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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26-28/기독교 인생관 / 한경직 목사
    2014-08-23 19:39:12   read : 1221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창 一ㆍ二十六)

    이 시간은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신앙 강좌 시간이올시다. 총 제목은 七十년대에 사는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어떠해야 되겠는가 하는 제목 아래서 우리가 몇 가지를 생각합니다.

    제일 첫 시간은 문자 그대로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과학 시대이어서 인간의 모든 생활이 과학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혁명을 가져오는 그러한 시대에 살게 되었다는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과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해서 이런 면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은 과학이 여러 방면으로 우리 인간에게 여러 가지 좋은 것을 가져왔지마는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과학은 만능이 아니고 그 영역에 제한이 있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함을 말했습니다. 특별히 과학이 인간에게 가져온다고 하는 변화는 외부적 생활의 변화이지 결코 인간의 깊은 속 그 심령에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였습니다.

    이것은 오로지 복음을 통한 정신 혁명을 통해서 인간의 속이 변할 수 있는 점을 생각한 것입니다. 과학 시대일수록 정신 혁명이 필요한 것은 이제 인간이 과학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전에 없었던 지식과 전에 없던 힘, 그 가운데는 인간 자체를 파괴시킬 수 있는 새로운 무기까지 가지게 된 이러한 시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능력과 지식을 바로 쓸 수 있는 새로운 사람을 만드는 운동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오직 복음을 통하여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우리는 계속해서 이 七十년대에 특별히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무신론적 사상이 팽대(膨大)한 시대에 살고 있음을 말했습니다. 소위 공산당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전적으로 이 우주에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우주의 창조주 우주의 섭리 자이신 하나님의 모든 역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나 약간의 무신론자가 있었지마는 오늘의 시대처럼 무신론자가 많은 때가 없고 오늘날처럼 무신론을 공공연히 선전한 때가 없고 오늘날처럼 무신론자들이 하나님을 믿는,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핍박하고 학살하는 때가 없었습니다.

    북한의 사정을 생각할 때, 모든 철의 장막 배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정경을 생각할 때, 우리는 실로 격분을 견디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러한 때야말로 우리가 참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고 어찌하여 우리가 믿으며 믿지 않을 수가 없느냐?

    이런 점을 지적 방면으로 모든 방면으로 우리가 분명히 알고 신앙 생활을 하여야 할 때인 것입니다. 공산당들은 말할 것도 없지마는 소위 자유 진영에 사는 이들 가운데도 하나님을 부인하며 사는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죄인 줄 알면서도 죄를 계속해서 짓는 사람들은 결국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우리 남한에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왜 사람이 죄인 줄 알면서도 양심을 거슬려 죄의 생활을 합니까? 그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계신 것을 모르고 하나님의 진노를 모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정신적인 혁명은 이미 하나님을 아는 데서 오는 것이고, 하나님을 알게 되면 자연히 옷깃을 바로 할 것이요. 적은 일이나 큰 일이나 양심을 거슬려서 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신 혁명을 일으키는 이러한 때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우리 남한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분명히 알려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사는 그 생활의 결국이 어떻게 될 것인지 알게 할 책임이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제 시간은 이런 기독교 우주관에 대해서 생각한 것입니다.

    오늘 아침, 셋째로 기독교 인생관에 대해서 생각하고자 합니다. 우리 장로교는 본래 제네바에서 요한 칼빈 선생이 세웠던 유명한,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우리 신교의 책「기독교 요강」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 첫 장 첫 절에 무슨 말이 있느냐 하면『우리 인간이 세상에서 알아야 할 지식이 많지마는 그 가운데 제일 중요한 지식은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요 둘째는 사람에 대한 지식이니라.』이런 말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잠깐 생각했습니다. 오늘 아침은 사람에 대한 지식을 생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우리 七十년대에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아주 필요한 것은, 우리가 사는 이 시대야말로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유물론자들은 근본적으로 사람을 짐승으로 봅니다. 유물론자가 아닌 사람들도 사람을 기계로, 생산의 한 도구로 봅니다.

    인간 소외란 말이 그때에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컴퓨터의 한 구멍으로 봅니다. 인격을 무시합니다. 이러한 시대인 만큼 우리가 성경이 가르치는 인생관이 무엇인가? 이것을 분명히 알고 이것을 우리 모든 동포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정신 혁명은 근본적으로 인간을 바로 이해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오늘 날, 우리가 사는 二十세기에 인생에 대한 문제, 사람이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 하려 왔으며 인생은 어디로 가는가? 인간이 무엇인가? 이러한 문제는 신학과 철학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다루어지는 때문입니다.

    지금도 말했지마는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보느냐, 여기에 의지해서 도덕 사상이 좌우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한 짐승으로 볼 때에는 사람을 짐승으로 취급하게 됩니다. 짐승이라고 하는 것은 필요할 때에 먹이고 기르고 쓰다듬어 주지마는 필요하지 않을 때는 마음대로 죽여버리는 것이 짐슴에 대한 대우입니다.

