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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1:18-31/ 열등감을 극복하는 비결 / 한경직 목사
    2014-08-23 06:57:36   read : 1053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고전 一․二十七)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당시의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서 솔직히 자기가 보는 대로 그들의 형편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런 구절을 읽을 때에 만일 사도 바울이 오늘날 한국교회에 있는 교인들을 내려다보신다면 현재의 한국 교인들에 대해서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좀더 범위를 좁혀서 우리 영락교회에 모여서 예배하는 교우들을 내려다 보신다면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제 생각으로는 지금도 전과 같이 여기 있는 이 비슷한 말씀으로 기록할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아마 지금도 우리 사회 가운데서 믿는 사람들을 보면 특별히 지혜 있는 자가 많다고 할 수 없고, 능한 자가 많다고 할 수도 없고, 문벌 좋은 이가 많다고 하기 어려운 줄 생각합니다.

    지혜가 부족한 사람들, 능하지 못한 사람들, 문벌이 좋지 못한 사람들은, 조금 잘못하면 열등감에 사로잡히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이 열등감에 대해서 잠깐 생각하고자 합니다.

    이미 읽은 말씀을 한 후에 계속해서 二十七절 이하에『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擇)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고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성경과 역사를 보면 사실 이대로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당시에 미련하게 보이던 갈릴리 어부들을 택하사 헬라의 철학자들을 부끄럽게 하였습니다. 세상에서 약한 약소민족이요, 천시를 당한 식민지 백성들을 택하사 마지막에는 강한 로마의 제왕들이 무릎을 꿇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일을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요. 또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 가을에 저는 특별한 이름 있는 주일 이외에는 건전한 신앙생활에 장애가 되는 요소를 제거하는 문제에 대해서 계속해서 설교를 해왔습니다. 그래서「유혹을 이기는 비결」혹은 「공포심을 극복하는 비결」혹은「원한을 극복하는 비결」이런 문제에 대해서 이미 설교를 했습니다. 오늘 아침 이 시간은 열등감을 극복하는 비결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누구나 나는 부족하다 하는 느낌이 다 있을 줄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건전한 자기 성찰인 줄 압니다. 그러나 이런 느낌이 도가 지나쳐서 항상『나는 부족하다. 나는 모자란다. 나는 할 수 없다』

    하는 느낌에 사로잡히게 되면 이것은 일종의 병적 심리상태입니다. 이것을 심리학적으로 열등감이라고 합니다. 영어로 말하면 인훼리오리티 컴풀렉스(Inferiority Complex)라고 합니다.

    사람이 이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면 자기에 대한 자신력을 전혀 잃고 무능하고 무력하게 되어서 인격상 또는 생활상 불행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이런 이들은 흔히 자기의 할 일을 하지 못합니다.

    씨름을 하기도 전에 누울 자리부터 봅니다. 마땅히 해야 될 경우에 할 말을 하지 못합니다. 겁이 나고 도에 넘치는 역병에 걸려서 정당한 사교생활도 하지 못합니다.

    이런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으면 교회에 출석은 하지마는 교회를 봉사하거나 전도는 하지 못합니다. 사회에 나가서 일한다고 하지마는 부정과 불의에 항거할 용기가 없습니다. 그대로 나가면 결국은 그 일생은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반면에 이런 이들이 자기의 그 열등감을 보충하기 위해서 다른 방면으로 도에 지나치는 일을 하는 수도 있습니다. 가령 어떤 여자가 이런 열등감에 사로잡힌다고 하면 도에 지나치는 화장을 한다든 가 의복을, 또 별스럽게 입고 사치하게만 차리려고 애를 씁니다. 미국 같은 데를 가보면 흑인들이 많이 있는데 흔히 흑인 여자들이 너무 화장을 도에 지나치게 합니다.

