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구원에 따르는 변화의 모습 2002-06-25 15:44:28 read : 4105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2. 6. 16 // 행 9:22-31
몸과 마음의 연관성에 대해서 연구가 많이 되었습니다만, 아직 모르는 것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머리에 있습니까? 가슴에 있습니까? 의학적으로 머리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철학적으로는 가슴에 있다고들 합니다. 잘 알지 모르겠어요.
우리의 몸과 마음에 과연 어떤 연관이 있을까? 우리의 마음이 몸과 전혀 다르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인가? 한때 이 이론을 믿는 자들이 많았어요. '몸과 마음은 완전히 별개의 것이다. 특별히 몸은 악한 것이고 영은 선한 것이다' 사도 요한이 이러한 이단을 꾸짖었습니다. 그것이 요한일서에 나타난 영지주의입니다. 영은 거룩하고 몸은 악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육신을 입고 오심을 부인했습니다. 이 영지주의가 사도 요한 시대에 다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니고 여전히 그 뿌리를 우리나라에도 남기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제가 거듭 말씀드린 이원론(二元論)주의입니다. 교회 생활은 거룩하고 세상 직업은 거룩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부부생활을 밤에 나누는 것은 거룩하지 않다고 합니다. 이원론주의입니다.
몸과 마음에 대하여 우리가 상당히 복잡한 연구를 하고도 아직 내려진 결론이 많지 않지만,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몸을 통해 우리 마음을 어느 정도 나타내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많은 경우 몸은 마음의 거울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얼굴만 봐도 그 사람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근심스런 얼굴을 보면 "혹시 오늘 무슨 걱정이 있으십니까?"하고 묻습니다. 그것이 얼굴에 나타나니까요. 화가 나도 우리의 얼굴에 나타납니다. 마음이 번민되고 화가 많이 나면 때로 어떤 사람들은 직선적으로 이것이 얼굴에 나타나는데, 코에서 연기가 날 정도로 아주 씩씩거립니다. 그럴 때는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개도 기분이 나쁘면 표정이 바뀐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남녀가 서로 사랑하게 되면 그 몸이 달라집니다. 옷차림, 화장법이 달라지고 말도 달라져요. 콧소리가 많이 섞이죠. 얼굴표정도 물론 달라집니다. 간단히 얘기하면 마음의 상태가 우리의 모습을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보면 우리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자에게 따라오는 변화의 어떤 모습이 있을까요? 예! 성경은 있다고 얘기합니다. 우리가 정말 구원받았다고 하면, 정말 거듭난 체험이 있다고 하면 우리의 몸과 삶에 어떤 변화가 반드시 따라오게 되어 있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겁니까? 구원받은 것을 성경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너의 영이 죽어 있었는데 살아났다고요. 우리의 마음이 과거에 죽어있다고 묘사한다면, 구원받은 그 이후에는 살아난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의 마음이 살아났다고 하면 어떻게 그것이 우리의 몸을 통해, 생활을 통해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은 우리의 마음에 너무나 큰 충격이기 때문에, 곧장 우리의 삶으로 직결되어서 그 변화를 누구나 확연히 읽을 수 있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읽은 이 본문은 사울이라고 하는 한 사람이 구원받고 나서, 그의 모습 속에 나타난 여러 가지 변화를 자세히 기록한 것입니다. 오늘 그의 체험을 통해 우리 가운데 그리스도를 구체적으로 받아들이고, 구원받은 후 우리의 모습 속에 나타난 보편적인 변화 몇 가지를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면 이러이러한 증거는 있어야 한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정말 구원받았다면! 이것은 사도 바울의 변화와 일생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에 적용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오늘 여기에 기록하신 줄 믿습니다. 제가 이 변화를 살펴보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정말 우리가 구원받았는가를 다시 한 번 점검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우리가 받는 구원은 신분적인 구원만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나는 과연 과정적인 구원을 지금 이루어 가고 있는가? 우리가 이 변화를 체크해 본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의 신앙을 가늠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은, 너희가 정말 구원받았다면 구원받은 자에게 첫 번째로 나타나는 변화는 다름 아닌 체험적 변화라고 말씀하십니다.