    오늘 날, 어떤 사람들은 사람을 국가의 한 도구로 생각해서 국가와 자기의 정치적 목적에 필요 할 때에는 먹이고 쓰다듬어 주지마는 자기의 정치적 목적에 불필요할 때에는 몇 백만이고 천만이고 죽여버리기 때문입니다. 인간관에 의지해서 윤리 사상이 지배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현대에 아주 중요합니다.

    또한 인간관에 의해서 사회 사상이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사회를 조직해서 살겠느냐? 인간을 근본적으로, 짐승으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사회 구조로 동물원으로 만들어 놓으면 제일인 줄 생각합니다.

    여러분, 동물원엘 가 보셨지요, 동물원에 사는 동물들 괜찮습니다. 먹을 때 먹고 잘 때도 있고 잘 살수 있지요. 그러나 동물원에 사는 짐승들 뭘 한가지가 없습니까? 자유 한가지가 없습니다.

    인간을 근본적으로 짐승으로 보는 유물론적 인생관을 가진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 조직을 보면 이렇습니다. 일 시킬 때 일시키고, 먹일 때 먹이고, 일만 하면 굶어 죽지 않습니다. 그러나 뭐 한 가지 없는 것이 있습니다.

    자유가 없습니다. 짐승 취급입니다. 자 이런 까닭에 인간에 대한 정당한 이해가 아주 필요합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인간에 대한 두 가지 그릇된 극단적 견해가 있는 것을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한 가지 견해는 인간을 너무 높이 봅니다.

    인간을 신(神)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본 시대 살아 본 사람은 일본 사람들이 천황을 신이라고 했던 사실을 압니다. 우리 한국에도 이런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천도교를 신앙하는 사람들은 인내천(人乃天)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범신론적 인간관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인간을 너무 높이 보는 그릇된 견해입니다. 시편 八편을 읽을 때 여러분께서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내시되 천사 보다 조금 못하게 내셨다고 했습니다.

    이는 인간을 높이 보는 견해를 배격하는 말입니다. 사람은 천사가 아닙니다. 사람은 신이 아닙니다. 그릇된 견해입니다. 사람을 신으로 숭모합니다. 북한 같은 데는 김일성이가 거의 신의 대접을 받습니다. 중공에는 거의 모택동이가 그런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결국 사람이 참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되면 사람을 신으로 섬기게 됩니다. 그릇된 견해를 배격해야 됩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견해, 극단적으로 사람을 낮추어 보는 견해는 이미 여러분에게 말씀 드렸습니다.

    유물론적 인간관에서는 사람과 아메바의 차이는 사람은 복 세포 동물이고 아메바는 단세포 동물이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과 짐승, 사람과 벌레의 차이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여기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에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고, 만물을 다스리는 영물로 지으셨다고, 사람을 너무 낮추어 보는 견해를 배격하는 교훈이올시다. 이 밖에도 제가 일찍이 말했지마는 현대에는 사람을 꼭 동물로는 보지 않지마는 사람을 한 기계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또 현대 공업이 발전되면서 사람이 거저 거의 기계 노릇 하는 현상을 더러 봅니다. 제가 몇 해 전에 데드로이트란 곳에 가서 거기 큰 포오트(Ford)자동차 공장에 구경을 갔습니다. 자동차 만드는 공장에 가보면 우선 부분품을 만드는 공장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 큰 건물을 지어 놓고는 부분품을 갖다가 맞추는 소위 아셈블리 홀이 있습니다.

    거기 가 보면 가운데는 레일이 있어서 맨 처음에는 거저 자동차의 몸 둥이 만 척 갔다 놓은 것이 슬슬 들어오고 그 다음에 그 옆에 사람이 하나 섰다가 바퀴를 갖다 넣는 사람, 그 다음엔 한 사람이 나사를 구멍에 궤고 또 한사람은 그 옆에 섰다가 나사를 한바퀴 돌립니다.

    또 한 사람은 그 옆에 두 바퀴 돌리는 사람, 그 옆에는 세 바퀴 돌리는 사람, 가만 보니까 하루 종일 서서 나사 못 하나씩만 꽂고 죄고 있단 말이요, 종일 나사못만 죄고 또 하고 또 하고, 나사못 한 번 죄고, 그 다음 사람이 또 한 번 죄고 종일 그것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기계지 사람이랄 것 뭐 있겠어요. 지금 공업화됨에 따라서 인간이 그런 취급을 자연 받게 됩니다. 그래서 점점 원치는 않지마는 인간을 기계로 보는 사상이 들어오게 되었고 인간을 한 생산의 도구로 보는 사상이 점점 민주주의 사회에도 들어오게 됐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인간이 무엇인지 바로 이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자, 여러분 그러면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관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다 아시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한번 분명히 이 것을 알기 위해서 이번에 이 문제를 가지고 강좌를 가지는 것입니다.

    첫째는 시편 八편을 읽었고 창세기 一장을 제가 읽었습니다. 또 二장에도 그런 말이 있습니다. 성경이 분명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인간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 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인간은 피조물이다. 인간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으로 지음을 받은 것이다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자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간은 자재(自在)한 존재, 스스로 있게 된 존재가 아닙니다.

