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55:6-13/ 여호와를 만날 기회 / 한경직 목사 2014-08-23 21:30:08 read : 921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 五十五․六)
이것은 선지자 이사야가 전 인간을 향하여 부르짖는 말씀이올시다.『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를 부르라. 만날 만한 때에 그를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간절히 권면 하였습니다.
우리는 거의 매일 같이 신문지상을 통해서 자녀를 잃은 부모가 잃은 아이를 찾는 광고, 혹은 부모를 잃은 자녀가 잃은 부모를 찾는 광고를 보게 됩니다.
몇 해 전 어떤 신문지상에「삭풍에 부치노라」한 난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시는지 모르지만, 그 난을 읽어보면 三八선을 넘을 때에, 혹은 六․二五 사변을 당할 때 자녀를 잃은 부모가 잃은 자녀에게 보내는 편지,
혹은 부모를 잃은 자녀가 부모에게 보내는 애끓는 편지들이 많이 연재되어 있는 것을 읽으면서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민망했습니까? 부모를 잃은 자녀의 할 일이 많지마는, 그 첫째 의무는 잃은 부모를 찾는 일일 것입니다.
어떤 분이 일찍이 말하기를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인간은 우주의 한 고아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영혼의 아버지를 찾는 일은 인간으로서 첫째로 할 의무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여호와를 찾으라고 권면 하였습니다. 인간은 무엇을 찾기 위하여 간단없이 활동하고 노력합니다. 얼마 전 브라질의 상파울로 중심 거리에 나가 보니 어떻게 많은 사람이 다니는지,
우리 서울 거리도 상당히 복잡하지마는 아마 더 복잡한 듯하고, 또 한 가지 다른 것은 서울 거리는 거의 우리 낯익은 한국 사람들의 얼굴이지만 그 나라에는 백인종의 얼굴, 황인종의 얼굴, 흑인종의 얼굴, 혼 잡종들의 얼굴,
그야말로 인종 전람회 마냥 그저 가지각색의 얼굴을 가진 분들이 분주하게 거리를 다니는 것을 목도할 때 한갓 마음 가운데 생각하는 것은 이 사람들이 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찾기 위해서, 이렇게 분주히 다니는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혹은 빵을 구하기 위해서, 혹은 돈을 찾기 위해서, 혹은 사람을 찾기 위해서, 혹은 향락이나 권세를 찾기 위해서, 사람마다 다르겠지마는 하여간 무엇을 찾기 위해서 분주히 돌아다닙니다.
인간은 이렇게 무엇을 찾기 위해서 시간과 머리와 정력을 허비합니다. 거리에 다니고 촌에 다니고 산과 들을 헤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깊이 생각할 것은, 내가 찾는 그것이 사실 나에게 참된 만족과 행복을 가져올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사야 五十五장 二절에는 그 선지자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우리가 양식 아닌 것을 위해서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해서 수고하는 자는 아닙니까?
금번 五․一六 혁명 기념일을 통해서 많은 죄수가 특사와 감형으로 출옥하게 된 것을 우리는 다 같이 기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아직도 전국 교도소에는 이번에 나온 수보다 몇 배나 더 많은 동포의 수가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따금 이 교도소에 예배하기 위해서 갈 때에 이런 생각이 들어옵니다.
『이들이 다 무엇을 찾다가 이 곳에 왔는가?』물론 억울하게 혹 들어온 이도 있을 줄 압니다. 그러나 대개는 무엇을 찾다가 결국은 그 곳에 오게 된 줄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계속 생각되는 것은, 만일 이것들을 찾는 열심의 절반을 가지고라도 하나님을 찾았던들 얼마나 더 큰 축복을 받았을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인간 일생에 죄 사람을 받고, 그의 자녀가 되고, 그와 동행하며, 그를 즐거워하며, 아니 그와 같이 영원히 사는 것은 인간이 무엇보다도 제일 먼저 찾을 본분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인간으로서의 사는 첫 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 五장 四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참되게 살고, 영원히 살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산상보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혹은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생명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우리가 찾는 것이 많고 구할 것이 많지마는 제일 먼저 찾을 이는 하나님이올시다. 제일 먼저 구할 것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義)올시다.
그런데 여기 거기에 대한 간절한 권면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고,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꼭 부르라고 권면 하였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무소 부재하십니다. 어디나 계십니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십니다.
