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별세가 있는 자의 행복
2001-12-11 19:37:36



마태복음 5:10-12



지난 주간에 어느 집사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매우 좋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본인은 앞으로 회사를 은퇴하면 선교지에 가서 새로운 인생을 헌신할 계획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미래 계획이 직장생활에서 다른 사람들과 큰 차이점을 느끼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퇴직하게 되면 더 이상 할 일이 없을 것에 대하여 벌써부터 걱정하고 염려한답니다. 그러나 퇴직 후의 새로운 인생을 내다보며 사는 자는 마음에 넉넉한 여유가 있습니다. 그래요. 다음이 없는 사람과 다음이 있는 사람은 삶의 질에 있어서 현격한 지평을 보여주게 되어 있습니다.
한 마디로 새로운 미래를 내다보며 사는 자는 행복합니다. 다음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저 너머의 다른 세상을 보게 하십니다. 주님은 언제나 다음 단계를 보게 하십니다. 이것이 곧 예수님의 별세 신앙입니다. 소위 Exodus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든지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미래의 영광을 약속해주십니다. 최종적 승리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영원한 내세의 다음 세상, 곧 별세를 보여주십니다.

이것이 곧 예수님의 행복론 설교의 핵심적 이슈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예수님의 행복론은 세상적 복이나, 일시적 복이 아닙니다. 영원한 행복, 하늘의 복을 주제로 하십니다. 그 복은 시간과 공간, 이생과 내생에 제한 받지 않는 신령한 복입니다.
예수님의 행복론은 별세의 행복론입니다. 이 세상의 기준을 뛰어넘는 천국의 복을 보장해주십니다.
그래서 팔 복은 천국에서 시작하여 천국으로 완성합니다. 마음의 천국에서 출발하여 하늘의 상급으로 끝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도 예수님처럼 별세의 행복을 즐기며 살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다 별세 신앙으로 살았습니다. 마음에 별세가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Woodrow Wilson은 이런 멋진 말을 합니다.
"나는 궁극적으로 잃게 될 일시적인 성공보다는, 궁극적으로 성공할 일시적인 상실을 선택하겠습니다."
(I'd rather temporarily loose with a cause that will ultimately succeed, than temporarily succeed with a cause that will ultimately loose). 다음을 내다보는 자의 행복론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지금의 현실에 힘없이 갇히지 말고, 미래의 성공과 승리를 내다보는 별세 신앙의 행복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청교도 시대의 설교자였던 Thomas Watson은, "가짜 성도들은 예수님을 따라서 감람산 까지는 갈 수 있다. 그러나 갈보리까지는 갈 수 없다"는 말을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감람산에 앉아 있는 제자들에게 갈보리까지 가야한다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열두 제자들을 감람산에 앉혀 놓으시고 참 제자가 되려면, "의를 위해 핍박받는 것을 기뻐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마지막 교훈으로 결론을 내리십니다.
왜냐하면 하늘에 큰 상급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12절). 이것이 별세 신앙의 근본입니다.
현세 중심의 신자가 푸른 잔디 동산의 감람산에서 달콤한 행복론에만 귀를 기울이는 자라면, 별세 중심의 고급한 신자는 거친 언덕의 갈보리 십자가를 달게 지려는 마음의 각오가 서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팔 복의 서론과 결론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주 멋진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첫 번 째 마음가짐으로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영적 좌절과 겸허함으로 시작해야 천국의 상속자가 된다"고 하셨는데, 여덟 번 째 마음가짐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내가 주님을 위해 핍박까지 받는 자가 되어 천국에서 상급도 받을 수 있으니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우며 영광스런 일인가"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면 팔 복의 결론인 이 말씀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1. 입지가 분명한 사람이 행복합니다

예수님은 제자 훈련 첫 시간부터 낭만적 행복론이 아닌, 저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 다음에 있는 별세의 행복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감내하는 자가 되라"
오늘 본문에서는 매우 중요한 전제를 바탕으로 합니다. 그냥 핍박을 받는 자가 아닙니다. 자기 잘못 때문에 고생하는 자가 아닙니다.
의를 위하여(10절), 주 예수님을 위하여(11절),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10:22. 24:9) 어떤 핍박이나 불이익도 감수하는 자입니다. 신앙적 가치관과 뜻이 분명하고 목적이 확실한 자입니다.
세상에서 손해를 보더라도 믿음의 의리를 포기하지 않는 자가 천국에서 큰상을 받습니다.