    어제도 제가 말씀 드렸지마는, 이 지구 위에 사람이 없던 때가 있습니다. 일정한 역사적 시간에 지음을 받음으로써 이 땅에 인간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자재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 오게 된 것이 어떻게 오게 된 것입니까?

    여러분의 부모로 말미암아 오게됐지요. 여러분의 부모는 어떻게 오게 됐습니까? 여러분의 조부모, 자꾸 이렇게 올라가면 어떻게 됩니까? 마지막에는 결국 아담이 하나님께로부터 지음을 받았으므로 우리 인류가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세상에 스스로 난 줄로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오고 싶어서 여기 비행기 표를 사듯 표를 사 가지고 이 세상에 왔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지음을 받아서 있게 되었고 하나님의 뜻에 의지해서 이 세상에 나게된 것입니다. 인간은 자재자가 아니고 자존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나게 되었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인간은 이렇게 피조물인즉 피조물에 대해서, 피조물인 인간으로서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피조물은 제한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피조물은 무한한 피조물은 없습니다. 피조물은 제한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도 제한이 있습니다. 키가 크는 것도 열 여덟쯤에 한참 클 때는 하늘이라도 찌를 듯 자꾸 크지요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얼마 크다가는 스톱하고 맙니다. 뭐 九척 장신이 있고 거인이 간혹 있다고 하지만 그것도 제한이 있습니다. 키가 제한이 있습니다.

    요새 의학이 발달되어서 보통으로 좀 오래 산다고는 하지만 인간의 수명도 제한이 있습니다. 옛날 유명한 중국 시에 두보의 시에 인생 칠십은 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고 한 말은 지금도 맞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한 해에 세상을 떠나는 분이 작년에도 아마 백 이삼십 명됩니다. 가만히 그 분들의 연령을 살펴보면 거저 五十-七十사이에 가장 많이 갑니다. 여러분 거저 스스로 속일 필요 없습니다. 환갑 지나신 분은 이제 내 때가 가까웠다 고 알고 사는 것이 좋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제한이 있습니다.

    그것 뿐 입니까? 우리 인간의 육체라고 하는 것을 무엇에나 제한이 있습니다. 전에는 항우는 기운이 세서 역발산 기개세(力拔山氣蓋世)란 말이 있지요. 산을 뽑는다는 것은 다 과장한 것이지요. 사람이 산을 어떻게 뽑는다는 말이요. 체력이란 제한이 있어요. 시력도 제한이 있어요. 먼 것도 못보고 가까워도 못 봅니다.

    듣는 것도 제한이 있어요. 너무 적은 소리도 못 듣고 너무 큰 소리도 못 듣는다고 합니다.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는 너무 커서 못 듣는다고 해요. 못 듣는 것, 거 괜찮아요 제한이 있어요. 인간 만능이니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과대망상증입니다.

    인간 만능이 아닙니다. 이 걸 알고 살아야 공연히 교만하지 않고 실수하지 아니합니다. 괜히 뱁새가 황새걸음 하다가는 다리만 찢어집니다. 제한 있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자, 또 인간은 이렇게 피조물이니,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의 목적이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만든 이에게 있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 여러분 여기 마이크 둘이 있지요. 이거 누가 지었어요. 사람이 지었습니다. 마이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이 마이크 자체에 있는 것입니까?

    이것을 만든 사람에게 있습니까? 사람에게 있습니다. 알겠습니까? 사람에게 있어요. 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지으심으로써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즉 우리 인간이 세상에 존재하는 최고 목적이 뉘게 있습니까? 내게 있습니까 하나님에게 있습니까? 세상에 어떤 사람들은 거저 내게 있는 줄 압니다.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하고, 내 먹을 대로 먹고, 놀고픈 대로 놀고 내 멋대로 하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건 잘못입니다. 그러기에 여기 요리문답에 제일 첫째 문답이 무엇인지 여러분이 알지요.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여러분 다 잘 믿는 분이니까 요리문답의 첫 답을 다 알겠지요. 아는 이 한번 다 손들어 봅시다.

    모르는 이는 손들지 마시오. 아는 이, 요리문답 첫 문제 대답을 아는 이만 손들어 봅시다. 아하, 손 내리시오. 못 드는 분이 많단 말이요. 요리문답 첫째도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우리 교회에서 요리 문답을 다시 가르쳐야 되겠습니다. 사람의 둘째, 셋째 말고 첫 째되는 목적이 무엇이냐 성경대로 거기 대답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알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이 있어요. 그 목적이 뭔지 아세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하나님과 교제를 하면서 큰 즐거움을 하나님도 가지고 우리도 가지는 것입니다.

    그걸 알아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피조물이므로 인간이 세상에 사는 최고의 목적도 내 향락이 아닙니다. 내 부귀 영화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세상에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 그 목적으로 삽니까? 물론 직업은 여러 가지로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최고의 목적은 내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실수가 없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인간은 피조물인즉 피조물 자체에 있어서 최대의 행복이 무엇인지 압니까?

