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영혼과 나누는 대화 2001-12-26 16:44:07 read : 1829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본문 눅 12: 13∼21
오늘 본문에 「개역 개정 성경」은 "한 부자 비유"라는 너그러운 제목을 붙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경은 "어리석은 부자" 또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라는 제목을 붙이고 있습니다. 주석 성경을 가지고 있는 분들은 그런 제목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2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 부자에게 "어리석은 자여"라고 부르셨으니 이 제목들은 타당합니다.
저는 이 부자에게 "어리석은 부자"라는 이름 대신에 "억울한 부자"라는 이름을 부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자는 영혼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말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정말 어리석은 사람들은 영혼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점점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1960년대에 김형석(金亨錫)이라는 철학교수가 쓴 「사랑과 영원의 대화」라는 책이 대단한 베스트 셀러가 된 일이 있습니다. 이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제목이 매력적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영혼은 영원의 일부인데 이 책이 지금 이런 제목으로 나온다면 베스트 셀러가 될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유물론자들은 두말할 것 없이 영혼 같은 것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 부자는 영혼이 있다는 것은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영혼과 나누는 대화의 내용이 나빴습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부자"라는 명예스럽지 못한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매우 억울합니다. 대학입학시험을 칠 때 수능고사 점수로는 합격권에 들었는데 면접점수가 좋지 않아 불합격된 경우에 비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이 부자가 자기의 영혼에게 "내 영혼아, 내가 그 동안 농사에 너무 바빠서, 또 곳간을 크게 짓느라고 바빠서 너를 돌보지 못해서 미안하다. 이제부터 영혼의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마. 내 영혼아, 육신은 곡식을 먹고 우유를 마시지만 영혼은 기도로 숨 쉬고 말씀을 먹고 묵상과 경건을 영양제로 삼지? 내 이제부터 너를 위해 기도와 말씀 섭취와 묵상과 경건에 힘쓰마!" 이런 대화를 나눴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부자는 대단히 지혜로운 부자, 경건한 부자, 물질적으로도 축복을 받고 영적으로도 축복을 받은 부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영혼이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최소한 믿으려고 애 쓰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영혼이란 무엇인가, 영혼은 과연 있는가, 이런 문제는 다루지 않으려고 합니다.
모든 종교의 기본은 영혼이 있다는 것을 믿는데서 출발합니다. 그것이 없다면 이 자리는 교회가 아니라 윤리학 교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때때로 이유 모를 그리움 같은 것을 느끼며 깊은 고뇌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영이 하나님을 찾으려는 노력입니다.
영혼이 있다는 것을 믿는 점에서 우리는 일단 이 부자와 같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이 부자와 달라져야하겠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영혼과 활발한 대화, 좋은 대화, 격에 맞는 대화를 나누기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영혼 문제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야고보 사도는 야고보서 2장 26절에서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혼 없는 몸은 죽은 것이다" 이 사실을 아주 기초적인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영혼 문제를 귀중하게 여기지 않은 생활은 천박한 생활입니다.
지금 이 예배실 안에 불이 꺼진다면 우리는 우왕좌왕 할 수밖에 없습니다. 잠언서 20장 27절은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혼이 없다고 하는 것은 이 등불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영혼 문제를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은 이 등불의 불빛이 희미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인간복제 기술이 많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인간 복제 기술이 더욱 발전하면 나를 하나 복제해 놓고 필요하면 그 복제된 나를 활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아픈 부분이 있을 때는 복제된 나의 그 부분을 갖다 끼워서 건강하게 활동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영혼은 복제할 수 없습니다. 요즘 생명복제 문제도 생명경시 풍조라든가 하나님의 생명창조 영역 침범이라든가 하는 점에서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데 만일 영혼복제 문제가 나온다면 그때는 정말 말세가 될 것입니다.
나의 영혼은 복제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소중하고 엄숙합니다.
인간이 무엇입니까? 영혼이 육체라는 옷을 입고 사는 존재입니다.
옷도 중요합니다. 인간생활에 기본적인 삼 요소가 의식주인데 의(衣)가 제일 앞에 나올 만큼 옷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몸이 있어야 옷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인간의 육체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영혼은 결코 사라질 수 없습니다.
이 세계가 아무리 진보하더라도 인간이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분명한 자각이 따르지 않으면 그 진보는 헛된 것입니다. 진보가 아니라 퇴보입니다.
