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1) 2002-02-16 11:03:50 누가복음 5:17-26 <2002. 2. 3.> ■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그동안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비전들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소서! 나의 지경을 넓히소서!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지금까지 함께 나누었던 말씀의 제목들입니다. 올 한 해동안 이 비전의 말씀을 꼭 기억하시고 기도하시고 순종하셔서 우리 모두가 복의 근원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향력있고 존귀한 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오늘부터는 그동안 중단해 왔던 누가복음 강해를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비들기 형상으로 그 위에 임하셨고 하늘에서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것처럼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으심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심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이 사실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세상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계실 때에는 성령의 충만함을 귀한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힘입어야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감당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슥4:6) 정말 그렇습니다. 목회를 하면 할 수록 깨달아지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아니되는 것이 목회입니다. 목회 만이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하는 모든 일은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술취하지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이것은 명령입니다.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받아야만 되는 필수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충만을 받으신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나아가셨고 그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시며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귀의 세 가지 시험을 기록된 말씀으로 여지없이 물리치셨습니다. 그리고 갈릴리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야로서 공생애를 그냥 시작하신 것이 아닙니다. 눅4:14절에 보면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사역을 시작하시매 그 가르침이 권세가 있었고 많은 귀신들이 떠나가고 많은 병자들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습니다. ■ 교회의 부흥의 열쇠는 예수님 오늘 본문도 보십시오. 예수님이 가버나움의 한 집에 계실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 집으로 몰려왔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 집이 가버나움의 안드레의 집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예수님을 만나 고침을 받기 위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그 집에 몰려 왔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든지 막2:2절에서 용신할 수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고 말합니다. 본문 19절에도 보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예수님 앞으로 나아올 수 없어 비상계단을 통하여 옥상으로 데리고 올라갈 수 밖에 없었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진정한 교회의 부흥의 비결은 예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교회 부흥의 열쇠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높이고 예수님만을 자랑하고 예수님만을 전하면 교회는 부흥되게 되어 있습니다. 보세요. 그 많은 사람들이 그 집의 건물을 보기 위해 나아온 것이 아닙니다. 그곳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구경하기 위해 모여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서, 예수님을 보고 싶어서, 예수님을 만나 치유받고 싶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서 모여온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착각합니다. 목사님들도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교회의 건물만 지어 놓으면 자동적으로 교회가 부흥되겠지, 또 성가대가 수준높고 아름다운 찬양을 하면 교회가 부흥되겠지, 또 화려한 박사 까운을 입고 설교를 하면 교회가 영적인 권위가 세워 지겠지'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에게도 그런 전화가 많이 옵니다. 목사님 그 정도 교회가 되었으면 박사 학위 정도는 받아야 목회 하기가 쉽지 않겠습니까? 이번 기회에 한번 받으시지요?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꿈에서 깨어나십시오. 교회는 교회의 건물 때문에 부흥되고, 성가대의 아름다운 찬양 때문에 부흥되고 목사의 화려한 까운 때문에 부흥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부흥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자랑하고, 예수님을 찬양하고, 예수님께서 교회의 주인되게 하고, 예수님의 말씀만을 전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에게 관심을 갖게 하면 굶주린 영혼들은 생명되신 주님에게로 나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교회는 부흥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부흥은 프로그램과 방법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전혀 무시할 수는 없지만 교회 부흥의 정말 중요한 열쇠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 바리새인과 교법사들 가버나움의 한 집에 정말 많은 사람들이 지금 모여 있습니다. 적게 모인 것보다는 많이 모여 있다는 것은 정말 좋은 것입니다. 큰 공간에 듬성 듬성 앉아 있는 것보다 작은 공간에 꽉 차 있는 것이 더욱 좋습니다. 그래야 설교하는 자도 흥이 납니다. 