언제나 계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가까이 계십니다. 어떤 시인의 말과 같이, 우리의 숨결보다 더 가깝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덴에서 설교할 때에 하신 말씀과 같이 그는 우리와 멀리 계시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우리 경험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그 은혜로써 우리에게 특별히 가까이 오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경험에 있어서는 특별히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가 있습니다.
첫째로, 인간의 일생을 통해서 보면 청년 시대가 특별히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입니다. 우리 인생을 흔히 四기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유년시대, 청년시대, 중년시대, 노년시대로 나누는데 유년시대에는 너무 어려서 종교적 뜻을 깨닫기 어렵습니다.
중년시대는 세상일에 너무 바빠서, 세상의 염려, 세상의 할 일에 너무 관련이 되어서, 말하자면 주님의 말씀 그대로 세상의 염려와 재리(財利)의 욕심 때문에, 혹은 권세욕 때문에, 가시덤불이 너무 성해서, 그 마음 밭이 컴컴합니다.
노년시대에 이르면 옛날의 그 사상과 그 습관과 인습이 너무 굳어져서 그 마음 밭이 한길과 같이 되기 쉽고 돌짝밭처럼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보아서 청년시대는 그렇지 아니합니다. 비교적 이 시대는 양심이 맑습니다. 이상이 높습니다. 뜻을 푸른 하늘에 둡니다. 인생의 깊은 뜻을 탐구하기를 힘씁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정이 마음 가운데 솟나나는 때입니다.
우리가 종교 체험의 역사를 보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이 청년시대에 하나님을 찾아서 만났습니다. 이사야도 청년시대에 성전에 홀로 들어가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예레미야도 청년시대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모든 선지자들의 경험이 그렇습니다.
예수 님 당시에도 예수를 따른 여러 제자들, 야고보니 요한 이니 베드로니 안드레니 다 청년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일한 이들을 볼지라도 디모데니 디도니 누가니 하는 사람들이 다 젊었을 때에 하나님을 만나고, 죄 사함을 받고, 그에게 몸을 드려서 일생토록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많은 열매를 맺은 것을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청년 시대에 처한 분이 많이 계신 줄 압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 한 분이라도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이가 있으면 여러분이 지내는 시대야말로 하나님을 만날 시대인 것을 깨닫고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우리 인간의 경험에 있어서 특별히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가 있습니다. 가령 병중에 있을 때 그렇습니다. 물론 질병은 고통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질병의 고통이 축복의 문이 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언제 멀리 하리요 마는 특별히 병으로 앓게 되면 더 가까이 돌보아 줍니다. 우리 영혼의 부모가 되시는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약할 때 특별히 가까이 하십니다.
병들어 눕게 되면 자연히 나만 믿던 교만한 생각이 없어집니다. 인간의 약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은 얼마나 그 체력과 지력과 모든 것이 제한되었다고 하는 것도 좀 저 절실히 알게 됩니다. 나 자신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없다고 하는 인간의 무능도 스스로 알게 됩니다.
특별히 병이 위중해서 사망의 사자가 내 앞에 어른거리게 될 때에는 더욱 인생의 더 깊은 뜻을 탐색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동양에서 내려오는 말 가운데『새가 장차 죽을 때에 울음이 슬프고, 사람이 장차 죽으려고 할 때에 그 말이 선하다』고 하는 말은 심리 상태를 묘사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종교 체험을 볼 때에 많은 사람들이 이 고통인 질병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우리가 누구보다도 잘 아는 성 프랜시스의 체험이 바로 그렇습니다. 혹은 로욜라의 체험이 그렇습니다.
혹은 파스칼의 체험이 그렇습니다. 그 밖에 많은 사람들이 이 질병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서 중생의 축복을 받고 일생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위대한 일을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옛날도 그렇고,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질병을 통해서 은혜 받는 사람을 얼마나 많이 만나보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전에 프랜시스가 문둥병 자들을 도와줄 때에 어떤 문둥병 자는 성질이 고약하고 믿음은 없고 해서 성 프랜시스는 극진히 그 사람을 도와주고 수종을 들고 헌데를 씻어주고 간호를 하지마는 감사한 줄은 알지도 못하고 불평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찌해서 나에게 이런 병을 주었는지 모르겠다고 불평을 합니다. 그러니까 프랜시스가 그 말을 듣다못해 고요히 하는 말이『형제여, 하나님께서 어떤 때는 우리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 우리 육신을 괴롭게 하는 때가 있습니다.』그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가 육신을 괴롭게 하는 이 질병을 통하여 은혜를 받아서 육신과 영혼이 아울러 구원을 얻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다 병을 원치 아니합니다. 병을 예방하도록 애쓸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어떤 병에 걸렸다고 하면 우리가 알 것은 이것도 과연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문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하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아니해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중병으로 앓고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고 하면 그것처럼 슬픈 일이 없을 것입니다.