    아프리카의 가나 같은 나라에 가 보니까 거기 흑인 여자들이 옷을 입었는데 별스럽게 울긋불긋한 옷들을 전부 입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열등감에 사로잡혔는데 이것을 다른 면으로 보충을 하려니까 이런 화장이나 이런 의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어떤 남편이 자기 부인보다 좀 못하다는 열등감이 있다고 하면 흔히 자기 아내에 대해서 더 괴롭게 굽니다. 그저 자기 아내를 꼼짝 못하게 지배하려고 달려 붙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열등감을 어떻게 해서든지 보충하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은 흔히 도에 지나치는 대접을 다른 사람에게 요구합니다.

    보통 사람은 섭섭해하지 않을 것도 이런 이들은 나무라기를 잘합니다. 혹 어떤 사람이 그저 무심중에 인사를 좀 잘못해도『아 저 사람이 나를 업신여겨서 인사를 안 하느냐?』하고 대단히 섭섭해합니다. 또 어떤 때에는 이런 이들이 도에 지나치는 자기 자랑도 해봅니다.

    하여간 이것은 병적인 심리상태입니다. 따라서 이런 이들이 가정에 있으면 가정이 불화하기 쉽고, 이런 이들이 교회에 많이 있으면, 교회가 불화와 불평에 빠지기 쉬운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것은 미덕이지마는 이 열등감이라고 하는 것은 병적 심리상태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꼭 극복해야 신앙생활도 바로 하고, 모든 다른 사업도 바로 합니다. 그런데 누구나 이 열등감에 사로잡히기 매우 쉽습니다. 이 열등가을 극복하는 길이 어디 있는가 몇 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자신을 잘 살펴서 이런 병적 열등감에 사로잡혔는가 알아봐야 합니다.
    또 그 원인이 어디 있는가 알아볼 것입니다. 원인을 알면 그것을 우리가 고칠 수 있습니다. 먼저 이성을 통해서 이 열등감을 시정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열등감을 가진 이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어렸을 적에 부모에게 좋은 가정교육을 받지 못하고 부모가 못한다고만 윽박질러서 이런 열등감이 마음에 깃들인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가정에서 아이들을 기를 때에 잘못한다고만 자꾸 육박아 주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아이 마음가운데『난 그저 못난 놈이야』하는 생각이 늘 들게 됩니다.
    또는 학교에서 선생이 버릇이 좋지 못하다 거니, 공부를 잘못한다 거니 하고 자꾸 못한다고만 눌려주고 욕해 주면 그만 아이가 마음에 깊은 상처가 나서 일생토록 열등감 가운데 사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학교 선생들은 이런 점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밖에는 열등감을 가질 이유가 없는 데도 오해 때문에 혹은 그릇된 가치판단 때문에 열등감을 가지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한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처럼 상당한 학교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이『난 젊어서 교육받을 기회를 잃어서 남처럼 대학을 졸업 못했어. 그러니까 난 남보다 못해.』이런 생각을 자꾸 하면 결국 열등감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사실 오해입니다.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반드시 열등한 것은 아닙니다. 또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반드시 사업에 성공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습해서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많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아브라함 링컨 같은 이는 학교에 몇 달밖에 못 다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미국의 제일 유명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인도의 라빈그라나드 타골 같은 이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문인이요, 시인입니다.

    그러나 이 분은 대학에 들어가 보지 못했습니다.
    요사이 듣는 말로는 젊은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돈이 없어서 대학을 그만 못 가게 된 것이 남부끄러워서 교회에 못 나온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 것으로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되겠습니까?

    또 어떤 학생은 부모가 학교를 보내 쥐서 시험도 치르고 합격도 했는데 소위 일류학교에 입학 못하고 이류나 삼류 학교에 들어갔다고 해서 부끄러워서 마크도 못 달고 큰 거리로도 못 다니고 친구를 만나면 피해 다인 일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것 때문에 열등감에 사로잡힐 필요가 조금도 없다는 말입니다. 오해와 그릇된 판단에 의해서 열등감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습니다.

    또 특별히 생활이 빈궁한 이들이 가난하니까 옷도 다른 사람처럼 입지 못하고 해서 스스로 마음이 열등감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도 사실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세례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요단강에서 외칠 때에 많은 사람들이 그 앞에 나와서 죄를 자복 하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약대 털옷이라고 무슨 모직 옷이 아닙니다. 변변치 못한 옷입니다.