그런데 거기 모인 사람들 가운데는 다 예수님이 좋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서 모인 사람들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 17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17절)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은 예수님을 조사하기 위해서 파견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어디에서부터 왔다고 되어 있습니까?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부터 왔습니다. 이것을 보면 당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갈릴리 뿐만 아니라 온 유대와 예루살레에까지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각지에서 파송된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문제 삼고자 그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은혜를 받기 위해 그 자리에 온 것이 아닙니다. 저는 목사로서 여러 곳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또 다양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그런데 설교하다 보면 정말 설교하기 싫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아세요? 한 그룹은 신학생들의 모임이고 또 한 그룹은 기자들의 모임입니다. 신학교 채플에서 설교를 할 때보면 은혜를 받기 위해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 자보다는 설교를 얼마나 잘 하나? 얼마나 본문에 충실하게 해석을 하나? 이렇게 평가하기 위해 모여 있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까 아멘도 없고 설교하기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또 한번은 크리스챤 기자협회에 가서 설교를 한 적이 있는데 설교를 듣는 태도가 얼마나 불량한지 설교하다 말고 중간에 그만 두고 내려 오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자기의 설교를 꼬투리잡고 비판하고 평가하기 위해 모여 있는 사람들 앞에서 설교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 한 사람만 있어도 설교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언젠가도 이 예화를 사용한 것 같습니다만 어느 교회에 목사님이 부임하여 설교를 했습니다. 첫 번째 설교인지라 얼마나 부담이 되었겠어요. 당회석에는 검사와 같은 장로님이 앉아 계셨습니다. 조심스럽게 원고를 읽어 가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2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셨다는 오병이어의 기적에 대하여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좀 고개를 들고 설교를 해야지 하면서 고개를 들고 설교를 했는데 너무 긴자안 탓에 그만 원고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당황한 나머니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보리떡 5천개와 물고기 이천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고도 12광주리나 남았습니다.라고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앞에서 설교는 듣지 않고 꾸벅 꾸벅 주무시던 장로님이 그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무시다 말고 그 설교를 들으신 장로님께서 설교 중에 뭐라고 한지 아십니까? "그런 설교는 나도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목사님이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너무나 부끄럽고 창피하기도 하고 아무튼 간신히 설교를 마쳤습니다. 다음 주일에 목사님은 장로님을 복수하고 싶어서 똑같은 본문을 가지고 똑 같은 설교를 했습니다. 이번에는 틀리지 않고 설교를 잘 마무리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회심의 미소를 띄우면서 주무시는 장로님을 향해 이렇게 애기했습니다. "장로님 이번에도 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장로님이 하시는 말씀 "지난 주에 먹다 남은 것 있잖아요?"라고 하였다는 우스운 애기가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교회 안에 한 사람이라도 설교를 비판하고 평가하기 위해 앉아 있는 사람이 있으면 설교자는 그 사람을 의식하게 되니까 그만큼 긴장하게 되고 힘들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를 도와 주는 일은 사모하는 마음으로 설교를 들어 주는 일입니다. 그 말씀이 정말 그렇다라고 생각되어지면 큰 소리로 아멘을 해 주셔야 합니다. 설교 시간에 조는 사람을 보면 솔직히 말해서 괘씸한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 한편의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몇권의 책을 읽어야 되고 얼마나 많은 시간 진땀을 흘려야 했는데 이럴 수가 있나 하는 섭섭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렇게 교회 안에 한 사람이라도 설교를 비판하고 책잡으려고 앉아 있는 사람이 있어도 부담이 되고 힘이 드는데 우리 예수님을 보십시오. 각 처에서 파송되어 온 내노라 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지금 예수님의 가르침을 비판하고 책잡기 위해 앉아 있습니다. 그들은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숫자적으로는 당시에 한 6천명 정도의 사람들로 알려져 있었지만 이스라엘의 전체를 움직이는 실세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영향력은 막강했습니다. 우리들은 바리새인하면 성경에 하두 예수님이 비판을 많이 해 놓아서 우리도 '나쁜 사람, 못된 사람'으로 알지만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존경받는 사람, 굉장한 사람들로 통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아, 회칠한 무덤"이라고 비판하셨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이중성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한 마디로 이중 인격자였습니다. 그들은 종교적으로는 아무 흠잡을 데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하루에 세 번 기도하고 온전한 십의 일조를 드리고 율법적으로는 완벽한 사람들입니다. 또 많은 장로들의 전통을 만들어 그것을 지키도록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는 온갖 탐욕과 부정과 음란과 오만과 불신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싫어한 사람은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이중인격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비판하시고 싫어하셨던 것입니다. ■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우리 예수님이 가르치고 있는 그 현장으로 들어가 봅시다. 