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ay : 2025년 05월 17일 (토요일)      로그인      회원가입
Home     美 대법"트랜스젠더 군 복무 금지 행정명령, / 일영연수원으로 옮긴 기감               카이캄, 51회 134명 목사안수식 / 4페이지 설교법               지구촌교회 담임목사에 김우준 목사 청빙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명성교회에서               빗속에서도 울려 퍼진 부활의 기쁨 / 지구촌교회 제4대 담임 후보에 한인 목회자               손봉호 서울대 명예교수 / '무장공비→ 목사' 김신조 별세 / 이재명 지지율 1위               헌재 전원일치로 윤석열 대통령 파면 /교회 건물 명의만 소유했던 목사…법원               산불 피해 한국교회 지원 총력 / 고령 교인 10명 중 6명               기독교인 수, 감소 멈추고 안정세 /일제 침략으로 예수 믿었으니 '수고했다'고 말해야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 이마에 십자가 인터뷰 출연               사순절에 대한 흥미로운 5가지 사실/ 트럼프 2기 첫 내각 회의, 목사·장관인 터너의 기도로 시작              

  홈     ,     강대식     강문호     계강현     고신일     곽선희     곽창대     권오선     권오진     김경진     김광일     김기석     김도완     김명혁     김병삼     김삼환     김상복     김상수     김성광     김성수     김승규     김양인     김영훈     김용혁     김원효     김은호     김의식     김재곤     김정호     김진수     김진흥     김창규     김창진     김형익     김홍도     남수연     노창영     노환영     류영모     명설교(A)     명설교(B)     명설교(C)     문기태     박병은     박봉수     박신진     박요한     박일우     박진호     박한응     박형근     배영진     배의신     배진기     배혁     서명성     서진규     손재호     송기성     스데반황     신만교     신현식     안두익     안효관     양인국     양향모     염두철     오주철     오창우     옥한흠     원영대     유기성     유민용     유은호     유장춘     유평교회     이강웅     이건기     이국진     이규현     이기복     이대성     이동원     이동희     이백민     이삼규     이상호     이성우     이성희     이양덕     이영길     이영무     이우수     이윤재     이은규     이익환     이일기     이재철.박영선     이재훈     이정원     이정익     이종철     이준원     이지원     이하준     이한배     이호준     임현수     장부완     전승문     정근두     정오영     정준모     조봉희     조상호     조성노     조영식     조용기     조학환     조향록     주준태     지성래     지용수     차용철     채수일     최동규     최인근     피영민     피종진     하용조     한경직     허창수     홍문수     홍정길.임영수     홍종일     외국목사님     .     괄사(왕)     기도문     (1)새벽     새벽.금언     인물설교     상식/주일     장례,추도.심방     가정설교     영문설교     목회자료/이단     교회규약     예화     성구자료     강해설교     절기설교     창립,전도,헌신,세례.주례사     어린이.중고등부     << 창세기>>     출     레     민     신     수     삿     룻     삼상     삼하     왕상     왕하     대상     대하     스     느     에     욥     시     잠     전도     아     사     렘     애     겔     단     호     욜     암     옵     욘     미     나     합     습     학     슥     말     <<마태복음>>     막     눅     요     행     롬     고전     고후     갈     엡     빌     골     살전     살후     딤전     딤후     딛     몬     히     약     벧전     벧후     요일     요이     요삼     유     <<요한계시록>>     말씀별설교     제목별설교     A)행사,심방     B)행사심방     예수님행적설교     성구단어찾기     이야기성경     설교(틀)구성하기     자주사용하는본문     구약사건     신약사건     구약삽화     신약삽화  

:: 로그인 ::
 ID   
 PASS   
로그인  회원가입
Home
  설교작성법(여기누르면 다나옴)
  설교잘하는 방법(여기누르면 다나옴)
  김기홍 설교학
  동영상.간증자료(여기누르면 다나옴)
  교계 뉴스 ------- (전체보기)
  생활전도(여기누르면 다나옴)
  전도편지
  참고 설교(성구)
  장례식 설교(내부에 많이있음)
  웃음치유와 영업
  기타

설교내용검색

성경 찾기

네이버.다음.구글


검색



Daum


(방송)설교 교회

해외교회사이트

예배와 찬양


목회자 컬럼
  • 교회와신앙칼럼
  • 뉴스미션칼럼
  • 뉴스엔조이칼럼
  • 당당칼럼
  • 기독공보칼럼
  • 기독목회칼럼
  • 크리스천칼럼
  • 타임즈칼럼
  • 김명혁목사
  • 김형준목사
  • 양인순목사
  • 이동원목사
  • 조현삼목사
  • 밤중소리

