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것 2001-12-25 17:09:29 read : 1793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 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사도행전 3장 1-10절)
<목회기도>
생명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것,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생명 주심 때문이며
우리를 살려 두신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있고
우리에게 시키실 일이 있으시기 때문임을 믿고 감사드립니다.
험한 세상에 살던 우리들,
복된 주일에 하나님께 예배 드리러
기둥교회에 나오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시간 믿음을 굳게 하는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소망을 분명히 확인하고 붙잡는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참된 사랑을 체험하는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많은 젊은이들이 군대에 나가 있습니다.
하나님, 군대에 나간 믿음의 아들들을 붙들어 주시옵소서.
특별히 기둥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일하다가
군대에 가서 수술을 받은 <이민규 전도사>도 하나님 붙들어 주셔서
그가 회복하여 기쁜 소식을 가족과 교회에 전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외국에, 객지에 나가 있는 믿음의 식구들
어느 곳에 어떤 모습으로 있든지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병상의 환자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와 함께 예배드리는 자리에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거룩한 주일, 믿음이 없어 나오지 못한 이들이
주일을 귀중히 여기고 예배를 귀중히 여기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귀한 시간 악한 마귀 틈타지 않도록
성령께서 주장하여 주실줄로 믿사옵고
귀하신 예수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할렐루야!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날, 예배의 자리에 나오심에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매일 매일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예배와 삶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들에게서 "교회가 뭐하는 곳이냐? 교인들은 무엇을 하는 사람들이냐?"는 질문을 받아 보셨을 것입니다. 대부분 교회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질문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기관과 사람을 돕는 일에 교회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더 많은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뜻으로 하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 신문에서도 보셨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 전체 사회복지시설 가운데 28% 정도의 기관을 기독교에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교 9%, 천주교 4%, 기타 종교에서 2%의 순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독교에서 30% 정도로 복지기관을 운영하고 사회와 불우이웃을 위해 많은 봉사와 후원 사업을 펼치고 있음에도 4% 정도의 복지기관을 운영하고 있는 천주교는 사회봉사를 많이 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을 믿고… 하는 일을 드러내지 않을 뿐이지, 기독교가 예수 믿는 사람이 하는 일이 많습니다. 219곳이나 되는 기독교 기관에서 운영하는 복지운영기금이 1028억원입니다. 그 중에 우리 기둥교회는 <소사구노인종합복지회관>과 <원미구노인복지회관>을 운영하고 있습니다.(2001년 3월 15일. 국민일보 16면 참조)
이렇게 교회에서 많은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별로 드러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교회는 뭐하는 곳이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뭐하는 사람들이냐?"라고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 비판적인 사고를 가지고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그러면 당신은 도대체 어려운 사람들을 얼마나 도와 주었느냐? 돈을 얼마나 내느냐?"라고 되물으십시오. 그런 질문을 받는 사람들 중에 쉽게 답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 주변에 교회가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오늘 예배 드리러 교회에 오면서도 많은 교회들을 지나쳐 왔을 것입니다. 교회가 기둥교회밖에 없어서 찾아 오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기둥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 가운데 성남, 망우리 등 먼 곳에서 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기둥교회까지 오는 길에 교회가 하나도 없었겠습니까? 많은 교회들이 있었겠지만 기둥교회를 찾아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들 가운데 '자립하여 교회다운 모습을 갖추고 일하며 봉사하는 일에 나설 만한 교회'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교회다운 건물로 우뚝 선 교회보다는 대부분 2층이나 지하에 위치한 교회들이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일부 사람들이 큰 교회를 향해 비판합니다. "교회가 커서 뭐하냐, 사람이 많이 모여야 뭐하냐?"는 비판의 목소리를 냅니다. 그러나 사람이 많이 모여야 큰 일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람이 많이 모인다고 모두 큰 일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크면 적게 모이는 교회에서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힘들고 어려운 기관이나 개인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베푸는 것이 교회의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이 우선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교회가 땅 위에 있는 목적, 지역에 교회를 세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곳곳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께 예배 드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가 땅 위에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치고, 하나님을 말씀을 배우기 위함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선교를 