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너는 나를 따르라 2001-12-26 16:58:41 read : 1895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본문 요10: 20∼23
우리들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뜻입
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답게 살고 계십니까? 그리스도를 따르는 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 수제자인 베드로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나를 따르라"입니다.
흔히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마지막으로 '나의 양을 먹이라' 세 번 당부하셨습
니다"라고 말하는데 정확하게는 그 다음에 "나를 따르라"고 두 번 당부하셨습
니다. 두 번째는 "너는 나를 따르라"고 "너는"을 넣어서 강하게 당부하셨습니
다.
예수님께서 오늘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보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십니
다. "나를 따르라"의 성서 원어는 "수 모이 아코론세이"(' )인데
현재형입니다. "너는 오늘 일상생활에서 계속적이고 습관적으로 나를 따르라"
는 명령입니다. 지금 이 명령에 순종하고 계십니까?
달력에는 양력이 있고 음력이 있습니다. 농사 짓는 사람들에게는 음력이 중요
합니다. 중국에서는 음력을 아예 농력(農曆)이라고 부릅니다.
러시아 로스토프 교회 최성찬 선교사님의 사모님이 집안 일로 일시 귀국했는데
"목사님, 낱장으로 된 달력을 100부쯤 구해 주세요. 그런데 꼭 음력이 들어 있
어야해요" 했습니다. "아니 러시아에서도 음력이 필요합니까?" 했더니 "거기 동
포들, 음력을 알아야 하는데 음력이 표시된 달력은 구할 수 없어서 애를 먹어
요"합니다. 그곳의 동포들, 농사를 많이 짓습니다. 그 분들, 한국말과 풍습은 많
이 잊어버렸지만 음력을 기준으로 농사짓는 것은 그대로 전해내려 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교회력(敎會曆)이 있습니다. 양력의 신정과 음력의 설이 다
르듯 교회력상의 새해는 다릅니다. 다음 주일이 대림절(待臨節) 첫 주일로 교회
력의 새해 첫 주일입니다. 따라서 교회력상으로는 이번 주간이 올해의 마지막
주간입니다.
여러분, 올해 예수님을 잘 따르며 사셨습니까?
예수님이 디베랴 호수에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 "너는 나를 따르라", 이 말씀
은 세 가지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첫째, "너는 나를 따르라" 하는 예수님의 명령에 우리는 무조건 "네"하고 대답
해야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만 "나를 따르라"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전도 사역 초기에 빌립을 보고 "나를 따르라"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43절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
라 하시니",
또 세관의 세무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마태를 보고 "나를 따르라"하셨습니다.
마태복음 9장 9절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예수님께서는 재물이 많은 청년이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
생을 얻으리이까" 물을 때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1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
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 "이
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
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그 주님께서 지금 당신을 보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다른 대답하지 말아야합니다. "네!" 해야합니다. 다른 대답하는 사람은 그리스도
인이 아닙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은 여러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셨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즉시 "네"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9장의 부자 청
년만은 예외였습니다. 예수께서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돌
아갔습니다.
이 청년은 지혜롭지 못한 청년으로 전해지고 있고 앞으로 영원히 그렇게 전해
질 것입니다. 이 청년은 영생을 얻는 길을 알려고 예수님에게 와서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19:16) 물었으나 예수님을 믿고 따르지
않음으로 영생에 들어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영생은 무슨 선한 일을 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를 때에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나를 따르라" 하는 질문에 대해 머뭇거리지 말아야합니다. "생각해 보고요" 해
서는 안됩니다. 즉시 "네" 대답해야합니다.
이번 주간 금요합심기도회에 일본선교보고를 듣겠습니다만 일본 사람들에게 예
수를 믿으라고 하면 그 사람들, 웃으면서 "생각해 보고요"합니다.
"오늘 저녁에 교회에 오세요", "생각해 보고요", 일본 사람들 아주 친절하지 않
습니까? 예의 바르게 "생각해보고요" 하면 초임 선교사들은 '아, 오겠다는 뜻이
로구나! 오늘 저녁 예배에 많이 오겠네!' 하면서 좋아합니다. 한 사람도 안 옵니
다. 예외가 없습니다. 그래서 일본이 영적으로는 한없이 빈곤한 나라가 되고 있
습니다.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하신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사
6:8) 하신 말씀의 속내용도 "너는 나를 따르라"입니다.
