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행21:13)
들어가는 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언제나 소수에 의해서 전파되었고, 복음의 위대한 역사는 그런 소수의 헌신된 사람들에 의해서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삶으로 우리에게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교훈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자들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최대의 계명입니다. 사람들이 이 최대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선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만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에게 이런 복음 전파에 대한 부담감과 의지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없고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않는 사람들뿐 아니라 하나님을 잘 믿고 헌신되었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이 복음 전파에 대한 부채의식이 없는 것입니다.
귀하지 않은 생명
본문은 사도 바울의 마지막 선교 장면입니다. 그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루살렘으로 가기 전에 어떤 사람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 바울에게 나아와 띠를 가지고 바울의 손을 묶으면서 "내게 성령이 이르시기를 이 띠의 임자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이렇게 되리라" 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체포되어 심문을 받을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안 모든 교우들은 힘을 합하여 바울을 말렸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령의 그런 예언이 바울을 예루살렘에 가지 못하게 하시기 위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는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겠노라." 라는 고백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결박을 당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 하등 선교의 걸림돌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본문의 고백처럼 복음을 위해서라면 죽는 것도 각오하였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있었기에
무엇이 이처럼 바울로 하여금 환란과 핍박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가게 만든 것일까요? 사도가 예루살렘에 가려고 하는 것은 유대교의 편견에 가려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에게 죽음을 무릅쓰게 만든 것은 구원으로부터 멀어진 채, 죽어가고 있는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의 영혼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사도는 예루살렘으로 가야할 부담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예루살렘에서 죽어가는 영혼들이었습니다. 구원의 놀라운 은혜와 구속의 역사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고, 그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못박혀 죽으셨지만, 다른 도시보다 구원을 먼저 보게 하셨던 예루살렘 속에서조차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모르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먼저 들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먼저 복음을 듣고, 이렇게 믿는 것이 과연 참된 신앙, 참다운 복음에 입각해 있는 신앙인지를 점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도 선교의 대상입니다. 교회에 나왔다고, 설교를 들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위해서 먼저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이 오셔서 사람들의 마음에 죄에 대해 애통하게 하시고,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통해서 일하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은혜와 사명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교회가 성령의 능력으로 놀랍게 무장되어야 할 필요를 발견했고, 능력으로 무장되기 위해서는 변화된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간절히 기도해야 된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간절히 기도하게 하시고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우리 가운데 은혜를 주셨으며, 모든 사람들이 교회에 나올 때마다 놀라운 기쁨과 은혜로 충만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우리는 무슨 일을 하여야 합니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 부름 받은 것입니까? 하나님이 그런 은혜를 우리에게 주신 것은 당신의 마음을 알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사도가 복음을 전하면서 결박당할 뿐 아니라 죽음까지도 각오할 수 있었던 것은 첫째, 영혼들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었고, 둘째로 그의 마음속에 있었던 사명 때문이었습니다.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만났을 때 그것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자신의 편견과 잘못 알고 있었던 구약의 모든 것들이 일순간에 허물어 졌고, 죄인중에 괴수요, 포악자요, 핍박자였던 자신을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은혜로만 다가오지 않고 사명과 함께 다가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는 반드시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은 다름아니라, 내가 만난 그 예수 그리스도를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사명과 성결
