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성격을 치유하라 2002-01-14 17:28:48 read : 1376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에베소서 6:4
오늘 말씀을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어버이들은 자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 말고 주님의 정신으로 교육하고 훈계하며 잘 기르십시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누구든지 다 부모님을 통해서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가장 큰 영향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 바로 부모님이십니다. 우리는 부모에게서 체질을 받고 태어납니다. 우리 외모와, 건강과, 우리의 모든 성격까지도 다 부모를 닮고 있습니다. 우리는 음성까지도 부모의 음성을 닮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전화할 때 아들에게서 아버지의 음성을 그대로 듣는 때가 있고 어떤 때는 딸의 음성에서 어머니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성질까지도 부모의 성질을 거의 닮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를 닮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신비하고 고마움을 느끼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부모는 자기 자녀를 제자 삼고 일생을 살아갑니다. 내가 이 땅에서 나의 가르침과, 훈계를 통해서 제자를 삼는 대상이 바로 자녀입니다. 그래서 자녀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라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함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부모로부터 영향을 입었고 또 자녀들에게 부모 입장에서 영향을 미치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좋든 나쁘든 내 영향을 받으면서 자라고 있는데 그 영향은 우연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부모로부터 받은 영향을 그들에게 그대로 미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나 자신을 생각하면서 또 우리 부모를 생각하면서 어떤 부모가 좋은 부모일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부모를 크게 둘로 나누면 상처입히는 부모와,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부모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성장한 과거를 회상하면 부모로부터 받은 영향이 좋은 영향이 있고 나쁜 영향이 있습니다. 좋은 영향을 긍정적으로 말한다면 주의 교양과 훈계, 주님의 뜻으로 영향을 준 것이고 나쁜 것은 내 인간적인 감정의 상처를 저들에게 투여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부모에게서 그렇게 받아 왔습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나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하고 또 어떤 면에서는 좋은 영향을 주기도 했습니다.
우리 자신들을 반성해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요. 우리는 모두 다 어린시절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어린시절은 단순한 인생의 한 과정이 아니고 어린시절에 받았던 영향을 우리는 되풀이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들이 성장했지만 어린시절에 받은 영향이 나의 성격을 이루어놓았습니다.
성질은 태어날 때부터 받아진 천부의 기질이라고 말한다면 성격은 성장하면서 부모나 외부의 영향으로 형성된 것입니다. 우리는 성장해가면서 부모들이 나에게 끼친 영향으로 형성된 모습을 우리 자신에게서 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이가 들어서 60이 되었어도 어린 아이의 모습이 내 속에 숨어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나이가 들수록 아버지와 어머니의 인간됨이 그대로 우리 속에서 재현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어린 아이가 있습니다. 하나는 어른 속에 있는 어린 아이가 있고 지금 자라는 어린 아이가 있습니다. 자라나고 있는 어린 아이가 있는가 하면 우리속에 자라지 못한 옛날 어린 아이가 그대로 숨어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아, 내 안에 잘못된 한 인간이 있구나! 이것을 고쳐야지' 그런 생각을 갖게 됩니다.
어떻게 되어 있든 그것이 다 좋은 것도 아니고 다 나쁜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교양있고, 인격적으로 성숙하고,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나고, 좋은 교육을 받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완전한 것도 아니고 부모가 전혀 교양도 없고, 인격적으로 부족해도 거기에서 태어난 자식이 또 전적으로 나쁘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한가지 전제하고 싶은 것은 어떤 사람도 완전한 사람이 없고 어떤 사람도 불완전한 것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또 좋은 부모라고 해서 그 부모가 훌륭한 것도 아니고, 나쁜 부모라고 해서 훌륭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결론으로 말하자면 은혜받으면 나도 좋고 부모도 좋고 은혜를 못받으면 나도 나쁘고 부모도 나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혹시 어린시절을 회상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내가 또 이 세상에 태어난다면 이러이러한 부모님을 나의 부모로 모시면 어떨까' 저도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어렸을 때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배는 고프고 잠자리는 없고 무엇 하나 넉넉한 것이 없으니까 어린 나이에 밤에 누워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부자집 아들로 태어났으면 잘 먹고 잘 살텐데 내가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배고프게 사는구나! 내가 세상에 또 태어난다면 부자집 아들로 태어나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결론은 '내가 부자집 아들로 태어나면 나는 없어지지 않는가 내 존재는 역사 속에 없는 것 아닌가 성씨가 달라지고 이름이 달라지니까 내 존재는 없는 것 아닌가 그냥 이대로 있자' 그랬습니다. 그리고 그냥 그대로 있어 왔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조용히 명상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또 태어나도 내 현재 부모의 아들로 태어나리라.' 그 이유는 이대로 역사에 존무후무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는 유일한 존재로 내가 하나 있는데 이 존재가 역사 속에서 해야 할 과제가 있다면 은혜를 받으면 됩니다.
