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9:9-17/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 한경직 목사 2014-08-23 00:43:52 read : 976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 十五․九)
주보에도 있지마는 다음 수요일부터 우리는 사순절을 맞게 됩니다. 부활주일 전 四十일 동안을 옛날부터 사순절이라고 해서 특별히 우리가 예수 님을 생각하고 그의 최후의 지상 생활을 바라보는 기간을 사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최후 교훈을 우리가 되새겨 보면서 은혜 받는 그런 때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주님의 말씀 가운데서 특별히 요한 복음 十五장 九절을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마지막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 가운데 한 구절을 읽었습니다. 이 말씀 가운데 세 부분의 구별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란 말씀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둘째는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라고 했습니다. 나의 사랑 곧 주님의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다음에는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권면 하는 것입니다.
먼저 아버지의 사랑을 잠깐 생각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의 그 아들 예수께 대한 사랑은 유한한 인간의 생각으로 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교훈에 의지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영원하십니다. 무시무종(無始無終)하십니다. 처음이 없고 마지막이 없습니다. 시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은 불변의 사랑이올시다.
인간의 사랑은 시시 때때로 변하지마는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랑으로 필연 그 아들 예수님을 사랑하신 줄 생각합니다. 영원하신 사랑으로, 무한하신 사랑으로, 불변의 사랑으로, 그 아들 예수를 사랑하신 줄 믿습니다.
둘째로 이런 사랑을 받은 아들 예수는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그것은 자기가 친히 말씀하신 그대로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했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의 그 영원하신 사랑으로, 그 무한하신 사랑으로, 그 불변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만세 전에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기록하였습니다. 혹은 로마서 八장에 이런 말씀으로 기록하였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困苦)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赤身)이나 위험이나 칼이랴.』하나님의 우리 주님을 통한 그 무한하신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자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올시다.
또한 이렇게도 기록하였습니다.『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변치 아니하시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나셨습니까? 그것은 대략 서너 가지 방면으로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줄 생각합니다.
먼저 그리스도는 하늘의 보좌를 내어놓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의 육신을 입으신 후에 인간의 모든 경험에 동참하시면서 인간을 봉사하신 것입니다. 그는 일직이 공적인 생활을 하시기 전에 가정에서 목수의 일을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근로 생활에 동참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광야에서 금식을 하시는 가운데 심히 주리셨다고 합니다. 인간의 기근에 동참하신 주님이올시다.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인간의 빈곤에 동참한 주님이올시다.
나사로가 죽은 후에 많은 여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같이 우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우는 자로 같이 우시며 인간의 모든 슬픔에 동참하신 주님이올시다. 그의 생활은 무엇보다도 제자들의 발을 씻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는 일생을 통하여 인간의 더러운 발을 씻으신 것이올시다. 그의 전 생애는 종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활은 여기에서 그친 것은 아닙니다. 그의 결정은 골고다에서 마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친히 십자가를 지시고 갈보리 산상으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그의 최후를 마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인간의 사망의 고통에 동참하시고 인간의 모든 짐을 대신 지시고 죄의 책임에 동참하셔서 최후로 자기의 목숨을 바치신 것이올시다.
만민의 죄악을 구속하시기 위해서 피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흘리신 것입니다. 친히 그가 말씀하신 그대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다고 하셨는데 그는 그 목숨을 버리면서 그의 크신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그는 그의 원수를 위해서까지 그의 목숨을 버리신 것입니다. 그는 그를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을 향해서『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그들이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기도했습니다. 이렇게 그의 사랑은 원수에게까지 미친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바라보면, 십자가는 두 선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가운데로 선이 하나 내려오고 옆으로 또 하나의 선이 가로지릅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말하자면 십자가의 수직선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하늘로부터 땅 끝까지 미친 그 깊은 사랑의 표현으로 우리가 믿습니다. 또 십자가의 횡선은 전 인류를 다 안으려고 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팔로 생각하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이렇게 우리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이와 같으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권면하는 말씀이 있습니다.『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너희도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 했습니다.