마귀들의 나라에서 회의가 열렸습니다. 마귀들이 그 동안 세상에 나가서 한 일을 보고하는 보고대회입니다.
첫 번째 마귀가 보고합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전도자가 있었는데 이 놈이 우리들이 하는 일에 방해가 될 것이 분명해서 이 전도자가 쓸쓸한 들판을 지날 때 나는 사나운 짐승을 시켜 물어뜯어 병신이 되게 했습니다.", 마귀 대왕이 혀를 차며 말합니다. "너는 수고는 했지만 그는 누워서 계속 기도하고 찬송할 테니 헛수고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두 번째 마귀가 보고합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 수백 명이 배를 타고 어디를 가기에 나는 사나운 풍랑을 일으켜 배가 파선되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모두 바다에 빠져 죽게 했습니다", 마귀 대왕이 칭찬을 하지 않고 화를 냅니다. "너는 그들의 영혼이 어떻게 되었으리라고 생각하느냐? 모두 하늘 나라에 갔을 것이 아니냐? 하늘 나라의 세력을 강하게 만들어 주었으니 너는 이적행위를 했다!"
세 번째 마귀가 보고를 합니다. "대왕님, 저는 많은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한 사람이 있는데 저는 그에게 끈질기게 접근해서 '영혼 같은 것은 없다. 영혼을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저 이 세상에서 잘먹고 잘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속삭였습니다. 그 사람이 처음에는 나를 멀리하더니 점점 내 말에 귀를 기울이더니 나중에는 내 말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의 영혼이 처음에는 맑고 깨끗하고 힘이 있더니 내 말에 빠져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마귀 대왕이 셋째 마귀를 칭찬합니다. "너는 참 중요한 일을 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바로 그런 것이다"
우리는 이 세 번째 마귀가 우리 안에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막도록 영혼에 파수꾼을 세워야합니다.
믿음이 영혼의 파수꾼이 되어 줍니다.
믿음은 또 영혼의 보험도 됩니다. 영혼이 손상을 입었을 때 회복되는 것을 도와줍니다.
저는 보험에 대해 깊은 이해가 없는데 이번에 이런 고마운 체험을 했습니다.
감리교에서는 해외 선교사가 현지로 갈 때 반드시 보험에 들게 합니다. 해외 선교사 파송을 받기 위해 감리회 본부에 제출해야 하는 서류들 가운데 보험가입증서가 꼭 들어가야 합니다. 저희 교회에서 선교사 파송예배 드릴 때 보험증서 전달하는 순서가 있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번에 구 소련선교회 소속으로 카자크 공화국 잠볼에서 수고하고 있는 노성열 선교사가 전도여행 중에 차량사고를 만나 세 분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선교사 자신을 포함해서 세 분이 중상을 입은 사고가 생겼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주보 7면에 있습니다.
저희 교회도 그 선교사가 소속된 선교회의 회원교회이기 때문에 수습하는 일에 동참했는데 보험회사에 연락을 했습니다. '이거 이 서류 가져와라, 저 서류 가져와라 얼마나 복잡할 것인가? 말도 통하지 않는 먼 나라의 그것도 지방에서 일어난 사고인데 복잡하겠구나!' 했는데 아니예요. 금방 적지 않은 보험금을 지급해 주더군요. '보험이 이렇게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것이로구나!' 알았습니다.
저희 교회에 생활설계사로 수고하고 있는 성도들이 많은데 그 분들 참 유익한 일을 하는 분들입니다.
믿음은 영혼의 보험입니다. 영혼이 위험에 빠졌을 때 얼른 도와줍니다. 회복되게 해 줍니다.
영혼의 파수꾼이며 보험인 믿음을 튼튼하게 갖기 바랍니다. 확고부동한 믿음의 토대 위에 서서 두려움에서 벗어난 영혼을 가지고 사는 삶이 아름다운 삶입니다.
자, 다음에 우리는 "나는 내 영혼과 대화를 얼마나 활발하게 하고 있는가?" 한 번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부부간에 대화가 없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부모와 자녀간에, 선생과 학생 사이에 대화가 단절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대화가 없는 것은 이렇게 심각한 문제를 가져옵니다. 제일 심각한 것은 영혼과 대화가 없는 것입니다.