그 현장에는 각처에서 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고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17절)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고 성령의 충만을 받고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에게는 분명히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임하여 있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 비판하기 위해 그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전하는 예수님에게는 병을 고치는 능력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의 마음 속에는 시기심과 분노가 가득차 있었지만 예수님에게는 병을 고치는 능력이 충만하였습니다. 그들 안에는 예수를 시기하여 죽이려는 욕망으로 가득차 있었지만 예수님의 마음 속에는 고통 중에 있는 인생을 고치고자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죽이려는 욕망과 살리고자 하는 소원이 팽팽한 긴장감 속에 함께 공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 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 이런 가운데 우리 주님은 계속하여 말씀을 가르치시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기죽지 않고 그들의 눈치를 살피지도 않고 당당하게 권세있게 말씀을 가르치시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때에 갑자기 한 중풍병자가 등장합니다. 본문 18절-19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 놓고자 하였으나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 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예수님이 계신 집으로 들어오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많은 무리들이 주님이 계신 집의 마당과 현관문까지 가로 막고 있어서 도저히 예수님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 중풍병은 현대말로 하면 뇌졸중입니다. 이 뇌졸중 환자 가운데는 상태가 경한 사람이 있고 중한 사람이 있습니다. 상태가 경한 사람은 신체의 일부만 마비가 되어 다른 사람이 조금만 도와 주면 거동하는데는 불편이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등장하는 이 뇌졸중 환자는 침상에 누운 채로 사람들이 메고 나아온 것을 보면 자기의 힘으로는 한 발짝도 걸을 수 없는 전신마비의 환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아주 전신마비 중증 환자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중풍병자를 침상채 메고 예수님에게로 나아왔습니다. 그런데 무리로 인하여 도저히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갈 수가 없었습니다.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비상 계단을 이용하여 지붕으로 올라갔습니다. 유대인들의 지붕은 우리나라의 옥상처럼 평평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올라가서 거닐기도하고 쉴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추락방지를 위한 일종의 난간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붕의 둘레는 사람들이 걸어 다닐 수 있도록 아주 튼튼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방의 천정 부분에 해당하는 곳은 마음만 먹으면 쉽게 뜯을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일종의 서까래 위에 진흙을 이겨 발라 놓으며 좀 부유한 사람들은 기와나 얇은 석판을 깔아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지붕의 천정을 뜯어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는 유대나라에서 지붕 뜯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다고 표현했습니다. 본문 19절을 보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옥상으로 올라간 사람들은 미친 듯이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시는 곳의 천정을 뜯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흙과 먼지가 사람들의 머리에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많은 지푸라기들이 흙 먼지와 함께 솓아져 내리기 시작합니다. 갑자기 방안은 최루탄이 쏟아진 것처럼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의 설교도 중단되었겠지요. 많은 사람들이 어안이 벙벙하여 뻥 뚤린 천정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중풍병자가 누워 있는 침상이 내려옵니다. 중풍병자를 데리온 사람들이 천정에 구멍을 내리고 그 사람의 침상을 달아 내린 것입니다. ■ 예수님의 반응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은 이 중풍병자의 이름도 밝히지 않고 있지만 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이름도 그리고 이 중풍병자와 어떤 관계의 사람인지에 대하여서도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어떤 분들은 가족이라고도 말하고 친한 친구들이라고도 말합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 어떤 관계에 있는 사람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 사람들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 집회가 바리새인들이 주도하는 모임이었다면 그들은 분명히 주거 침입죄, 기물 파괴죄, 공중 집회 방해죄로 긴급체포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성질 급한 베드로 같으면 당장에 지붕에 올라가서 멱살을 잡고 죽일 놈, 살릴 놈 하면서 먼 일을 내고 말았을 것입니다. 분명 그들의 행동은 무례한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의 이러한 행동을 제제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주님의 그들의 무례한 행동에 대하여 이렇게 반응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20절) 예수님은 그들의 그러한 행위를 통해서 믿음을 보셨습니다. 무슨 믿음입니까? 이 중풍병자가 예수님만 만나면 일어나 걷게 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들에게는 바로 이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소망이다. 어떻게 하든지간에 예수님 앞에 내려 놓기만 하면 예수님이 이 중풍병자를 일어나 걷게 하실 것이다.' 이 믿음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의 체면도 무시하고 지붕에까지 올라가 천정을 뜯고 이 사람을 침상채 달아 내리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그 모습 속에서 믿음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중풍병자의 믿음이 아니라 그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믿음이 이 중풍병자를 구원했습니다. 