  • Home

    예수는 흑인이다
    2002-05-13 19:16:05   read : 2326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나혜영 약력

    장로회신학대학졸업 (기독교교육 전공)
    School of Theology at Claremont (기독교윤리 전공)
    Northwestern University에서 종교학 Ph.D. 논문작성 중 (종교윤리 전공)
    복음신문 편집국장 역임
    가나안장로교회 개척부목사
    거니가나안장로교회 담임


    내가 신학을 공부한다고 소개를 할 때 "아니, 예수가 흑인이었다는 사람이 있는데 정말 그렇습니까?"라고 그동안 궁금했던 점을 꺼내면서 이야기를 트는 사람이 그동안 몇 있었다. 도저히 예수가 흑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아서, 그리고 말세지말의 망발을 발견한 것 같아서, 혼자 곰곰 생각을 하다가 말을 꺼내는 것 같다.

    사실 이런 질문에 대답하기란 그리 쉬운 게 아니다. 섵불리 대답했다가는 욕을 바가지로 먹게 돼있다. 나 아무개가 이러이러하게 말했다 하고 말듣기 십상이다. 그러나 미국에 사는 우리로써, 그리고 흑인들과 함께 어울어 산다고 하는 우리들로써는 적어도 이 말만큼은 근본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1964년도에 제임스 콘이 "예수는 검었다 (Jesus was black.)"라는 선언을 하였을 때, 사람들은 콘이야말로 인종학적 상식이 없는 그야말로 불학무치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말이 가진 자극성은 흑인 사회에 매우 강렬하게 나타났다. 수백개의 다른 형용사를 가지고 예수를 설명하는 것보다, 블랙이라는 한 단어로써 예수를 가르치는 것이 더 용이할 만큼 '블랙'이라는 단어는 강력했다. 그들은 이 말 한마디 속에서 예수가 그 시대에 받았던 천대, 멸시, 박해, 그리고 고난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흑인들은 예수가 검었다는 한마디 속에서 예수야말로 자기들을 진정으로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알았다. 자기들이 온갖 모멸을 겪으면서 오직 자유만을 기다려 온 절박한 사정을 예수가 이미 이천년 전에 알고 있었다는 것도 깨닫기 시작했다.

    알버트 라보트는 그의 책 Slave Religion에 무명 한 흑인 설교가의 말을 남겨 놓았다. "나는 글을 모르기 때문에 주인이 들려주는 말을 설교해야 했다. 주인에게 잘 복종하면 천국에 간다고 늘 전해야 했었는데 이것보다 더 나은 말씀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차마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자유가 온다고 그렇게 말했다." 채찍으로 맞을 것을 각오해야 겨우 자유를 말할 수 있었던 흑인들은, 자유를 말했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게 된 예수를 참으로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억압받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말할 것을 말하면 징벌이 오는 그런 사회가 억압 사회이다. 예수는 사랑을 가르쳤기 때문에 마침내는 십자가를 지고야 말았다.

    아닌게 아니라 예수는 그 시대의 흑인이었다. 그는 자유를 원하는 사람들과 살았고, 버림 받은 사람들과 대화를 하던 사람이다. 그는 당시의 지배층, 즉 화이트가 주류를 이루는 그러한 곳에서는 한번도 제대로 어울리지 못했던 사람이다. 예수가 블랙이라는 말은 참으로 획기적인 말이었고, 예수를 이해하는데 엄청난 기여를 했다. 우리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이면에는 우리가 나름대로 가진 아픔의 기억을 망실한데 있다. "지저스 이즈 블랙"이라는 말은 간단해 보여도 애환을 이해하지 못할 때 절대로 터득할 수 없는 말이다. 오늘 우리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하는 질문은 그러므로 자명하다. 억눌린 자들이 가진 슬픔, 그것을 진정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가 과연 그들과 동반관계를 이뤄갈 수 있을 것인가.

    우리 한인 사회에 기독교회가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고 사람들마다 말한다. 그러므로 이민 교회가 어떠한 색채를 띄어야 할 것인가를 결정짓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나는 할 수만 있으면 조금이라도 우리의 색채가 더 검어지기를 기도하고 있다.

