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8:36-39/ 예수 안에 하나님의 사랑 / 한경직 목사 2014-08-23 06:45:50 read : 963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八․三十八-三十九)
우리가 읽은 성경 말씀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 一장에서부터 모든 사람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서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기독교의 중심 진리를 의논하다가 맨 마지막으로 기록할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주에 사무칩니다. 따뜻한 햇빛, 반짝이는 별들, 시원한 공기, 봄 동산의 아름다운 꽃들, 노래하는 새, 여름의 녹음 방초, 가을의 오곡백과,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표현하여 줍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그 지으신 우주에 그의 사랑이 충만합니다. 그러나 이 시긴 이 광범한 하나님의 사랑을 다 생각할 수는 없고 다만 본문에 있는 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잠깐 생각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으리라. 』독생자를 통하여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 물론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말씀이 육신을 입으셨습니다.
종의 형상을 입으셨습니다. 마구간에 나시고 구유에 첫 자리를 정하여 누우셨습니다. 이 모든 것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가장 가난하고 가장 천한 사람들까지 구원하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탄생하시자 며칠이 못되어서 멀리 애굽으로 피난을 갔다고 하였습니다. 이 가운데에서도 우리 주님은 모든 피난민까지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해 주시는 구주인 하나님의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나사렛의 가난한 목수의 가정에서 장성하였습니다.
어머니를 도와서 물을 긷고 요셉 아버지를 도와서 목수 일을 하셨습니다. 이 가운데도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노동이 얼마나 신성한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농민들과 노동자의 구주가 되신다고 하는 점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요단강에서 다른 사람과 같이 역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이 가운데에도 역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죄가 없으시지마는 모든 죄인을 대표해서 만민의 구주가 되신다고 하는 표가 여기서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십니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의 교훈 가운데에 물론 하나님의 사랑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화평하게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예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불러 구원하려 왔노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의 여러 가지 자비하신 일에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주린 자를 먹이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고, 병난 자를 고쳐주고, 죽은 자를 다시 살려주고, 우는 자와 같이 울고, 즐거워하는 자와 같이 즐거워하신 것입니다. 이 모두가 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십니다.
그러나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잠깐 묵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모든 사랑 가운데서도 사랑의 절정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의 극치가 여기서 나타났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자기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사랑은 봉사를 의미하고 사랑은 희생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생명을 희생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그 뿐이 아닙니다. 죄 없고 일점의 흠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로마서 五장 七-八절에 기록한 바와 같이,『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흑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선한 사람을 위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죄인을 위해서 죄 없는 이가 자기의 생명을 바치신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인간은 죄인뿐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원수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곧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의 길을 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온 우주를 통해서도 나타나지마는 특별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어떻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믿는 사람 하나하나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것을 잠깐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본문에서도 읽었지마는 八장 二十九-三十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믿는 사람 하나 하나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그 무소 부재하시는 미리 아시는 예지에 의지해서 구원받을 자를 미리 정하셨습니다. 믿을 자를 미리 아시고 정하셨습니다.
정하신 그들을 성령을 보내서 우리의 마음을 감화시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끔 불러내었습니다. 불러낸 다음에는 예수 십자가의 공로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주시고 모든 죄를 다 말소해 주시고 의롭다 함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의롭다 함을 허락하여 주신 이후에는 온전히 거듭나는 축복을 주어서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과 딸로 삼아서 영화롭게 하여 금생과 내생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믿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하나 하나를 이렇게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줄에 말하자면 얽매인 바가 되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어린애가 어머니 품속에 온전히 안기듯, 병아리가 암탉의 날개 아래 온전히 품기 듯이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사람에 안기어서, 사랑에 품기 어서 우리가 구원을 얻고 주안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 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예수 님은 포도나무 되시고 우리는 포도나무 가지가 되어서 나무와 가지가 하나가 되어서, 주와 연결해서, 사랑의 줄에 얽매여서 주와 하나가 되는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일찍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를 하나도 빼앗기지 아니 하겠다고, 우리 주님께서는 자기의 생명을 더해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을 한 번 구원한 후에 빼앗기지 아니하고 끝까지 보호하여 주시겠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오늘 이 본문에 있는 결론을 사도 바울이 이렇게 기록한 것입니다.』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이것이 사도 바울의 결론이올시다.
