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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동이를 버립니다
    2001-12-28 21:13:03   read : 2110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4:9-19,27-30
    인간의 기억은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으로 저장됩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 치매에 걸리셔서 생존하셨을 때 현재 일은 몰라도 옛날이야기는 다 기억을 하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장기기억입니다. 반면 단기 기억 있습니다. 무엇을 잠깐 기억을 하는 것입니다. 단기기억의 특징은 한 7개정도 암송을 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면 그전 것을 밀어내야 저장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화번호가 7-8자리입니다.
    여하튼 마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처를 받았다면 밀어내야만 좋은 기억이 자리를 잡을 수 있습니다. 영적인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무섭게 학대를 받으면 하나님 아버지를 무서워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좀 더 객관적으로 신실하게 믿으려면 부모님의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마리아 여인이 나옵니다. 과거가 있는 여자입니다. 많은 죄를 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이 여인에게 변화가 생깁니다. 그 변화에 대해서 28절을 보면
    물동이를 버려주고 동네에 들어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사마리아 여인에 대한 하이라이트입니다. 여러분! 물동이를 버린 것이 무슨 큰일입니까? 그러나 의미가 큽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무거운 물동이를 버리고 나를 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물동이를 버리면 큰일 날 것처럼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물동이만 버리면 변화가 생기는데 버리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물동이의 단어는 귀중한 것입니다. 물동이를 버릴 때 주님을 만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 물동이를 버렸을 때 이 여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고 우리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됩니까? 자! 보세요.
    이 여인이 예수를 만났습니다. 이 만남으로 그 날 이 여인은 참으로 엄청난 변화를 겪습니다. 예수께서 자기의 남편 이야기를 말씀하실 때 이 여인은 전신에 전율 같은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정곡을 찌르는 지적에 순간 놀랬을 것입니다. 그 말씀 한마디가 그 여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의 마음을 바꾸어 놓고 가는 길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여인의 예수와의 만남은 얼마나 소중한 만남입니까? 예수와 한 번 진지하게 만나게 되면 이런 변화의 복을 받습니다. 신앙인들에게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 일곱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 중 두 가지가 더 궁극적인 질문입니다. 그 중 하나는
    "당신은 진정으로 예수를 만났습니까?"라는 질문이고 또 하나는
    "당신은 정말 구원을 받았습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여러분, 정말 예수를 만나보셨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정말 구원받았습니까? 여러분은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습니까? 여기 이 여인은 그 당시 사회에서는 부정한 여인으로 죄인의 올가미가 씌여진 사람입니다. 당시 여인들은 아침 일찍 우물에 가서 물을 길었습니다. 그것이 정숙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대낮에 물을 길러 나갔습니다. 밤늦도록 쾌락을 즐기고 아침 늦게까지 자다가 한낮이 되어서야 일어나서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그런 그 여인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남편을 데려 오라" 그때 이 여인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이 놀람으로 이 여인은 비로소 그 생활에서 해방됩니다. 그리고 비로소 욕망에서 헤어나 자유인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와의 만남은 가장 먼저 변화를 주는 축복이 있습니다.
    첫째로 인간관계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때가 제 육시쯤 즉 한낮인 정오쯤에 물을 길러 오고 있었습니다.
    유대 여인들은 서늘할 때 물을 길러 옵니다. 그런데 땡볕을 무릅쓰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물을 기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6-18절에 나오는 예수님과의 대화 속에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다. 네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다."
    여러분! 남편 다섯에게 버림을 받은 사람입니다. 정말 사람을 만나고 싶지도 않을 것입니다. 지겨울 것입니다. 사람들이 싫어집니다. 그래서 한낮에 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당해보지 않으면 정말로 모르는 일입니다. 사람을 만나기 싫은 것! 말입니다.
    초등학교 시절을 때론 기억하기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환경조사를 했습니다. 텔레비전 있는 사람? 전화 있는 사람? 냉장고 있는 사람? 손을 들라고, 그때마다 "아버지 없는 사람! 손들어" 아버지 없는 사람은 기성회비를 깎아줍니다. 이럴 때 아버지 없는 아이에 대해 친구들이 이상하게 보는 것처럼 느끼고, 자신이 왜소해 지는 것을 봅니다.
