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마태복음 14장 22절에서 33절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 "경배하며 고백하기까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33절을 보면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경배하며 신앙 고백을 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본문 그대로 '경배하며 고백하기까지'라고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남녀가 서로 사랑할 때 첫 만남에서부터 '내가 너 사랑한다'라는 고백이 안되지 않습니까? 과정을 지나면서 사랑을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도 첫날 교회에 나와서부터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습니다'라는 고백이 안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고백을 하기까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베드로는 평생에 세번 고백을 했습니다.
첫번째 단계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해야 예수님과 관계가 맺어집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단계로 "세상 사람들은 나에 대해서 누구라 할지라도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주님이 물으셨을 때 "주는 그리스도 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을 듣고 주님이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세번째 단계로 부활하신 다음에 주님께서 갈릴리 바다로 베드로를 찾아가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주님, 내가 주님 사랑하는 줄 주님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즉 '주를 사랑합니다'라는 뜻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세 단계의 고백이 우리들에게 꼭 있어야 하는데 오늘 제자들의 고백은 두번째 단계에 해당됩니다. 그 고백이 있기까지는 세번의 과정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서 제자들이 경배하여 고백하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순종해야 합니다 (22-25)
아람 나라의 군대 장관으로 나아만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람은 지금의 시리아입니다. 나아만이 왕의 신임을 두텁게 받고 있을 때 문둥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고치지를 못하기에 온 몸에 문둥병이 퍼졌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땅에 살고 있는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가면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사마리아에 있는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갔습니다. 나아만이 문 밖에 왔음에도 엘리사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전갈해 주는 말이 '요단강에 가서 일곱번 목욕하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나아만은 '내가 왔으면 그래도 나와서 맞이해 주고 상처 위에 손을 흔들어 고쳐 줄줄 알았는데 요단강에 가서 목욕을 하라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내가 살고 있는 다메섹을 흐르고 있는 아마나와 바르발 강은 요단강 보다 열 배나 더 낫지 않느냐'하면서 노하여 분을 내고 물러갑니다. 첫째로 상당히 굴욕감을 느끼고 노하여 떠나갑니다. 둘째로는 아마나와 바르발 강은 유브라데 강의 상류로서 요단강 보다 열배나 낫다는 것입니다. 목욕할 데가 없어서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순종을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 때 따라왔던 종들이 나아만 장군에게 "주인님, 여기까지 왔다가 그냥 가시겠습니까? 요단강에서 목욕을 한다고 손해가 납니까? 고생이 됩니까? 그것을 왜 못하십니까? 밑져야 본전이 아닙니까? 어서 가시지요?"라고 권면을 합니다. 종들이 권면을 하니까 권면에 못 이겨서 "싫지만 순종"을 한 것입니다. 일곱번 목욕을 하라고 했는데 한번을 하면 7분의 1일이 낫고 두 번을 하면 7분의 2가 나은 것이 아닙니다. 여섯 번 할 때까지 전혀 소식이 없었습니다. 마지막 7번째 목욕을 하니까 어린아이의 살 같이 깨끗해 졌습니다. "끝까지 순종"을 했습니다. 끝까지 순종을 했을 때 엄청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깨끗이 고침을 받은 나아만은 '이스라엘 외에는 신이 없는 줄 내가 알았도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즉 체험을 했습니다. 이 체험이 그냥 되었습니까? 첫 단계가 순종에서 시작이 되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받고 나서 순종한 것입니까? 순종하고 나니까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고백하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고백을 하지 않았습니까? 누가가 시켜서 고백했습니까? 스스로 고백했습니다. 제자들도 이렇게 순종하고 나서 나중에 고백한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2절에서 25절을 보면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를 가지고 5천명이 넘는 엄청난 무리를 먹이셨습니다. 하루 종일 말씀의 은혜를 받고 배불리 떡을 먹은 백성들은 흩어져 가라고 해도 흩어져 갈 문제가 아니라고 하면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오늘 분문에는 흩어져 가는 것으로 되어있지만 똑같은 사건을 요한복음 6장에 기록한 후에는 백성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옹립하는 운동이 거기에서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저 분이 이스라엘의 왕인데 우리가 돌아갈 것이냐? 예수님을 왕으로 옹립하자'는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실 때는 그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정치적인 왕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제자들이 그 무리들과 같이 어울려서 오히려 앞장을 서려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내가 이 무리들을 흩어 보낼 것이니 너희들은 빨리 건너편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가버나움으로 가라는 뜻입니다.