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삼기 위해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예수믿는 사람들이 모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교제를 나누기 위해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가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가 땅 위에 있는 목적이,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 사회봉사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땅 위에 있는 목적이 '사회봉사'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사도행전 3장 1-10절에 보면 진정,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사람에게 무엇을 주어야 하는지, 가진 것 없는 우리는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이웃에게 줄 것이 없는지를 바르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여러 문이 있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문은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dung gate'라는 문이 있는데, 사람들의 용변을 쳐내는 문입니다. 그리고 'beautiful gate'라는 미문(美門)이 있습니다. 이 미문은 성전 바깥 뜰과 안뜰의 경계에 놋으로 만들어진 문입니다. 그런데 그 미문에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자리를 잡고 구걸하고 있었고 그곳을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풍습에 의하면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 외에 성전에 가기전까지 만나는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 줄 돈을 따로 가지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래서 앉은뱅이는 사람들이 성전에 들어갈 때마다 구걸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를 향해서 "우리를 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앉은뱅이는 분명 동공이 확대되어 '돈을 주겠거니…'하는 기대에 찼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앉은뱅이에게 실망을 주고 말았습니다. 돈을 줄 것 처럼 "우리를 보라"고 하고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사람을 약올리는 말입니까! 이 부분에 대해 신학자 요한 칼빈은 "먹이를 먹기 위해 입을 크게 벌린 수탉을 놀리는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그냥 지나치지 않고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준다"고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앉은뱅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사건이 터졌습니다. 인간의 상상을 넘는 기적이었습니다.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걷기도 하며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성전에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3명의 등장 인물을 둘로 구분하여 소개합니다.
앉은뱅이는
• 앉은뱅이는 인간 존엄성을 상실한 자입니다.
거지인생입니다. 이웃도 사회도 그에게는 냉담했습니다. 그는 소외당한 외로운 자였습니다. 그는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 앉은뱅이는 자유의 상실자입니다.
불구임으로 자유를 잃었습니다. 정신적 자유, 육체적 자유를 겸하여 잃었습니다. 가고 싶은 곳에 못 가고 하고 싶은 일도 못하고 먹고 싶은 것을 못 먹습니다.
• 앉은뱅이는 단지 자기의 생계만을 구했습니다.
취미 생활, 여유를 찾을 엄두도 없이 '먹느냐 굶느냐'가 문제였습니다. 그에게서는 예수님의 필요를 느낄 수 없는 먹고 사는 데 급급한 삶의 절박함만 보였습니다.
• 앉은뱅이는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앉은뱅이는 성전 문 앞에 앉아 있으나 성전을 모르고, 성전 문에 앉았으나 하나님을 모르고, 성전 문에는 앉았으나 성전에는 들어가지 않는,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드나드는 사람, 교회 주변을 맴도는 사람 가운데도 하나님과 상관 없는 사람이 많습니다. 노래는 부르나 진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고, 교회의 일은 하나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헌신이 없고, 설교는 들으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멘하지 않고…, 교회 일을 위해, 사업을 위해, 때로 교회에서 주는 밥을 먹기 위해 교회에 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와는 상관 없이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앉은뱅이처럼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와 상관없이 교회 앞에 계십니까 아니면 하나님과 관계가 있으십니까?
베드로와 요한
기도하는 사람 베드로와 요한
당시의 유대인들은 정확히 하루 세 번씩 일정한 장소, 일정한 시간에 기도했습니다. 그 증거는 구약(시55:17, 단6:10), 신약(행10:9)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 시간으로는 아침 9시, 낮12시, 오후 3시입니다. 사도행전 3장 1절에 나오는 '제 9시'는 6시간의 차이가 있으므로 우리 시간으로는 '오후 3시'를 가리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하러 가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 하나님께 의지하는 사람, 하나님께 맡기고 사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모두 기도하러 다니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배드리기 위해, 봉사하기 위해, 이런 저런 일로 교회에 옵니다. 그러나 기도하러도 교회에 오시기 바랍니다. 기둥교회 4층에 혼자 기도할 수 있는 방 24개 그리고 여럿이 함께 기도할 수 있는 기도실을 잘 만들었습니다. 제 마음에 우리 기둥교회 성도들 모두 그 기도실을 많이 이용하셨으면 합니다. 한번도 안 가본 사람은 기도가 아니더라도 구경하러라도 한번 가보셨으면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산에 가야, 굴에 가야, 기도원에 가야, 분위기가 잡혀야 기도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모두 잘못된 생각입니다. 기도해야 하는 장소, 기도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는 "교회"입니다. "이 집은 만민이 기도하기 위하여 지은 곳"입니다. 여러분, 기도하기 위해 교회에 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올 수 없는 먼 거리에 사는 분들이 많아서 교회에서 기도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기둥교회 강단 십자가 사진을 액자에 넣어 각 가정에 드렸습니다. 다니엘처럼 성전을 향한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드렸습니다. 그 앞에서 무릎꿇고 기도해 보셨습니까?
