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3:1-13/ 아브라함과 롯 / 한경직 목사 2014-08-26 14:35:08 read : 1322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이 시간 읽은 창세기 13장에는 우리가 잘 아는 아브라함과 롯에 대한 얘기가 있습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올시다. 아브라함과 롯이 같이 애굽에 내려갔다가 또한 같이 가나안 땅으로 올라와 벧엘과 아이 성 근처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 아래서 아브라함도 양과 소와 육축이 많아졌고, 또 롯도 그 소유가 많아져서 그 근방의 목장이 좀 부족하여진 모양입니다. 이렇게 되니 아브라함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목장 때문에 서로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때에 아브라함이 자기의 조카 롯을 불러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지 말자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서로 다투지 말자고 하였습니다. 그는 평화를 추구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그들은 서로 한 골육인 것을 지적하였습니다. 모든 싸움이 추하지만, 골육지간의 싸움은 더욱 추합니다.
또 그리고 그 땅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거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싸움을 삼갈 것이지만, 더욱이 이방 사람들 앞에서 골육지간에 싸우게 되면 더욱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계속해서 롯에게 말하기를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네가 좌로 가면 나는 우편으로 가겠고, 네가 우편으로 가면 나는 좌편으로 가겠다.”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양보의 태도를 또한 봅니다. 다툼을 그치고 평화를 추구하려면 말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때로는 양보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곧 아브라함의 생활 태도입니다. 그는 평화를 구하였고, 또 평화를 위해서는 양보하기를 큰 무슨 원리가 아닌 이상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아브라함이 그와 롯 사이에 싸우지 않아야 할 이유를 두 가지로 지적하였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첫째는 골육지간이므로 싸우지 아니해야 하고, 둘째는 다른 사람들, 다른 민족들 앞에서 싸울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이 왜 다투지 아니하여야 하는가? 왜 교회가 평화롭게 나아가야 하는가? 그 이유도 두 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는 우리는 다 한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말하자면 영적으로도 골육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또 하나는 우리 주위에는 안 믿는 사람들이 많이 둘러있어서 우리 믿는 사람들의 생활을 주시하는 까닭입니다.
우리 남한 동포들이 왜 서로 싸우지 아니하여야 하느냐? 왜 국민총화가 꼭 필요하냐? 그 이유도 간단히 두 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는 우리는 다 단군 할아버지의 피를 받은 동포입니다. 혈족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의 자유를 빼앗으려고 호시탐탐 엿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민족도 모르고, 이성과 양심도 저버리고, 때때로 전쟁을 도발하는 공산당 집단이 북한에 도사리고 있는 까닭입니다.
왜 우리가 평화를 그렇게 갈급해 하되 꼭 평화통일을 추구하는가? 그 이유도 간단히 말하면 두 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는 우리가 남한에 살든지 북한에 살든지 다 한 피를 받은 배달의 민족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사실 가족과 친척들을 이북에 두고 온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우리 민족을 역사적으로 시기하고 멸시하려고 하는 다른 민족들도 우리 사방에 또한 둘러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또는 한국 민족으로서 이 아브라함의 생활의 태도에 대하여 꼭 배울 것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우리 민족이 세계 어디를 가나 재주 있고 부지런히 일한다고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실로 감사한 생각이 북받쳐 올라옵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 민족은 어딜 가든지 서로 합할 줄을 모른다고 하는 말이 들려올 때에는 우리의 가슴이 얼마나 아픈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롯의 태도를 잠깐 생각하여 보십시다.