    적어도 이 여인은 더욱 비참한 사람이었던 같아요. 다섯 사람한테 버림을 받았다는 것은 모든 관계가 파괴된 것입니다. 세상을 저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렵죠!
    그런데 이런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고 물을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7절).
    이상합니다. 아마 이 여인은 생각했겠죠.
    "이 동네 사람이 아니가 보구나! 나에게 말을 걸어오다니! 다른 사람이라면 물을 달라기는 커녕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텐데"
    그리고 나서 이 낯선 사람 예수님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녀에게 충격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서 변화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잘나가기 때문에 찾아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짐을 아시고 우리의 절망과 눈물이 함께 할 때 찾아오십니다.
    다 나를 버리고 나를 멀리할 때 주님께서 찾아오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이 예수님을 만난 이 여인은 달라졌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주님은 우리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다. 내가 나를 볼 때 나는 아무 쓸모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관심이 많으십니다. "제가 이렇게 실수를 하고 사는데요? 믿음생활을 이렇게 해도요?"
    "그래 그래도 너를 사랑한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침내 이 여인은 물동이를 버리고 주님을 전했습니다. 한낮에 이고 다녀야 하는 물동이를 버리고 주님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동네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기쁨을 회복해 주셨습니다. 자꾸 인간 관계가 힘드십니까? 물동이를 버리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물동이를 버려 주고 주님을 생각하며 인간관계속에서 기쁨을 즐기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둘째, 물동이를 버렸을 때 가치관이 바뀝니다. 폐쇄적이고 부정적인 세계관이 변화됩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서 물을 달라고 하셨을 때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하면서 인종차별에 대해 다그쳤습니다. 예수님께서 생수를 줄 수 있는 분이라고 자신을 소개했을 때도(10절), 이 여인은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면서 쪽박도 없는 주제에 큰 소리 친다고 면박을 주었습니다(11절). 더구나 우물이 깊은데 어디서 생수를 얻겠느냐고 자기가 알고 있는 세계가 전부인양 조목조목 따지듯 반문했습니다. 거기다 자신이 알고 있는 전통과 신앙의 상징인 야곱의 우물을 자랑하며 예수에 대해 우월 의식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철저히 부정적이고 폐쇄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게 무섭습니다. 폐쇄적인 가치관은 사람들을 숨막히게 합니다. 고통스럽게 합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20년 전 만해도 왼손잡이가 없었습니다. 왼손으로 밥을 먹으려면 매맞습니다. 그래서 왼손잡이는 병신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의사들이 말하길 20-30%가 왼손잡이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왼손잡이가 더 머리 좋은 사람이 많습니다.
    미국 대통령만 보면 클린턴, 부시1세 대통령, 레이건, 포드, 투르먼이 왼손잡이였습니다. 채플린, 미켈란젤로, 모차르트, 다빈치 다 왼손잡이였습니다. 만약 미켈란젤로에게 왼손을 쓰지 못하게 하면서 혼을 냈다면 천지창조 같은 작품이 나왔겠습니까?
    교회에 대해서도 폐쇄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문제를 삼게됩니다.
    오늘 이 여인도 자신의 짧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에게 대듭니다.
    상처받은 사람이 약한 자에게 더욱 큰소리치는 것이 현실이 아닙니까?
    그래서 12절에 큰 소리 한번 못 쳐본 여자가 예수님 만나서 분통을 풀어놓습니다.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큽니까?"(12절)
    그러나 주님은 공허함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13절).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물을 먹더라도 목마른 것은 당연합니다. 목마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생수의 근원이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 2:13)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멀리합니다. 그곳이 근원임을 모릅니다. 그리고 터진 웅덩이를 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4절). 이 말씀을 듣고 여인은 비로소 자기에게 절실히 필요한 물을 발견했습니다. 지금가지는 남들이 하는 대로 물동이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창피해서 사람들을 피해 다녔습니다. 세상사람들이 쓰는 방법대로 살았습니다. 물동이만 보고 살았지요. 그것이 자기를 살려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주님을 만나기 전 까지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을 피하러 물을 길러 왔습니다. 물동이를 가지고 다닌 것입니다.
