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있으면 세상이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요 十四․十九)
이 간단한 말씀은 부활절 메시지를 가장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부활절 아침에 우리 주님은 두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내가 살았다는 말씀이올시다.
둘째는 너희도 살리라 하는 말씀입니다. 내가 살았으므로 믿는 너희도 살리라는 말씀이올시다. 내가 살았으므로 너희도 살리라.
이 부활절 아침에 주님의 간단한 말씀을 우리가 잠깐 묵상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내가 살았으므로 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살아 계십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나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오늘 아침 읽은 성경 말씀은 여러분이 들은 성경말씀 대로, 사도 바울이 고리도 전서 十五장에 기록한 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으나 성경대로 사흘만에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는 부활하셨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다른 종교는 그 종교의 교주의 탄신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우리 주님의 탄강(誕降)일 만이 아니라 부활절이 있습니다. 다른 종교는 그 교조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 무덤을 잘 장식하고 경배합니다. 우리 기독교에도 무덤이 있기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무덤은 열린 무덤이요. 빈 무덤이올시다.
여러분 성지에 가 보세요. 저는 가 봤습니다. 빈 무덤뿐입니다. 왜? 예수 님께서는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그 무덤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부활의 종교라고 합니다. 만일 예수께서 부활하지 않았다고 하면 세상에 기독교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없었을 것입니다.
왜? 여러분은 그 때의 형편을 복음서를 잘 읽어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동산 밖에서 악한 무리에게 잡힐 때에 모든 제자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오직 베드로 하나만이 몰래 예수의 뒤를 따라가다가 대제사장 아문 뜰까지 들어가기는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 곳에서 불행히도 대제사장의 종을 만나서『네가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고 물을 때에 떨려서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와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에 제자들은 겁에 질려서 어떤 방에 모여 문을 굳게 닫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두어 제자는 멀리 촌으로 피해갔던 모양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제자들은 낙심천만이었습니다. 혼비백산의 참혹한 모양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이 어떻게 새로운 용기를 얻었습니까? 예수를 못박은 원수들이 들끓는 예루살렘에서 새롭게 복음을 전파할 용기가 어디서 생겼습니까? 어떻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할 수가 있었습니까? 어디서 이 용기가 회복되었습니까?
거기에 대한 설명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부활한 예수를 만난 까닭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 十五장에 기록한 대로 게바에게 그는 나타나 보였습니다. 그 후 열두 제자에게도 나타나 보였습니다. 오백여 신도에게 일시에 나타나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편지를 쓰던 그 때까지 살아 있다고 그랬습니다.
예수님을 본 사람들의 태반이 살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확실히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의심하지 맙시다.
기독교와 교회 자체의 존재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안식일이 변해서 어떻게 주일이 됐습니까?
제자들은 다 유대 사람입니다. 그들은 오래도록 구약대로 살았습니다. 열 가지 계명대로 이래 중 마지막은 안식일로 지키며 성전에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던 이들이 어떻게 이래 중 첫날인 일요일에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까? 그 대답도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대답은 예수님께서 이래 중 첫날, 오늘날 일요일이라고 부르는 첫날에 부활한 까닭입니다. 그래서 이래 중 첫날을 주일, 주의 날이라고 부르게끔 되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래 중 첫날인 주일에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이 주일 자체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확실히 부활하셨습니다. 의심하지 맙시다.
여기 신구약 성경이 있습니다. 이 성경은 신약과 구약, 두 부분으로 나눕니다. 신약은 구약보다 양은 적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잘 아십니다. 이 성경의 중심은 신약입니다. 기독교의 중심 진리가 신약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약을 구약보다 더 자주 읽는 것입니다. 이 신약성서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중심 진리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신약은 씌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신약전서 자체가 예수 님의 부활을 우리에게 증명해 줍니다.
예수는 과연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였습니다. 의심하지 맙시다.
이 밖에도 우리가 부활을 믿는 이유는 많지마는 시간이 없어서 다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부활은 사실입니다. 물론 부활과 같은 사실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초자연적 사실입니다. 우리가 다 이해는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도마 같은 제자도 처음에는 의심했습니다.