어느 교부가 말하듯이,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존경을 받든지, 핍박을 받든지 할 뿐입니다."
혹시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어떤 불이익이나 곤경을 치를 때가 있으신가요?

어떤 분이 말하기를, 핍박은 못을 박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못을 망치로 때릴수록 깊이 박힙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약간의 어려움이 있을수록 그 뿌리를 더 깊이 내리는 효과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정말 별세의 행복을 추구하는 자라면 입지가 분명해야만 합니다. 신앙적 가치관이 철두철미하게 정립되어야 합니다. 신앙적 자세가 요지부동해야만 역설적인 행복을 맛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너무 쉽게 타협하고, 너무 쉽게 포기하고, 너무 쉽게 신앙적 가치관을 버립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서글픈 예고를 하셨던 것입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누가복음 18:8)
어떠한 시련을 만나더라도 믿음을 포기하지 말라는 간곡한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적 입지가 분명한 사람이 되어야 별세의 행복을 누린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요. 별세의 행복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은 신앙적 입지가 흔들리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오늘 이 시대야말로 다니엘과 사드락과 메삭, 아벳느고 같은 역설적 신앙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신앙적 입지가 분명한 사람들이었습니다(다니엘 1:8).

그들은 느부갓네살 왕의 황금신상 제막식에 소환되었을 때 타협불허의 신앙적 자세를 힘차게 표명합니다. 그들은 느부갓네살 왕의 회유책과 협박에도 불구하고 바빌로니아 제국에 쩌렁쩌렁 메아리칠 정도로 확신에 넘치는 선포를 합니다(다니엘 3:16-18).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신앙적 입지가 확고한 자의 패러독스입니다.
기독교는 역설의 종교입니다. 별세의 행복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요즘 어떤 어려움을 겪고 계신가요? 예수 믿는 신자로서 어떤 불리한 입장과 상황에 처해보시나요?
그것은 운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직장의 상급자를 잘못 만나서도 아닙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모두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디모데후서 3:12)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신자답게 살려면 여러 가지 어려움과 손실이 따릅니다. 이런 불이익을 거뜬히 감수하는 자를 향하여 성경은 너무나 화려하게 평가해줍니다.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면서 참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우니라"(벧전 2:18-20)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복"이라는 말을 두 번씩이나 거듭 강조하십니다(10,11절).
신앙적 입지가 분명한 사람은 그만큼 두 배, 세 배 이상의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행복론 메시지는 단순한 구원으로 시작하여, 풍성한 구원으로 완성됩니다.
가난한 심령이 부요한 심령으로 발전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출발했는데 큰 상을 받는 상태로 달라집니다. 미숙한 신앙에서 성숙한 신앙으로 변화됩니다. 시작은 미약했는데 나중은 심히 창대한 복을 누립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 됨의 행복이요, 헌신하며 사는 제자가 누리는 천국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나중에 "예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했던 것입니다."(사도행전 5:41)
성공적인 그리스도인은 이런 역설적인 행복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자입니다.
우리 모두 별세 행복의 주인공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희생을 치를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제가 지난 주간에 리더십 강좌를 들었는데, 그분은 성공을 이렇게 정의해 주었습니다.
"성공이란 지금보다 더 살기 좋게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훈련 목적입니다. 섬김과 희생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십자가는 희생의 원리입니다. 희생이란 무엇입니까?
"큰 것을 얻기 위해 작은 것을 버리는 것이요,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일시적인 것을 포기하는 것이요, 천상의 축복을 누리기 위해 지상의 행복을 체념하는 것입니다."
스티븐 옥포드가 말하듯이, "그리스도인의 리더십이란 꿇은 무릎, 젖은 눈, 깨어진 심장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훈련은 철저한 희생의 훈련입니다.
예수님를 따르는 제자는 감람산 저 너머 갈보리 언덕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를 위하여서라면 어떠한 대가나 희생이라도 치를 수 있는 사람이 복되다는 말씀입니다.
별세의 행복을 추구하는 자는 어떤 손해나 희생을 개념하지 않습니다. 작은 희생 다음에 큰 보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대인들은 하늘의 큰상을 바라보며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의 영웅들은 더 좋은 부활을 바라보았기에 그 어떤 희생도 기쁨으로 감내하였습니다(히브리서 11:35).
그래서 본문 11절과 12절에서는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욕을 먹고 핍박을 받고 애매한 고난을 받으면 천국에서 상이 크다"고 약속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 마음에 별세 행복을 추구하고 사는 사람은 그 어떤 악천후 속에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지상의 손실보다 천상의 상급이 훨씬 더 크기 때문입니다(12절)
여기 크다(polus)는 말은 분량적인 의미입니다. 내가 잃은 것보다 훨씬 더 많고 풍성한 양으로 보상해주신다는 축복선언입니다.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소리 없이 썩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거둔다고 가르쳐주십니다
일손다실의 철학, 일사다생의 원리를 심어주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희생을 치르는 자가 곧 별세의 행복을 누린다고 격려해주십니다(요 12:26).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며 섬기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존귀하게 여기신다고 하십니다"
오늘 아침에도 우리는 별세의 행복을 바라보는 영안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난 직후의 일입니다.
한 선교사가 아프리카에서 일생을 보냈습니다. 거기서 그는 아내를 잃고, 가족들은 말라리아에 감염되었습니다. 그는 60년 동안을 희생적 삶을 살았으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제 60년 동안의 선교사역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건강을 다 상실하여 몸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가 타고 오는 비행기에는 세계 2차 대전을 마치고 돌아오는 아이젠하워 장군이 동승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비행기는 뉴욕 공항에 착륙하고 문이 열렸습니다. 그러자 그 활주로 옆에는 붉은 양탄자가 깔려 있고, 군악대의 환영 퍼레이드와 함께, 곳곳마다 오색찬란한 문귀가 써있었습니다.
"아이젠하워, 금의환향하시는 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home, Ike). 모두가 환호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선교사가 내릴 때에는 아무도 환영해주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쓸쓸하고 씁쓸했습니다.
그때 사탄이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이것이 네가 희생한 결과야. 너는 이제까지 헛살았어. 아무도 너를 알아주지 않아. 너는 혼자 뿐이야. 너는 병들고, 늙었고, 죽어가고 있어."