1. 체험적 변화
구원은 체험적인 사건입니다. 그러기에 이것은 단순한 생각이나 사상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예수를 믿긴 믿는데 생각으로 믿어요. 교회에도 그런 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후 하늘에 계시다가 다시 오실 것이다'라고 압니다. 또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긴 믿는데 그저 생각으로 믿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가슴에 와 닿는 것도 없고, 자기 마음에 어떤 변화가 없습니다. 가정생활에 변화가 없습니다. 사회생활에 변화가 없습니다. 교회생활은 물론이고요. 5년, 10년, 20년을 믿어도 그 모양 그대로예요. 왜? 그들에게는 체험이 없고 겪어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사람이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는 신학교 교수였습니다. 구약성경을 달달 외울 정도로 많은 지식이 있었던 이 사람의 이름은 니고데모였어요. 그는 어릴 때부터 종교생활을 해 왔습니다. 부모님은 유대인이었고 자신은 신학교 교수였으니 얼마나 많이 성경을 읽고 알았겠습니까? 그런데 그에게 고민이 생겼습니다.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없어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늘나라에 들어갈지 확신이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그 밤에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예수님을 찾아가서 말을 겁니다. "예수님, 다른 사람이 다 뭐라고 해도 제가 보기에 당신은 굉장히 훌륭한 선지자이십니다." 이러면 예수님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아, 무슨 과찬의 말씀을요. 앉으시죠!" 하고 얘기가 나가야 되는데,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니고데모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이것이 무슨 얘기입니까? 오늘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니고데모야, 생각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두 번째 태어나는 것이다. 체험이고 현실이다. 너는 다시 태어나야 돼!" 그랬더니 니고데모가 충격을 받아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아니, 예수님! 제가 어떻게 다시 태어납니까? 이렇게 나이 많아 늙었는데 엄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 나올까요?"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여기에 한 단어를 더 붙였어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그 방법을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 다음 3장 6절에 굉장히 중요한 말씀을 하시는데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지금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히브리 어법으로 볼 때 "니고데모야, 네가 어떻게 오늘 여기에 존재했니? 네가 어떻게 이 세상에 태어났니? 너의 어머니가 너를 낳았기 때문이 아니니? 너의 어머니의 육신이 너를 낳았기 때문에 너의 육체가 있는 것이란다. 그와 똑같이 영적인 거듭남도 영으로 말미암아 태어나야 돼! 생각으로 되는 것이 아니야! 체험해야 돼!" 니고데모가 어리둥절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설명을 해 주십니다. "그래, 네가 어리둥절한 것을 내가 안다. 바람이 불면 네가 바람을 느낄 수 있지 않니? 그러나 그 바람이 보이던?" 여러분, 그렇잖아요? 바람이 불면 태극기가 바람에 흔들립니다. 그런데 그 바람이 어느 방향에서 불어서 어디로 가는지 우리 중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요. 그러나 바람은 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바람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영으로 태어나는 것은 이와 같다는 겁니다. 내가 육체적으로 느끼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중생은 존재한 사건입니다. 거듭남은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사건입니다. 생각이나 사상이 아닌 것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교회에 나오면서 생각으로는 복음을 알지만 중생한 체험이 없이 교회를 다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중생한 체험이 있으신가요?