이사야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
했습니다. 즉문즉답(卽問卽答), 즉시 묻고 즉시 대답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
야합니다.
우리는 조금 전에 찬송가 514장 "누가 주를 따라 섬기려는가"를 불렀습니다. 이
찬송은 영국의 프랜시스 리들리 해버갈(Frances Ridley Havergal 1836∼1879)
이라는 여류 신앙인이
작사했습니다.
해버갈 여사는 음악과 어학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몸이 매우 약
해서 평생 고생했고 결국 마흔두 살로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 평안함을 누린 분이었습니다. 해버갈 여사는 늘 "내 영혼을 주께 맡기
니 그 순간부터 하늘과 땅이 더 밝게 보였다"고 간증했습니다.
찬송가를 많이 작사했는데 우리가 사용하는 「통일 찬송가」에 이 분이 작사한
찬송이 열 곡 수록되어 있습니다. 저희가 매주 봉헌 찬송으로 부르는 348장 "나
의 생명 드리니"도 해버갈 여사가 작사했습니다.
해버갈 여사가 어떤 날 역대상 12장을 읽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기 전, 사울
을 피해 숨어 있을 때에 아히에셀을 비롯해서 여러 용사들이 다윗을 따랐다는
내용입니다. 이 사람들은 사울과 같은 지파였습니다. 그래서 사울을 따르기 쉬
웠는데 다윗을 따랐습니다.
이 내용을 읽으면서 '그리스도와 사탄의 싸움에서 그리스도 편에 설 자가 누구
일까?'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묵상 끝에 작사한 찬송이 바로 514장입니다. 이
찬송의 1절은 모두 질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누가 주를 따라 섬기려는가
누가 죄를 떠나 주만 따를까
누가 주를 섬겨 남을 구할까
누가 주의 뒤를 따라 가려나
여러분 어떤 미음으로 이 찬송을 부르셨습니까? 앞으로 이 찬송을 부를 때는
마음속으로 "내가"라는 대답을 하면서 부르시기 바랍니다.
누가 주를 따라 섬기려는가 - '내가!'
누가 죄를 떠나 주만 따를까 - '내가!'
누가 주를 섬겨 남을 구할까 - '내가!'
누가 주의 뒤를 따라 가려나 - '내가!'
이렇게 부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오늘 새롭게 여러분에게 명령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이 명령
에 대해 주저하지 않고 "네!" 대답하며 주님을 따르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
다.
둘째,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나?' 상관하지 말고 주를 따라야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보고 "내 양을 먹이라" 세 번 당부하신 다음에 베드로가 순
교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18절의 말씀 가운데,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는 베드로가 십자가
에 달려 순교할 것을 예고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나를 따르라"하셨습니
다.
베드로가 보니까 요한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20절,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여기 "예수께서 사랑하는 제자"는 요
한입니다. 요한이 요한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자기 이름을 넣기가 어색하니까 이
렇게 돌려서 표현했습니다.
베드로가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나는 순교하겠지만 요한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래서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예수
님의 대답은 "내가 요한은 오래 살게 할지라도 너는 상관하지 말아라, 너는 나
를 따르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나?'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나?' 상
관하지 말고 주님을 따라야합니다.
'저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네요. 나도 예수님을 따르지 않겠어요' 하는 것은
극단적으로는 '저 사람은 지옥 쪽으로 가네요. 나도 지옥 쪽으로 가겠어요'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찬송가 387장을 아시지요?