기도는 어느 곳에서 어떻게 무릎을 꿇든지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특정한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 만든 집이 아니라면 어느 곳에서든지 다니엘처럼 성전을 향하는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자기가 기도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언제 기도하십니까? 오늘 아침 눈을 뜨자마자 기도하셨습니까? "하나님, 생명 주신 것 감사합니다. 오늘도 숨쉬며 하루를 시작하게 하시고 눈을 뜨게 하신 것 감사합니다."라고 일어나자마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기 전 기도하고, 식사 때마다 기도하고, 운전할 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하루에 10번 정도는 기도하는 삶을 살기 위해 눈 감고 고개 숙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베드로와 요한처럼 기도하러 다니는 사람, 기도하는 시간이 있는 사람, 기도하기 위해 성전을 찾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가난한 사람, 베드로와 요한
베드로와 요한은 자기 주머니에 돈한푼 갖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갈릴리 어부 출신인 베드로와 요한은 별볼일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라는 말을 통해서도 그들은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 부자가 있으시다면 죄송하지만, 우리 기둥교회에는 특별한 부자는 없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 자기 소유의 집인 것처럼 살고 있지만, 이곳 저곳 얼키고 설켜 사는 사람들이 모인 데가 기둥교회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도토리가 키재기하는 것처럼 비슷비슷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처럼 별나고 특별한 많은 것을 갖지 못했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사람이라면, 예수 믿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을 믿는다면, 예수 믿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가슴을 펴고 당당한 자신감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감을 가진 베드로와 요한
예수님을 소유한 베드로와 요한은 빈털털이었으나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자신감이 없는 사람의 어깨는 쳐졌으나
자신감 있는 사람은 어깨를 펴고 다닙니다.
- 자신감 없는 사람은 무기력해 보이나
자신감 있는 사람은 패기가 넘칩니다.
- 자신감 없는 사람은 절망적이고 부정적인 태도와 말을 하지만,
자신감 있는 사람은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말과 태도를 보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돈 한푼 없었으나 앉은뱅이에게 소리쳤습니다. 자신이 있었습니다. "우리를 보라, 우리가 가진 것은 없지만 예수의 이름을 당신에게 줍니다. 예수를 믿으시오,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시오"라고 당당하게 소리쳤습니다. 여러분, 2000년 전의 예수님과 오늘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다른 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히브리서 13장 8절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믿었던 그 예수님을 지금 우리도 믿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하셨던 그 하나님은 오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활용할 줄 아는 베드로와 요한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들이 가진 것을 알았습니다. 소유한 것을 활용할 줄 모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분도 휴대폰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예배시간에는 아예 꺼 두시기 바랍니다. 제가 어느날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고 있는데, 상대방의 말을 녹음 해 두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녹음기가 없으니 녹음을 할 수도 없고 안타까운 마음만 가지고 통화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후에 어떤 분과 만나서 "조금 전에 어떤 사람과 통화를 했는데 그 내용을 녹음해 두었으면 좋았을 텐데 녹음기가 없어서 하지 못했다"는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제 휴대폰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알고 봤더니 제 휴대폰에 녹음할 수 있는 기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도 모르고 여태까지 전화를 걸고 받는 기능만 사용해 왔던 것입니다. 있는 데도 쓸 줄을 모르면 바보입니다.