자, 그 한 마디 한 마디를 잠깐 생각해 보세요. 사망일지라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믿는 자를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와병에 인사절』(臥病人事切)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사람이 한 번 병으로 누으면 인사가 끊어진다고, 하물며 죽을 때에 인사절이올시다. 세상 인사는 죽을 때에 다 끊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사망은 나누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망은 이별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망을 직면하게 될 때에 피차에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이 사망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육체를 떠나는 것은 주와 함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방금 죽으려고 하는 회개한 강도에게『오늘날 네가 나와 같이 낙원에 있으리라.』말씀하였습니다.
우리 교우 중에 잘 믿는 어떤 자매 한 분이 장사 차로 멀리 갔다가 그만 임 산기가 되어서 그곳에서 해산을 하다가 세상을 떠난 일이 있습니다.
이 분이 잘 믿는 분으로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을 스스로 깨달은 다음에는 같이 갔던 자기 남편을 위로하면서『나는 이제 오래지 아니해서 주님 계신 데로 갈 터인데 나는 위해서 조금도 염려하지 마세요.』
라고 오히려 남편을 위로하면서『내가 그 십일조를 드리던 것이 어디 있는데 그것을 교회에 가져다 드리고 또 여전도 회비를 내가 어디에 마련해 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꼭 여전도회에 가져다 바쳐 주세요.』
그리고서 이 부인의 어린애가 일곱이 있었습니다. 여섯이 딸이고 하나가 아들입니다. 일곱 살쯤 된 아들이었는데, 그 남편보고 이 아들은 잘 길러서 이 다음에 목사가 되게 해달라고 하고 또 자기 육체는 세상 떠난 다음에 영락교회 묘지에(강원도 외지에서 별세)좀 불편하지만 옮겨서 꼭 묻어 달라고 그런 유언을 하고 고이 잠자듯이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사망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고 찬송을 부릅니다.『요단강 건너가 떠나리』이렇게 안 부릅니다.
왜 그런고 하니 믿는 사람에게는 사망도 만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님을 만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먼저 간 성도를 만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사망도 끊을 수 없습니다.
그 다음에 한 말이「생명이나」입니다. 생명도 즉 사는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산다는 것은 환난과 재앙을 의미하고 유혹과 시험을 의미하고 때때로 빈궁과 질병을 의미하게 됩니다.
불교에서는 흔히 인생을 사고(四苦)라고 해서 생로병사(生老病死) 네 가지를 말합니다. 이 사고를 보면 사실 죽는 것은 하나 밖에 없고, 세 가지, 나는 것, 늙는 것, 병나는 것, 이것은 다 살았을 때 당하는 고통이올시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 가운데도 살기가 아마 힘든 모양이요. 그러기에 수즉다욕(壽則多辱)이라는 말도 있어요. 오래 사는 것이 좋지마는 오래 살면 욕되는 일이 많다 하는 말입니다. 세상이 괴롭고 세상에 욕되는 일이 많다 그런 말이올시다.
그러나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당할 수 있는 어떠한 경험이라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것은 없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 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귀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 다음에 한 말이「천사나」,「권세 자들이나」또 몇 마디 건너가서는「능력이나」입니다. 이것은 다 같은 뜻을 의미한 줄 생각합니다. 여기 이 해석에 대해서는 주석자의 의견이 꼭 같지 않습니다.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능력이나 이것은 좋은 영적 존재로 해석할 수도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게 되면 물론 이 천사들이나 천군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으려고 할 것도 아니고 또 끊을 수도 물론 없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해석하지 않고 아마 보통은 여기 천사라고 하는 말은 타락한 천사를 가리킨 것이며 권세 자들이라고 한 것은 악한 권세를 가리킨 것이라고 흔히 해석합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물론 이 세력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려고 애씁니다.