    예수님도 친히 말씀하시기를『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예수 님은 가장 가난하였습니다. 주후 四세기 사람인 성 안토니오 같은 이는 본래 부자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하신 그 말씀 그대로 살기 위해서 자기의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자기는 가죽으로 옷 한 벌을 해 입고 광야지대에 나가서 일생을 굴속에서 살았습니다.

    한 번은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가 얼마나 안토니오의 모양이 험했던지 그를 짐승으로 오인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한 번은 알렉산드리아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칠 때에 온 알렉산드리아 성 사람이 그 앞에 나와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열등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떻게 사느냐, 얼마나 진실히 살고 얼마나 옳게 살고 얼마나 봉사를 하느냐? 여기에 우등과 열등이 있지, 돈 많고 없는데 우등과 열등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그 말씀입니다. 지위가 높고, 지위가 낮고, 벼슬을 하고, 벼슬을 못하고, 여기에 우등과 열등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해해서 열등감에 사로잡히지 맙시다.

    몸에 병이 있거나 특별히 불구자가 된 이들 가운데『나는 일생 병이 있고 나는 북구자가 되었으니 아무 것도 할 수 없다』하고 열등감에 사로잡히는 이들이 혹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이유는 안 됩니다.

    바로 지난 금요일에 세브란스 의 수족 부에서 아침 기도회를 인도해 달라고 해서 갔다 왔는데 거기 가 보니까 토리 박사 기념 채플이 있었습니다. 이 토리 박사는 본래 그 유명한 미국의 부흥사인 토리 박사의 아들인데 이 분이 중국에 선교사로 갔다가 제二차 대전 때에 그만 부상해서 팔을 하나 잃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六․二五사변이 일어나 다리 없는 사람, 팔 없는 사람이 많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에 나와서 세브란스 병원을 중심해서 의 수족 부를 설치하고 많은 청년들에게 다리를 해 주고 팔을 해 주었습니다.

    지금 그 이는 귀국했지만 현재 그 책임자로 있는 선교사도 두 손이 다 없는 분입니다. 두 손이 다 없는 분인데 한국에 나와서 많은 손 없고 발 없는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헬렌 켈러 같은 여자는 소경이니 눈도 보지 못하고, 귀머거리니 귀도 듣지 못하고, 벙어리니 말도 하지 못합니다. 이런 여자지마는 세계의 가장 유명한 여자 가운데 하나입니다. 몸이 약하다고 불구자가 되었다고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자포자기하면 안 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사업하다가 실패한 다음에 열등감에 사로잡히는 이가 혹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사실 이유가 안 됩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났지마는 우리 교회 고한규 장로님은 참 위대한 장로입니다.

    그가 한 번은 자기의 회고담을 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그가 사업에 실패해서 많은 사람에게 빚을 졌던 경험이 있었다고 합니다.

    내가 신의주 제二교회에서 봉사할 때에 그 곳에 참 위대한 장로님으로 김기범 장로님이라고 계셨습니다. 언젠가 이 기범 장로님과 하루 저녁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하는데 하시는 말씀이, 자기는 일생 사업을 한 사람인데 일생에 세 번 크게 실패를 해서 한 푼도 없는 신세가 되었었다고 합니다.

    그 후에, 다시 일어나서 회복하여 이 만큼 살아간다고 하였습니다. 사업하다가 누구나 실패할 수 있습니다. 실패했다고 절대로 열등감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부인들 중에는 미안한 말이지마는 얼굴에 허물이 있든지 또 얼굴이 잘못 생겼으면 아주 열등감에 쉽게 사로잡히는 모양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책을 보니까 어떤 분이 세계에서 가장 큰 일을 많이 한 여자들을 전부 조사를 하고 그들의 얼굴이 잘 생겼나, 못 생겼나를 알아보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오히려 큰 사업을 한 여자들 가운데는 못 생긴 여자들이 더 많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얼굴에 허물이 좀 있다든지 해서 열등감에 사로 잡힐 필요는 없습니다.