오늘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반대하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눈이 멀어졌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나니아 선지자를 보내서 사도 바울에게 복음을 전해주자 그가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또 성령을 충만하게 받습니다. 이 모든 것은 사건이요, 사도 바울이 직접 체험한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이러한 체험이 있어야 됩니다. 단순히 교회 나오는 것 이상, 단순히 신앙생활 하는 것 이상, 우리의 영이 두 번째 태어나는 사건과 체험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자기의 체험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
이 말씀을 묵상해 보셨나요?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거예요. 그리스도에게! 체험입니다, 사상과 철학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갈보리 십자가 위의 주님과 함께 동일시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내 안에 사는 것은 주님이십니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내 인생의 주인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체험적인 사건이었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에게 이러한 체험이 있으신가요? 여러분은 갈보리 십자가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 죄 사함 받은 체험이 있으십니까? 십자가 앞에 당신을 못 박고, 이제 당신의 모든 삶을 그리스도에게로 이전하고 양도한, 그러한 사건을 체험하셨습니까? 여러분 마음속에 이러한 체험의 순간이 없다면 여러분은 구원과 상관없을지 모릅니다. 혹 생각으로 믿는 것은 아닌가요?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구원받은 자에게는 반드시 변화가 따라와야 된다! 첫 번째는 체험적인 변화입니다. 오늘 아직도 이 체험을 하지 못하신 분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이 사건을 경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니고데모가 어리둥절해 하자 이렇게 가르쳐 주십니다. "니고데모야, 네가 이것을 어떻게 체험하는지 알기를 원하느냐?" 그때 예수님이 간단한 비유를 해 주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잘 아는 사건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불순종해서 하나님의 불뱀이 그들을 다 물게 하셨습니다. 다 죽어갑니다. 그때 모세가 기도하자, 하나님이 한 구원의 방법을 베푸셨어요. 나무로 만든 장대 위에 놋뱀을 달라는 겁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돌아다니면서 장막에 있는 백성들에게 외치라! 누구든지 나와서 이 놋뱀을 바라보는 자는 살리라!" 외쳤더니 백성들이 아우성입니다. '모세가 어떻게 저렇게 무식하게 말을 하는가! 의사를 데려와야지, 약초를 갖다줘야지, 장대 바라본다고 뱀에 물렸는데 살겠는가!' 원망하던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납득이 가지 않는 그 말씀을 믿고 억지로 물린 다리로 기어 나와서 놋뱀을 바라본 자는 다 산 줄로 믿습니다.
인자도 달려야 하리니! 갈보리 십자가를 체험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십자가가 아닙니다. 내가 달려야 할 그 십자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찾아오셔서 당신을 사랑하시기에 당신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바로 당신 대신 물과 피를 다 흘리신 그 갈보리 십자가에! 여러분, 이 사건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체험하지 못하셨습니까? 그리스도를 생각으로가 아니라 마음에 인격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셨습니까? 기도하십시오. 찬양하시고 십자가에 관한 말씀을 읽으시고 기도하시는 어느 순간, 성령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갈보리 산 위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구원은 체험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체험적인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 본문이 가르쳐 주는 것은 이성적인 변화입니다. 구원받은 자에게는 체험적 변화뿐 아니라 이성적 변화가 따라오게 되어 있다고 얘기합니다.
2. 이성적 변화
왜 교회에 나옵니까? 어떤 사람들은 노래가 좋아서 교회에 나옵니다. 오늘 성가대가 아름다운 찬양을 해 주었는데 영안교회의 특징을 지닌 성가대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제 마음에 합해 갑니다. 많은 사람들 중,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교회에 나옵니다. 그런데 이들의 목표가 뭐냐 하면, 내 평생 소원이 성가대 들어가는 거예요. 제가 신앙 생활할 때 대영침례교회라는 큰 교회를 나갔는데, 청년시절에 성가대를 했어요. 그런데 거기에 주(?)집사님이 계셨어요. 이분은 목소리도 좋고, 성가대만 하면 얼굴이 환해집니다. 저와 같이 베이스를 했는데 찬양을 너무 잘해요. 그런데 이분이 신기한 것은, 목사님이 설교를 딱 시작하면 바로 주무셔요. 그래서 주(?)집사였습니다. 원래 오 집사님인데 주 집사로 바꿨어요. 얼마나 조는지 옆에 있던 저에게 기대서 좁니다. 어떨 땐 코를 골아 제가 찔러서 깨워놓으면 또 자요. 그런데 또 신기한 것은, 설교가 끝나고 찬양을 하면 환하게 얼굴이 펴져요. 한잠 잘 자고 났으니 얼마나 그 얼굴이 환하겠어요.
이 분이 구원받았을까요? 아니요. 노래가 좋아서 교회에 나온 거예요. 어떤 사람은 습관적으로 나옵니다. 모태신앙, 부모님부터 믿었으니까 그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은 어머님이 유언해서 나옵니다. 어떤 사람은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나옵니다. 여기에 그런 남자들이 있을 겁니다. '바가지 긁고 밥을 잘 안 해주니까 한끼 얻어 먹으려면 어떡하나, 나가야지.' '한시간만 앉아 있으면 되는 거지 까짓 것!' 이런 사람들은 5년, 10년 교회를 나와도 성경이 무엇인지 몰라요. 성경만 읽으면 졸리고 설교만 들으면 이해가 안 가요. 딴 생각만 들어와요.