그 전에는 이렇게 말씀하신 적도 있습니다. 十三장에 보면『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는 말, 서로 사랑하라고 하는 말, 이상과 같은 교훈은 너무 많이 들었으므로 거저 심상히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순절을 맞으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묵상하면서 어떻게 하면 이런 사랑의 만 분지 일 이라도 보답할 수 있을까 를 진지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인간의 모든 생활의 슬픔, 고통, 환난, 죽음에까지 모든 생활에 동참하셨습니다. 우리의 생활이 어느 정도까지 이 인간의 슬픔과 고통에까지 동참합니까?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시기 위해서 그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셨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육체를 구원하기 위해서 내 생활의 어떤 면에 희생했습니까? 시간의 희생입니까? 정력의 희생입니까? 물질의 희생입니까?
그리스도는 원수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생활에 있어서 사실 모든 원한을 풀고 원수까지 사랑하는 심정 가운데서 신앙 생활을 하십니까? 우리가 믿는다고는 하면서도 신자간에도 담을 쌓고 그냥 헐지 않는 일은 없습니까?
제가 이번에 약 한 달 가량 미국을 여행하면서 미국 사회의 여러 가지 실정을 가까이 살필 기회가 있었습니다. 가령 미국 사회에도 여러 가지로 우리 한국 사회에서처럼 어려운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월남 문제 같은 것도 매우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미국 국민 가운데는 월남 전쟁을 반대하는 이가 많아서 정부 당국의 입장이 대단히 곤란합니다.
또 인종 문제는 한국에는 없는 문제지만 대단히 중대 문제입니다. 흑백의 민족 문제, 흑인 가운데서 흑인의 민권 운동이 일어나면서부터 아주 심각한 문제로 등장했습니다. 또 머리도 깍지 아니하고 수염도 깍지 않는 과거의 문화 생활을 부정하는 히피족들이 상당히 늘어나는 모양입니다.
또 캠퍼스도 전처럼은 아직도 조용하지를 않습니다. 학생들 가운데서 여러 가지 문제가 이 대학 저 대학에서 일어납니다. 이런 문제가 많지마는 가만히 보면 그래도 안정된 무엇이 있습니다.
요새 미국에서 새로 쓰이는 말이 있는데 한국말로 번역하면『조용한 대다수』라고나 할는지 소위 싸이렌트 매조리티(Silent Majority)라고 그렇게 떠드는 사람이 많지마는 실상은 조용한 대다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 대다수의 조용한 국민은 떠들지 않습니다. 그들은 조용한 사람으로 부지런히 일하고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거저 상부상조하는 사람들입니다. 떠드는 사람들이 더러는 있기는 하지마는 조용히 정직히, 부지런히 일하고 진실 된 생활을 하고 상부상조하는 그런 수가 많으니 근본적으로 그 사회는 안정이 된단 말입니다. 말하자면 이는 사회의 저력, 밑에 있는 힘이요, 안정 세력입니다.
그런데 이 안정 세력의 배후에는 무엇이 있는지 아십니까? 교회가 있습니다. 안정 세력에는 교회가 있어서 이들을 가만히 볼 것이면 주일이면 으레 교회에 나가서 예배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어떻든지 진실히 살아 보려고 애쓰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최근의 문공부 통계를 보니까 우리 남한의 개신교 수가 三백만이 조금 넘는다고 합니다. 천주교인의 수가 약 七五 만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개신교의 수가 남한 인구의 일 활이 되는 셈입니다.
만일 우리 사회가 이 앞으로 안정된 사회, 건전한 민주 국가로 발전하려고 할 것이면 이 신교를 믿는 수가 인구의 약 五할은 되어야, 그 때에는 한국 안에 일어나는 사회 문제와 모든 문제가 자연히 해결될 줄 압니다.
그러므로 제가 이번에 미국을 다녀오면서 느낀 것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전도 운동이요, 둘째로는 사랑의 운동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이 어떻든지 우리의 생활에 있어서 상부상조할 줄 아는 사랑의 운동이 필요합니다.
제가 바로 지난주간에 유진 오레곤이란 지방엘 가서 홀트 양자회 이사회에 참석하고 왔습니다. 제가 한국에 나와 있는 홀트 양자회의 이사장이란 직책을 가지고 있으므로 본부 이사회에 꼭 참석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번에 가서 참석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홀트씨에 대해서는 말씀을 조금 들으신 분도 계시겠지마는 아마 잘 모르는 분도 계실 겁니다. 이번에 내가 홀트씨의 집도 방문했고 그 사정을 더욱 자세히 알고 왔는데 홀트씨는 별로 큰 교육을 받은 분이 아닙니다.