    또 과거에 큰 실수를 하고 죄를 지었다고 열등감에 사로잡힐 필요도 없습니다. 왜? 사도 바울이 얼마나 교회를 핍박하고, 얼마나 큰 죄를 지었습니까? 그러나 회개한 다음에는 다시 뒤를 돌아다보지 않았습니다.

    내 과거 때문에도 열등감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말했지마는 열등이냐? 우등이냐? 열이냐? 우냐? 하는 그 문제는 이런 것들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요컨대 내가 어떤 환경에 있든지, 어떤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생활을 하느냐?

    얼마나 진실하고 얼마나 선하고 얼마나 봉사의 생활을 하느냐? 얼마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생활을 하느냐? 얼마나 이 사회를 위해서 유익한 일을 하느냐?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성공이나 실패에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먼저 내 자신을 살펴서 이 원인을 시정할 것입니다.

    둘째로는 예수 안에 자기 자신의 허물과 부족함을 보아야 합니다.
    나 자신을 볼 때 예수님께서 보시는 나 자신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나 자신은 하나이지만 실상은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다른 사람이 보는 나 자신.
    둘째는 내가 보는 나 자신.
    셋째는 예수님께서 보시는 나 자신, 이렇게 자신은 하나이지만 다 다르게 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데만 관심을 가지고 살다가는 기뻐할 때도 있지만, 울 때도 많고, 섭섭할 때도 많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때에는 다른 사람이 우리를 칭찬해 주지만, 어떤 때에는 우리를 욕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 남은 우리를 바로 보지도 못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우리를 어떻게 보나, 여기에 너무 관심을 가질게 아닙니다. 또 내가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데도 너무 관심을 둘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나 자신을 들여다보면 나는 날 모르는 죄가 있고, 내 속에 허물이 있고, 부끄러운 것이 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나 자신을 보는 것만으로 나를 생각하다가는 낙심하기 쉽습니다. 자포자기 하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 나 자신을 어떻게 보시나 그것을 발견해야 됩니다. 찾아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은 시몬 베드로를 부를 때에 뭐라고 말씀하였습니까?『내가 장차 너로 하여금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 님은 우리를 보실 때에 우리의 과거를 보지 않습니다. 우리의 현재도 보지 않습니다. 장차 주안에서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되겠나 하는 우리의 미래를 봅니다.

    그래서 갈릴리 어부 시몬을 볼 때에 단순히 고기만 잡는 시몬으로 안 보았습니다. 장차 사람을 낚을 베드로를 보았습니다. 내가 네 이름을 반석 즉 베드로라고 하겠다고 하시며 장래의 베드로를 보았습니다.

    예수 님께서 세관에 앉아서 세를 받던 레위 마태를 볼 때에, 거기 앉아서 세금만 받는 레위를 보지 않았습니다. 장차 이 사람이 예수를 믿고 내 안에 살게 될 때에 어떤 사람이 되겠나 하는 장래의 마태를 본 것입니다. 삭개오도 그렇게 본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보실 때에 우리의 미래를 봅니다. 과거가 문제 아닙니다. 현재도 문제 아닙니다. 우리가 온전히 예수 님 안에 들어오게 될 때에 이 사람이 어떻게 되겠느냐 하는 미래를 봅니다.

    주안에서 나 자신의 미래상을 발견하고 그 미래상을 바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 四장 十三절에『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 때에 사도 바울은 자신을 그저 보지 않았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사는 자기 자신을 보았습니다 자기 혼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마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될 때에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三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났습니다.『내가 네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었다. 내가 이 백성을 애굽의 압박에서 구원할 작정이다. 내가 네게 명하노니 네가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서 내 백성을 구원하라.』

    그 때에 모세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압니까?『내가 누구관데, 내가 무엇이기에 바로 에게 돌아가서 내 백성을 구원할 수 있습니까?』이것은 모세가 스스로 자기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열등감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압니까?『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가리라.』그 다음부터 모세는 자기 혼자 자신을 보지 않고 하나님과 같이 동행하는 자기자신을 보았습니다. 그 때에 담대히 애굽으로 돌아가서 자기 백성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나 자신의 미래상을 발견하고 볼 줄 알아야 됩니다.