하나님이 바울을 만나주셨던 그 때부터 그의 마음에는 불이 생겼습니다. 바로 영혼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해야 한다는 간절한 열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구령의 불길은 아주 정결한 환경에서만 타오릅니다. 공기가 탁하고 습기가 많은 곳에서는 불이 자꾸 꺼지듯이, 가슴속에 있는 구령의 불길도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열정으로 정화되지 않으면 타오르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이런 구령의 열정이 있었던 것은 그가 순수한 삶을 살았고, 사심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가슴속에 영혼을 향한 구령의 열정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혼탁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도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남들이 하지 않는 많은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보람과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살려고 할 때 심한 고생과 절망이 찾아왔지만 이런 놀라운 절망과 고난의 골짜기를 지나면서 그리스도의 넘치는 위로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은 사도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많은 사랑과 남이 알지 못하는 많은 지식들을 주셨고,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복음이 전해지기를 원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끔 저는 하나님께서 열린교회를 세우셨지만 교회가 서 있어도 하나님이 맨 처음 이 교회를 세우실 때의 원하셨던 모습으로 되어가지 않는 것 같은 한계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에 이 교회를 세웠을 때 교인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토요일이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나와서 예수의 복음을 전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매주 복음을 전하러 나오는 사람은 우리 교인중에 소수일 뿐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커다란 반성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보다 중요한 일이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고 예수가 누구인지를 사람들에게 알게 하는 이 일을 위해서 수고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여기에 왜 서있는 것이겠습니까? 우리가 영혼을 구원하고 복음전파를 위해서 수고하지 않는다면 마지막 날에 우리에게 무슨 상급이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동행하시는 사람
우리는 이 고통하는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사람들과 특별히 동행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 결박을 당할 뿐만이 아니라 죽는 것도 각오하였던 바울과 같은 사람들이 오늘 우리에게는 절실히 필요합니다. 사도는 칼과 죽음의 위협이 기다리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들이 없습니다. 전에는 언어와 문화의 벽, 혹은 인종의 벽을 넘어야 했지만 이제는 어느 곳에서나 예수의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모슬렘중에 지하드라는 테러리스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헌신된 모하메트교의 평신도들입니다. 어느 서방 기자의 보고에 따르면 그들 가운데에는 월급을 받는 사람들이 단 한사람도 없으며, 모두 자비량으로 와서 살인적인 훈련을 받고 사선을 넘나드는 투쟁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들중에 불평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파트타임으로 한 시간, 후에는 여름에만 단기 사역으로 후에는 그것으로도 만족이 안되어 자신의 모든 재산을 팔아 거기에 던져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느 선교사가 제게 그 지하드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자신이 엄청난 절망을 경험했음을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절망은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그들은 알라를 위해서 그렇게 자신을 불태웠는데 우리는 과연 복음을 위해서 이러한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까?
자신의 죽음으로 이룬 열매
어느 가난한 교회에서 열심히 헌금하고 기도하여 아프리카로 선교사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간 지 몇 달 되지 않아 그 아프리카 토인들에게 선교사가 피살되었습니다. 광고시간에 목사님께서 울먹이면서 성도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그렇게 기도하고 물질로 헌신하여 파송한 그 선교사가 토인들에게 순교당하였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 중에 그렇게 피살당하고 순교한 그 선교사의 뒤를 이을 사람이 없습니까? " 목사님의 말이 끝나자 마자, 그 교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나를 보내소서" 하며 일어섰습니다. 한 사람의 죽음이 수많은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복음은 누군가의 죽음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신령한 감화를 끼치고 감화를 받았던 사람들이 다시 복음 전파에 헌신하면서 그렇게 피를 잇대이고 시체가 시체를 넘어서면서 전파되어 온 것입니다.
맺는 말
비록 우리 모두가 먼 곳에 나가 복음을 전하지는 못하지만, 우리는 모두 한 마음으로 복음 전파에 동참해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한 예수의 그 놀라운 사랑이 우리 안에만 머물러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어디든지 그 복음을 들고 일어나 외치며 나가는 선교사들이 벌떼와 같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그 때까지 우리는 이 조국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미래에 할 수 있는 복음 전파를 위해서 오늘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지 않은 것은 모순입니다.
리챠드 백스터는 "지금 있는 자리에서 복음을 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가 어떤의식을 거쳐서 어디로 가든지 그것은 모두 쓸데 없는 일이다" 라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곳에서 구원을 받고 이곳에 있는 것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힘을 다하여 우리가 이 복음을 전하고 이 고난을 복음전파를 위해서 받는 것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리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 깊이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과 같이 주께서 우리의 혀가 굳어지기까지 예수의 넓은 사랑을 전파하고 우리의 심장의 피가 멎을 때까지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삶에 헌신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