더욱이 자연계만을, 물질 세계만을 치중해서 공부하는 과학 교육을 받은 현대인에게 이런 진리가 얼른 납득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세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올시다 우리 신앙의 제一조가 무엇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입니다.
전능하셔서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으로서는 죽은 자를 부활케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요새 신문에 보니 우리 한국에도 달에서 가져온 조그만 돌이 도착된 모양입니다. 여러분 공중에 뜬 둥그런 달을 늘 보시지요. 그 달도 별 것은 아닙니다. 결국은 큰 돌덩이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무겁겠어요. 그런데 그것이 떨어지지 아니하고 늘 공중에 그냥 있습니다.
그걸 이해할 수 있어요? 아마 이해하기가 어렵지요. 뭐 달만 볼 필요가 없지요. 우리 지구는 어떻습니까? 지질학자의 얘기를 들으면 지구 속에는 뜨거운 불, 용암(溶岩)이 있다고 합니다. 겉은 전부 돌입니다. 돌과 물로 된 공(ball)입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가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공중에 둥둥 떠 있습니까? 여러분 이걸 다 이해할 수 있어요?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능 가운데서 되는 일입니다.
부활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은 영원히 살아 계시면서 지금도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마태복음 마지막장 마지막 절을 기억하십니까? 거기에 주님께서 이런 약속을 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주님께서 항상 같이 있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만 계신 것이 아니고 우리와도 같이 계십니다.
엠마오 길의 두 제자와 동행하신 것처럼 지금도 인생 행로를 걷는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여기에 항상 이란 말은 모든 날이란 뜻이 있습니다. 기쁜 날이나 슬픈 날이나, 튼튼한 날이나 병든 날이나, 분주한 날이나 외로운 날이나, 사는 날이나 죽는 날이나, 우리 주님은 우리와 항상 같이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아침에도 살아 계시는 우리 주님은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우리가 할렐루야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 부활절 아침에 주님의 첫 마디 말씀을 기억하세요.
『내가 살므로 내가 살았다. 내가 영원히 살았다. 영원히 내가 너희들과 같이 하겠다.』
자, 그 다음엔 둘째 말씀을 우리가 잠깐 생각합시다.
너희도 살리라. 내가 살았으므로 믿는 너희도 살리라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부활하리라. 너희도 영원히 살리라.
욥기 十四장 十四절에『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리이까?』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부활절 아침에 주님의 대답이『너희도 살리라』대답합니다. 몸도 살고 영혼도 살리라.
그러므로 사도신경 마지막 신조가『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몸도 다시 삽니다. 부활합니다. 왜? 내가 살았으므로,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므로 우리도 부활 할 때가 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말씀하시기를『예수의 부활은 모든 잠자는 자의 처음 익은 열매』라고 지적했습니다.
예수님도 분명히 요한 복음 五장 八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이를 기이 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十五장 五十一절에『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오』했습니다. 죽어 있을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죽은 자들이 다시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했습니다.
몸도 다시 살겠다고 했습니다. 이 육신의 부활을 들을 때에는 물론 여러분의 마음속에 여러 가지 의문이 떠 올라올 줄 생각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길 수 있을 것인가? 여러 가지로 문제가 일어날 겁니다.
그러나 그런 염려는 과히 하지 마세요. 여러분 모태에 있는 아기의 모습을 본 이가 있습니까? 저는 본 일이 있습니다. 미국 어떤 병원에서 한 달된 아기를 끄집어내서 병에 넣어 둔 것을 보았어요. 한심합니다. 눈이 있습니까? 코가 있습니까? 그런 핏덩어리가 발육이 돼서 이목구비가 있는 사람이 됩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여기 앉은 여러분도 그런 때가 한 번 있었어요. 그걸 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게 어떻게 그런 일이 생깁니까? 거저 한 마디로 말해서 신비합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현재의 이 몸도 이루어 주신 것뿐입니다.
그래서 부활이 없다는 사두개인 들이 예수께 나와서 우스꽝스러운 질문을 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어떤 여자가 일곱 남자와 살다가 죽었는데 부활할 때에는 어느 남자의 아내가 될 것입니까? 예수께서 이 말씀에 대답하면서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권능도 모르므로 크게 오해 하였도다』했습니다.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권능도 몰라서 이런 생각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작은 꽃씨가 어떻게 변해서 저렇게 아름다운 꽃이 됩니까? 그것도 다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신비합니다.