어떤 부모도 내게 부족한 부모가 없고 어떤 부모도 내게 완전한 부모가 없노니 은혜를 받으면 그 부모도 하늘이 주신 부모요, 내 존재도 하늘이 보낸 전무후무한 존재로 역사에 있는 것이니 이것이 얼마나 신비한 일입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남편을 또 만나야 되고, 어떤 아내를 또 만나야 되고, 어떤 자식으로 또 태어나고 이런 얘기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은혜를 받아 내 존재를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하나님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최대치의 존재로 만들어 작품화시키는 일, 이것이 자기 신성한 자존심이며 최대의 행복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성격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해보면 완전치 못한 것이 어렸을 때부터 형성되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 속에 반항하는 성격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들을 강압적으로 통제함으로 말미암아 그 속에 반항하는 인간성이 형성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은 안하지만 부모가 강압적으로 하면 가출하든지 아니면 거기 함께 있으면서도 자기를 계속 도피해 가는 그래서 부모의 말에 순종해 주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불만 섞인 모습으로 형성이 됩니다. 이런 성격은 분노하는 성격인데 계속 불평하는 성격으로 형성이 됩니다.
또 하나 불만하는 성격은 완벽주의에서 나온 것입니다. 완벽한 성격 때문에 1등만을 추구하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칭찬은 없고 책망만 하는 부모 밑에서 성장해온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열등의식이 형성되고 그렇기 때문에 성공해도 자기 자신을 실패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성공하면서도 만족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끊임없이 성취지향속에서 열등의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세 번째로 끊임없이 의존하면서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부모가 아이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기 때문에 모든 것이 자기 중심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이것은 대개 막내라든지, 외아들, 외동딸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부모가 자녀들의 변덕과 요구에 굴복하면서 그 뜻을 맞추어주기 때문에 맹목적 요구를 가지고 일생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결혼해도 자기 아내에게 맹목적 요구를 하고 아내된 사람도 남편에게 맹목적인 요구를 하면서 일생을 삽니다.
절제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별로 가진 것도 없는데 쓰고 보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절제 못하는 유약한 인간성으로 어렸을 때부터 형성해 왔습니다.
또 방치형 어린이들이 있는데 부모가 없거나 부모가 너무 바빠서 자녀를 방치하는 형입니다. 이런 경우는 대개 부모가 너무 유명해서, 사업이 바빠서 아이들을 돌보지 못하고 가정부나 할머니에게 맡깁니다. 그래서 그냥 방치해버리기 때문에 이 아이들이 평생 고독한 인간으로 형성해 가고 또 사람을 의심하는 존재로 형성해 갑니다. 또 사람 사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자학적 성격을 갖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부모와 친척으로부터 어렸을 때부터 학대받으면서 자란 사람들입니다. 부모를 잃어버리고 삼촌 집에 가서 학대를 받았다든지, 고아원에 가서 학대받았다든지 이렇게 해서 자랐기 때문에 애정의 결핍 때문에 안정감을 두지 못해서 연애를 해도 여기에서 한달 저기에서 한달 이런 식으로 합니다.
