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싸우는 것이다. 2002-01-10 23:23:25 read : 2242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성경말씀: 딤후 4;6-8
어느 분이 제게 요즈음 살기가 퍽 힘들다고 하면서 이러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요즈음은 사는 것이 전쟁하는 것 같아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싸우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이야기가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 지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사형당할 날이 얼마 안 남았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관제란 제사를 드릴 때 포도주를 붓는 제사를 말합니다. 전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제사의 마지막 순서입니다. 이제 인생의 마지막 순서가 되었습니다.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이렇게 말할 때에 바울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착찹하였을 것입니다.
이 때 바울은 자기 일생을 돌아보면서 선한 싸움을 싸운 일생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선한 싸움을 싸웠다는 말은 헬라어로 <아고나>라고 되어 있는 데 이는 격투기 선수들이 혼신을 다 하여 싸우는 모습을 그리는 말입니다.
로마 원형 경지장은 2000년전에 세워진 운동장입니다. 5만명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운동장 가운데 사자같은 맹수와 사형수를 싸움을 시킵니다. 그러면 사자밥이 되느냐 살아남느냐 둘 중에 하나였습니다. 맹수와 싸워서 이기면 살려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생명을 건 결사적인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5만명의 군중들은 그런 실제적이고 잔인한 싸움을 보면서 즐겼습니다. 이 때 사형수는 죽느냐 사느냐의 싸움이라 그야말로 필사적인 싸움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에서 지냈으니까 이런 경기를 보았거나 들어서 알고 있거나 둘 중에 하나였습니다. 이런 모습을 생각하며 감옥에서 자기는 선한 싸움을 일생 싸워 왔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생활이란 선한 싸움을 싸우는 생활입니다.
누구와 싸우며 살아야 합니까?
1.자기와의 싸움
이 세상에서 가장 이기기 힘든 상대는 자기입니다. 내 주인이 내가 아닙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16;32)
죤 맥스웰 목사님은 <리더십의 능력>이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지도자란 제일 먼저 자기를 이길 수 있어야 한다는 데서 지도자론을 출발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의욕에 차서 항상 일하려고 하는 데 그 때마다 일을 방해하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잡히기만 하면 박살을 내 주어야겠다고 기회만 엿보고 있었으나 항상 방해하는 데 언제나 도망만 다니지 잡히지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자기가 열심히 일을 하려는 데 모자를 눌러 쓴 그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일을 방해하였습니다. 맥스웰 목사님은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고 그 사람을 꼭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누구인가? 도대체..> 하면서 모자를 벗겨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자기였습니다. 그 때 그는 외쳤습니다.
<나의 가장 큰 방해자는 나다>
여기에서 지도자론을 전개시켜 나갔습니다.
알 유다비는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간 사람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끝장을 내는 <1M 철학> 때문입니다. 그가 <1M 철학>을 가지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광산업을 하던 그가 금광을 비싸게 사서 금을 캐내려 가는 데 처음에는 좋은 금이 많이 나오다가 그치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파도 금광맥이 안 잡혔습니다. 그 동안 벌은 돈을 모두 투자하였습니다. 그러나 허사였습니다. 빚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끝장이었습니다. 포기하였습니다. 남은 것이라고는 빚 뿐이었습니다. 모든 채광 도구도 고물상인에게 헐값에 팔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한편 그 금광을 산 고물상 주인은 자기 친구에게 한번 와 보라고 하였습니다. 알유 다비가 신경질을 부리며 던진 고괭이가 아직도 꽂혀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말했습니다.
<여기 맥이 이상하다.한번 이 고괭이를 집어 파보아라>
그래서 그 고괭이를 빼서 1M 정도를 파내려 갔을 때 노다지가 나오기 시작하여 갑부가 되었습니다. 알 유 다비는 이 소식을 듣고 <포기하려 할 때 1M만 더 하자>라는 <1M 철학>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돈없이 할 수 있는 사업인 세일즈 맨으로 들어가서 물건을 권할 때 거절하면 그 때부터 더 매달렸습니다. <1M 철학>으로 그는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래서 가정 사역을 하는 송 길원 목사님은 이 글을 읽고 <아들아! 1M만 더 파보렴>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자기와의 싸움에 승리하여야 참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삼각산 기도를 약 5년 하였습니다. 목회 초기의 열성이 부럽기만 합니다.거의 매일 밤 삼각산으로 올라가 기도하다가 통행금지가 넘으면 꼬박 바위에서 밤을 지내곤 하였습니다. 그 영력을 지금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때 한 분이 눈위에서 6시간을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나도 눈위에서 6시간 기도할 수 있을 때까지 나를 훈련시키려고 애를 써보았습니다. 그 도전에 실패하고 말았지만 그 때의 그 기도능력을 오늘까지도 나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말했습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쌍용건설 직원 김 일용(29세)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는 작년도 모 대학 건축과를 졸업하고 입사시험에 109번이나 낙방하였습니다. 금년 3월 쌍용입사시험에 110번째로 합격하였습니다. 그 동안 신입사원 입사시험에 109번 쫓아디니느라고 서류 준비한 돈만 100만원이 넘었습니다. 몇번이고 포기하려고 하였지만 될 때까지 한다는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서양 속담에 <포기하지 않는 개구리가 버터를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속담의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두 마리 개구리가 우유통에 빠졌습니다. 미끄러워서 나올 수 없었습니다. 한 마리는 절망속에 빠져 죽었습니다. 한 마리는 계속 발을 저었습니다. 그랬더니 버터가 되었습니다. 버터 위에 앉아 버터를 즐기며 살았습니다. 자기와의 싸움에 승리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싸우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나와 싸워 나가며 내가 나를 이겨야 합니다. 그래야 참 승리를 할 수 있습니다.