    =================================
    평신도 신학 (1)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한국 TV들은 대통령이 장관들 한테 전화 혹은 구두로 지시하는 장면들을 방영해오고 있다. 내용만 보면, 국민을 사랑하는 대통령 각하의 애틋한 마음이 듬뿍 담긴 것임을 당장 알만한 것들이다. 설날 교통 체증이 생기지 않도록 각별한 계획을 세우라든가, 날씨가 추워지니 국민들 월동준비에 불편함이 없도록 하라든가 등등이다. 물론 이런 장면을 내 보내는 측에서야 국민들이 한없이 나라와 각하 앞에 감사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겠지만, 방송을 대하는 모든 국민이 다 그런 생각을 갖는 것은 아닐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TV 앞에서 마음이 편치 않아지는 이유는, 도대체 장관들은 무얼하는 사람들이길래, 대통령이 하나하나 고쳐라 말아라 염두에 둬라 할 때 까지 기안하나 하지 않고들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이다. 이런 팥, 콩 고르는 일 쯤이야 지시가 있기 전에 당연히 준비됐어야 하는 일이 아닌가? 우리 대한민국의 장관 수준이 교통 수급계획까지 지시가 있어야 움직이는 사람들이라면, 굳이 훌륭한 인격이니 학력이니 하는 게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더 나아가서, 대통령이 손수 콩알이 큰지 팥알이 큰지 매일 연구하고 있는 나라에서 도대체 무슨 삼권이 필요할 것이고 거대한 정부 조직이 필요할까 하는 궁리도 안드는 바가 아니다.

    그런데 이런 우수꽝스런 장면을 심심치 않게 공영방송이 내 보내는 것을 보면 무슨 의도가 있는 것만 같다. 그것은 국민을 아직도 바보로 알고 있다든가, 아니면 대통령은 그래야 된다고 하는 고정관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교회도 여전히 이같은 어리석음을 되풀이하고 있다. 불행히도 교회 일은 만 세계에 TV로 방송을 안 하는 터라, 눈치 채지 않게 되풀이 되고 있다는 점만 다른 것이다. 대통령이랑 진배없는 목사님은 메주알 고주알 다 연구하고 있고, 국민이나 다름 없는 교인들은 지시가 있기만 기다리고 있는 한국교회 사정은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교인은 또 그래야 하고, 목사님은 당연히 또 그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시작된 개신 교회는 아이러니 하게도 루터의 사상을 가르치지 않고 있다. 루터의 글을 읽다 보면 지금 교회가 얼마나 중세 카톨릭 교회처럼 권위를 사랑하고 있는지, 또 교인들을 우습게 알고 있는지 당장 알게 될 것이다. 평신도들을 세상 물정 모르는 시종처럼 만들어 놓은 것은 교회의 책임이라 반성하고 지금이라도 새로이 교육전략을 세워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 형편은, 한국 사회의 열등한 민주화 수준 그 절반에도 못 미치는 더욱 열악한 형편이라고 나는 보고있다. 그러므로 평신도 신학이란, 평신도에게 알기 쉽게 교권을 인정시키는 신학이 아니라, 평신도가 자기가 믿고 보고 들은 바에 의거하여 자신있게 행할 수 있도록 근거를 제공해주는 `신학'이어야 한다. 그것을 한국교회가 만들어 주었으면 싶다.

    한국의 교인들과 미국의 교인들을 비교해보면 아주 재미있는 현상이 하나 있다.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의 촛점이 다르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미국의 교인들은 신학적인 주제 보다 자기 교회의 운영체계에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데 반해서,
    한국 교인들은 교회 운영체계보다 성서적이고 신학적인 주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한국 교인들은 교회 살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목사님이 어떤 말씀을 어떻게 가르치나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반영한다고 하겠다.

    이런 현상은 두가지 측면에서 부정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첫째는, 한국 교회가 운영상의 모순으로 싸움과 분열로 잘 치닫는다는 점이다. 교회 살림에 문제가 생길때까지 아무도 간섭하지 않고있다가 곪을대로 곪아지면 들고 일어나서 서로가 책임소재를 묻고 다투기 때문에 분쟁이 겉잡을 수 없이 커지곤 하는 것을 보게 된다.

    둘째는, 교인들의 신학적 관심이 크기 때문에 자기가 좋아하는 "해석"이 있기 마련이고, 이 해석과 목사님의 것이 행여 다르면, 이단이니 삼단이니 하고 들고 일어나서 "듣기도 싫다, 말하기도 싫다"하면서 언로를 막고 협상의 기회 없는 막다른 싸움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 한국적 현상은, 싸우는 당사자들에게는 심각한 것이 틀림 없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 말해, 좀더 넓게 보면, 얼마든지 사전에 조정할 수 있는 문제이거나, 충분히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주제들을 가지고 격렬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첫째는 한국 교회가 평신도 신학을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평신도 강좌니 평신도 교육이니 혹은 평신도를 위한 신학이니 하는 말이 있었지만 그런 것들이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평신도 신학"이 아니라,

    목사 잘 받들고, 심부름이나 잘 하라는 내용의 평신도 길들이기 위주였던 것임을 알 수 있다. 한국 교계의 평신도관이 상당히 왜곡돼 있는 것은 평신도 신학이 없는 "평신도 길들이기"의 부산물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결과로, 한국 목회자는 엄청난 "권리"를 소유한 반면, 한국 평신도는 무한한 "의무"를 지게 됐다고 나는 본다.