이성적인 변화가 없는 사람입니다. 구원을 돌아보아야 할 사람입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교회에 나와도 하나님 말씀인 이 성경 말씀의 핵심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남에게 한 번도 설명해 본적이 없어요. 왜? 그들이 모르니까요.
그러나 성경은 얘기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구원을 받으면 이성적인 변화가 따라온다고 말씀하십니다. 20절을 보세요. 아주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사울이 전파했어요. 다시 22절을 보세요.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여기서 중요한 얘기가 나오는데,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중생의 체험을 가진 이후 이 주제를 가지고 설교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구절은 사도 바울이 남긴 13개 서신서의 핵심입니다. 다른 얘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이시다!' 골로새서의 주제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시다!' 로마서의 주제입니다.
이성적인 변화, 지식의 변화가 생겨야 합니다. 특별히 어떤 지식의 변화가 생겨야 되는가? 성경은 예수님에 관한 지식의 변화가 생겨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참으로 구원받은 자는 예수님에 관한 이성적 변화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옛날에는 그저 예수님을 4대 성인의 한 사람으로 알았어요. 공자도 좋고 불자도 좋고 석가도 좋고 다 좋지 뭐. 소크라테스도 좋고 예수님도 좋고... 그러나 구원받고 나면 예수님에 대한 이성적 변화가 생깁니다. 예수님을 과거의 사람으로 알지 않습니다. 그가 비록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지만, 그분은 인간이 아니에요. 하나님이세요. 우리가 우리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게 되자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분은 그리스도, 히브리말로 메시아이십니다. 여러분, 구원받은 후 이러한 변화가 생겨야 합니다.
구원받은 자는 성경을 읽을 때 그리스도 중심으로 읽습니다. 십자가 중심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의 특징은 성경을 읽기는 읽는데 "야, 기가 막힌 윤리가 여기 있구나! 기가 막힌 문학이 여기 있구나! 성경을 읽으면 문학도 늘고 좋은 얘기가 다 있지, 착한 사람이 되지." 그래서 성경을 읽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이 참으로 거듭나고 나서 성경을 읽게 되면, 창세기 1장 1절부터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까지 이곳에서 붉은 십자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구약의 양을 잡아 제사 드리는 그 사건이 바로 나를 위한 말씀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거기에 십자가가 나타나게 되고 그리스도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러한 자는 이 성경 말씀을 읽을 때마다 그것이 곧 나를 향한 말씀이에요. 내 부인과 자녀를 향한 말씀이 아니고, 설교를 들을 때마다 그것이 나를 향한 말씀으로 와 닿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러한 깨달음이 있으십니까? 이러한 이성적 변화가 있으신가요? 구원받은 자에게는 체험적 변화가 따라옵니다. 이성적 변화가 따라옵니다. 세 번째 본문이 가르쳐 주는 바는 사회적 변화가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3. 사회적 변화
우리 인간은 다 사회적 동물입니다. 이 말은, 우리는 어딘가에 소속되어 살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과거에 소속되어 있던 공동체에서 이탈하여 다른 공동체에 들어가는 것, 이것이 구원입니다. 옛날에 친구들과 쏠려 다닐 때는 친구 없으면 죽을 것 같아요. 같이 술 마시던 친구들, 그들이 없으면 세상을 무슨 재미로 살까 싶었어요. 그러나 이제 구원받고 보니 그들은 아무래도 나하고 방향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이제 새로운 공동체 교회 안에서 친구를 찾게 됩니다. 구원받은 증거입니다. 또 이것이 구원에 반드시 따라오는 변화이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나와서도 구원받았다고 해놓고 늘 세상 친구를 그대로 둡니다. 다 끊어버리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이 말씀을 잘못 사용해 가지고 구원받고 나서 친구들에게 "나, 이제 너희들하고 절교다. 이런 영적으로 죽어있는 것들! 사탄의 자식들!" 하면서 다 끊어 버렸어요. 이러면 여러분의 인격이 잘못된 것이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옛날 친구와 사귀어야 됩니다. 관계를 유지해야 됩니다. 그러나 무슨 말씀입니까? 그들과 같이 어울리던 일들은 정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과 옛날에 재미있던 일들이 더 이상 여러분에게 재미있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고도리를 칩니다. 밤새도록 치고는 마누라가 교회에 가자 하니까 할 수 없이 나와 앉아 있습니다. "예배 시간이 언제 끝나나? 이 한 시간이면 몇 판을 돌렸겠다. 낚시하러 갔으면 지금쯤 서너 마리는 잡았을 텐데!" 