    자기의 생각을 가지고 세상적인 방법을 가지고 나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목마르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이런 법이....
    바로 이것입니다. 더 이상 물동이가 필요 없습니다. 세상 걱정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것은 물동이를 버리는 것입니다. 내 생각 폐쇄적인 생각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물동이를 버리지 않고 어떻게 물동이를 가지고 와서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 있습니까? 이것저것 생각하면 어떻게 믿음의 세계를 바라 볼 수 있습니까?
    우리가 내일부터 특별 새벽기도회를 합니다. 물동이를 내버려두는 마음이 없으면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계속 물동이를 안고 사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면 주님 방법대로 살도록 노력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기적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자아인식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위선적인 자기를 포기하게 됩니다.
    생수를 달라는 여인의 간청에 갑자기 주님은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16절). 물과 남편이 도대체 무슨 관계입니까? 주님은 문제의 본질로 들어가고 계십니다. 가치관의 변화 후에 이제 그 여인 자체를 변화시키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야곱의 우물을 말입니다. 가족, 친구, 재능, 교회,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힘들어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사실 그 모든 것을 감사하는 조건으로 주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감사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다 자신의 문제입니다. 내가 해결되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물론 자신의 실패와 죄를 인정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나 본질적으로 죄를 숨기려고 합니다. 이 여인은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으면 당황하면서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17절).
    그러나 주님께서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말에 긍정하면서 역설적인 지적을 하십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18절). 남편이 다섯이 있었다는 말은 그녀의 과거의 죄와 실패를 드러내신 말이며,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라는 말은 현재의 죄와 여인의 절망을 지적하신 말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예수님의 시선을 예수님 자신에게로 돌리는 고도의 수법을 여인은 구사하고 있습니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19절).
    인간은 자신을 칭찬하는 소리에 정신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당시 인간으로서 최고의 영광스런 존재인 선지자라고 예수님을 호칭한 것입니다. 죄를 가리는데 인간은 본능적으로 지혜롭고 민첩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관심을 자기의 죄의 문제에서 떨어지게 하려 합니다. 그래서 일사천리로 예배의 문제를 들먹입니다(20절). 당시 첨예한 논쟁거리인 예배의 장소문제를 들먹이며 예배에 관심이 깊은 사람이란 것을 은연중에 드러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죄인인가요? 그 질문에 우리는 "저는 교회 나가고 있는데요, 설마
    제가 지금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요, 게다가 봉사까지 하는데.." 그러나 주님은 "니가 바로 죄인이다. 물동이를 가지고 살지 못한다."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느 시골에 한 분이 교회에 나온 지가 얼마 안됐는데, 부흥회 때에 목사님이 가정예배를 드려야 복을 받는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듣고, 가정예배를 드리려고 아침에 가족들을 다 모았습니다. 이 사람은 찬송도 잘 부를 줄 모르고, 성경도 잘 찾을 줄을 모릅니다. 아무준비도 없이 가정예배를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해야할까 한참을 생각하다가 한가지 생각을 해냈습니다. 부흥회 때에 목사님이 '할렐루야!'외치시는 것을 생각해내고는 따라하라고 하고는 '예수만세'를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듯이 세 번 외쳤습니다. 하고 나니, 기분이 좋더랍니다. 이렇게 예배드리면 되겠구나 하고 가정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분은 우리 가 보기에 무식하게 예배를 드렸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향기로운 제물로 받으셨을 것입니다.
    이 시대에 신앙도 깊은 맛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신앙도 관계와 편의와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고 좌우되고 있습니다. 이 시대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무엇이나 얄팍한 것은 좋지 않습니다. 멋이 없습니다. 관계도 그렇고 처신도 그렇고 신앙도 그렇습니다. 너무 얄팍하면 신뢰가 가질 않습니다.