그는 아브라함이 이렇게 평화적으로 양보하는 말로 하는 말을 듣고 곧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봅니다. 물이 넉넉하고 푸른 풀이 무성한 목장을 찾았습니다. 그리해서 멀리 요단강 하류에 있는 소돔과 고모라 성 근방에 있는 평야를 바라보니 물도 넉넉하고 푸른 풀도 무성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곧 그곳으로 가기를 작정하고 동편으로 옮겨가서 그곳에 장막을 쳤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롯의 태도를 주시하여 보세요.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입니다. 본래 아브라함을 따라서 이때까지 온 것입니다. 자기 삼촌이 이만큼 양보하는 뜻을 보이면 사실은 자기가 양보했어야 될 것입니다. “삼촌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아니됩니다. 삼촌께서 먼저 좋은 것을 택하세요. 삼촌께서 우하시면 나는 좌하겠고, 삼촌께서 좌하시면 내가 우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했어야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말은 한마디도 들리지 아니합니다. 그리고 그는 물이 넉넉하고 푸른 풀이 무성한 곳을 얼른 자기가 먼저 택하고, 소돔과 고모라 성 가까이 장막을 쳤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그후에 그는 얼마 안 되어 소돔 성 안에 들어가 살았다고 하였습니다. 당시 소돔과 고모라는 음란하고 죄악이 많은 성들로 소문이 났는데도, 그런 면은 도무지 전혀 생각지 아니한 모양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자기의 갈 바, 자기의 살 것을 택함에 있어 물질 방면만 보았고, 도의(道義) 면은 전혀 도외시, 무시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창세기를 읽는 분들은 잘 압니다. 창세기 14장을 읽어볼 것이면, 몇 해 후에 소돔 왕과 그를 도와주는 몇 왕, 또한 북방에 있는 시날 왕과 그 연방 그 두 사이에 큰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성 왕들이 패전을 했습니다. 적군이 소돔과 고모라 성을 함락시키고, 모든 재물을 약탈하고 국민들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그때에 롯도 가족들과 같이 포로로 잡혀서 멀리 북방으로 끌려갔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때까지 벧엘 근방에 살다가 이런 놀라운 소식을 듣고, 특별히 롯의 소식을 들을 때에 그냥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를 도와주는 여러 청년들, 자기가 평소에 훈련을 시켰던 청년 318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밤에 그들이 잘 때에 갑자기 습격을 해서 흩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롯과 그 가족을 도로 찾아왔습니다. 이렇게 롯은 자기 삼촌 아브라함의 덕분으로 겨우 생명을 보존하게 되었습니다.
그만하면 롯이 다시 소돔 성에 가서 살 마음이 보통 사람 같으면 없었을 텐데, 그래도 롯은 그다음에 다시 소돔 성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거기에 그냥 머물러 살았습니다. 아마 소돔 성이 그에게 맞았던 모양입니다. 그 결국은 또한 어떻게 되었는가? 여러분은 아마 잘 기억하실 것입니다. 죄악으로 관영한 소돔 성과 고모라 성은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의인 10사람이 있을지라도 죄를 용서하기를 원하신 하나님은 의인 10사람도 없는 그 두 성을 결국은 유황불로 멸망을 시키고 만 것입니다.
다행히도 롯과 그 가족은 천사들의 특별한 도움으로 그 두 성이 아주 파멸하기 직전에 그곳을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자기 아내는 천사가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소돔 성이 아쉬웠던지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어버렸다는 이 얘기는 우리가 잘 아는 너무나 유명한 얘기입니다.
주의하여 보세요. 푸른 풀밭을 따라가던 롯, 도의를 무시하고 물질만 좇던 청년 롯은 결국은 빈손으로 허둥지둥 소돔 성을 버리고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멀리 불타는 화염에 싸인 소돔 성을 바라봅니다. 자기의 재산까지 태우며 타오르는 연기만 망연히 바라보게끔 되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물질을 쫓던 이 롯은 적수공권(赤手空拳)이 된 것입니다. 그 후에 롯의 그 최후가 얼마나 비참하게 된 것은 더 계속해서 얘기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리고 평화를 추구하고 양보하면서 척박하지만 산지에 그냥 살았던 아브라함은 도리어 모든 방면으로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 역사의 산 교훈이 우리에게 경감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기에 두 가지 생활의 태도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브라함의 삶의 태도, 다른 하나는 롯의 삶의 태도입니다. 하나는 사실 그리스도인의 삶의 태도요, 다른 하나는 세상 사람의 삶의 태도입니다. 여기에 앉은 우리는 어떤 삶의 태도로 이 인생길을 걸어가는가? 바른 선택이 필요합니다. 바른 가치관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더 귀한가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목자가 푸른 초장을 찾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도의 면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장사하는 이들이 이익을 추구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도의 면을 무시하면 아니됩니다.