제가 며칠 전 기도원의 연못가에 잠시 섰는데 노랑나비 둘이 날아옵니다. 사람은 춥다고 해도 봄이 온 것이 분명해요. 추한 벌레가 변해서 어떻게 저런 아름다운 나비가 됐을까 생각했습니다. 그것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비한 일입니다. 거저 하나님의 권능 가운데 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권능과 사랑은 우리 영혼, 육신과 정신까지 곧 인격 전체를 구원하실 때가 올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너희도 살리라는 말은 이 다음 부활 때까지 기다려서 살리라는 말은 아닙니다. 지금부터 살리라는 말입니다.
지금부터 영원히 살리라는 말입니다. 요한 복음 三장 十六절을 여러분이 다 기억하시지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했습니다. 이 다음에 영생 얻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믿는 즉시로 영생을 얻으리라 했습니다. 지금 얻겠다는 말입니다. 영생의 뜻을 확실히 파악하여야 됩니다.
물론 영생의 뜻은 글자 그대로 길이 산다는 시간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닙니다. 이 우주에 영원히 사는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곧 영생은 하나님의 생명이란 뜻입니다.
길이 살 뿐더러 하나님의 생명, 참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영생은 죽음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시작이 됩니다. 참으로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서 성령으로 거듭나는 사람은 그 때부터 이미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런 사람에게는 실상 죽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도 말씀하시기를『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했습니다. 과거입니다. 또『심판에 이르지 아니 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했습니다. 이것도 과거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또 말씀하시기를『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니라』했습니다. 영생을 얻었단 말입니다.
이 영생을 얻은 이는 사실 죽음이 관계없습니다. 죽음이란 모든 인간 관계는 끊으나 하나님과의 관계는 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언제나 우리가 살아 있습니다.
지난 十九세기에 미국에 유명한 부흥 사 무디 라고 하는 사람이 한 번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앞으로 어느 날 여러분들이 이 사람 무디가 죽었다는 신문의 기사를 읽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을 절대로 믿지 마십시오. 그 때에 나는 지금보다 더 잘 살 것입니다.
그 때에는 이 흙으로 된 장막 집을 벗어 놓고 썩지 아니하는 집, 곧 죄가 더럽힐 수 없는 그리스도의 몸과 같은 영광스러운 몸으로 살 것입니다. 내가 육신으로는 一八三七 년에 났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는 一八五六 년에 새로 났습니다. 육신으로 난 것은 아마 죽겠지요. 그러나 성령으로 난 것은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한 목사도 이미 나이 七十이 가까웠으니 아마 오래지 아니해서 한 목사 죽었다는 소문을 여러분이 들을 것입니다. 미리 말합니다. 그런 말 조금도 믿지 마세요. 나는 그 때야 말로 주님과 같이 더욱 빛나게 영원히 살 것입니다.
지난 부활 주일을 같이 여기서 예배를 드린 이 가운데 一00 명이 훨씬 넘는 분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슬픔을 당한 이들도 아마 계신 줄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 부활절 아침에 주님의 음성을 분명히 들으세요.『내가 살았으므로 너희도 살리라.』
그들이 살아 있습니다. 위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의 일생에 중요한 일들이 많이 있지마는 중요한 일은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생과 사, 사는 것과 죽는 일입니다. 옳게 사는 것과 옳게 죽는 것, 이것이 중요합니다.
죽음을 준비하고 살아야 옳게 살고 삶을 준비하고 죽어야 옳게 죽습니다. 여러분 다 죽음을 준비하고 사십니까?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그와 동행하는 생활은 옳게 살고 옳게 죽는 것입니다.
내가 살았으므로 너희도 살리라. 그것이 곧 영생의 길입니다.
아직도 우리 가운데 온전히 주님을 내 주로 영접지 못한 이가 계십니까? 이 부활절 아침에 온전히 주님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영생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인간이 거저 六十년이나 七十년 살다가 없어지기 위해서 지어진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영원한 불멸의 존재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내가 살았으므로 너희도 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