2.마귀와의 싸움,즉 죄와의 싸움
우리가 하나님이 자녀가 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운명적으로 마귀와 싸우게 되어 있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원수이기에 하나님의 자녀를 공격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정체를 이렇게 들어 내셨습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바울은 우리의 싸움을 이렇게 정의하였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6;12-13)
베드로로 말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벧전 5;8-9)
마귀는 우리의 영을 파괴시고 혼을 파괴시키고 육을 파괴키는 못 된 원수입니다. 우리는 마귀에게 결코 속지 말아야 합니다. 대적하여야 합니다. 늘 싸워야 합니다.
나는 시골에서 국민학교 3학년까지 다녔습니다. 큰 산을 하나 넘었습니다. 저수지 옆을 걸었습니다. 30분 정도되는 거리를 매일 다녔습니다. 여름은 너무 더웠고 겨울은 벌판과 산바람이 살을 도려내는 것같았습니다. 가다가 힘들면 길거리에 앉아 삘기 산딸기를 따먹었습니다. 때로는 뱀에 놀라 도망치기도 하였습니다. 한번은 우연히 그 곳에서 가까운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40년만에 그 길 생각이 났습니다. 국민학교 동창도 만났습니다. 그래서 그 길을 한번 보고 싶가고 하였습니다. 그는 나에게 가보면 놀랄 것이라고 귀뜸을 하여 주었습니다. 왜 그런가 하고 가보고 정말 놀랐습니다. 40년만에 보니. 이제는 산밑으로 큰 도로가 났습니다. 차를 타고 다니지 걸어 다니는 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길을 걷는 이가 없고 보니 길이 있었던 흔적조차 없었습니다. 완전 산이었습니다. 이제 이 산은 뱀이 우글거려 뱀을 잡는 땅꾼들의 일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 길을 보면서 <마귀에게 흔적도 없이 점령당하여 사는 내가 아닌가?>라고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지난 번 신문통계를 보았습니다. 우리나라에 가장 대표적인 대학촌은 신촌입니다. 이대, 연대, 서강대, 홍익대, 명지대등 명문 대학들이 그 주변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주변에는 술집같은 유해업소가 1,700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책방은 겨우 7개밖에 없다는 통계입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러브호텔입니다. 국회에서 국감을 하는 데 56개 방을 가진 러브호텔이 일년 수입이 15억원이라는 것입니다. 하루에 방 하나를 세 번 돌린다는 보고였습니다.
윤락녀중에 30-40%가 미성년자라는 것입니다. 고등학교 학생들이 그런 곳에 많이 나간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12세에서 20세까지 800 만명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중에 40만명이 살인,강도,절도,폭력,음주사고등으로 감옥을 경험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죄가 깔려 있고 마귀가 득실거리는 세상에 우리는 살면서 이 마귀와 싸워가며 살아야 합니다. 죄만 미워하고 하나님만 사랑하고 영혼만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잡초와 뱀들이 우글거리는 마귀 안식처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성결하게 사는 운동이 벌어져야 합니다. 마귀와 싸우려면 단단히 무장하여야 합니다.
마귀는 사람들을 유혹할 때 다음과 같은 말을 가장 많이 사용합니다.
(1) 이 정도는 괜찮겠지
이 말은 마귀가 준 말입니다. 적은 미끼에 고래가 잡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작은 불꽃 하나가 숲을 태운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아간이 여리고성을 점령할 때 모두를 불태워야 하는 데 작은 외투 하나쯤은 전리품으로 숨길 때 한 말이 이 말이었을 것입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그러나 그 작은 것 하나가 온 집안식구를 아골골짜기에서 사형 당하게 만들었습니다.