그 순간 그는 너무나 슬펐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그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이렇게 말씀해주시더래요. "아들아, 너는 아직 고향에 온 것이 아니야!"(Son, you're not home yet).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당신이 만일 죽기 5분전이라면, 이렇게 말하지 않겠어요? "왜 내가 좀더 섬기지 않았을까? 왜 내가 좀더 사랑하지 못했을까? 왜 내가 좀더 드리지 못했을까? 왜 내가 좀더 전도하지 못했을까?
왜 내가 좀더 열심을 품지 못했을까? 왜 내가 좀더 헌신하지 못했을까?"
그렇습니다. 그 마음속에 별세신앙이 확고하게 있는 사람은 헌신과 희생의 삶을 삽니다.
Christmas Evans라는 전도자는 자기 자신의 헌신적 삶에 비추어 이런 숭고한 고백을 합니다.
"내 인생이 녹 쓸어 버리는 것보다는 타버리는 편이 훨씬 좋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보면 천국의 아름다운 광경 중에 멋진 장면이 자주 소개됩니다.
그 찬란한 천국에 있는 주님의 보좌 앞에서 어떤 사람들이 승리의 개선가를 부르며 찬양하고 있습니까?(요한계시록 6:11. 7:13,14. 22:5)
【이 땅에서의 그 어떤 핍박이나 박해도 별세 신앙으로 승리한 성도들입니다】
그들은 신앙의 입지가 분명한 자들이었고, 어떤 희생도 기꺼이 감내한 별세 신자들입니다.
저 천국의 큰 상급을 바라보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인생의 어떤 악천후 속에서도 별세의 행복을 내다보기에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역동적이고 역설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헌신은 헛수고나 허비가 아닙니다. 하늘의 큰 상급이 주어집니다.


(기도 초청) (저 하늘에는 눈물이 없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의 행복론은 참 아름답습니다. 내면적 행복을 심어주며, 근원적 행복을 안겨주고, 영원한 승리자의 행복을 바라보며 즐기게 해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행복의 창조자이십니다. 오늘 아침 그 예수님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행복의 창조자이신 예수님으로 더욱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은 별세의 행복 속에서 십자가의 길을 찬송하며 올라가셨습니다.

저 하늘에는 눈물이 없네, 거기는 기쁨 넘치네.
저 하늘에는 눈물이 없네, 거기는 찬송 넘치네.
세상의 근심은 사라져버리고 영광만 가득하겠네
우리의 주님과 나함께 있을 때 영원한 기쁨 넘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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