나는 예수 따라 가는 십자가 군사라
주 이름 증거하기를 왜 주저하리요
다른 군사 피 흘리며 나가 싸울 때
나 혼자 편히 앉아서 바라만 보리요
그 다음, 후렴은 어떻게 시작됩니까?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 어찌든지 나 주님의 용사되리
나는 주의 군사되어 충성을 맹세하여
내가 승리하기까지 주 은혜로 싸우리
주의 용사된 나에게 주의 일 맡기소서
여러분, 다른 사람은 어찌든지 여러분은 주님의 용사되어 충성스럽게 싸우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는 요한의 길을 마련하셨고 베드로에게는 베드로의 길을 마
련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각자의 길을 마련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예비하신 나의 길을 가야합니다. 다른 사람의 길과 비교할 필
요가 없습니다.
"주님 내 길 예비하시니 나 기뻐합니다"라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입으로는 이
렇게 노래하면서 마음으로는 "주님이 예비하신 내 길이 다른 사람보다 좁고 험
해서 나 불평합니다" 해서는 안 됩니다.
미태복음 25장에 달란트 받은 종들의 비유가 나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힘써 일해서 다섯 달란트를 남겨 칭찬 받았습니다. 두 달란트 받은 종도 마찬
가지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왜 이렇게 했을까? 혹시 다른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맡기면서 자기에게는 한 달란트만 맡긴 것이 서운해서 이렇게 한 것이 아닐까?
이런 짐작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종은 더욱 어리석은 것이 됩니다. 자기가 받은 달란트 가지고 최
선을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적게 받았기 때문에 부담이 적을 수도 있
습니다.
어느 의사 선생님이 큰 종합병원을 책임지고 있다가 작은 규모의 개인의원을
개업하고 일하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그 의사 선생님, 아주 기쁘게, 만족스
럽게 일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그 달란트의 비유를 잘 보세요. 달란트를 준 것이 아닙니다. 맡
긴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14절,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
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내 것 아니고 맡은 것인데 다른 사람과 비교하
면서 기분 좋아하고 언짢아 할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나중에 주인이 다 찾아
갑니다.
학교 선생님들 보니까 담임한 반의 학생들 숫자가 많으면, 학생들을 많이 맡으
면 오히려 싫어하더군요.
요한복음 21장 20절에서 22절까지의 문답을 이렇게 바꿀 수가 있습니다.
"주님, 이 사람(요한)에게는 어떤 임무를 주셨나요? 그의 자리는 어디이고 그의
운명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기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이렇게 해석됩니다.
"너는 나를 따르기만 하지, 다른 사람이 어떤 일을 맡든지, 그가 어떻게 되든지,
그가 얼마나 오래 살든지 관심 갖지 말라, 묻지 말라"
"너의 운명을 요한의 운명과 비교해서는 안되며 오직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사
명을 완수하는데 관심을 기울여라"
바울 사도는 로마서 12장 3절에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
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
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루고 있는 지체입니다. 팔을 팔로서의, 다리
는 다리로서의 역할에만 관심을 쏟고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전심전력할 때
그 교회는 힘차게 성장합니다.
팔이 다리 일까지 하려고 하고, 다리가 다리 일을 하지 않고 팔의 일을 하려고
하면 그 교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공자는 이상적인 삶의 모습, 또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으로 군군신신부부(君君臣
臣父父), 여섯 글자를 들었습니다. '군'은 임금 군자입니다. '신'은 신하를 말합니
다. '부'는 아버지를 말합니다. 임금은 임금의 역할을 잘 하고 신하는 신하의 역
할을 잘 하고 아버지는 아버지의 역할을 잘 하면 그 사람은 행복하고 그 사회
는 발전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기 직전에 제자들이 급하게 물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회
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예수님의 대답은 조금 냉정하게 느껴집니다. "때와 시기
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그 다음에 사도
행전 1장 8절에서 증인의 사명을 다할 것을 당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실 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증인의 삶을 살기에 힘써야합니
다.
다른 사람에게 주신 달란트, 다른 사람에게 맡기신 일, 다른 사람에게 허락하신
처지와 형편,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너희의 알 바 아니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전서 4장 15절에는 남의 일에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라고 했습니
다. 여러분, 남의 일에 간섭하다가 어려움 겪는 일이 없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의 길에 신경 쓰지 말고 주님께서 나에게 걸으라고 하신 길을 걷기
바랍니다.