미국의 한 통나무 집 앞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습니다.
"이 집은 작습니다. 그러나 이 집은 위대한 집입니다. 이 집은 작습니다. 그러나 이 집 후손들에 의해 오늘의 미국은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죠나단의 집 앞에 있는 문구입니다.
작은 것도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성막에서 평신도들이 죄를 지으면 소,양,염소 그리고 비둘기 중에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은 아무리 적은 죄를 지어도 소를 잡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큰 사람의 작은 죄를 작은 사람의 큰 죄보다 크게 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2) 딱 한번인 데 뭘
마귀가 두 번째 주는 유혹의 말은 바로 이것입니다. 마귀의 무기중에 중요한 무기입니다. 한번이 문제입니다. 죄는 반복성과 성장성이 있기에 한번 죄의 맛을 보면 자꾸만 반복되기 쉽습니다. 이번만 딱 한번 더 하고 그만 두자는 것은 마귀소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부추와 마늘과 파를 먹고 싶다고 아우성쳤습니다. 한번 맛본 것은 그대로 살아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5;21-22)
(3) 다 그러는 데 뭘
이것도 마귀소리입니다. 다 그러니까 나도 그렇게 산다는 자세도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다 그래서 나만이라도 성경적으로 살 수 있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는 넓은 문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싸우는 것입니다. 마귀와 결사적으로 싸워 이겨야 합니다.
3.하나님과의 싸움
우리는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싸우는 것입니다. 자기와 싸움, 마귀와 싸움 그리고 하나님과의 싸움입니다. 성경에 하나님과 싸워서 이긴 사람이 등장합니다.
야곱은 형과 헤어져서 20년을 살았습니다. 20년만에 돌아오는 야곱의 심정은 매우 착찹하였을 것입니다. 갈 때에는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 갔지만 돌아 올 때에는 아내 4명, 아들 12명, 딸 1명 그리고 재산은 성경 3대 거부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야곱이 돌아 온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에서는 20년전의 감정을 그대로 품고 있었습니다. 400명의 군사를 데리고 야곱을 죽이려고 오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일단 모든 식구들과 모든 재산을 얍복강을 건너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 혼자 얍복강 나루에서 밤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야곱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도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 야곱앞에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야곱은 이 사람과 밤새 씨름을 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야곱을 도저히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야곱의 환도뼈를 쳤습니다. 얼마나 세게 쳤던지 환도뼈가 위골되고 말았습니다. 야곱과 그 사람은 이런 대화가 오고 갔습니다.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니이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그리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하였습니다.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뀐 순간이었습니다.
야곱은 그 후 일생을 절었습니다.
이스라엘이란 <하나님과 싸워서 이겼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하나님과 싸워서 이긴 야곱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싸워서 이긴 사람을 또 한 사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히스기야 왕입니다. 히스기야 왕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당시 최고의 영적 지도자 이사야가 와서 하나님의 예정을 전하여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히스기야 왕은 하늘나라로 부르시기로 예정하셨으니 죽음준비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죽음을 알려주는 것만도 큰 축복이었습니다.
이런 말을 들은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받아 드리지 않고 하나님에게 매달렸습니다. 과거에 하나님을 위하여 잘 한 것을 추억하시고 병을 고쳐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을 받아드리지 않았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는 이렇게 이어졌습니다.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의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추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니>(사38;2-3)
히스기야가 추억하여 달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열왕기하에서 히스기야가 평소에 하나님을 위하여 잘 한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 오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 구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아비라 스가리야의 딸이더라.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곧 저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더라.여호와께서 저와 함께 하시매 저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저가 앗수르 왕을 배척하고 섬기지 아니하였고>(왕하18;2-7)
하나님께서는 이런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15년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히스기야의 모습입니다.
지난 주간 국민일보에 보도된 내용입니다. 백 화자 전도사님 이야기입니다. 그는 연천군 고문리에 <효자의 집>을 만들어 갈 데 없는 노인들을 길거리에서 모집하여 부모처럼 섬기는 이입니다. 어려운 살림인데도 예수사랑을 전하는 이였습니다. 그런데 지난 여름 홍수 피해로 2억원 가량의 재산이 유실되어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나 노인들을 보살핌에는 멈출 줄 몰랐습니다. 자기는 굶어도 좋지만 노인들을 굶길 수 없다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난 10월 21일 산에서 500만원 상당의 10년 산삼 7뿌리를 찾았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보상이라고 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간구하며 부르짖는 자에게는 이런 축복을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싸우며 사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이런 고백을 하고 하나님 앞에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딤후 4;6-8)
우리는 세 가지와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1.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2.마귀와의 싸움에서
3.하나님과의 싸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