    예레미야 一장을 읽어보세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부릅니다.『내가 모태로부터 너를 택했다. 내가 너를 열국의 선지자로 세웠노라.』그 말을 들을 때 예레미야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압니까?『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 알지 못하나이다.』이것이 열등감 아닙니까? 나 혼자서는 말도 할 줄 모르고, 나이도 어린데 내가 이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비로소 그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기 자신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용기를 얻어서 자기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안에서 나 자신의 미래상을 볼 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께 몸을 바치고 하나님 안에 있게 될 때에는 나 자신으로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 열등감은 자연히 사라져 없어집니다.


    온전한 신앙은 열등감을 소멸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온전할 때 열등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와 보시니 간질병 않는 어린애를 데리고 온 아버지가 예수님 앞에 나와 축수(祝手)합니다.

    『주님이시여 내가 이 아이를 데리고 와서 주님의 제자들한테 좀 고쳐달라고 하니까 못 고쳤습니다. 선생께서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이 아이를 좀 불쌍히 여겨 주세요.』그 때에 예수 님께서 뭐라고 대답했는지 여러분 아십니까?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알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한 것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꼭 옳은 일이면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한 것이 없습니다.

    참 신앙은 열등감을 내어쫓습니다. 요한복음 一장 十三절에『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면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됩니다. 세상의 왕의 자녀들도 열등이라고 말할 수 없거든 하나님의 자녀로 열등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다 우수합니다. 지금도 미국에 인종문제가 굉장히 얼어나지마는 어떤 백인이 흑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왜 당신은 솔직히 흑인을 열등민족이라고, 열등이라고 용인하니 않는가?』

    물으니까 독실한 그리스도인인 그 흑인은 조용히 이렇게 말했습니다.『내 얼굴은 비록 검다고 하지마는 나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내가 내 아버지께 충성된 아들이 되기 위해서도 열등이라고 하는 것은 용인할 수 없습니다.』

    다음의 성경 말씀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산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을 폐하려 하시나니.』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참된 신앙에 들어와서 기도를 통해서, 묵상을 통해서,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위로부터 새 힘을 얻을 때에는 나 혼자 할 수 없는 일도 할 수 있고, 능력이 충만한 적극적이며 창조적인 인물이 될 수 있고, 창조적인 사업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이와 같은 은혜를 받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내 가정에서도 내 책임을 감당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자포자기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가지고 담대히 살아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죄악이 많은 세상에서 이 죄악 세상을 구원할 복음은 오직 이 기독교의 진리밖에 없는데 복음을 담대히 전파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번에 오래간만에 국정감사를 해봤습니다. 그 국정감사가 철저한 감사는 아닙니다. 자타가 그것을 다 공인합니다. 그러나 그만한 감사를 통해서 아직도 우리 정부 각 부처에 얼마나 많은 부정과 부패가 있습니까?

    우리가 이 나라를 바로 세우려고 하면 우리 믿는 사람들이 어떤 부처에 있든지, 또 사회의 어떤 분야에 있든지, 불의와 부정과 부패에 항거해서 용감히 싸울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어제 신문에 동경 올림픽에 대한 큰 뉴스가 났었습니다. 북한 여자 선수 신금단 이가 여기 남한에 있는 자기 아버지를 동경에서 만나는 이야기가 대서 특필되었습니다. 여러분 十四년 동안이나 기다리다가, 어떤 신문은 十분 만나 보았다고 하고 어떤 신문은 十五분 만나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 비극이 어디 있습니까? 이것이 참 한국의 슬픔이요, 二十세기의 비극입니다. 이런 천륜과 인륜을 부정하는 사상과 제도가 이 땅에 오래 남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 악한 사상과 싸워 이겨서 이 땅을 다시 통일하는데 선봉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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