요사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고요히 살펴보면, 롯의 길을 걷는 이들이 너무 많지 않은가 느껴집니다. 무슨 가짜 약품, 가짜 화장품, 가짜 커피, 가짜 비누, 가짜 과자, 가짜 지폐, 웬 그리 가짜가 많습니까? 뇌물, 협잡, 부정부패는 아직도 각계각층에서 노출되고 있습니다.
십계명 중 마지막 계명은 특별히 탐심을 삼가라고 경고합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고 하였습니다. 탐심은 물질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남의 지위, 남의 명예, 남의 재주, 남의 것을 시기하며 탐내지 말라고 성경은 경고합니다.
왜 천사 가운데 하나라고 하였던 루시퍼가 변하여 사탄 곧 악마가 되었습니까? 시기와 탐심 때문에, 하나님의 지위와 영광을 탐내어 마귀로 전락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돈, 권력, 지위 등이 귀합니다. 그러나 고상한 인격은 그보다 더 귀합니다. 의리도 더 귀합니다. 신앙도 더 귀합니다. 생명은 더 귀합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생명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금년이 바로 미국의 독립 200주년을 기념하는 해입니다. 제가 이미 오래 전에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어떤 남미의 한 정치가가 미국의 한 대사를 만나서 이런 내용의 이야기를 하였다고 합니다. “당신 나라의 조상들은” 청교도를 의미할 겁니다. “일찍이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이 미주 대륙에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 당신 나라 국민들은 신앙의 자유뿐 아니고, 물질까지 풍부하게 얻었습니다. 그런데 부끄러운 말이지만, 우리 남미 나라들의 조상들은 물질을 얻기 위하여 이 미주 대륙에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보니 우리들은 물질도 얻지 못하여 아직도 가난하게 살고 또 자유도 충분히 얻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이민 갈 수 있습니다. 한국 사람으로 이민 가는 것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슨 동기로 다른 나라에 가는가? 그곳에 가서 어떻게 살 것인가? 이런 점을 깊이 생각해야 될 줄 압니다. 우리는 조국의 발전과 민족의 중흥을 위하여 온갖 힘을 다 쓰고 있습니다. 경제개발이 꼭 필요합니다. 근대화가 요구됩니다. 그러나 더 귀한 것을 잊지 아니해야 합니다. 그것은 정신면입니다. 정신개발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신앙 운동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더 귀합니다. 사랑도 더 귀합니다. 소망도 더 귀합니다. 자유도 더 귀합니다. 공의도 더 귀합니다. 최후 승리는 언제나 진리와 정의 편에 반드시 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길을 걷느냐, 롯의 길을 걷느냐? 바른 가치관과 바른 선택이 필요합니다. 두 갈래 길이 우리 각 사람 앞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 민족 앞에도 놓여 있습니다. 신앙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길을 걸읍시다. 우리뿐 아니고 자손만대에 축복을 받는 우리나라, 우리 민족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천부의 대주재 우리 하나님 아버지시여! 아득한 옛날 인생길을 걸은 아브라함과 롯의 두 길을 저희들이 잠깐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 잠깐 와서 한 번밖에 지나가지 못하는 인생길을 지금 걸어가고 있습니다. 오 하나님 아버지시여, 우리 하나하나가 신앙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걸은 길과 같이 그 옳은 길을 걸을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해서 현재 내 자신 내 가족이 축복을 받을 뿐더러 우리 민족 4천만이 하나님의 축복이 임할 수 있는 우리나라, 이 민족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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