본문에 보면 '재촉하사'라고 하였습니다. 한번 가라고 하셨는데 가지 않고 두번 가라고 해도 가지 않기에 재촉하신 것입니다. 재촉했다는 헬라 말에는 강권했다는 뜻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옹립하는 일에 우리가 빠지면 어떻게 하느냐'는 생각에서 가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남아 백성들의 앞장을 서고 싶고, 거기 남아 있으면서 영광을 받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빨리 건너가라고 재촉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싫지만 순종"을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중에 예수님의 말씀이 항상 좋아서만, 즐거워서만, 기뻐서만 순종을 합니까? 싫지만, 괴롭지만 순종하고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순종하고 난 후에는 믿음이 좋아지고 하지 말라고 해도 신앙 고백을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을 보내신 뒤에 예수님은 산으로 기도를 하러 올라가십니다. 그리고는 한 밤이 지나도록 기도하십니다. 그 때 제자들은 노를 저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수리를 갔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 19절에는 10여리를 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확히 따지면 5km를 갔다는 것입니다. 5km를 가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아십니까? 저녁은 6시부터 계산을 합니다. 예수님은 새벽 3시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기도를 마치고 제자들에게 오시기까지 바람과 물결로 인하여 고난을 당했습니다. 저녁 6시부터 새벽 3시까지면 9시간입니다. 9시간을 노 저어 가는데 얼마나 바람이 거세고 물결이 거세었으면 10리 밖에 못 갔겠습니까? 그 만큼 고생을 당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고난 중에도 순종"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해 가는 중에도 그런 고난은 당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때 안 믿는 사람들이 배를 타고 갔다면 그네들만 당합니까? 고난은 보편적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당하고 안 믿어도 당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고난 속에서 되돌아갔습니까? 고난 속에서도 기어이 가라는 곳까지 가려고 순종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싫지만 순종했고, 고난을 당하는 중에도 순종했습니다. 밤4경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밤4경은 새벽 3시부터 6시까지입니다. 그러니까 4경에 들어서자 마자 오셨으면 3시요, 좀 지났으면 4시에 오셨을 수도 있고 5시에 오셨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 동안 제자들은 그 만큼 오랜 시간 고생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물결을 잔잔하게 할 때까지 순종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가르칩니까? "끝까지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순종하고 나서 나중에는 주님 앞에 큰절을 하고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했습니다.
맥도날드 목사님이 '순종은 모든 문을 여는 열쇠다'라고 했습니다. 순종은 믿음이 있기에 순종할 수 있고 믿음이 없는데도 억지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여하간에 순종하고 나면 믿음이 좋아집니다. 즉 믿음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순종하고 나면 큰 은혜를 받습니다. 은혜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순종하고 나서 나아만 장군과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이 축복을 받지 않습니까? 축복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순종하는 믿음은 하늘 문을 여는 열쇠가 된다는 사실도 믿으시기 바랍니다.