이런 자들이 교회에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혹시 신분적인 구원은 받았을지 모르지만 전혀 성장한 믿음이 아닙니다. 구원받게 되면 사회적으로 변화가 생깁니다. 친구관계에서 변화가 생기고, 부부간에 변화가 생기고, 부모와 자식간에 변화가 생깁니다. 어제와 같을 수가 없어요. 직장 갔다오면 신문만 보고, 그래서 부인에게 늘 잔소리를 듣던 사람이 구원받고 나면 사회적인 변화가 생겨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가끔 설거지를 해주는 사람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물걸레질을 해주는 사람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예수 믿은 후 집에서 걸레질 한번 안 해본 사람, 이런 분들은 자신의 구원을 돌아봐야 됩니다. 옛날 그 남편 그대로, 그 부인 그대로, 그 자녀 그대로... 아닙니다. 성경은 예수 믿고 나면 사회적인 변화가 생겨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23절과 24절을 보세요. 아주 중요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신기하지 않습니까? 옛날에 유대인의 우상이 누구였습니까? 사울이었어요. 사울과 유대인은 너무너무 가까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관계가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합니다. 사울도 유대인을 죽이려 했습니까? 아니요. 사울은 여전히 유대인을 사랑했어요. 자기 민족이 구원받기를 바랬어요. 그러나 유대인들이 그를 미워하는 관계로 바뀌었던 겁니다. 사회적 변화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사회적인 변화가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이 사회적 변화를 외치기 위해서 목장을 만들었습니다. 아마 지난주에 모였을 것입니다. 목장에 참석하십시오. 세상 친구들이 술 먹자고 하면 밤 12시까지 갑니다. 그러나 모여서 성경공부 10분만 더 지나면, 예배시간 5분만 더 지나면 시계 보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는 사회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겁니다. 목장에 들어오셔서 믿음 안에 새로운 친구를 만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고민을 얘기하십시오. 여러분의 기도제목을 요청하십시오. 우리의 사회적인 모든 관계가 주님 안에서 다시 정리될 때에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장해 나갈 줄 믿습니다.
구원받으면 체험적인 변화가 따라옵니다. 이성적인 변화가 따라와서 말씀이 깨달아집니다. 세 번째 사회적인 변화가 따라옵니다. 그리고 마지막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는 바는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4. 가치관의 변화
29절을 보세요.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변론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전도를 했던지 헬라파 유대인들이 여기에 주의했어요. 앞에 유대인들이 죽이려 한 사람들은 누구고, 헬라파 유대인은 누굽니까? 사도 바울이 헬라파 유대인임을 아십니까? 그는 헬라 말에 너무 능통한 사람이었고,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였어요. 히브리파 유대인과 헬라파 유대인의 두 부류가 있었는데, 사도 바울은 헬라파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가서 이제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변론하며 증거 했다고 말씀합니다.
구원받고 나면 가치관이 바뀌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돈이 최고였어요. 쾌락이 최고였어요. 지위가 최고였고, 권력이 제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 안에서 거듭나면 그 가치관이 바뀝니다. 여러분, 불교를 믿는 스님들도 이 세상이 얼마나 잠시 잠깐의 허무한 곳인가를 알아요. 그래서 산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재산 상속 다 포기하고 들어가 삽니다. 바람같이 물같이 살아갑니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입니다. 불교신자들이 이것을 알진대,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왜 이것을 모르고 살아가야 합니까? 성경이 무엇을 얘기합니까? 이 땅에 쌓은 재물은 부질없는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이 땅은 잠시라고 얘기합니다. 이 땅보다 엄청난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을 위해 부름 받은 자들이 아니고, 우리에게 찾아오는 저 엄청난 세계를 위해 살아야 할 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명령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의복을 위해 염려하지 말라. 그것은 이방인들 즉 구원받지 않은 다른 사람들이 염려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오늘 소위 구원받았다고 하는 성도들이 너무너무 의식주를 위해 염려합니다. 그들의 오직 목표는 몇 평 아파트를 구입하는가 입니다. 여기에 끝이 있는 줄 아십니까? 60평을 구입해도 다음 노후대책에 한 채 더, 그 다음 큰아들에게 한 채, 둘째 아들에게 한 채... 그렇게 그 아파트를 사기 위해, 돈을 모으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인생을 다 허비해 버립니다.
