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15:50-58/ 사후의 세계 /조용기 목사 2014-09-12 15:21:12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사후의 세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죽음은 길고도 깊고 아득한 터널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 삶의 끝에서 죽음이라는 아득하고 캄캄한 터널을 들여다 볼 때 그 끝이 보이지 않고 저쪽 출구가 전혀 보이지 않음을 보고 절망합니다. 그래서 무신론자들은 죽음은 전적인 무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으로 죽음 그 자체로 삶은 영원히 사라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불가지론자들은 죽음 저 건너편에 삶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실존주의자들은 삶이란 지금 여기 현실 세계 안에서 밖에 논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죽음 저 건너편에 대하여는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 종교들은 그들 나름대로 사후의 세계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죽음 저 건너편 세계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첫째로, 구약성경이 말하는 인간과 사후의 삶에 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구약 성경 창세기에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시라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당연히 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 영이 혼과 더불어 우리 육체 속에 지금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제가 되고 대화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아무리 발달한 동물이라도 동물이 하나님과 교제를 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동물이 절간을 지었다든지 성당을 지었다든지 교회당을 지었다는 말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이 없기 때문에 영적 대화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영적인 요구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쫒겨 났으나 영적인 교통을 사모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사는 곳은 어느 곳에서 종교가 있습니다. 저 아프리카의 피그미 족속으로부터 시작해서 알라스카의 그 곳에 사는 눈 속에 사는 사람들까지도 모두 다 자기 나름대로의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사람은 근본적으로 그 속에 영이 있기 때문에 영은 영과의 교통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수단으로서의 종교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영은 죽지 않으므로 인간은 천국이나 지옥에 갈지언정 영원히 소멸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에는 그 사실을 구약에도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은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이 산채로 천국으로 데리고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창세기 5: 22~24에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 오 세를 향수 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그는 물질적인 세계와 영적인 세계를 왔다 갔다 왕래하다가 그만 영적 세계 속에 머물게 됨으로 보이지 않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일 물질적인 존재에 불과하다면 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이 산채로 영적인 세계인 천국으로 옮겨가 버리고 만 것입니까? 그것은 인간의 죽지 않는 영원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엘리야의 승천 사건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야는 그 제자 엘리사가 보는 앞에서 갑자기 하늘에서 불 말과 불 수레가 나타나서 엘리야를 엘리사와 떼어놓고 엘리야는 불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엘리야가 올라가는 것을 보고 엘리사가 아버지! 아버지! 이스라엘의 군대요 마병이요 라고 고함을 쳤습니다. 마병이여 라고 고함을 쳤습니다. 그러자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두루마기를 엘리사가 받아 입고 요단강 물을 치니 요단강 물이 갈라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엘리야도 산채로 불 수레를 타고 하늘로 승천했습니다. 만일 사람이 영적인 존재가 아니라면 영원히 사는 존재가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엘리야를 불 수레에 태워서 하늘로 데리고 올라갈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인간은 물질적인 존재일 뿐 아니라 영적인 존재요 물질세계 속에 살 뿐 아니라 신령한 세계에서도 살기 때문에 언제나 물질세계와 영적 세계에 왕래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이신 하나님과 오직 영적인 존재인 인간만이 교통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영생하심으로 인간도 영적 존재이므로 영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필요하시다면 죽음이라는 과정을 무시하고 영의 세계로 영생의 세계로 인간을 데리고 가신다는 것을 이 사실을 통해서 분명히 증거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신약과 사후의 세계를 우리가 알아보십시다. 여러분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 완전한 사람으로 오셔서 이 땅에서 33년 동안 계시다가 십자가에 죽었다 무덤에 들어간 지 사흘 만에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할 동안에 많은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된 것을 증명할 뿐 아니라 인간은 영과 육이 분리되었으면 죽었으나 영이 돌아오면 도로 살아난다는 사실을 주님은 그 사역을 통해서 분명히 증거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사역할 동안에 유대인의 회당장 야이로라는 사람의 딸이 죽었습니다. 