미국 가든 그로브의 크리스털 교회 설립자로 유명한 로버트 슐러 목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물론 당신은 숨쉴 공기와 마실 물과 먹을 음식이 필요하다. 세 가지 요구조건이 만족되지 않을 때 당신의 육신은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중의 어느 것보다도 더욱 간절히 요구되는 욕망이 있다. 바로 당신의 영혼이다. 만일 당신이 살아있는 영혼, 성장하는 영혼, 정열적이고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 영혼, 낙관적이고 강한 영혼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면 살아 있는 육신이 있다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공기나 물이나 음식보다도 더 필요로 하는 것은 당신 내부의 진정한 힘과 생명을 부여해 줄 수 있는 영혼이다.
우리의 영혼이 살아있는 영혼, 성장하는 영혼, 정열적이고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 영혼, 낙관적이고 강한 영혼이 되기 위해서는 영혼과 대화를 부지런히 해야합니다.
노사간에 대화가 없는 직장일수록 노사분규가 심한데 영혼과 대화가 없으면 육신생활과 영적인 생활간에 큰 분규가 일어납니다.
육체와 영혼은 우리 내부에서 늘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육체의 요구에 쉽게 쏠리고 영혼의 가르침을 잊어버리곤 합니다. 육체의 요구를 따라 헤맬 때 오히려 사람은 자기를 잃어버리고 놓치게 될 것입니다.
영혼과 더불어 진지하게 대화할 때 비로소 사람은 자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영혼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영혼과의 대화를 잃어버린 육체는 일개 동물과 같은 유기체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의 육신은 스무 살 안팎을 전후해서 성장을 멈춥니다. 그러나 영혼은 끝까지 성장합니다.
아무리 잘 가꾸어도 우리는 육신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유지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영혼은 대화를 통해 가꿀수록 빛나며 아름다워집니다.
대화는 서로의 관계를 발전시키고 이해를 깊게 합니다. 어느 교육학자는 대화는 기적을 낳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대화의 기적」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제일 큰 기적은 영혼과 대화를 나눌 때 일어납니다.
공기 없이 육체를 지탱할 수 없듯이 영혼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일 순간도 지탱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요한 웨슬리 목사님의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자각이 있을 때 우리는 영혼과 풍성한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자,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을 생각합니다. 영혼과 어떤 대화를 나누시겠습니까?
이 부자는 영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영혼과 대화를 나누려 한 것까지는 합격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화의 내용이 불합격이었습니다.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했습니다.
물질이 영혼을 살찌우지 못하며 영혼의 갈증을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역설이지만 육신의 음식을 먹지 않는 금식이 오히려 우리의 영혼을 살찌게 합니다.
먼저 말씀 드린 모범답안을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내 영혼아, 내가 그 동안 농사에 너무 바빠서, 또 곳간을 크게 짓느라고 바빠서 너를 돌보지 못해서 미안하다. 이제부터 영혼의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마.
내 영혼아, 육신은 곡식을 먹고 우유를 마시지만 영혼은 기도로 숨쉬고 말씀을 먹고 묵상과 경건을 영양제로 삼지? 내 이제부터 너를 위해 기도와 말씀 섭취와 묵상과 경건에 힘쓰마!"
예수님은 21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영혼에 대해서 이런 대화를 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우리들이 영혼의 문제에 대해 각성을 갖도록 집오리의 비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봄이 되어 들오리 한 마리가 자기의 동무들과 함께 지중해 지방에서 여름을 보내기 위해 노르웨이로 날아갑니다. 이 오리는 네덜란드 땅을 통과할 때 헛간에서 살고 있는 집오리들을 보았습니다. 날아가던 들오리는 그 집오리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와서 집오리들의 풍성한 대접을 받으며 여러 날을 보냅니다. 하루는 자기의 동무인 들오리들이 공중으로 날아가는 소리를 듣고서 그들과 함께 날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며칠 동안 풍성한 대접을 받은 터이라 몸이 살찐 탓으로 무거워서 헛간의 처마까지도 날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로 내려와서 헛간에 살고 있는 집오리들과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가을이 되면 남쪽으로 날아가는 동무들의 소리를 듣고 또 봄이 돌아오면 동무들이 북쪽으로 날아가며 우는 소리를 듣고 그들이 날아가는 것을 바라보곤 하였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 들오리는 날개를 펴서 땅에서 떠올라 자기의 동무들과 함께 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헛수고였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자기의 동무들이 머리 위로 북쪽으로 또는 남으로 날아가는 소리를 듣고서도 별로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저 집오리의 하나처럼 되어 헛간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날지 못하고 땅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 비유가 사람들의 영혼에 일어나는 현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심령 속에 나타났던 영혼에 대한 깨달음이 이 세상의 것들과 어울려 사는 동안에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사라지고 말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을 나는 들오리입니다. 집오리들과 같이 땅위의 일들을 이야기하려 하지 말고 들오리들과 같이 하늘의 일들을 이야기해야합니다.
