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고후 五․十九)
여기 화목이라고 하는 말씀이 거듭 나타납니다.
화목이란 말은 지금 말로 알아듣기 쉽게 화해라는 말입니다. 화해란 피차에 멀어졌던 이들을 다시 가까이 해서 화친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해케 하셨다고 기록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의 중심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화해의 종교올시다. 기독교 복음은 화해의 복음이올시다. 이 시간 이 화해의 기쁜 소식을 여러분과 같이 잠시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서 세 가지로 우리에게 교훈 합니다.
첫째 하나님과 화해하라. 둘째는 서로간에 화해하라. 셋째는 화해자가 되라.
하나님과 인간이 멀어졌습니까? 하나님은 우주와 인간의 창조자시요, 통치자시요, 보존자이십니다. 인간은 그의 피조물이요. 피치자(被治者)요, 피존자(被存者)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와 사랑과 빛의 하나님이요, 공의와 긍휼(矜恤)과 자비가 풍성하신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와 같으신 하나님께 대하여 반역하였고 범죄 하여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으며 하나님을 도피하기도 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냉담한 태도를 가지는 이들도 있고 심지어는 적의를 품고 사는 사람도 이 세상에 많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큰 담이 싸이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큰 구렁텅이가 그 두 사이에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처지에서 인간이 먼저 화해를 구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화해를 구하신 것입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신 까닭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화해를 구하십니까? 여기에 기록하기를『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라고 했습니다. 무슨 화해의 메시지를 보낸 것이 아니라 친히 세상에 오셔서 인간의 죄를 대신 지시고 피 흘려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심으로 인간의 죄를 사하시고 다시 부활하심으로 의롭게 하신 것입니다.
이 성육신의 비밀과 십자가를 통한 구속의 진리는 제한된 인간의 지력으로 해득하기란 물론 어렵습니다. 우리가 알지마는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이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을 믿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하셨으니 우리 인간이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저 돌아와 화해할 것뿐입니다. 오직 죄를 회개하고 돌아올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과 같이 되리라." 그는 죄인을 부르십니다. 십자가는 죄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크신 두 팔이십니다.
십자가가 모든 죄인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의 음성은 부드럽습니다. 간절합니다. "오라, 오라, 죄 있는 자들아 나아 오라, 하나님과 화해하라." 우리가 다 하나님과 화해하였습니까? 아직도 하나님과 멀리 계시는 이는 없습니까?
아직도 하나님과 담을 쌓고 사는 이는 없습니까? 옛날 동양의 성현들도 "순천 자는 흥하고 역천(逆天)자는 망한다" 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화해해야 우리가 금생과 내생에 바로 살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해하라" 이것이 첫째올시다.
인간끼리 서로 화해하라는 것입니다. 인간 사회에 불화와 불목과 분쟁과 분열이 얼마나 많은 것은 우리가 다 체험하고 목도하는 바입니다. 이것은 개인과 개인 뿐 아닙니다. 단체와 단체, 계급과 계급 사이에, 정당과 정당 사이에,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불화와 분쟁이 그치지 않습니다.
이 불화의 근본 원인은 물론 이간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죄악 가운데 사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먼저 하나님과 화해하라고 권면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화해하려면 동시에 우리 인간과의 화해가 필요하다고 지적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는 산상보훈 가운데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을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로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성경은 말씀합니다.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속히 화해하라" 는 것입니다.
화해에 꼭 필요한 조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화해를 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최고의 대가를 지불하시면서 인간에게 화해를 청하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는 아무개와 화해할 마음이 있기는 하지마는 저가 먼저 말하지 않는데 왜 내가 먼저 말할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 다른 사람도 꼭 같은 생각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은 내가 먼저 화해를 청하는 것입니다.
전에 어떤 부부가 여러 해를 단란하게 살다가 성질이 거칠어서 심하게 싸운 후에 서로 갈라졌다고 합니다. 이혼을 했다는 것입니다. 정녕 이혼을 하고 보니 후회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공연히 했군. 혼자 살자니 이거 안 되겠군.' 그러나 기왕 한 이혼이라 다시 살자고 할 수는 없고 그러니 상대편에서 살자고 청해 오면 응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추석이 되었습니다. 마침 자라다가 죽은 아이의 무덤 생각이 났습니다. 이 아버지가 그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섰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이혼한 여자도 죽은 아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역시 그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멀리서 무덤 앞에 선 남자의 뒷모습을 보니 전날의 자기 남편이었습니다.