하나님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부관계, 부부간에 같이 시간을 내고 같이 기도하고 사랑을 나누라. 그것이 믿음 안에서 중요하고 영원히 가는 진리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무시해 버립니다. 부부간에 대화하지 않습니다. 외식비조차 아낍니다. 제가 가을마다 여행가라고 그렇게 얘기하지만 여행 한번 가지 않습니다. 부부간에 남처럼 살아갑니다. 자식들과 대화해야 됩니다. 자식들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 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왜? 돈벌어야 되니까요.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이방인들의 삶의 태도라고요. 우리가 진정으로 구원받았다고 하면, 우리는 이 땅을 위해 살 것이 아니고 저 하늘나라를 위해 살게 된다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구원받고 나면 교회를 걱정하게 되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저 영혼을 구원할까, 잃어버린 영혼들을 볼 때 안타까운 마음이 생깁니다. 누가 가난한 사람이 없는가 돌아봅니다. 그리고 구호헌금을 할 때 신혼반지를 팔아버리는 거예요. 그가 돈이 아까운 줄 몰라서 다이아몬드 반지를 팔았겠습니까? 어떤 이들은 자기의 적금을 깨버리는 거예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이웃을 도와주는 거예요. 왜? 구원받았으니까! 이 땅에는 그저 먹을 것 입을 것 있으면 족하니까요.
과거에는 어떻게 모을까를 고민했습니다만 이제는 어떻게 쓸까를 고민합니다. 과거에는 어떻게 더 누릴까를 고민했습니다만 이제는 어떻게 더 섬길까를 고민합니다. 과거에는 어떻게 더 즐길까를 고민했습니다만 이제는 어떻게 내 몸을 불태워 봉사할까를 고민합니다. 예수 믿는다 하면서 가치관이 변화되지 않으면 그것은 참 구원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교회사가 무엇을 얘기합니까? 교회사는 과거에 예수 믿고 변화 받은 이들의 행적을 기록한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변화했나요? 오늘 사도 바울 뿐일까요? 어거스틴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그렇게도 즐기던 쾌락을 하루아침에 정리해 버렸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김익두 목사, 그는 평양 시내의 깡패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변화된 모습, 사랑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로 사랑하는 목사가 되었습니까? 그는 부고장을 보냈어요. '김익두 사망' 온 평양시내 상인들이 즐거워했어요. "익두가 죽었디야!"
그런데 죽은 사람이 웬일입니까? 검은 옷에 검은 책을 하나 끼고 나타난 겁니다. "어, 안 죽었네!" 시간이 흐른 후, 소문이 들려옵니다. 옛날의 김익두가 아니라고요. 맨날 두들겨 패더니 이제는 남이 때려도 맞는다고 합니다. 한겨울에 상인들이 얼음물을 끼얹습니다. 그런데 김익두 목사가 옷을 툭툭 털고 웃으며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옛날의 김익두가 죽은 것을 감사하시오! 그렇지 않았으면 오늘 당신은 정말 죽었을 것이오!" 그러고 지나갔어요.
백양로 교회에 대도 조세형이 와서 간증집회를 합니다. 조세형을 아십니까? 감옥에서 성경을 진실 되게 10번 이상을 읽었어요. 그는 거듭난 사람이에요. 복음을 외치며 다닙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요, 구원받은 자의 마땅한 삶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러한 변화가 있습니까? 5년 10년 15년 20년 집사가 되고 안수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직급은 올라가지만, 혹시 여러분의 삶에 전혀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닙니까? 이왕 예수 믿을 바에 오늘 바울과 같이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두 이런 기도의 제목을 내어놓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소원을 품고 남은 생을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주여! 제 안에 체험의 변화가 있게 하옵소서! 이성적인 변화가 있게 하시고, 사회적인 변화가 일어나서 정리해야 할 관계를 정리하게 도와주옵소서! 그리고 가치관의 변화를 우리에게 가져다 주시옵소서!
대도 조세형이 할 수 있다면 당신은 얼마나 몇 배 훌륭한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 모두 구원에 합당하게 변화 받아 여러분의 가정뿐만 아니라 부산시, 이 한국 땅덩어리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위대한 도구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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