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기억할 일 2001-12-31 13:45:22 read : 2134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이사야 63:7-9
살다보면 쉽게 잊혀지는 것도 있지만, 어떤 것은 오랜 세월이 흘러갔는데도 잊혀지지 않는 것도 더러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진정 기억해야 할 것은 곧잘 잊어버리고, 잊어 버려야 할 것은 속에 품고 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입니다. 그런데 인생을 제대로 깊이 있게 살려면 꼭 잊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먼저, 죽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도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존재"(mortal being)임을 기억하며 산다면, 우리 삶의 차원이 달라질 것입니다.
인제 대학교 김 열규 교수가 쓴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책이 있습니다. 사실 요즈음 사람들은 죽음을 잊고 삽니다.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전쟁터나 사고 현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 것을 보면서도 그것이 자기와 관련이 있다는 느낌을 별로 갖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책에 의하면, 이런 현상은 불과 몇 세대 동안 이루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한 세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 민족은 죽음을 거룩한 문화(文化)로 가꾸어 왔고, 사람이 죽으면 복잡한 절차를 갖추어 장례(葬禮)를 치렀을 뿐 아니라 죽은 조상까지도 가족 구성원의 일부로 여기고 극진히 섬겼다고 합니다. 저자는 한국인에게 죽음은 '떠나감'이나 '나그네 길'이 아니라 '돌아감'이라고 결론짓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천해지고 위협받고 있는 죽음의 위상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저자는 독자들에게 "죽음을 늘 생각하고 거기에서 출발해 삶을 사랑할 것"을 권합니다. 오늘 송년주일을 맞아서 우리는 죽음을 늘 잊지 말고 기억하면서, 유한한 인생 속에서 겸손히 주의 뜻에 합당하게 살기를 결단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와 사랑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올해 마지막 주일을 맞아, 다음 두 가지를 기억하도록 합시다.
1.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긍휼과 자비와 사랑, 그리고 큰 은총을 기억합시다.
7절에 보면,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 찬송을 말하며 그 긍휼을 따라, 그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 보면,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자비와 긍휼, 사랑, 그리고 은총이 너무나 크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받았다고 느끼십니까?
사람들이 요즘 '느낌'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합니다. 그러나 정말 사람들이 뭔가를 절실하게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절절하게 우리 가슴에 느껴져야 합니다. 기독교는 심정(心情)의 종교입니다. 이론이 아닙니다. 머리로 하는 게 아닙니다. 며칠 전에, 제가 미국에서 목회할 때 전도사로 있던 목사가 친구 몇 사람과 왔었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석사학위를 하고, 영국에서 영성신학으로 박사학위 공부를 했다고 했습니다. 후배 목사들과 함께 잠깐 목회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목회란 이론이 아니고, 실제이기 때문에 영성신학을 전공한 사람은 목회를 해야 살아있는 학문을 할 수 있지 않느냐고 하면서 목회를 권유해 보기도 했습니다.
사실, 느낌이 살아나야 열정도 생기는 법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절실하게 우리가 체험해야, 산 신앙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드러난 고백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총 중 어떤 것을 기억해야 될까요?
먼저, 구속(救贖)의 은총을 기억합시다.
에베소서 2장 3-5절을 보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엡 1:7)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믿습니까? 이것을 여러분이 몸으로 느낍니까? 이것을 여러분이 결코 잊지 않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집 문에 바르고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먹으며 출애굽 당시 죽음의 사자(使者)로부터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리는 유월절(逾越節)을 지내며 무교병을 먹는 것은 그들이 애굽에서 400년 간 종살이하다 출애굽 할 때 급히 탈출하느라 발효시키지 않고 만든 떡을 먹었기 때문에 그 고난의 때를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리려 유월절에 희생당한 어린양은 바로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404장)은 바로 1917년 프레드릭 레만 목사가 어렵게 목회생활을 해 나가던 중, 그의 아내가 어느 날 도시락 안에 '바다가 먹물이요, 하늘이 두루마리인들 어찌 하나님의 사랑을 다 적으리오'라는 싯귀를 넣어 준 것에 큰 감동을 받아 쓴 것이라고 합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 용서하셨네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1절)
하늘을 두루 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3절)
다음으로, 때를 따라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신 은혜를 기억합시다.
창세기 28장 20∼22절에 보면, 야곱이 하나님께 서원(誓願)을 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 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그러나 그는 그 약속대로 큰복을 받았는데도, 하나님께서 때마다 일마다 지켜주셨는데도, 얍복강 가에서 하나님을 대면(對面)하여 씨름하다가 결국 환도 뼈가 부러지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허락 받기 전까지 하나님과 한 약속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야곱과 같이 필요할 때는 하나님께 서원을 하고, 형편이 나아지면, 그 은혜를 곧 잊어버리지는 않는지 살펴야 합니다.
