딤후3:10-17/ 성경과 현대인 / 한경직 목사 2014-08-23 07:58:42 read : 945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三․十六-十七)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四․十二)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요 五․三十九)
육신 생명의 건강을 유지함에는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며 영양 있는 음식물을 섭취하고 적당한 운동을 하는 등 이에 대한 법칙을 준수해야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 영적 생명의 건강에도 이러한 법칙이 있어서 이를 준수하여야 되는데 그것은 곧 기도와 성경 읽기와 실행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 속 사람의 생명을 말씀한 것이니 속 사람이 성장하려면 영적 영양물인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보편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이를 두 가지 방법으로 말씀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대자연을 통해서 말씀하신 바 이를 신학적 용어로 일반계시(一般啓示)라고 하여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존재와 그 무한하신 지혜와 전능하심과 하나님의 영광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둘째로,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는 특별계시(特別啓示)라고 하여 인류구속(人類救贖)의 진리 곧 우리의 영적「만나」는 이에서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여러 가지 서적이 많지만 오로지 성경만이 하나님의 특별 계시이며 하나님의 말씀 인 것입니다.
왜 신구약 성경을 특히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느냐 하면『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번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그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한 히브리 一장 一절로 二절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 히브리 민족을 택하시고 그 중에서 선지자들을 내셔서 그들을 통하여 말씀하셨고 마지막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인격과 생활로써 실제로 말씀하신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一장 一절에 있는『태초에 말씀이 있으니』라는 말씀은 그리스도를 가리킨 말씀으로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이 구체적으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에 의하여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과 같이『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묵시하신 바』이니 곧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날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 오견(誤見)이 있음을 압니다. 하나는 성경을 보통 종교적 천재의 기록이라 하여 다른 서적과 동일시하는 자연주의자와 무신론자의 견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류를 사랑하셔서 그 죄악에서 인간을 구속하시려 독생자를 보내신 분이시라 이 소식을 전하는 기록에 관계 안 했을 리 없습니다. 그는 성경 기자들에게 성신으로 감동하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성경은 문자적 구수(口授)(Verbal Dictation)로 되어졌다고 하여 성경 저자의 인격과 지식과 연구를 무시하는 견해입니다. 이에 대한 정당한 견해는 성경 말씀대로 하나님의 영감으로 은혜 받은 인물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평시에도 감동 중에 산 이들이요,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을 수행할 때는 더욱 큰 감동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신앙과 행위의 표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거의 二천년 전에 여러 사람들이 여러 모양으로 쓴 기록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대의(大義)에는 조금도 모순되는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인이 성경을 읽을 때에 의심하기 쉽습니다. 성경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 같은 부분도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 중에는 역사와 시와 논물과 잠언 등이 포함되어 있는데 어떻게 이런 것을『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각양 방식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역사가 하나님의 진리를 나타내며 시가 또한 하나님의 진리를 나타냅니다.
『겟세마네의 예수』라는 성화를 보면 한 획 한 획이 다 예수 그대로라고는 할 수 없으나 그 전체가 예수의 얼굴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라』(딤후 四․十三)한 이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일까 생각할 수 있지만,
디모데 후서 전체는 하나님의 계시를 알려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시나 논문이나 서신이나 그 전체가 다 하나님의 진리를 나타내므로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음으로 성경은 고대서적(古代書籍)이라는 것입니다. 나날이 진보하는 세상에, 오늘날 같은 원자력 시대에 있어서 새로운 서적을 읽을 것이지 어찌 수천 년 전의 옛 책을 청년들이 읽고 있겠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옛 책이라고 해서 버릴 것은 물론 아닙니다.
철학을 연구하는 자는 지금도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를 읽을 것이요, 동양 도덕을 연구하는 자는 지금도 논어(論語)나 맹자(孟子)를 읽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진리는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알키메데스의 원리는 지금도 역시 물리학상의 진리요, 피타고라스의 정리(定理)도 역시 기하학상의 진리로서 세상 끝까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이 비록 고대인의 인정과 풍속, 사회 제도, 관습 따위의 의복을 입기는 하였으나 하나님 자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가 입은 의복은 변하나 진리 자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진리는 항상 새롭습니다. 二十세기의 경이(驚異)라는 B 29를 타고 다니는 군인도 회중신약(懷中新約)을 품에 가지고 다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복과 진리 자체의 관계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셋째로, 과학적 지식을 가진 현대인에게 이적에 대한 기사는 난해(難解)의 감을 준다는 것입니다. 자연과학을 배운 사람은 자연 법칙에 대한 이념과 성경과는 상반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이적이라는 것은 고대에는 신앙에 도움이 되었으나 현대에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어떤 학자는 이적을 자연 법칙에 의하여 해석해 보려고 노력하였으나 그러나 이것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예수의 부활 등을 어떻게 자연적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은 성경에 있는 이적을 그대로 승인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대저 신학적 견지에서 보면 자연 법칙은 하나님의 일반의지(一般意志)의 표현이요, 이적은 하나님의 특수의지(特殊意志)의 표현입니다. 그런고로 성경을 보면 특수한 때에만 하나님의 이적이 나타난 것을 신약(新約)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여기에 무신론자나 유물론자나 맹목적 운명론자에게 이적을 말하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믿으나 이적은 자연 법칙에 벗어난다고 하는 사람에게 말합니다. 그네들은 자연 법칙으로 볼 때 무(無)에서 유(有)를, 무기물(無機物)에서 유기물(有機物)을 낼 수는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연 법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곧 천지 창조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최대의 이적은 천지 창조인데 창조주 곧 하나님을 믿는 자는 그 가능성을 부인하기 곤란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혹 창조주의 가능성은 시인하나 하나님께서 이 천지를 한 번 창조하신 연후에는 자연 법칙에 의하여 자연계를 운행케 하셨으니 자연 법칙을 어기어 그리 할 리가 없다고 말합니다(Deism). 그러나 이적은 자연 법칙을 어김이 아니요, 초월합니다.