    놀라지 말라. 한국 교회에서는 축도 할때 "찌어다"를 쓸 것인가 "비나이다"를 쓸 것인가 다투고 있지만, 서구에서는 평신도가 자기의 언어로 축도를 하는 것이 흔하다. 이것은 극단적인 한 예이지만, 대체로 보아, 서구 기독교인들은 만인 사제 (萬人司祭)가 지닌 뜻을 십분 이해하고 있는 반면, 우리 한국 교회는 이름만 개신교지, 중세 카톨릭 교회보다 더한 교권주의로 교인들을 억압하고 있는 곳이 많다는 것을 이제 조금씩 생각했으면 좋겠다.

    나는 평신도들이 "교회에 저항하여 봉기해 줄 것"을 원하면서 이 글을 쓰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교회에 더 많은 공헌을 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평신도의 위치와 역할을 바르게 터득함이 첫 순서라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

    해외선교 유감 /미주조선일보


    기독교 2천년 역사는 침노하는 역사요, 빼앗는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는 성서적 배경에서 해석될 수도 있으나, 따지고 보면 기독교가 지닌 독특한 진취적 성격이 자기 우월감과 어울러진 데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침노하는 역사"의 전형적 모델은 서구 기독교의 선교관에서 나왔다. 페이간 (비 기독교인)이라는 말이 미개인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쓰여지고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의 세계관이 어떠했을 것인지는 자명한 일이다. 종교 개혁 이후에도, 세계관 및 선교관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 역시 선교를 세력 확장과 거의 동일시 했다. 선교사가 무장함에 동승하는 사례가 빈번한 것은 이를 반영하는 말이다. 약소민족의 수탈사는 엄밀히 따져보면 기독교 선교사와 평행하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것도, 서구 세력의 진입과 무관하지 않다. 영 불의 구주 국가들도 한국에 자기 백성 선교사를 두고싶어했던 이유는 그와 같은 배경에서 이해할 수도 있다.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교육과 의료 등의 분야에서 가장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취한 행동은 그리 적절치 않았다. 첫째, 초기 선교사들은 한국을 지금의 방글라데시나 소말리아 같은 나라들처럼 선전했다. 선교사들은 유부녀들이 젖가슴을 내놓고 있는 사진, 아이들이 벌거벗고 있는 사진 등등을 모국에 보내어, 이들을 계몽하는 것이 급선무임을 알리고, 선교비를 모았다. 못된 사진을 보낼수록 더욱 흡족한 선교비가 모아질 수 있다는 사실도 그들은 알았다. 뿐만이 아니다. 글로도 남겼다. 자기네가 고생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한국민을 얼마 모욕했는지 모른다. 배제학당을 세운 아펜젤러는 '한국민은 교회 쥐처럼 가난하고 돼지처럼 더럽고 늑대처럼 교활하며 개처럼 게으른데 위선은 말할 수 없다"고까지 선전했다. 한국이 세계에 알려진 오늘날까지도 문화민족으로서의 대접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어찌보면 그 당시의 `홍보'탓이 아닌가 싶다.

    둘째는, 선교사들이 한국의 귀중품들을 수집하여 해외에 반출한 행위를 들 수 있다. 얼마전 미테랑 대통령의 한국 고문서 반환 약속 - 지켜지지 않았지만 -은 그들이 수집한 한국 고문서가 어떤 경로로 프랑스에 까지 들어갔을까 하는 데까지 미쳐졌다. 프랑스가 한국에서 수탈을 위한 전쟁을 벌인 적이 없기에 더욱 궁금하기 그지 없다. 물론 프랑스 도굴단이 한국까지 원정을 다녀간 기록이 없는 건 아니지만, 책과 같은 문서류는 도굴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과 친밀하게 인간적 교류를 가질 수 있었던 선교사들이 그 역을 맡아줬다고 본다. 실지로, 미국의회 도서관에 분류조차 제대로 되지 않고 고무줄로 묶어서 방치해 놓은 15세기 귀중본인 虞註杜律 목판본 2권을 비롯하여 율곡의 聖學輯要 7권 등등은 1922년부터 한국서 활동한 선교사 게일이 미 의회 도서관에 팔아 넘긴 책들이다. 게일 선교사는 한국 장로교회사에 `길이 남을 만한' 인물로서 평양신학교 설립에도 크나큰 공헌을 남겼다.