    자, 이 마이크가 피조물인데 이 마이크의 최대 행복은 무엇일까요. 마이크 노릇 잘하는데 있지요. 소리가 잘 안 들리거나 하면 그건 틀렸단 말입니다. 마이크 노릇 잘 하는데 있어요. 그게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우리 하나 하나를 지었습니다. 지을 때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목적,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둘째 목적이 있어요 무엇인고 하니 이 사람은 이런 일을 해서 내게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겠다, 저 사람은 저렇게 해서 내게 영광 돌리게 하겠다 하는 것입니다.

    그 목적이 제二의 목적은 각각 다르단 말이오. 그래서 어떻게 했는지 압니까? 하나님께서 사람마다 소위 달란트라고, 각각 재능을 다르게 주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림을 잘 그립니다. 어떤 사람은 이자윤 집사 님처럼 노래를 잘 부릅니다. 아 어떤 사람은 글씨를 잘 씁니다. 또 어떤 사람은 손재주가 있어서 만들기를 잘합니다.

    어떤 사람은 수학을 잘합니다. 어떤 사람은 특별히 정치에 머리가 있습니다. 경제에 머리가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슨 경영에 머리가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각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능을 다르게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특별히 남을 잘 가르칩니다. 어떤 사람은 특별히 남을 잘 위로해 줍니다. 심방을 잘합니다. 재능을 각각 다르게 주었단 말입니다. 인간 하나 하나의 최대 행복이 무엇이냐?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이 세상에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무슨 일을 통해서 자기에게 영광을 돌리게 지으셨나?

    이걸 자세히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재능이 무엇인가 잘 살펴서 이걸 살려서 직업도 내 재능에 맞게 택하고 교회에서 일하는 것도 내 재능에 맞는 직분을 택하고 이렇게 되어서 하나님께서 각각 우리를 지을 때 주신 재능을 잘 살려서 一00퍼센트 활용을 하는데 인간의 최대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헬라에 두 가지 윤리 사상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최대 행복이 어디 있느냐? 쾌락에 있다고 주장한 사람이 있습니다. 한 학파에서는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이란 것은 자아의 실현에 있다는 그런 것입니다.

    실상은 그 두 가지가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재능을 꼭 발견해서 잘 실현하는 사람은 자연히 쾌락이 거기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기쁘고 제일 행복 된 사람이 누구인지 압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재능을 바로 찾아서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원하고 이루고자 하는 그 일을 찾아서 그 일을 잘하는 사람, 그 사람은 세상에 제일 행복되고 세상에 난 보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다 그렇게 삽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두어두는 동안은 내가 아무리 나이 많아도 나를 통해서 꼭 내가 아니면 하지 못할 일이 세상에 있는 까닭에 세상에 살려 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세상에 사는 사람은 사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하려고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꼭 알아서 그걸 그대로 하고 사는 사람이 최대의 행복자 입니다. 또 그 사람이 세상을 다 살고 사도 바울처럼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켰으니 의의 면류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그렇게 사는 사람은 누구든지 의의 면류관이 그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분명히 들으세요. 사도 바울 같은 이도 처음에는 그 것을 바로 못 찾았어요. 그래서 오히려 기독교를 박해했지요.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붙잡아서 돌이켰단 말입니다.『너 이게 네 길이 아니 야.』그 다음에 바른 길에 들어서지 않았어요. 얼마나 큰 열매를 맺었습니까. 아직까지도 참된 신앙으로 들어오지 못한 사람은 근본적으로 자기의 바른 길을 찾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걸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최대로 행복한 사람이 되고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사람이 되고 가장 큰 유익을 사회와 국가에 주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 이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아직까지 이것을 분명히 못 찾으신 이는 꼭 찾아서 앞으로는 이렇게 살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창세기에 무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시되 우리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고 기록했습니다. 사람을 지으실 때에 돌이나 나무처럼 안 지었어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 했습니다.

    자 여기 대해서도 여러 가지 해석을 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저는 언제나 누구든지 보통으로 알아들을 수 있게, 이해할 수 있게 생각하는 것이 좋을 줄 알아서 간단히 세 가지로 설명하겠습니다. 인간은 다른 동식물보다 다르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었다는 것은 세 가지 점에서 짐승과 다른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무엇인지 아세요?

    첫째는 어제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이성이란 것이 있어요. 무엇을 생각하고 연구해 내는 사고력이 있어요.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는 창조성이 있어요. 하나님처럼 없는 데서 있는 데로 창조는 못해요. 그러나 하나님이 만든 물건을 가지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 수 있는 힘, 이 창조성, 창조력이 인간에게 있어요. 여기 내다보면 우리 뜰에 높은 은행나무가 있어요. 우리 뜰의 보배는 은행나문 줄 압니다.

    아마 五00-六00년 된 은행나무인데 이 은행나무 위에는 언제나 까치집을 지어요. 내가 저 집에 사는지 十五, 六년 된 것 같은데 매해 까치집을 또 짓고 짓는데 까치는 작년에 지은 것이나 십 년 전에 지은 집이나 똑같이 지어요. 내 생각으로는 천년 전에도 까치는 집을 저렇게 지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자,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우리 사람은 집을 그렇게 짓습니까? 뭐 요새 가만히 보니까, 작년에 집을 지은 것과 금년에 지은 집이 달라요. 요새는 너무 집을 잘 짓고는 도둑 촌이란 말이 들리도록 너무 잘 짓는 사람도 있는 모양입니다.