돌아갈까 하다가 기왕에 왔다가 그냥 갈 수야 있나 하고 멀리 서 있었다고 합니다. 이 남자가 한참 울고 가려고 돌아서서 내려다보니 전에 자기 아내가 서 있었습니다. 그때 남자가 하는 말이 "제가 그저 잘못했습니다. 내가 성질이 못 되어서 당신의 마음을 상하게 했습니다" 라고 하자 여자도 "아니올시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리하여 죽은 아이의 무덤 위에서 다시 화해했습니다. 이 때부터 다시 살았다고 하는 얘기입니다. 내가 먼저 잘못했다 고 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 말을 못해서 우리가 화해를 못합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무조건 내가 지은 죄를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전에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받아서 애굽에 팔려가 숫한 고생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 후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여러 해 후에 형들은 크게 흉년을 만났습니다.
곡식을 구하러 애굽에 내려갔다가 속담에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격으로 그 곳에서 요셉을 만났습니다. 내가 요셉이란 말을 들을 때 형들은 정신이 아찔했습니다. 그때 요셉이 하는 말이 ꡔ당신들이 오래 전에 나를 애굽에 팔았다고 무서워 마시오. 근심하지 마시오, 나를 이 곳에 보낸 것은 당신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당신들의 모든 죄는 이미 용서한지 오래였습니다.ꡕ 요셉은 무조건 용서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필요합니다. 요셉은 형제간의 불화로 그런 큰 고생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형제간의 불화는 옛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다 잇습니다. 오늘날도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형제간에 부화한 이는 없습니까? 고부간에 불화 한 이는 없습니까? 심지어 부자간에 혹은 모녀간에 불화 하는 이는 없습니까? 친척간에 불화 하는 이는 없습니까? 가까운 친구간에 불화 하는 이는 없습니까? 먼저 잘못했다고 후히 용서하고 화해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특별히 성례주일에, 주님의 한 몸과 한 피를 받는 이 날, 화해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저는 오래 전에 전도사로서 교회 일을 시작할 때 어떤 원로 목사님이 제게 와서 자기의 경험 이야기를 해 주던 것을 지금도 잊지 않은 것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 목사님 말씀이 자기가 신학교를 졸업한 후 어떤 노회(老會)에서 목사 되기 위해서 시취(試取)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때는 노회 장소 한가운데 세워놓고 이 사람 저 사람 묻는 방식을 써서 동의 재청해서 가결하던 때라고 합니다. 어떤 분하고 시취를 같이 하는데 대답은 그쯤 했으면 되려니 했는데 맨 마지막에 어떤 선교사 한 사람이 일어서더니 "여러 형제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마는 제가 보기에는 이 분들이 대답은 무난하지마는 아직도 목사가 될 준비는 못 된 줄 아오." 하고는 앉더랍니다.
그만 선교사의 말인지라 회중 공기가 싹 변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한 분이 "연기하도록 동의합니다" 하고 동의에 재청해서 가결을 지우고 나니 영락없이 낙제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날 밤 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를 하려니 마음이 불편해서 기도가 잘 안 됩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기를 그 선교사와 나와 사이에 사감(私感)은 하나도 없는데 왜 그 분이 내게 대해 그런 말을 했을까?
그렇다면 필경 내게 유익하기 위해서 그런 말을 했겠지 생각하고 평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잠을 잤다고 합니다. 이튿날아침 거리에서 함께 낙제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는 만나는 첫 마디가 ꡔ아 선교사 그 놈ꡕ 하고 아직 분한 마음을 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몇 개월이 지난 후에도 노를 풀지 못 하드라는 것입니다. 반년 후에는 두 사람 다 목사가 되기는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목사가 된 다음에도 그 친구는 선교사 미워하는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있더랍니다.
그러더니 결국 그이는 목사 일을 그만 두더라는 것입니다. 나는 그 말 듣고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늘 남을 미워하는 마음을 품으면 내 마음에서 은혜가 떠납니다. 은혜가 떠나면 목사의 일을 볼 수가 없습니다.
은혜가 떠나면 장로의 일도 볼 수가 없습니다. 집사의 일도 볼 수가 없습니다. 또 평신도로서 내가 내 영혼도 구원 못합니다. 그러기에 내가 내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도 다른 사람에 대한 원한이나 미워하는 마음을 오래 품으면 아니 됩니다.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미국의 문필가 마크 트웨인이라는 분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용서는 자기를 짓밟는 발꿈치를 향수로 발라주는 앉은뱅이 꽃의 향기와 같다" 용서는 가장 고귀한 일입니다. 가장 고귀한 인격을 가지고 있어야만 충심으로 남의 죄를 용서하는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서로 화해하십시다.