    서구 기독교의 선교사(宣敎史)가 가지고 있는 치부는 제대로 연구되지 않고 있다. 이는 서구인들은 스스로의 약점을 드러내려 하지 않기 때문이며, 한국의 기독교는 너무도 서구 의존적이어서 선교사(史)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려는데 주저하기 때문이다. 또 기독교의 약점을 이야기 하는 것은, 선교에 지장을 준다는 식으로 매도한 까닭에 공정한 조사를 하지 못한 것도 그 원인일 것이다.

    이같은 이유로 해서, 왜곡된 선교행태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면, 그 잘못은 누가 책임질 수 있을 것인가? 한국인 교회가 과거의 서구 기독교의 선교과정을 그대로 답습한다면 그것은 과연 옳은 일일까? 실례로, 필자는 선교보고회라는 명목으로 개최되는 선교기금모금회에 여러차례 참석할 기회가 있었는데 거의 한결같이 피선교지의 비참한 모습과 미개성을 확대하여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 문화에 대한 존경심은 찾아볼 길이 없었고, 미신이 횡행하는 사회로만 비추고 있었다. 반면, 나이지리아에서 온 신학도와 거의 2-3년 같이 지낼 수 있는 기회도 있었는데, 그의 깊은 문화적 배경 앞에서 깜짝 놀란 것도 고백치 않을 수 없다.

    한국 기독교는 과거의 구미 선교사들처럼 군함이나 해적선을 타고 피선교지에 가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으로 간다. 현지에 구축할려고 하는 교회는 현지인을 위한 교회가 아니라, 내 교회의 세력을 넓히기 위해서이다. 또다른 침략사이지만, 선교라는 명목으로 미화될 뿐이다. 현지에서 경제적 이득권을 따내거나, 선교지 확보등의 명목으로 얻은 땅을 경제 거점으로 기업에게 제공하는 등의 행위를 더이상 배워서는 안될 줄 안다. 현지에서 접한 문화재들을 소중히 여기고 그들이 세계문화 속에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도록 돕는 일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현지에서 고생하고 있는 참된 선교사들도 무수히 많지만, 일부는 환율차를 이용하여, 현지에서 신흥귀족이 되고 있는 수도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마음이 쓰려지는 경우도 있다. 선교를 위해서 어떻게 기금 마련을 할까 하는 연구 못잖게, 해외선교의 방향과 목표를 뚜렷이 하는 한국 교회의 선교관이 세워졌으면 한다.



    독자 설교

    설교작성하기 (3년 후에는 자동삭제됩니다.)
    이 름 E-mail
    제 목



    프린트하기 기사메일보내기 독자설교


    이전으로
    목회자료
    김명혁 목사의 ‘전하지 못한 설교’ 1
    김명혁 목사의 ‘전하지 못한 설교’ 2
    김명혁 목사의 ‘전하지 못한 설교’ 3
    부교역자 청빙시 사역계약서를 씁시다
    인생 칠도, 선교 칠도, 신앙 오도, 복음 삼도
    김명혁 목사 “살면서 눈물의 감동 안겨줬던 8가지 이야기…”
    2023 설날 명절 가정예배 추도예배 감사예배 (명성교회/ 분당 만나교회/ 분당우리교회)
    메리 크리스마스, 성탄설교 3편
    목사란 누구인가? -뉴노멀 시대의 목사 전망 / 목회자들도 데이터 기반한 목회 전략 세워야
    한국 신학자들이 선정한 올해의 성경구절’
    코로나 사태로 예배가 중지된 상태에선 담임목사가 직접 전화심방이 필요하다
    교회 월별 일년프로그램과 학생회 계획과 실제
    이미지(예화) 설교를 해야 한다 / 설교 말씀은 기억 못하고, 예화만 기억난다.
    목회 30년 회고와 훈수 (자신을 향한) /딤전3:1-7
    세상은 변하는데, 설교는 한때 주름잡던 이들 흉내 못
     | Home | 사이트맵 | 설교검색 | 설교전체보기 | 설교쓰기 |___ | 
    Copyright by 본 설교신문 자료를 다른사이트로 무단복사 절대금합니다(추적장치가동)/ 김효자 /사업자번호831-29-0156/서울시강남구도곡로1길14 /통판:서울강남01470/문자로 질문바람010-4394-4414 /E-mail:v919@naver.com   Contact Webma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