또 그리고 우리 인간의 체험에 있어서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가 또 있습니다. 그것은 특별히 슬픔을 당하는 때입니다. 물론 슬픔도 고통이올시다. 누가 슬픔을 원하겠습니까? 그러나 이 슬픔의 체험도 축복의 문이 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어떤 가정에나 눈물의 사자가 찾아옵니다. 죽음이란 외모로 사람을 보지 아니합니다. 어떤 가슴에나 눈물이 깃들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한 번 난 자는 반드시 한 번 죽을 때가 있습니다.
큰 슬픔이 우리 가슴에 깃들일 때에는 아무리 강퍅하던 마음도 부드러워집니다. 감정이 순화됩니다. 시기하고 교만스럽고 남을 미워하고 질투하던 감정도 스스로 봄 동산의 눈처럼 녹아 버립니다. 그 심령이 겸손하고 온유하여집니다.
그러므로 이 슬픔의 밀물이 들어올 때에 믿음의 배를 띄어 천국을 향하여 돛을 다는 이가 많습니다. 이 눈물의 렌즈를 통해서 멀리 계신 듯한 하나님의 얼굴을 분명히 보고, 천당을 분명히 보고, 하나님을 참으로 만나서 구원을 얻는 심령이 많습니다.
우리 중에 슬픔을 당하는 이가 있습니까? 그러면 이 때야말로 하나님을 만날 때입니다. 눈물을 허비하지 맙시다. 공연히 눈물을 흘리지 맙시다. 이 눈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 눈물이 축복의 눈물로 변합니다.
그 밖에도 우리의 경험에 있어서 특수한 체험, 혹은 실패라고 한다든 가 혹은 고독, 환난, 그 반면에 큰 성공이라고 한다든 가 특별한 축복, 이런 특수한 체험을 당할 때는 언제든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기회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실패를 통해서 오히려 자기의 허물과 죄를 깨닫고 하나님을 만나고 중생해서 위대한 일을 한 사람들을 우리가 얼마든지 봅니다. 큰 환난을 통해서, 자기의 고독한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 위로를 받고 새로운 생활을 하며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이의 생활도 우리가 얼마든지 봅니다.
또는 그와 반대로 큰 성공을 한 후에, 남달리 축복을 받은 후에,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한 것을 깨달아서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 때에 더욱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도 우리는 종종 봅니다.
이런 특수한 경험을 하시는 이가 우리 가운데 계십니까? 기억하십시다. 이 때야말로 하나님을 만날 때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해가 있습니다.
여기 누가복음 四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사렛에 가셔서 성경 가운데 이사야 六十一장 一절 이하를 읽으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는 보내 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 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마지막에『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심이라』하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은혜의 해가 전개되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역사적으로 보면 제一세기야말로 큰 복된 해입니다. 복된 시대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그 시대입니다. 열두 사도가 전도를 한 그 시대입니다.
오순절의 성령이 임한 그 시대입니다. 사도 바울이 온 천하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한 은혜의 시대입니다. 많은 사람이 구원을 얻은 그 시대입니다. 우리 교회 역사를 보아서 이와 같은 시대를 종종 봅니다.
二, 三세기가 다 그러했고, 아마 十六세기는 종교개혁의 의미가 깊은 그러한 시대입니다. 특별히 十八세기에 영국을 비롯해서 큰 은혜의 해가 임해서 교회가 부흥되었습니다. 二十세기도 그 은혜의 해는 계속되는 줄 압니다. 사실 우리 남한에 있어서는 우리가 당하는 이 시대는 은혜의 시대입니다.