이 믿음이 중풍병자로 하여금 일어나 걷게 했습니다. ■ 믿음은 포기하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날 수 없게 하는 많은 쟁애물이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느날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그 중풍병자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말은 하지 않지만 나도 그 예수님을 만났으면 좋겠다는 눈빛이 역력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가버나움의 어떤 집에 계신다는 소문을 듣고 그 중풍병자를 침상채로 메고 달렸습니다. 그냥 걷는 것도 힘든데 무거운 침상을 메고 그것도 사람이 실려 있는 침상을 메고 달린 다는 것이 어디 쉽겠습니까? 또 사람들은 얼마나 불쌍한 모습을 쳐다 보았겠어요? 그렇게 어렵게 해서 도착했는데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는 겁니다. 하지만 거기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너 때문에 늦었다고 하면서 싸우겠지요? 아니면 풀썩 주저 않아버리거나 아니면 운명의 장난으로 돌리면서 다음 기회로 미루겠지요?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주저 앉이 않았습니다. 돌아서거나 다음 기회로 미루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비상계단으로 올라가 지붕의 천정을 뜯어 내고 침상채 달아 내리웠습니다. 많은 장애물이 있었지만 주저 앉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 사람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침상에 누워 지내는 사람이 자기 스스로 걸어 예수님에게로 나아올 수 있겠어요. 그렇습니다. 죄 가운데 빠져 있는 영적으로 죽어 있기에 자기 스스로 주님에게로 나아올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그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해 주어야만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족 가운데 오늘 이 중풍병자와 같은 분은 안계십니까? 오늘 주변의 이웃 가운데 이 중풍병자와 같은 분은 안계십니까? 있다면 우리는 그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해 내어야 합니다. 인도하되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해야 합니다. 몇 번 교회에 인도해 놓고 안 나오면 '주님이 택한 백성이 아닌가 보지' 혹시 이런 생각을 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진정한 믿음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 남편을 구원하는 일도 맡겨준 사명을 감당하는 일도 비전을 이루어가는 일도 중간에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누군가를 위하여 기도하다가 변화되지 않는 모습 때문에 기도마저 포기해 버리고 낙심 가운데 빠져 있는 분이 계세요? 믿음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기도의 무릎을 꿇고 나아가면 반드시 제 3의 길이 열립니다. 포기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비상계단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곳을 통하여 지붕에까지 올라갈 수 있었고 천정을 뜯어 내고 그 사람을 달아 내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 믿음의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시고 목자이십니다. 하지만 이 땅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누군가 나를 위하여 기도해 주며 함께 기쁨과 슬픔과 고난과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진정한 믿음의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바울이 그토록 멋있게 귀하게 쓰임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이 그에게 붙여주신 많은 동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과 그 세 친구들이 신앙의 정조를 지키며 영향력있는 사람으로 살수 있었던 것도 함께 할 수 있는 동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힘들고 어려울 때 아무도 그를 돌 보아줄 사람이 없어서 외로운 인생을 살았던 한 사람이 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된 환자였습니다. 연못이 동할 때 가장 먼저 들어가면 병을 나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에 베데스다 연못가에 와 있었지만 누구 하나 자기를 들어 연못에 던져줄 사람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가 병들었을때 누구 하나 자기 곁에 있어 주며 자기를 들어 연못에 던져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병들었을 때, 가정이 어려움을 당할 때, 사업에 실패했을 때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해 주며 함께 그 아픔에 동참해 주며 함께 해 줄 수 있는 신앙의 친구, 믿음의 동역자가 여러분에게는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기쁨과 슬픔과 고난과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진정한 이웃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서로의 짐을 함께 나누어 질 수 있는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 진정한 사랑은? 중풍병자를 메고 온 그들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몸소 실천한 사람입니다. 한발짝도 걷지 못하는 사람에게 병을 잘 고치는 예수님이 오셨으니까 거기 한번 가보지....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구체적으로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그들은 그 중풍병자를 위해 자기를 희생했습니다. 진정한 희생은 상대방의 필요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희생은 가난한 영혼 지친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은혜 찬양 237장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그렇게 살 순 없을까 욕심도 없이 어둔 세상 비추어 온전히 남을 위해 살 듯이 나의 일생에 꿈이 있다면 이 땅에 빛과 소금되어 가난한 영혼 지친 영혼을 주님께 인도 하고픈데 나의 욕심이 나의 못난 자아가 언제나 커다란 짐되어 나를 짓눌러 맘을 곤고케하니 예수여 나를 도와 주소서.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그렇게 살 순 없을까? 남을 위하여 당신들의 온 몸을 온전히 버리셨던 것처럼 주의 사랑은 베푸는 사랑 값없이 그저 주는 사랑 그러나 나는 주는 것보다 받는 것 더욱 좋아하니 나의 입술은 주님 닮은 듯 하나 내 맘은 아직도 추하여 받을 사랑만 계수하고 있으니 예수여 나를 도와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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