출애굽기 16장 35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사람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사십년 동안 만나를 먹되 곧 가나안 지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광야 같은 세상을 지내오는 동안, 이제까지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양식을 주셔서 살았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벌어서 우리 식구가 올 한해도 편히 먹고 지냈다"는 생각을 하진 않습니까? 이런 생각이 있다면 이걸 당장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주셔서 우리가 먹고 입고 편히 쉬며 지내올 수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셔서 올 한해도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 주님, 저는 이제까지 주님의 자비와 긍휼과 사랑과 은총으로 하여 이제까지 살았나이다!"
2. 곤경(困境)에 처했을 때, 주님이 친히 돌보시고 안아 주셨음을 기억합시다.
9절을『표준새번역』으로 보면 더 실감이 납니다. "주께서는, 그들이 고난을 받을 때에 사자(使者)나 천사(天使)를 보내셔서 그들을 구하게 하시지 않고 주께서 친히 사랑과 긍휼로 그들을 구하여 주시고, 옛적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을 치켜들고 안아 주셨습니다." 좋은 번역입니다. 공동번역도 그렇고, 영어성경에도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가 곤경을 당할 때, 우리를 건져주셨다는 이 말씀이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나긴 세월을 하루같이 치켜들고 안아 주셨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그렇게 해 주셨습니다!
몇 년 전 어느 여름날, 서울 예닮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김 호식 목사님께서 아주 자상하게, 교회를 어떻게 지었는지, 그리고 목회에 대한 유익한 말씀을 해 주시면서 수박을 대접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 차를 일부러 보내주셔서 저를 전철 타는데 까지 데려다 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저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대 선배 목사님이시고, 유명한 분인데, 한 두 번밖에 만나지 않은 저를 마치도 수 십 년 된 친구를 대하듯이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쩌다 이런 분을 만나면 감동을 받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돌보시고 안아 주신다고 했습니다. 이사야 40장 11절에 보면, "그는 목자와 같이 그의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양들을 팔로 모으시고 품에 안으시며, 젖을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해 주시는 일입니다. 또, 신명기 32장 10-1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우리]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하신다고 했습니다. 한 해를 돌이켜 볼 때, 이제까지 우리가 고난을 겪을 때, 큰 곤경에 처해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우리 영혼의 아버지가 되어 주셨음을 기억하며 감사하자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그 크신 은총과 변함없는 사랑을 받았으니, 이제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두 가지를 해 나갑시다.
먼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큰 은총을 전합시다.
7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 찬송을 말하며 그 긍휼을 따라, 그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우리에게)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고 한 대로, 우리에겐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전하는 일이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다시 말해 복음(福音)을 전하는 것이 우리 일이라는 것입니다. 전도(傳道)하자는 것입니다.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허락 받고 나서 동네에 들어가 자기가 만난 예수를 힘있게 전했습니다. 그는 행실이 좋지 못하여―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같이 사는 남자도 자기 남편이 아니었다―손가락질을 받는 처지에 있었지만, 예수를 만나 죄 사함 받고, 구원의 길을 발견했기에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힘써 할 일도 이 도(道)를 전하는 것입니다. 이 도(道)란 모든 사람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 길입니다. 우리가 받은 바 그 크신 은총과 사랑을 전하면 되는 것입니다.
복음전하는 것이 우리 생의 '과업'(opus)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포로된 자를 자유케 하고, 눈 먼 자에게 새로운 비전을 주고, 억눌린 자를 풀어주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9장 16절에서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不得不)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 했습니다.
다음으로, 진실(眞實)한 신자(信者)로 사는 것입니다.
8절에 보면, '거짓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참된 백성의 자격(資格)을 간단히 말한 것입니다. 그것은 거짓이 없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즉 '진실한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신자(信者)라는 말은 희랍어로 '오이 피스토이'라고 하는데, '진실한 자'라는 뜻입니다. 신자들은 무엇보다도 진실해야 합니다. 시편 51편 6절에 보면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신다"고 했습니다. 또 고후 11장 3절에서는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 했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을 신뢰함이 진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크나큰 은총을 받은 우리가 이제부터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그 은총과 사랑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진실한 신자로 살며, 최선을 다해서 받은 바 사랑과 은총, 베풀어주신 긍휼과 자비를 전하며 사는 것, 즉 복음을 전하며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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