집오리 차원의 대화를 나누다가 보면 우리의 육신은 살이 찝니다. 그러면 영혼이 날 수 없습니다. 영혼을 살찌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진리, 사랑, 믿음의 대화로 채워질 때 아름다운 것이 됩니다.
150년 전쯤에 미국 필라델피아에 엘리자 에드문즈 히윗(Eliza Edmunds Hewitt 1851∼1920)이라는 여자 교사가 있었습니다. 필라델피아 사범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우수한 교사였습니다.
히읫 여사가 담임하고 있는 학생 가운데 문제아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 학생을 잘 타이르고 있는데 이 학생이 느닷없이 단단한 것으로 히윗 선생의 등을 때렸습니다. 히윗 선생은 등뼈에 큰 상처를 입고 반년 가까이 석고붕대를 감고 병석에 누워있어야만 했었습니다. 그의 나이 설흔여섯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 학생에 대한 미움, 직업에 대한 회의, 답답함, 이런 것들이 얼마나 컸을 것입니
다.
어느 햇살이 비치는 봄날, 히윗 여사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페어마운트 공원을 산책하게 되었습니다. 햇살 속에서 영혼과 대화를 나누며 산책할 때 그는 영혼에 기쁨이 스미는 것을 느꼈습니다. 자기의 영혼에 햇빛이 비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을 신앙시로 표현한 것이 오늘 설교가 시작되기 전에 부른 찬송가 488 "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 주 영광 찬란해"입니다.
병에서 어느 정도 회복된 히윗 여사는 교회학교 교사 일에 더욱 힘써 일흔 살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칼빈장로교회의 초등부 부장으로 수고했습니다. 그는 평생 셋을 크게 사랑했는데 하나는 주님, 또 하나는 주님이 지으신 자연, 그리고 또 하나는 교회학교 어린이들이었다고 합니다.
찬송가 470장 "내 평생에 가는 길"의 작사 배경은 성도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 스페포드(Spafford) 집사의 네 딸이 여행 중에 배가 침몰해서 모두 물에 빠져 죽었는데 스페포드 집사가 그 지점을 통과하면서 지은 찬송시입니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그는 말할 수 없는 비통함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영혼의 평안함을 얻고 그 비통함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찬송가 464장에서 489장 사이에는 이런 찬송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청하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아마 형이 유산을 독차지했거나 법에 정해진 것보다 더 많이 차지했던 모양입니다. 당시 그런 문제가 생기면 랍비에게 가져오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거절합니다.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영혼문제이다" 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말씀을 하시지요.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그렇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그의 영혼이 얼마나 건강한가에 있습니다.
요즘 육신의 건강에 대한 관심이 참으로 큰데 영혼의 건강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기 바랍니다.
이어 예수님께서 이 부자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름은 학생들은 방학, 성인들은 휴가, 시간의 여유를 갖게 되는 때입니다. 흔히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는데 이제는 여름이 독서의 계절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때를 영혼과 대화를 나누는 일에 힘써야겠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나의 일생의 사명은 노인이나 청년이 육체 및 부귀 기타의 헛된 것을 지나치게 사랑하고 보다 그들이 마음을 다해 사랑해야 할 영혼에 대하여는 냉담한 것을 경계함에 있다"고 했는데 여름성경학교와 여름수련회에 임하는 교회학교 교사들은 학생들이 마음을 다해 영혼을 사랑하는 존재들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영혼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고 영혼과 대화를 활발하게 하는데 바른 대화를 해서 칭찬 받는 성도, 하나님께 부요한 성도, 참 생명을 풍성하게 누리는 성도가 되기를 우리들의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