얼마든지 전도를 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아 갈급 한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시대에 복음을 전파할 수밖에 없고 내가 또한 구원을 얻을 수밖에 없습니다. 민족적으로 그런 것과 같이 개인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어떤 때에는 성령으로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주를 사랑하는 마음이 불 일 듯 일어나게 하고 교회를 스스로 찾게 하는 그런 때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분은 교회에 나와서 예수를 믿을 때에『어떻게 나오셨습니까?』물어보면『뭐 내게 전도한 이 없어요. 다만 믿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나왔습니다.』이렇게 간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은혜의 해가 여러분에게 임할 때에, 우리 민족적으로 임할 때에 우리는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꼭 만나야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지금은 은혜 주실 때요, 오늘은 구원의 날이라』하면서 이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권면 하였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면 헤롯왕은 가장 위대한 선지자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듣고도 회개 못하였습니다. 빌라도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고 그 말씀을 듣고도 회개 못하였습니다.
베스도, 벨릭스, 아그립바 왕 같은 이는 가장 위대한 사도 바울의 설교를 듣고도 하나님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왜? 그 마음이 강퍅해서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였습니다. 가까이 계시건만 부르지 않았습니다. 만날 만한 때가 되고 만나게 되었건만 찾지 아니하였습니다.
은혜의 기회란 우리가 붙잡아야 합니다. 만날 만한 때에 우리가 찾아야 됩니다. 가까이 계실 때에 우리가 불러야 합니다. 여러분, 열 처녀의 비유를 아시지요? 슬기 있는 다섯 처녀는 등과 기름을 준비하였다가 신랑이 올 때에 혼인 잔치에 들어갔습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였다가 늦어졌습니다. 혼인 잔치에 들어가려고 하니까 문은 벌써 닫혔습니다. 아무리 문을 열어 달라고 두드리건마는 열리지 아니합니다. 애석합니다.
그러나 천국의 법칙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실 때에 우리가 들어가지 아니하면 문은 닫힙니다. 닫힌 후에는 열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회를 놓치지 아니해야 됩니다.
여러분! 이런 얘기 들었어요? 사단이 자기 부하를 다 모아놓고 어떻게 하면 이 많은 사람을 꾀어서 지옥으로 인도하고 구원을 못 얻게 할까 의논을 하였습니다. 어떤 악귀가 척 일어서면서 하는 말이『저는 허락만 하시면 세상에 나가서 성경이라는 것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고 전파하겠습니다.』하였습니다.
『아! 그것 참 그럴 듯하다.』또 다른 악귀가 일어서서『저는 세상에 가서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무신론을 전파하겠습니다.』하였습니다.『그것 좋은 방법이로군,』 또 다른 놈이 일어서더니 하는 말이『나는 세상에 가서 천당과 지옥이 없다고 선전하겠습니다.』하였습니다.
가만히 듣더니『그것도 그럴 듯하단 말이야』하고 사단은 머리를 끄덕였습니다. 또 다른 놈이 일어서더니『나는 그저 그런 이야기는 한하고 예수는 믿기는 믿되 차차 믿으라고 전파하겠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사단의 말이『이 네 가지 방법이 다 좋은데 어디 어느 방법이 제일 효과가 있나 시험을 해 보자. 너희들이 一년 동안 나가서 그 방법대로 힘써 보아라』하고 세상에 내어보냈습니다. 一년만에 다 다시 모였습니다. 그런데 누가 一등 상을 탔는고 하니 넷째 놈이 一등 상을 탔다고 합니다.
만날 만한 때에 만나야 됩니다. 가까이 계실 때에 불러야 됩니다. 내일로 연기하지 마십시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직까지 온전히 죄를 회개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만나지 못한 분이 계십니까? 지금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여러분의 기회입니다.
또 마지막으로 말씀 드리는 것은 꼭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분명한 길 세 가지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첫째는 성경을 읽는 가운데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둘째는 기도를 힘써야 합니다. 항상 기도를 힘쓰면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셋째는 주일 예배와 집회에 참여하여야 됩니다. 예배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를 다 합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 며칠 후에 부흥 사경회(査經)(會)를 하려는데 이 부흥사경회는 이 세 가지를 다 합한 것입니다. 이 사경회 때에는 성경 공부도하고 기도도 힘쓰고 예배도 드리고, 세 가지 다 합니다.
여러분, 참 하나님을 만나고, 여러분의 친척이 하나님을 만나고 여러분의 친구가 하나님을 만나기를 꼭 원합니까? 이번 부흥 사경회에 一년에 한 번씩 하나님께서 이 기회를 주실 때에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다.
꼭 하나님을 만나고 이 축복을 받아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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