스테이턴 아일랜드에 '미스 에마'라는 사람이 50만불 상당의 재산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그중에서 27만 5천불은 현금으로 남기고, 20만불은 은행에 남기고 수백 주의 주식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미스 에마'는 굶어서 영양실조로 죽었습니다. 식사는 핫도그만 먹고, 그 핫도그 포장지로 난로에 불을 지피고 살았던 것입니다. 6억 5천 만원 상당의 재산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집에서 영양실조로 죽었습니다. 그런 사람은 죽기를 자청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 가난할 때 남을 도와 주지 못한 사람은 돈이 많은 부자가 되어도 다른 사람을 도와 주지 못합니다. 가난하고 어려울 때 십일조 못하고 헌금 하지 못하는 사람이 돈이 생겨도 아까워서 헌금하지 못합니다. 공부방이 없다고 공부 못하는 사람은 공부방이 생겨도 공부를 못합니다. 가난할 때 화목하고 행복하지 못한 가정, 돈이 없어서라고 하는 가정은 부자가 되어도 행복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더 싸우게 됩니다. 최초의 인간처럼 사람들은 이런 저런 핑계를 댑니다. 자신이 정말 가지고 있는 것을 모릅니다. "우리 집은 가난해서, 든든한 빽이 없어서, 아버지가 안계셔서, 어머니가 안계셔서, 나는 공부 한 것이 없어서, 대학을 못가서, 유학을 못가서…"라고 핑계를 대지만 대부분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은과 금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들에게 있는 것… 그것을 분명히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알 뿐만 아니라 있는 것을 고백하고 다른 사람에게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이 가진 것을 찾아 보십시오. 최소한 교회에 와서 예배 드리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아직도 믿음으로 예수를 고백하고 영원히 사는 진리를 모르는 분이 계시다면 예수 믿고 구원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미 예수 믿음으로 가슴 속에 예수님을 모시고 있는 분이라면 그 예수 믿음으로 가장 귀한 진리를 가진 사람으로서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를 가졌습니다. 그외에도 무수히 많은 것을 가졌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전한 예수님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던 앉은뱅이처럼 이제 여러분의 삶에 나태하고 좌절했던 자리에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걸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걷기도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은 앉은뱅이의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시켰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베드로와 요한이 가진 예수님의 이름은 앉은뱅이의 발과 발목에 힘을 주었습니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게 했습니다. 성전 문에 앉아 구걸만 하던 사람이 일어나 하나님을 찬미하며 성전에 들어가게 했습니다(8절).
여러분, 우리가 진정 힘든 사람들에게 주어야 하는 것은 돈, 밥, 옷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야 하는 것이 먹을 것, 돈, 물질이 아닙니다. 우리가 베풀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며,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보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합니다. 배고픔을 해결해 주고 돈을 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으로 용서해 주시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영국에서 한 청년이 장난 삼아 보낸 한 통의 편지가 우스꽝스러운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런던의 유명인사 20명이 거의 같은 시각에 모두 런던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고 합니다. 긴급전문 "모든 것이 들통났으니 속히 피신하기 바람"이라는 전문을 그 청년은 단순히 재미로 런던의 유명인사 20명을 뽑아 명단을 작성해서 일제히 같은 전문을 발송했을 뿐입니다.
여러분도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것이 들통났으니 속히 피신하기 바람"이라는 글을 보고 숨지 않고 당당히 나설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칼 바르트(Karl Barth)라는 유명한 신학자가 있습니다. 이 분은 아주 유명한 신학자입니다. 물론 저는 그분의 신학사상 모두를 따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 칼 바르트가 미국의 초청을 받고 도착하는 날, 수많은 기자들은 칼 바르트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당신이 평생동안 신학을 연구하고 세계적인 신학자가 되면서 당신이 발견한 가장 위대한 당신의 신학은 무엇입니까?" 그런데 바르트는 뜻밖의 너무나도 단순한 답을 해서 기자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둔탁한 독일식 발음으로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God loves you). 성경에 그것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 내가 발견한 가장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리고 찬송을 나즉이 읊조렸습니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있네." (Yes, Jesus loves me! Yes, Jesus loves me! Yes, Jesus loves me! The Bible tells me so.)(찬송가 411장)
가장 위대한 신학, 가장 위대한 발견은 '죄 가운데 있는 우리를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각기 처한 형편과 사정이 다릅니다. 하나님은 많이 배운 사람, 못 배운 사람, 잘 사는 사람, 못사는 사람, 권세있는 사람, 없는 사람 등 우리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의 증거가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을 믿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처럼 자신감을 가지십시오. 확신을 가지십시오. 가슴을 펴십시오. 입을 열어 그 예수를 증거하며 여러분의 삶 속에서도 처지고 주저앉아 뒹굴던 삶에서 이제 일어나 걷기도 하며 뛰기도 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승리의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합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에게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베드로와 요한은
담대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하나님, 우리들도 우리들의 삶 속에
'예수쟁이'임을 드러내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들이 살면서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이 되게 하시고
다른 사람들에게 담대히 증거하며
예수 믿는 능력을 가지고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땀흘려 얻은 것 가운데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여 이 시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들의 물질과 함께 몸과 마음을 드리오니 받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2001년 5월 20일 주일 낮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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