첫단계는 믿음의 단계였다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믿음이 출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 붙잡혀야 합니다 (26-31)
26절을 보면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고생하고 있는 밤 아직도 어두운 밤에 산에서 기도하고 있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그 모습을 못 보시겠습니까? 사정을 모르시겠습니까? 다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이 믿음의 생활을 하면서 당하는 고난은 다 보시고 알고 계십니다. 때 되매 주님이 오시지 않았습니까? 찾아 오시면 '주님 어서 어십시오'하면서 즐겁게 영접해야 되는데 무서워 소리를 질렀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무섭고 놀랐으면 고래 고래 소리를 질렀겠습니까? 왜 예수님을 그렇게 무서워합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무서워 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을 무서워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유령이라 하여 무서워 소리지르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왜 유령입니까? 예수님이 왜 도깨비입니까? 예수님을 유령이라 하고, 예수님을 귀신이라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순종하면서도 아직도 예수님께 붙잡히지 아니한 사람은 예수님을 무서워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봤더니 제대로 믿으려면 망하겠다 싶기 때문입니다. 주일에 상점 문을 닫으라고 하니 그 손해를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하지 말라고 하는 일을 하면 수지가 맞는데 기어지 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라고 하는 일을 하게되면 고생이요, 손해가 되는데 어김없이 하라고 합니다. 예수 믿고 되는 일이 없겠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되면 얼마나 예수님을 무서워하겠습니까? 교회에 나오면서도 예수 믿기를 무서워하는 사람은 예수님께 붙잡히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붙잡히기 전에 제자들은 순종하면서도 예수님을 무서워했다는 사실을 여러분 스스로 자신의 믿음과 견주어 보기를 바랍니다.
27절에서 29절을 보면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놀라 소리지르는 제자들에게 "내니 두려워 말라 안심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주님의 음성을 알아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씀을 알아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베드로가 '만일 주시어든'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믿겠다는 뜻입니까? 이 말이 무슨 소리입니까? 이 소리가 제자들이 할 소리입니까?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한 것은 기적을 바라는 뜻입니다. 주님께 붙잡히기 전에 믿음의 상태는 자꾸 기적만 바라는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예수 믿고 되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절대로 주님은 기적을 아무 때나 일으켜 주시지 않습니다.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네가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도 너도 할 수 없고 꼭 하나님만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 우리의 믿음과 예수님의 사랑이 더하여 만나는 곳에 기적이 일어나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데 너는 기적만 바래? 내가 하는 그대로의 기적이 네게 나타나기만을 바래? 그래 한번 와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걸어갔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기적을 바라면 안됩니다. 아직 예수님께 붙잡히지 않았기 까닭에 기적만 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꼭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믿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0절을 보면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자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라고 하였습니다.
붙잡히기 전에는 예수님이 그렇게 작게 보입니다. 그리고 물결 즉 나를 괴롭히는 고난이 그렇게 커 보입니다. 오라 하기에 걸어가던 베드로가 아닙니까? 그런데 산더미 같고 집채같은 물결 그 뒤에 계시는 예수님은 너무 작게 보이는 것입니다. 물결은 너무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걱정이요, 근심입니다. 물결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나중에는 예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빠져들어 가지 않습니까?
순종하면서도 주님께 붙잡히지 않는 믿음은 고난을 당할 때에 예수님이 절대 보이지 않습니다. 고난만 보이고, 고난이 그렇게 커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붙잡히고 나면 아무리 산더미 같고 집채같은 물결이라고 할지라도 주님의 말씀 한마디에 물결이 평정됨을 확신합니다. 작아 보이던 예수가 예수께 붙잡히기만 하면 천하보다 크게 보인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베드로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지금 베드로가 물에 빠져 들어가는데 기도를 어떻게 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급한 상황입니다. 그럴 적에 '오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여 큰 은혜를 감사하고 감사하옵나이다. 지금 봄철이 돌아와 꽃이 피고 동산에는 짐승들이 뛰놀고 들판에는 새들이 노래하는 이 때에 내가 지금 물에 빠져 들어가고 있사오니 주님이여 나를 구원해 주시옵기를 간절히 간절히 바라옵고 또 원하옵나이다'라고 기도하겠습니까? 그런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의 아들 딸이 용돈이 모자라면 뭐라고 합니까?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 나를 길러 주신 아버지, 나를 공부시켜 주시는 아버지, 나를 먹여 주고 입혀 주시는 아버지, 내가 용돈이 없사오니 나에게 용돈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또 원하옵나이다'라고 합니까? 허튼 소리 아닙니까?