    하여간 우리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머리로 생각을 하고 연구를 해서 전보다 더 잘 만들고 보다 더 잘하고 집도 보다 더 잘 짓고, 이렇게 해서 과학이 발전이 되고 문화가 발전이 되어서 오늘날과 같은 우주 시대가 되게 되었고 또 통신과 교통이 모든 방면에 편리하게 만들었단 말이요. 이것이 다 무엇을 통하여 왔습니까?

    인간에게는 이 창조성이 있단 말입니다. 인간의 창조성을 살려서 간단없이 있는 자료를 가지고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는 것이 인간이요. 그것이 사람과 짐승이 다른 점입니다. 어떤 사람은 개를 잡아서 해부해 보고 사람을 해부해 보고 개와 사람이 다른 것이 없다고 말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실, 생리학적으로 보면 그 모습만 다르지 뭐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달라요. 그러기에 이것 보세요. 이간이 인간으로 살려면 하나님이 주신 창조력을 살려서 무슨 일이나 연구를 하고 살려서 보다 더 잘하는 것, 이것이 인간으로서의 생활임을 기억해야 됩니다.

    거저 옛날에도 이렇게 살았다고 오늘도 이렇게 산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아주 작은 예를 들면 다른 나라는 안 그런데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다른 나라에서는 장사할 때 거리에 상점에 물건을 진열해 놓고서 장사를 잘 하는데 우리 한국의 거리를 보면 장사하는 사람들이 왜 물건을 자꾸 길바닥으로 내 놓는지 모르겠단 말입니다.

    이거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하는 일입니다. 지금의 때가 어떠한 땝니까? 세계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시골 구석구석까지 거저 한국학이라고 해서 한국을 연구하러 오는 사람이 많은데 거저 할아버지들이 했던 대로 침을 그냥 내뱉고, 물도 그냥 쏟아버리고 거리는 그냥 어지럽히고 해서 되겠습니까?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 방면에도 꼭 모법이 되어야 합니다. 창조성을 살려서 전에는 몰라서 그러했지마는 이제는 생활도 개선해야 합니다. 내 늘 하는 말이지만 대접을 받으러 갔을 때에는 그 자리에서는 미안해서 말못했지만 이런 자리에서는 말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우리 한국에서 손님 대접하는 것 보면 음식을 너무 많이 차립니다.

    솔직히 말해서, 제가 여러 나라에 가서 대접을 받아보았지마는 우리 한국 사람들처럼 손님 청해 놓고 한꺼번에 많이 차리는 민족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얼른 보면 한국 사람들이 마음이 후해서 그렇게 한다고 하겠지만, 사실 그런 면이 있어요, 그러나 그렇게 할 필요가 있습니까?


    많이 한꺼번에 차려 놓았다가 한패가 먹고 나간 다음에 그 걸 다시 들여와서 또 먹는데 그렇게 하지 말고 그 사람들 먹을 만큼 차려 놓고 그 사람들 먹고 나면 새 손님 청하고 새 것으로 다시 차려다 대접하면 그 얼마나 알뜰하고 좋아요.

    이것 좀 미안하지마는 우리 믿는 사람들이 생활 개선도 해야 되겠어요. 창조성을 살려서 과거에는 그렇게 살았지마는 좀더 깨끗하고 좀더 경제 되고 좀더 알뜰하고 좀더 정돈되게 살아야 하겠어요. 언제나 넓은 세계에 갔다와서 서울을 보면 서울의 거리는 외국처럼 정돈이 안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정돈이 안 되는 것 이상한 일입니다. 어떤 집에 가보면 걸레질은 잘해 놓았는데 걸레 조각, 한 조각은 방바닥에 그냥 놓아두었단 말입니다. 정돈을 못해요. 그러기에 정돈과 청결(淸潔)이 같이 돼야 합니다. 청결도 하고 정돈도 하고 두 가지가 같이 돼야 합니다. 이것은 딴 얘기가 되어서 미안합니다.

    창조성이 있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란 말입니다. 또 둘째는 우리와 짐승이 다른 것은 무엇입니까? 양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八장을 여러분이 다 아시지요. 예수님이 성전 뜰에서 가르치는데 어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어떤 여자를 대리고 와서 세워 놨습니다.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저 여자로 말하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입니다. 모세 율법에 의지하건대 돌로 쳐서 죽이라고 했는데 선생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아주 어려운 문제입니다. 돌로 치지 말라고 하면 모세의 율법을 어긴다고 할 것이요 돌로 쳐라 하면 예수 님이 사랑이 없다고 할겁니다. 책잡으려고 이런 케이스를 가져왔단 말입니다.