八학년까지 공부했다고 하니까 우리의 학제로 말하자면 중학교 二학년 정도까지 마친 분입니다. 그리고는 촌에서 농사하던 분입니다. 커서 진실하게 열심히 일해서 넉넉히 사는 농부였습니다.
그런데 六․二五사변 때에 한 분이 와서 유진이란 곳에서 피얼스 박사가 한국 사정을 얘기한다고 하니 같이 구경가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듣고 자기 부인과 딸들을 데리고 가서 피얼스 박사의 얘기도 듣고 사진도 보여 주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한국 고아의 사정이 매우 딱한 것을 알게 되자 돌아오는 길에 부부가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생각하던 중에 피얼스 박사가『당신 네가 도우려면 한 달에 十불씩 우리 선명회에 보내 주면 이것을 받아 가지고 고아 한 사람을 기를 수 있소』하는 말을 듣고 곧 그들도 고아 두 사람을 도와주어야겠다고 한 달에 二十불씩 내고 고아 두 사람을 돕겠다고 신청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하면서, 자기 부인과 아이들과 종종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만 해 가지고 될까?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고 성경에 말씀했는데 우리가 고아를 이렇게 도와서 될 것인가?
어떤 때 좀더 고아들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한국에 나올 생각이 났습니다. 한번 나와서 부산, 대구, 서울을 다니며 고아원의 실정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생각하기를 내가 두 아이만 돕는 것으로 될 수가 있나. 우리 집이 상당히 넓은데 고아들을 좀 데려다가 길렀으면 얼마나 좋겠나 하고 자기네 아이가 여섯이나 되는데, 아래층도 좀 수리하고 집을 손질하면 아직도 여덟 아이는 더 기를 수 있겠다고 생각이 됐습니다.
그래서 집을 수리하며 한국에 나와 고아 여덟을 데려가려고 신청을 했습니다. 자기가 직접 기르려고. 그런데 미국에는 양자는 두 아이 밖에는 더 기를 수 없는 법이 있어서 그 법을 고치려고 국회의원과 교섭을 해서, 그러니까 국회에서는 몇 달 안에 법을 고쳐 주었어요. 그래서 한국에 나와 고아 여덟을 데려다가 자가 아이 여섯과 같이 기르기를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하니 이 광경을 보고 그들 아는 이들, 교회 교우들, 친척들이 감동을 받아서 우리도 한국 고아를 데려다 기르겠다고 해서 다른 가정에도 보내는 일을 하기에 이르러 소위 홀트 아답션 프로그램 (Holt Adaption Program)-홀트 양자회라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홀트 씨는 아이들을 빨리 받아들여 기르기 위해서 한국에 와서 고아원 하나를 세웠습니다.
처음에는 홍제동에 세웠다가 일산으로 옮겼는데 현재도 있어요. 거기에는 언제나 버려진 아이들을 우선 받아서 기르는데 늘 五, 六백 명의 고아가 있습니다. 홀트씨는 몇 해 동안 친히 고아원에 나와 일하다가 바깥에서 일하던 중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국 고아를 위해서 생명을 바쳤어요. 그러나 그 부인과 친구들이 계속해서 이 일을 합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지금까지 이 홀트 양자회를 통해서 미국과 서서와 여러 나라에 한국 고아를 양자로 보낸 수가 작년까지 五천 명이 넘었어요. 五천명을 좋은 가정에 들어보내서 잘 자라게 했습니다.
여러분, 이번 이사회에 내가 가서 가만히 보니 이사들이 약 二十명되는데 자기네 집에도 아이들이 있지만 한국 고아를 두 셋씩 데려다 기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감사한지 알 수가 없지요. 한국 사람인 나로서는 깊이 느껴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외국 사람들이 이렇게 한국의 고아들을 데려다 기르는데 왜 한국 사람들은 이렇게 할 수가 없겠는가? 생각이 듭니다.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어떻든지 사회 안에서 사랑의 운동의 선구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