    깊은 맛을 주는 신앙을 가지려면 때로 손해를 감수해야 하고 우직한 신앙이어야 합니다. 살아가는 모습이나 신앙도 우직한 분들이 깊은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없이 조용히 살면서도 할 일을 다 합니다. 그런 분들이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자기 몫을 다해 냅니다.
    한 외국인이 한국의 시골을 보기 위해 왔습니다. 어느 노인과 어린 손자가 함께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노인과 손자가 손수 쟁기를 잡고 밭을 가느라고 수고를 하고 있었습니다. 외국인이 그 모습을 보니 참 기이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가난하면 손수 쟁기를 끌고 있는가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웃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저 집은 참 가난한 모양이군요. 소 한 마리가 없어서 저렇게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자 동네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저 노인은 교회를 건축할 때 도움될 만한 것을 제공하려 했지만 그들에게는 돈이 없었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단 한 마리밖에 없는 소를 팔았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밭을 갈고 있으면서도 저렇게 행복해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깊이 있는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예수와 깊이 있게 교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정 깊은 교제를 하는 사람이라면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얼마나 무게 있는 신앙입니까? 다 바치고도 즐거운 상태,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고 행복이고 깊은 교제의 삶이 아닙니까? 주님과의 깊은 교제는 이런 축복을 줍니다. 이 시간 물동이를 내려놓으시고 "맞습니다 주님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넷째로 물동이를 버리니 사명의 변화가 생겼습니다.
    여인은 메시아를 만났습니다. 그 기쁨이 너무나 큽니다. 많은 분들이 저에게 물어 봅니다. 목사님은 어떻게 목회를 하게 되었어요? 그때마다 대답하는 것이 같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다면 무엇을 하는 것이 가장 귀한 것입니까? 그것은 사명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무엇이 우리의 사명입니까?
    남들보다 더 가진 것이 사명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을 써야 합니다. 나에게 있는 부담감이 사명입니다. 무엇인가 내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네게 있었던 아픔이 나에게 사명입니다. 다른 사람이 경험하지 못한 것이 사명입니다.
    진정 예수를 만나게 되면 그냥 살아가지 않게 됩니다. 증거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 여인을 보십시오. 우물가에서 예수를 만났습니다. 보니까 그분은 선지자였습니다. 그분은 가려져 있는 자신의 생애를 꿰뚫고 있었습니다. 그는 분명 그리스도였고 메시아였습니다. 그런 분을 이 여인이 만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예수를 진정으로 만난 사람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물가에서 예수를 만난 사마리아 여인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물동이를 버려 두고 사람들에게 달려갔습니다. 이 여인은 보잘것없는 자신에게 오신 분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변했습니다. 사명감이 생긴 것입니다. 어떻게 서든지 이 생명을 전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물동이를 버리고 말입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29절)고 외치며 다녔습니다. 그렇습니다. 물동이를 버리면 사명감이 불타오르게 됩니다. 야성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못 견디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동이를 버릴 때 가능한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가슴에 불이 붙는 것 같아 골수에 사무쳤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가서 전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도
    "내가 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모진 고난과 박해를 받으면서도 세 차례나 전도 여행을 하면서 기쁨으로 예수를 증거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증거의 삶입니다. 신앙인이 예수를 진정으로 만나면 이렇게 증거의 삶을 살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만남은 신앙인으로 하여금 움직이게 하는 힘을 부여해 주고 가만히 앉아 있도록 내버려두질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진정으로 예수를 만나면 이런 변화가 주어집니다. 깊은 교제도 주어집니다. 증거의 삶도 주어집니다. 이것이 예수 만난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혜요 축복입니다.
    여러분의 각자의 물동이는 다릅니다. 그러나 스스로는 알 것입니다. 물동이를 버리십시오.
    그리고 다시 한번 변찮는 주님의 사랑을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결국 예수님의 사랑 외에는 살수 없는 것을 아시고 승리할 수 있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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