    그 때 예수 님께서 얼른 대답지 아니하고 땅을 보고 잠시 계셨습니다. 그러니까 얼른 대답하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좀 있다가 얼굴을 서서히 들고서 그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시지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은 먼저 돌을 들어서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그리고는 다시 머리를 내리시고 무슨 글을 쓰십니다. 한참 있다가 하나씩 하나씩 슬며시 나가고 여자혼자 남았단 말입니다. 자, 여러분, 무엇이 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 자리에서 쫓아냈습니까? 양심의 가책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람과 짐승이 다른 점이란 말입니다. 짐승 사회에서 이런 현상을 봅니까? 어떤 사람은 죄를 짓고 너무 부끄러워서 자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유다 가 자살하지 않았어요. 유다 만이 아닙니다. 요 몇 달 전 어떤 여자가 자살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여러분 개나 돼지가 자살했다는 말을 들어보았습니까? 이것이 사람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입니다.

    사람은 양심이 있단 말입니다. 성경에 보면 양심은 마음에 새긴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율법을 우리 마음속에 새겨 주셨단 말입니다. 거저 그래서 무슨 일을 잘못한 다음에는 가슴이 두근두근 합니다. 이것이 사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까닭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의 한 조각이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와 있단 말입니다. 정 포은 선생 같은 이의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고려말에 모든 세력은 이성계와 이방원 등 이씨 가문으로 다 옮겨가고만 때, 누구의 힘으로 그 세력을 막을 재간이 있겠어요. 고려조는 망한 것이 분명하단 말입니다.

    그러나 정몽주, 정 포은 선생은 그의 시조에서 이 몸이 죽고 죽어 일 백 번 고쳐죽어도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수 있으랴 했습니다. 그 절개 이것이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이 양심을 버리면 짐승의 레벨로 떨어집니다.

    의리와 절개를 버리게 되면 동물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기에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유명한 말, 그의 무덤 비석에다 이런 말을 새겼다고 합니다. 『하늘에는 별이 있고 인간의 가슴에는 양심이 있다.』그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증거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이것 보세요. 우리가 사람으로 살려고 하면 언제나 양심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양심을 거역해서는 아니 됩니다.

    양심을 져버려서는 아니 됩니다. 하물며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이 양심을 져버리면 그 믿음이 어떻게 되겠다고 그랬습니까? 파손 당하겠다고 그랬습니다. 양심이라고 하는 것은 배의 나침반과 같지 않습니까. 배의 나침반이 잘못될 것 같으면 배가 어느 곳에 가서 암초에 부딪쳐서 깨어질지 모릅니다.

    우리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하는 사람이 양심, 나침반을 버리게 되면 언제나 파선할는지 모르게 됩니다. 둘째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사람에게는 양심, 도덕심이 있다고 하는 말입니다.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이 있어요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어요. 겉으로 보면 육신뿐이지만 속에는 영혼이 있어요. 여러분이 아시거니와 유물론자들은 영혼을 부인합니다. 발전기는 전기가 날 때는 번쩍번쩍하다가 발전기가 서게 되면 전기가 없어지는 것처럼 사람을 육신이 살아 있는 동안 영혼이 있다가 사람이 죽으면 다시없어지고 무슨 영혼이 있나 이런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내가 전에도 이런 얘기 종종 했습니다마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불란서에 유명한 철학자가 있었는데 그가 쓴 책 가운데 인식론이란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은 인간이 안다고 하는 것은 어떻게 알게 되나? 하는 것을 연구했습니다.

    결국은 무엇인고 하니 사람이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은, 오관(五官)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뭔고 하니 귀로 들어서 알고, 눈으로 보아서 알고, 혀로 맛보아서 알고(짜고 단지), 코를 통해서 냄새를 맡아서 알고, 피부를 통해서 찬지 더운지 여러 가지를 압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뭘 안다고 하는 것은 오관을 통해서 머리에 들어옴으로써 무엇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사실 아닙니까? 가령 여러분이 여기 마이크가 잇는 줄 압니까? 어떻게 압니까? 어떻게 아는고 하니 저 전기 불빛 태양 광선이 여기 와서 마이크에 부딪칩니다. 그 광선이 반사되어 우리 눈으로 들어옵니다.

    동공으로 들어와요. 그리고 동공 뒤에 안벽이라고 있는데 안벽에 거꾸로 비추어 줍니다. 그 다음에는 시신경이라는 이상한 힘줄이 있어서 시신경을 통해서 뇌 세포에 보고가 됩니다. 결국은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은 뇌 세포에 보고 된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자체가 어떤지, 그 사실 그대로를 아는 것인지 의문이 됩니다.

    거저 시신경의 보고를 통해서 아는 것뿐입니다. 시신경이 잘못 되면 잘못 압니다. 그러기에 눈이 잘못 되면 잘못 압니다. 물건은 하나인 데 둘로 보는 이들이 있지 않아요? 색맹이라고 해서 하얀 것을 검게 보는 사람도 있지 않아요. 근본적으로 빛이 없다고 하면 여기 마이크가 있는 것을 여러분이 알겠어요?

    우리가 오관을 통해서 무엇을 아는데 오관을 통해서 바깥에 있는 것을 아는데, 이것을 안다는 것은 사실은 확실하지 못해요. 우리가 바로 아는지 잘못 아는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는 아무리 의심해도 의심할 수 없는 것이 있어요.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생각하는 것만은 의심할 수 없어요. 이것은 의심이 난다. 저것은 의심이 안 난다. 그러나 그 생각 자체는 의심할 재간이 없단 말입니다.