기도할 때 허튼 소리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꾸 허튼 소리를 하니까 대표 기도가 길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발 그런 소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간단하게 기도를 했습니다. 얼마나 멋진 기도입니까? 짧은 한 마디였지만 결사적이었습니다. 기도는 아버지와 얘기하듯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기도했을 때 예수님이 즉시 손을 내밀어 붙잡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붙잡아 주시니까 베드로가 뭐라고 생각을 했겠습니까? "야 이제는 살았다. 예수님이 이렇게 좋구나.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께 붙잡힌 것이 이렇게 영광이구나"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어디에 가서 훈련을 받아서 된 일입니까? 돈을 주고 산 일입니까? 주님께 붙잡히면 경배하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고백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꼭 예수님께 붙잡힌 성도, 예수님께 붙잡힌 가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한 배를 타야 합니다 (32-33)
큰 회사는 너무 직원이 많기에 서로 몰라보게 되므로 한 식구 같은 기분이 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30명이 될까 말까한 중소기업은 한 집안 식구 같을 것입니다. 그럴 적에는 일이 잘 되면 저녁이라도 함께 하면서 건배를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우리는 한 배를 탔습니다'라고 합니다. '한 배'를 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운명을 같이 한다는 뜻입니다. 이 회사가 망하면 너도 망하고 나도 망합니다. 우리 가족 식구들은 모두 굶게 되고 나는 노숙자가 되는가 하면 너도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배를 타고 갈 적에는 먹어도 함께 먹고 굶어도 함께 굶는 것 아닙니까? 가면 함께 가는 것이지 누구는 떼어놓고 갑니까? 파선해서 배가 깨어지면 함께 죽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배를 탄다는 것은 운명을 함께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운명을 함께 하고 예수님과 한 배를 타야 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32절에서 33절을 보면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를 붙잡은 예수님은 베드로와 함께 배에 오르셨습니다. 예수께서 배에 오르기 전에 그 배 안은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불안, 공포, 초조, 좌절, 절망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다가 예수님이 배에 오르니 바람이 그치고 바다가 조용해졌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이 함께 탄 배는 평화가 깃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한 배를 타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속에 그리스도가 산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 속에 그리스도가 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마음에는 항상 천국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옥중에 갇히고서도 기뻐하고 기뻐하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 마음은 지옥인데 죽으면 천국인줄 아십니까? 여러분들 가정도 꼭 주님을 모시고 주님과 한 배를 타는 가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남편도 한 배 타기를 바랍니다. 아들 딸들도 주님과 한 배 타는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이 물결을 잔잔케 해 주십니다. 주님이 가고 싶은 곳까지 무사히 가는 것이 성공이요, 축복입니다. 주님과 함께 목적지 가버나움에도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 주님과 함께 궁극적으로는 천국에도 함께 가는 것입니다. 주님과 한 배 탄 가정은 이렇습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제자들이 하나같이 예수님께 경배하며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한 것은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닙니다. 돈을 받고 한 것이 아닙니다. 첫째로 순종의 단계가 있었습니다. 싫어도 순종했고, 고난을 당해도 순종했습니다. 끝까지 순종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께 붙잡히는 단계가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순종하면서도 붙잡히기 전에는 별 소리를 다 했고, 별 일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붙잡히고 나면 '나는 예수님 덕분에 살았다. 예수가 이렇게 좋더라'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간증을 하게 됩니다. 셋째로 예수님과 한 배를 타는 단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함께 평안이 이루어지고 평화가 깃들고 목적지에 무사히 이르게 됩니다.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이 예수님과 한 배를 탄 가정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