인간의 성격의 유형이 이런형 저런형이 다 있는데 자기 성격을 보면서 우리 자신들이 어느 환경이나 가정생활이나 어떤 삶 속에서 완전치 못할 때 이것을 치유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이 사람은 나쁘다고 단정하지 말고 치유해 가야 합니다. 제일 먼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 일단 어떤 형태의 존재든지, 어떤 부모로부터 어떻게 형성되어 왔든지, 우리의 외모라든지, 또는 체질이라든지, 성격이라든지, 어떤 형태의 것이든지간에 일단 감사로 받아야 합니다. 현재 이대로 주신 것을 은혜로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으로 만족하라는 것이 아니고 이것을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성격이 잘못 되었다고 느낍니까? 기회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제가 이번에 일본에 가서 제일동포 위문성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사람들이 제 얘기만 들으면 우는지요. 제일동포들은 한이 맺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징용으로, 일찍이 조실부모하고 살 길이 없어서 일본으로 다 끌려간 사람들입니다. 또 자기 발로 간 사람도 있지만 자기 발로 간 것이 아니라 끌려간 것입니다. 돈에 끌려가고, 한에 끌려가고, 살기 어려우니까 끌려간 것입니다. 자원해서 갔지만 그 속내용을 보면 끌려간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 마음속에 있는 것이 부모를 원망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된 것은 부모가 자기를 버렸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부모가 버린 것이 은혜다' 이렇게 되었습니다. 부모가 버린 것을 원망했는데 이제는 '내 부모가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너를 영접하시리라 내 부모가 나를 버림으로 말미암아 버리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게 되었으니 부모님이 나를 버리므로 말미암아 버리지 않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내가 얻었으니 이것이 은혜다.'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돌보는 것은 쉽지만 버리는 것은 얼마나 힘든 것이냐 여기까지 생각한 것입니다. 버렸다고 나쁘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내 부모가 나를 버리고 얼마나 마음 아파하실까' 자기 자식을 사랑하고 돌보고 따뜻하게 사랑해 주는 것은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식을 때리고, 버리고, 상처를 입히는 것은 부모로써 못할 일을 하는 부모가 되었기 때문에 너무 너무 슬픈 일입니다.
이런 부모를 원망하는 자식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이 부모에 대해서 마음 아파하는 자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은혜를 받고 앞에 나와서 간증하는 말이 '나는 지금까지 부모를 원망했는데 오늘 은혜를 받고 보니 하나님이 나를 이곳에 보낸 것은 나에게 이런 은혜를 받게 하기 위해서 우리 부모를 통해 나를 여기까지 보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은혜를 받도록 하나님은 역사하셨다. 그 부모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 상처입힌 부모라고 해서 원망하거나 상처입힌 부모를 노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그 부모에 대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불효자이옵니다.' 이렇게 고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신비한 일입니다. 저는 가장 힘든 것이 대화하는 일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대화를 한 일이 없으니까요. 나는 우리 아버지와 평생에 대화를 몇 마디 한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한신교회 성장에 큰 장애가 바로 제가 대화를 잘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 교회 남성도들이 저와 대화를 통해서 교제하는 기회를 많이 갖지 못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형성된 제 성격 때문에 이것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무엇으로 극복해 가느냐? 사람과 대화를 못하니까 하나님과 대화했습니다. 또 사람들을 만나서 얘기하기가 싫으니까 책을 읽었습니다. 그것으로 나를 성취해 갔습니다.
우리는 또 하나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서 과거에 상처받은 모든 일들을 용서해야 됩니다. 부모도 자녀들 앞에서 용서를 받아야 할 때는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며칠 전에 어떤 장로님이 그래요. 자기 딸이 얼마나 고집이 센지 부모 말을 안듣는다는 것입니다. 머리에 염색하지 말라고 하면 더 빨갛게 들이고, 일찍 들어오라고 하면 더 늦게 들어오고 그래서 어느날 밤에는 이 장로님이 딸의 뺨을 한 대 때렸습니다. 그랬더니 눈을 부릅뜨고 보더니 "나는 아버지가 장로지만 한번도 아버지에게서 예수의 모습을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러더랍니다. 아버지가 그 얘기를 듣고 너무 너무 충격을 받아서 골방에 들어가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아버지, 제가 딸 앞에 한번도 예수의 모습을 보인 일이 없다니 저를 용서하소서." 눈물 뿌려 기도하고는 나와서 딸의 방에 들어갔습니다. "딸아, 내가 잘못했다. 네게 예수의 모습을 보여야 할텐데 한번도 보이지 못한 네 아버지를 용서해다오." 하니까 그 딸이 아버지를 처음으로 껴안고 "아버지, 내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하세요." 하고 말하더랍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그렇게 한번도 순종해 주지 않던 그 딸이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자기 자신이 아버지로서 처음으로 권위를 가졌다고 그래요.
우리는 자기의 잘못을 하나님 앞에 용서를 받을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또 용서할 수 있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과거에 우리는 나에게 상처를 입힌 누구도 용서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용서하듯 우리도 용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과거에 상처를 받음으로 형성된 성격에 대하여, 내재적인 내 인간됨에 대하여 아무도 원망하지 말고 아무도 탓하지 말고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십자가의 주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은혜받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 형제를 사랑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 위에 은혜로, 이 사랑 위에 사랑으로 나아갈 때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모든 것이 다 아름다운 세계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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