성경에 있는 말씀과 같이 사실 악한 마귀가 우리를 삼키려고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다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 악마는 이미 광야에서 우리 주님에게 패배를 당한 원수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로써 온전히 참패를 당한 원수입니다.
물론 지금도 이 영적 악한 세력이 여러 유혹으로 이끌고 시험을 하는 것이 사실이지마는 과히 염려할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은, 주께서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주는 승리자입니다. 그 지팡이와 그 막대기가 항상 우리를 안위해 주시는 까닭이올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후서 四장 九절에 기록하였습니다.『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다시 일어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현재 일이나」라고 기록하였습니다. 현재에 우리가 무슨 일을 당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은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현재 무슨 일을 당하고 계십니까? 아마 그것은 각각 다를 것입니다.
혁명 후에 실직을 당한 이, 사업에 실패를 당한 이, 입학은 했으나 학비가 곤란해서 지금 당장 어려운 가운데 있는 이, 공부는 하고 싶은데도 그만 입학 시험에 낙제를 해서 곤란한 지경에 있는 학생들이 아마 이 가운데 계시는 줄 압니다.
어떤 가정에는 질고 가 있습니다. 어떤 가정에는 병은 없는데 아이들이 말을 잘 안 듣습니다. 어떤 분은 고독하고 어떤 분은 생활이 빈궁합니다. 어떤 가정에는 슬픈 일을 당했습니다. 우리가 현재 당하는 경험이 다 다릅니다.
그러나 기억하세요. 여러분이 방금 어떤 경험을 당하든지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서 해결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아니해야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合力)하여 선을 이룹니다.
그 다음에는「장래 일이나」라고 썼습니다. 사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에게는 장래처럼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무슨 일이 있을지 누가 압니까?
오늘날 한국처럼 교통 사고가 많고 공산당 많고 원자탄 많고 또 三八선까지 있는 이런 한국에 살 때에 사실 우리는 내일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세요.『내가 확신하노니 장래에 어떠한 일이 있을지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자는 없습니다.』
찬송가에 있는 말씀과 같이『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다 주님의 경륜 가운데서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권면 하였습니다.『내일 일을 위해서 염려하지 말고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다.』고 내일 일은 하나님의 사랑에 맡길 것뿐입니다.
그 다음에는「높음이나 깊음이나」입니다. 이것은 대공간의 신비를 의미할 줄 압니다. 대공간은 항상 옛날이나 오늘이나 우리에게 삼엄한 기분을 주고 어떤 때는 공포의 대상이 됩니다. 사실 지금은 인간이 전에 보다 더 높이 올라가고 더 깊이 들어갑니다.
비행기나 우주선을 타고 높이 올라갑니다. 잠항정(潛航艇) 타고 태평양 깊은 물 속으로 다닙니다. 그러나 아무리 우주가 넓다고 하지마는 주님 계시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내가 어디로 가서 주의 낯을 피하리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주께서 거기 계시며 음부에 자리를 펼지라도 주께서 또한 거기 계시 리이다.』(시편 一三九편).
우리가 천왕성, 해왕성에 간다고 할지라도 조금도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는 없습니다.
그 다음 마지막으로 외친 말씀이『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끊을 수 없다.』하였습니다. 요즘 인간이 지은 것 가운데 아마 원자탄, 수소탄이 제일 무서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능력은 원자탄이나 수소탄보다도 더 크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원자탄, 수소탄보다 더 뜨겁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믿는 자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는 도저히 없는 것입니다.
찬송가의 한 절과 같이『온 세상 다 버려도 주 예수 안 버려』예수 님께서는 버리지 아니합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독생자를 주시고 생명까지 버리신 주님께서 우리를 버리실 리가 없습니다. 그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염려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 것입니다.
특별히 이 랜트 기간에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우리는 어떠한 환경,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이 사랑을 믿는 가운데서 승리적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