    우리가 바깥에서부터 오관을 통하여 들어오는 것은 확실치 않지만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내 속에 생각만은 확실하단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내 속에 생각을 하면서 이것은 옳은 것 같고 저것은 잘못된 것 같다고 생각하는 나라는 것이 있음이 분명하단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분의 유명한 말이 있지요.『나는 있는 게 확실하다. 자아(自我)가 있는 게 확실하다. 왜 그런고 하니 나는 생각하는 까닭이다』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 속에는 나라고 하는 것, 자아라고 하는 것이 다 있습니다. 이것이 생각도 지도하고 모든 것을 경영해요. 이것이 성경의 용어로 하면 영혼입니다.

    이것은 바깥에 있는 무엇보다도 제일 확실해서 의심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확실히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 있지요. 그럼 사람이 죽은 뒤에는 어떻게 됩니까? 유물론자들은 죽은 다음엔 영혼이 없어지고 말지 뭐가 있나? 합니다. 거기 대해서는 우리 교회서 내가 종종 말하는 것이지만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닙니다.

    과학적 세대에 사는 우리로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은 과학자들이 철칙으로 믿는 물질불멸론 (物質不滅論)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무엇인고 하니 이 우주에 물질이 여러 가지 종류인데 형태는 항상 변하마지는 물질 자체는 그냥 우주에 있어서 더할 수도 없고 덜할 수도 없다고 하는 원칙입니다.

    우주에 있어서 더할 수도 없고 덜할 수도 없다고 하는 원칙입니다. 가령 부인들은 잘 알지요. 가마에다 물을 넣고 불을 때면 한참 후에 물이 다 없어진단 말입니다. 아 이거 물이 다 없어 졌구먼 하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물이 없어진 것입니까? 물이 수증기가 되어서 공기 가운데 포함돼 있는 것입니다.

    도로 다 잡아넣으면 물이 다시 됩니다. 이걸 무엇이라고 그래요 물리적 변화라고 그럽니다. 그러나 질까지 변하는 것이 있어요. 내가 늘 그런 예를 드리지마는 여기 가령 촛불이 있다고 합시다. 큰 촛불에 불을 켜 놓았습니다. 밤새도록 켜놓으면 초가 다 없어집니다. 아하 초가 다 없어졌구먼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상 초가 없어진 겁니까? 초속에 있던 탄소가 합해서 탄산가스가 되어 공기 속에 있단 말입니다. 그걸 다 모아 놓으면 초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이걸 무슨 변화라고 그래요, 화학적 변화라고 그럽니다. 우리 어떤 사람은 나이 거의 七十이 되어 오니까 오래지 않아서 한 목사 죽었다는 소식을 들을 것입니다.

    놀라지 마세요. 으레 그런 일이 있는 것입니다. 죽게 되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 봅니다. 죽게 되면 三, 四일 후에 내다가 파묻을 거예요. 내가 바라기는 영낙동산에 파묻어 주기 바랍니다. 파묻으면 한 十년, 二十년 후에 파 보면 어떻게 됐을 것 같아요. 다 썩어서 그러면 이 육체는 다 썩어져 없어졌겠군 하고 생각할 수 있지요. 그러나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썩어졌다는 것은 단순히 화학적 변화를 일으켰다는 말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 살이 되고 가죽이 되었던 물질 자체도 형태는 변하였지마는 실상, 아주 없어지는 것은 절대로 압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란 죽을 때엔 그 육체가 화학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물질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면 이 육체로 형태는 변하나 그 자체는 그냥 보존되는 이러한 우주에서 인간에 있어서 가장 분명한 것은 우리의 영혼, 우리의 정신, 우리의 이 마음, 이 것만은 우리가 죽을 때에 아주 없어지지 않는단 말입니다. 없어진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물질이 불멸하는 것과 같이 인간의 영혼도 불멸합니다. 죽은 후에도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음 문제는 무엇입니까? 영혼이 그냥 없어지지 아니하고 남아 있다면 죽은 후의 영혼의 형편이 어떠하겠습니까? 가령, 영혼이 어떤 곳에 가겠는가 그것이 문제이지요. 여러분, 우리가 구약을 읽으면 엘리야 같은 위대한 선지자를 만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우상을 많이 섬기던 시대에 살면서 하나님을 믿고 담대히 그 신앙을 증거 하면서 일생을 옳은 일을 위해 산 선지자입니다. 또 그 때에 선지자를 핍박하던 이세벨이라는 악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아합 부인되는 이세벨이 있었습니다. 또한 악한 왕인 아합이 있었습니다. 항상 엘리야를 대적한 그런 왕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엘리야는 죽지 아니하고 승천하였다고 했습니다.