인격은 자연 법칙을 초월합니다. 또한 우리는 자연 법칙의 제한성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자연 법칙은 과학적 방법으로 발견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한에서 지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실이 발견되는 때에는 정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학이 발전하여 연구하면 할수록 우주는 신비한 것임을 즉 이적임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깊은 연구를 한 과학자일수록 이적을 믿게 되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물질적인 우주에 이적이 많으니 성경에도 이적이 있음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상으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데 대한 현대인의 의혹 몇 가지를 들어 말하였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란 것은 결국 내가 읽어보지 않고는 모릅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 우리가 하나님을 직면하고 그리스도를 직면하는 것입니다.
일찍이 고대 언어학자로 세계적 권위이던 윌손 박사에게 어떤 대학생 두 사람이 가서 성경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느냐고 반대 이론을 전개하여 하였습니다. 이 때에 윌손 박사는 조용히『그런데 이 성경을 몇 번이나 읽어보고 그런 결론을 내렸습니까?』하고 반문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다 서로 얼굴을 쳐다볼 뿐, 아무런 대답도 없었습니다. 박사는 다시 묻기를『그러면 한 번은 읽었겠지요?』그래도 대답이 없었습니다. 사실은 한 번도 읽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 때에 박사는『나는 四十년간 매일 밤 열 시부터 새벽 두 시까지 성경을 연구하였고. 그리고 나는 이 책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데 조금도 의심이 없소, 우선 두어 번 읽어보고 오시지요』두 학생은 머리를 숙인 채로『고맙습니다』란 한마디를 남기고 나가버렸다고 합니다.
一七九0년 영국 정부에서 남양 군도의 하나인 피트카린(Pitcarin)도에 식림(植林)하기 위하여 인부 백여 명을 파송(派送)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그 섬에서 선장에 반역하여 작은 배에 선장을 태워 죽으라고 대양(大洋)에 띄워 보낸 후 자기들끼리 절해고도(絶海孤島)에서 돌아올 생각도 못하고 토인 여자와 동거하며 생활하였습니다.
죽은 줄 알았던 선장은 다행히 지나가는 배를 만나 영국으로 돌아가 정부에 보고하여 정부는 곧 해군을 파송하여 이들을 체포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三十년간의 역사를 물으니 대략 이러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선장을 죽게 만들어 놓고 각자 마음대로 놀았습니다.
자연히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마다 시비를 가릴 사람이 없어서 대부분이 서로 싸워 죽었다고 합니다. 또 어떤 자가 열대 식물의 즙으로 술을 만들어 먹기 시작한 뒤에는 싸움이 더 굉장해 졌습니다. 술 먹고 놀고 싸우고 죽고 하는 반복이었습니다. 이리하여 백인들은 몇이 남지 않게 되었으나 흑인 여자와의 관계로 반종 아이들은 많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어떤 날 이 반역자의 하나인, 술 먹고 싸우고 음란하고 살인하던 이 아담스가 수두룩히 모인 반동 아이들을 바라볼 때에『이 아이들이 크면 역시 우리들처럼 살다가 죽을 태지! 이래서야 될 수가 있나!』하는 생각이 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옛날 자기 가정이 연상되었고 떠날 때에 자기 어머니가 주던 성경책이 생각났다 합니다. 그 책이 지금도 있을까 하고 옛 가방을 뒤져보았습니다. 책은 그냥 있었습니다. 아담스는 읽기를 시작했습니다. 읽고 있던 아담스의 눈에서는 눈물이 마를 줄 몰랐습니다. 이리하여 많은 죄는 회개의 눈물과 함께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 때부터 아담스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남은 사람들에게도 회개를 권하였습니다.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며 글을 가르쳤습니다. 무정부 상태이던 이 섬은 질서가 잡히고 예배당이 서고 학교가 섰습니다. 야만의 절해고도에 문화와 종교의 꽃이 핀 것입니다. 오직 성경 한 권의 감화로 말입니다.
이 성경은 현재 九八七종의 방언으로 번역되어 온 세계인이 읽고 있는데 이로써 죄인은 구주를, 슬픈 자는 위안을, 낙망자(落望者)는 소망을, 타락한 자는 재생을, 정치가는 정의를, 철학자는 지혜를, 예술가는 영감을,
도덕가는 윤리를 찾고 있으며, 청년들은 어떻게 혈기를 제어할까를, 노인들은 어떻게 여생을 보낼까를, 죽는 자는 참된 영생을 각각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책이 퍼지는 곳에 영적 해방이 있고, 도덕적 해방이 있고, 참된 사회적 해방, 정치적 해방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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