셋째, 주님은 우리의 부족함을 따지지 않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 분임을 알아
야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처음 "나를 따르라" 하신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를 제자
로 부르실 때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 18절에서 20절까지를
읽어드립니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
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
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
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베드로가 "나를 따라오라"는 예수님의 초청에 응해 예수님을 따르는데 처음에
는 앞장서서 잘 따랐습니다. 수제자란 인정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을 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
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앞장서서 대답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체포 당하셨을 때 멀리서 따랐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결정적인 실수를 했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너는 나를 따를 자격 없어!" "내가 너에게
나를 따르라고 한 것 취소야!" 하시지 않았습니다.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묻고 세 번 "내 양을 먹
이라"하셨습니다.
왜 같은 말을 세 번 하셨을까? '중요하기 때문이다', '성서원어로는 사랑이라는
말이 여러 가지인데 만족한 답이 나올 때까지이다', 여러 가지 대답이 있는데
그 대답 가운데 하나가 '세 번 부인한 죄책감을 씻어주기 위해서이다'입니다.
예수님은 결정적인 실수를 한 베드로에게 다시 사명을 주시고 변함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2001년을 출발하면서 우리는 모두 주님을 잘 따를 것을 다짐했습니다. 이 해의
마지막 한 달을 앞두고 돌아보니 실수한 것이 참 많습니다. 그 가운데는 용서
받기 어려울 것이라고 여겨지는 실수도 있습니다. 주님을 따를 자격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예수님은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실 때도 "나를 따르라", 이제 부활하시고 이 땅
에서의 사역을 끝마치면서도 "나를 따르라"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성도들의 삶에 있어서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요즘 저희 교회에는 새로 나오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유명한 부흥사인 무디 선생이 미국 매사추세스 주 브릭톤(Brickton)이라는 곳
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 동안 집회에서 받은 은혜를
간증하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한 청년이 일어났습니다. 초신자인 것 같았습니다. 그 청년은 이렇게 말했습니
다. "나는 확실하지는 않으나 앞으로 그대로 믿고 의지하며 순종하렵니다", 새
로 나오는 성도들도 이렇게 말하시기 바랍니다.
이 집회에서 성가를 인도하기 위해 참석했던 타우너(Towner) 박사가 이 청년
의 간증을 듣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타우너 박사는 이 이야기를 자기 친구인
죤 세미스(John Sammis) 목사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죤 세미스 목사는 이 이야
기를 듣고 역시 은혜를 받아 찬송시를 하나 작사했습니다. 그것이 찬송가 377
장 "예수 따라가며 복음 순종하면"입니다.
예수 따라 가며 복음 순종하면
우리 행할 길 환하겠네
주를 의지하며 순종하는 자를
주가 늘 함께 하시리라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우리 행할 길이 환해집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
은 즐겁고 복된 길입니다.
독재자들은 몽둥이를 들고, 총이나 칼을 들고 "나를 따르라" 하지만 주님은 인
자한 얼굴로 "나를 따르라"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할 때의 "따르라"의 성서 원어인 '아콜루테오'는 "동행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나를 따르라" 하는 것은 "나와 동행하자" "나와 함께 여행하자"는
뜻입니다.
대통령이 어디 가는데 "나와 같이 갑시다" 하면 참 좋아합니다. 이번에도 대통
령이 해외에 가는데 같이 가려고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분들의 이야기가 보
도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여러분을 보고 "나와 같이 갑시다"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오늘은 찬송가를 자주 인용하게 됩니다. 찬송가 456장의 일 절,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그 다음 무엇입니까? "즐거운 일 아닌가", 그렇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 주님과 동행하는 것, 주님과 여행하는 것, 즐거운 일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주님께서 오늘, 지금 여러분을 보고 "나를 따르라"하십니다.
주저하지 말고, "네!" 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은 어떤 길로 따르나 하지 말고 나의 길로 따르시기 바랍니다.
허물 많은 나를 보고 따르라고 하시는 것 감사하면서 따르시기 바랍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하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리스도인의 본분을 다
하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앞장서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