    엘리야의 영혼은 그냥 남아 있습니다. 물론 이세벨이나 아합 왕도 그 후에 죽었겠지요. 그러면 엘리야의 그 남아 있는 영혼과 아합이나 이세벨의 남아 있는 그 영혼이 같은 곳에서 같은 형편 가운데 있을 것 같습니까? 도저히 그렇게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신약을 읽어보면 세례 요한 같은 분이 있습니다. 일생을 의롭게 산 위대한 참 선지자입니다. 또한 그 때에 헤롯왕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의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서 산 음란한 왕이올시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이런 음란한 왕의 생활을 책망한 까닭에 결국은 헤롯왕에게 목 베임을 받아서 순교했습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이 이렇게 죽었으나 그 영혼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헤롯왕도 그 후에 죽고 그 영혼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세례요한의 영혼과 악한 헤롯왕의 영혼이 같은 곳에 가서 같은 형편에 있을 것 같습니까? 도저히 그렇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이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여 주는 것같이 천국과 지옥이 반드시 있습니다.

    스스로 속지 마세요. 천당과 지옥이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모든 영혼이 같은 곳에, 같은 형편에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이란 비록 물질로 된 육체를 가지고 살지만 모든 다른 물질적 존재와는 온전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이성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양심이 있습니다. 그것보다도 인간에게는 가장 귀한 불멸의 영혼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렇게 인간이 가장 귀한 존재인데 불행하게도 인간은 타락되었습니다. 범죄한 인간입니다. 우리 동양 철학자들은 두 가지 인간성에 대해 학설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성선설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성품은 근본적으로 선하다는 학설입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는 인간의 성악설을 주장한 이들이 있습니다. 인간은 악하다. 그리해서 성선설, 성악설은 우리 동양철학에 있어서 항상 대립되는 학설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이 점을 분명히 볼 수가 있습니다. 인간이 본래 지음을 받았을 때에는 그 성품이 선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담과 하와가 처음에 지음을 받고 타락하기 전에는 성품이 선했습니다. 의로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인간이 한번 죄를 짓고 타락한 후에는 인가의 성품이 부패해서 그만 악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성선설과 성악설은 일면의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가장 분명하게 인간의 성품에 대하여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타락되어서 인간 사회에 일어나는 모든 형편을 살펴볼 때나, 또는 내 자신을 스스로 살펴볼 때나, 우리 인간은 아주 부패하였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선지자는 일찍이 말씀하시기를『마음은 만물보다 악하다』고 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밖으로부터 사람에게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속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곧 인간의 부패한 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 곧 그것은 음란과 도둑질과 여러 가지 죄악이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좋은 음식이 썩으면 더욱 냄새가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본래는 선했지마는 이렇게 부패하여졌으므로 아주 추악한 인간이 된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점점 부패하게 되면 참으로 짐승보다 더욱 악하게 타락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사는 二十세기로 말하면 과학의 세기라, 문명의 세기라고들 말합니다. 참 인간의 지혜와 인간의 기술이 얼마나 발달이 됐는지 인간이 달나라에까지 내왕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면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사는 이 二十세기야말로 가장 악한 세기란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과거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二十세기야말로 가장 무섭게 인류의 피를 흘린 세기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一九一四년부터 一九一八년까지 있었던 제一차 세계대전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 후에 독일에서는 나치 운동이 일어났고 이태리에서는 파시스트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독일에서는 나치 운동 때문에 무죄한 유대 사람 六백만 명이 가스 챔버에서 학살을 당했습니다. 동양에서는 일본 군국주의가 일어나서 만주를 비롯해서 중국 본토와 아시아 제국에서 많은 무죄한 피를 흘렸습니다.

    제二차 대전이 벌어졌습니다. 아직도 이 피 흘리는 전쟁이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六ㆍ二五동란이 일어났습니다. 월남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지금도 계속이 됩니다. 가장 피비린내 나는 세기는 二十세기입니다.

    그런데 가장 문명했다는 세기가 곧 이렇습니다. 인간이 타락했다는 사실은 이론으로 설명할 필요가 없고 다만 우리가 二十세기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실을 직시하면 곧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과연 타락하였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머리가 발달할수록 악한 생각은 더욱 발달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현 세기는 한편으로는 모든 과학의 혜택을 잘 이용하면 바로 혜택을 입을 수 있기도 하나 반면에 잘못하면 원자탄과 수소탄 전쟁으로 전 인류가 멸망할 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지니고도 있습니다.

    여러분, 이 타락한 인간은 어떻게 하면 구원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二十세기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정치적 혁명, 문화적 혁명, 사회적 혁명, 경제적 혁명, 모든 혁명을 다했는데 이제 남은 것 하나는 정신적 혁명입니다.

    어떻게 하면 정신을 바로 잡아서 이 인간이 좀 더 선해지고 좀 더 의로와 지고, 좀 더 깨끗해지고 좀 더 화평하게 살 수 있는 인간이 될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타락된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해서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의인을 부르려고 오신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불러서 의롭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리스도밖에는 우리를 이 죄악에서 건져낼 이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타락한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해서 복음을 온 천하에 전파하도록 우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이 인류를 이와 같이 심히 캄캄한 가운데서 구원해 낼 광명은 오직 복음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구원받은 우리는 이 복음을 전파해야 될 것입니다. 오로지 복음만이 인류의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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