.
    부에 대한 정죄는 마르크스주의에서 극에 달했습니다. 모든 사회 악의 원천은 사유 재산이며 사유 재산이 사라진 공산주의 사회에서만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아름다운 구화는 사람들을 혁명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 체제 아래서 사람들이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가난과 빈곤 뿐 이었습니다. 부함이 우리 인간을 인간답게 하지 못하지만, 잘못된 부가 우리 인간을 파괴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가 문제를 삼아야 할 것은 잘못된 부이지 부 그 자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공산주의는 잘못된 부와 부 그 자체를 혼돈하여 부 그 자체를 부정한 셈이 되었지만 부 자체를 부정하여 얻은 가난이 인간을 더 인간답게 만든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자본주의에는 돈에 대한 극단적인 긍정이 있습니다. 공산주의에는 돈에 대한 극단적인 부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돈에 대한 극단적인 긍정과 부정은 모두가 다 문제가 됩니다. 우리는 다시 돈은 그냥 돈이라는 명제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돈에 대하여 우리 기독교적인 신앙의 바른 자세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소유형의 인간이 되는 것은 막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유 그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무조건 부자는 소유형의 인간이고 가난한 사람은 존재형의 인간이라고 쉽게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소유형의 인간과 소유는 사실 관계가 없습니다. 많은 것을 소유한 부자 중에도 얼마든지 존재형의 인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 중에 우리는 그와 같은 존재형의 부자들을 찾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많은 것을 소유하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 중에도 얼마든지 존재형의 인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역시 우리는 그와 같은 사람들은 성경에서 얼마든지 찾아 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찾아 낼 수 있는 많은 존재형의 사람들 중에는 부자도 있었고 가난한 사람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소유하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얼마든지 소유형의 인간들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무조건 소유에 대하여 욕심이 없는 깨끗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편견입니다. 극단적인 공산주의자들이 가졌던 편견이 바로 그와 같은 편견이었는데 그것은 얼마나 엄청난 파괴를 가져왔는지 모릅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 만은 요즘 대형교회들의 문제가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자 작은 교회에 대한 이상론들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저는 대형교회가 아름다운 교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작은 교회가 아름다운 교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래서 '작은 교회가 아름답다'라거나 '작은 교회가 더 교회답다'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런 주장은 교회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인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것은 복음과 바른 신앙고백이지 교회의 사이즈가 아닙니다. 복음과 바른 신앙고백은 능력이 있습니다. 그 복음과 신앙고백이 있으면 작은 교회도 얼마든지 능력 있고 아름다운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복음과 바른 신앙고백이 있다면 대형교회도 얼마든지 아름답고 능력있는 교회가 될 수 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아무리 복음과 신앙고백이 있다고 하여도 무조건 작은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 구실을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무조건 대형교회이기 때문에 교회답지 못한 교회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은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부한데도 처할 줄 알고 비천한데도 처할 줄 알게 되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저는 똑같은 원리가 교회의 사이즈에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그것과 상관없이 교회는 복음 때문에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가 되어야 하고 또 될 수 있다는 것이 저의 믿음입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고 조심하는 것이 편견입니다. 저는 지방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거나 말하는 사람이 제일 싫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리석은 정도가 아니라 그것은 악한 일입니다. 교회와 세상을 망치는 참으로 악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은 온통 편견 투성입니다. 이 지방 사람에 대한 편견과 저 지방 사람에 대한 편견, 가난한 사람에 대한 편견과 부자에 대한 편견, 작은 교회에 대한 편견과 큰 교회에 대한 편견등등 성숙하지 못한 생각들 때문에 얼마나 골치가 아픈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와 같은 편견으로부터 벗어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천국을 사모하고 바랄 때 꿈꾸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아십니까? 그 중에 하나가 바로 편견이 없는 성숙한 사고와 사상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좌로나 우로 치우침이 없는 건강한 세상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라고 저는 믿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말씀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돈을 숭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돈이 여러분을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제발 벗어버리시기 바랍니다. 10만 원짜리 운동화나 자랑하면서 사는 유치한 삶에서 해방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참 행복은 소유 가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 가치에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소유 가치를 팔아 존재 가치를 높이는 사람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소유 가치를 높이기 위하여 존재 가치를 낮추는 일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가장 잘 범하는 실수와 오류가 바로 그것입니다. 소유 가치에 대한 욕심 때문에 아무 돈이나 막 벌고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의 가치가 없어지고 부끄러운 존재가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돈보다 여러분 자신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자녀들에게 돈을 유산으로 물려주기보다는 여러분의 신앙과 삶을 유산으로 물려 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힘들어도 옳지 않은 돈과 내 몫의 돈이 아닌 것에 대한 욕심을 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무조건 돈을 악한 것으로 보거나 부를 부끄러운 것으로 생각하는 편견에 사로 잡히시지도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과 말씀대로 살면 궁극적으로 누구나 부유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그 부는 부끄러운 부가 아닙니다. 더러운 부가 아닙니다. 깨끗한 부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청부(淸富)라고 부릅니다.

    돈과 세상에 대하여 바르고 반듯한 사상과 신앙 그리고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말씀이 좀 복잡해 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매우 중요한 문제를 다루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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