이 성례주일에 우리 가운데 한 분이라도 혹 담을 막고 사는 이가 있으면 꼭 화해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여덟 가지 복을 말씀하실 때에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 이라고 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한 가지 종류는 어디를 가나 싸움을 붙이는 사람이요, 다른 한 종류는 어디가나 싸움을 끄는 사람입니다. 즉 싸움을 말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의 말씀은 싸움 말리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전에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서 갈멜이란 곳에 가서 살 때 그 지방에 나발이라는 큰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다윗은 따라온 청년 약 육 백 명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식량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때 다윗이 자기의 사람 십여 명을 나발에게 보내면서 이렇게 말하라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곳에 와서 반년이 넘도록 살면서 당신의 양 한 마리 해치지 않고 오히려 보호해 주지 않더냐? 그런데 우리가 지금 식량이 덜어졌으니 좀 보태 달라" 고 부탁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대로 부하들이 나발에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발이 그 이야기를 듣더니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인고? 요새 상전을 떠나서 도망쳐 다니는 이들이 많다더군"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청년들이 돌아와서 그대로 다윗에게 보고했습니다.
다윗은 분해서 칼을 차도록 하고 사 백 명을 무장하여 인솔했습니다. 그때에 나발의 목자 중 한 사람이 그 광경을 보고 급히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때에 그 현명한 여인은 그 말을 듣고 남편 몰래 여러 필의 말에 음식물을 가득 싣고 자기가 앞서서 나귀를 타고 다윗을 향해 갔습니다.
고개를 넘어오기 전에 다윗과 그의 군사들을 만나 절을 하고 간곡히 빌었습니다. "이름 그대로 내 남편 나발이 미련해서 그렇습니다." 하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다윗의 노가 풀려서 그 음식물을 받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자 보세요. 만일 그때에 아비가일 같은 지혜 있는 여자가 없었던들 그날 무슨 일이 생겼겠습니까?
나발의 가족과 목자들과 재산이 전멸을 당했을 것입니다. 또 그렇게 했다고 할 때 다윗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사실은 다윗에게 손해 준 것도 없는 이들의 피를 많이 흘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비가일과 같은 지혜 있고 현숙한 여인이 있었기 때문에 그 참화를 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이처럼 화해자가 필요합니다. 가정에도 필요합니다. 회사에도 필요합니다. 국제간에도 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 사업에 그렇게 분주해도 자기 고향에 있는 맨스필드라고 하는 친구 백작의 가정에서 재산을 둘러싸고 형제끼리 싸움이 벌어졌다는 말을 듣고 가서 권면할 결심을 했습니다. 그때 루터의 나이 예순 세 살이었습니다.
노구를 무릅쓰고 고향까지 가서 밤새도록 권면을 했습니다. 싸우지 말고 화해하라고 했습니다. 결국은 그의 말을 듣고 형제간에 화해를 했습니다. 하루 저녁 더 자고 이튿날 떠날 계획으로 잠들었다가 그날 저녁 병들어 그 이튿날 아침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생각하면 섭섭합니다. 그러나 마틴 루터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해를 시키려고 많은 애를 썼을 뿐더러 거기에서 자기의 생명까지 바쳤습니다. 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각계 각층을 보세요. 불화, 불목, 분쟁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믿는 사람은 이러한 사회에서 살 때에 어디 가든지 화해자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형제간에도 직장에서도 관청에서도 경제계에서도 어떤 곳에 가서든지 이 화해자가 필요합니다. 세계 정세를 보세요. 사실 이 같은 화해자가 나타나지 아니하면 세계인구가 이 땅에 남아 있을는지 의문되는 현실에 우리가 살고 있지 않습니까?
지난 五월에 미국 연합장로회 총회에서 소위 一九六七년 신앙고백서를 새로 만들어서 여러 다른 신앙고백서와 같이 첨가했습니다. 이것이 한국 교회에서 보도가 될 때에 여러 가지 오해를 가지고 보도된 것은 유감입니다.
이 시조가 우리 한국 교회와 직접 관계가 되는 것처럼 보도가 된 것 같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미국 교회의 것이요 한국 교회의 것은 아닙니다.
또 그들이 과거의 신조들은 다 부인하고 이것으로 대치한 것처럼 선전을 하는데 그것도 아닙니다. 과거의 모든 신조 즉 웨스트민스터 신조까지 그대로 두고 새 시대에 하나 더 첨부한 것뿐입니다. 그렇다고 이 신조가 한국 교회에 맞는다고 하는 말도 아닙니다.
오히려 맞지 않습니다. 단점도 혹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그것은 우리 한국 교회가 상관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혹 그런 교회에서 선교사가 오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이도 있으나 그것도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한국 교회에는 한국 교회의 신조 그대로 믿는 사람들만 보냅니다. 또 그런 사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선 오해하지 않는 것이 좋겠고 한 가지 이해해 둘 것은 이 신조가 여러 가지 약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마는 이런 二十세기 정세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화해의 복음을 강조한 것은 아주 적절한 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새로운 신조를 낸 줄 압니다.
인간은 영적 견지에서 보다 사회적 실정을 살펴보나 세계 정세를 관찰할 때나 꼭 이 화해의 복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자기와 화해케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화해의 복음을 받아서 하나님과 화해하고 모든 사람과 화해하여 이 불화 많은 땅에 나가서 화해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믿는 사람들의 사명이올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