회당장이 예수께 나와서 간절히 간구하여 자기 딸에서 손을 얹어서 살려 달라고 하므로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에 가서 그 딸을 살린 기록이 성경에 있습니다. 누가복음 8:53~56에 “저희가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가라사대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신대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계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 여기에 분명히 말하기를 아이야 일어나라고 하시니 그 영이 돌아왔다고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아이의 영이 떠나서 하늘나라에 갔을 때는 아이가 죽었으나 하늘나라의 임금인 예수께서 돌아오라고 말을 하니 그 영이 그 몸에 돌아오니까 그 죽은 몸이 살아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그 영이 몸을 떠날 때에 죽는 것이고 영이 다시 몸에 돌아오면 그는 살아나는 것입니다. 인간은 영이 그 육체 속에 사는 것이요 육체의 장막 집을 벗어버린 다고해서 그 영이 없어지지 않는 것은 그 영은 죽지 않고 영생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린 기록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7: 11~16에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 새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마라 하시고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여기에 벌써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죽은 지 며칠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집에 있다가 이제는 초상 치루기 위해서 그를 상여에 메고 그 과부의 어머니가 통곡을 하며 울면서 따라오고 많은 동네 사람들이 함께 왔습니다. 예수님이 그 과부의 우는 것을 불쌍히 여기사 그 상여를 중지시키고 뻣뻣이 굳어져서 이미 경직된 그 청년을 향하여 청년아 일어나라고 말씀하니까 즉시로 그 영이 돌아오매 그는 살아서 일어나서 여전히 그 어머니와 말하고 사람들과 대화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인간은 물질적인 존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영이 돌아오면 언제나 아무리 죽은 자라도 살아난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극적인 사건은 나라로의 부활인 것입니다. 나사로는 죽은 지 벌써 나흘이 되고 무덤에 장사되어 썩은 냄새가 났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여동생인 마르다와 마리아는 극구 무덤 문을 열어 놓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덤 문을 옮겨 놓으라고 명령하신 다음 무덤 입구에 서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고함을 치시니까 나사로가 그 수의를 입은 채 몸이 묶인 채 그는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하니까 풀어놓으니 멀쩡하게 살아났습니다. 그는 무덤에 들어가서 이미 그 몸이 부패했습니다. 절대로 의학적으로는 살아 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그 영을 불러들이니 그 썩고 부패한 몸이 즉시로 살아 일어났습니다. 이러므로 사람은 그냥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이 들어오면 살고 영이 떠나면 죽는다. 그러면 우리 자체가 누구냐! 우리는 영이 마음을 더불어 육체 속에 지금 살고 있을 따름인 것입니다. 우리의 참 모습은 영이요 육체가 아니라는 것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서 여행을 하는 동안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변화산상에 올라간 적이 있습니다. 변화산상에 올라가서 기도할 때에 주님의 입은 옷이 빨래한 자의 흰옷 같이 희어지고 눈부시고 광채가 났습니다. 그러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을 것을 이야기하는 것을 베드로가 보고 너무 놀라고 감동해서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우리가 지어 하나는 주님을 위해서 하나는 모세를 위해서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서 하십시다. 그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즉시 구름이 그들을 가리고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말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가 기뻐하는 자니 저만 들으라. 그러시고 구름이 사라지고 그들의 정신이 번쩍 차려보니 예수님만 계시더라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마가복음 9: 2~ 5에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더라.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나타나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거늘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여기에 여러분 모세와 엘리야가 변화산상에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것처럼 모세는 예수님 오시기 전 1400년경에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오다가 요단강 이편 느보산 어떤 한 기슭에 죽어서 장사되었습니다. 그는 1400년 전에 죽었습니다. 그래서 분명히 모세를 느보산의 한 지산인 비스가산에서 장사지냈습니다. 그 육체를 땅에 파묻었습니다. 그 영은 떠나가고…그리고 엘리야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 850년경에 그는 죽지 않고 그 몸을 가진 그대로 승천해 올라갔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변화산상에서 기도할 때에 예수님을 돕기 위해서 나타난 사람이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와 예언을 대표하는 엘리야가 나타나서 율법에 예언된 대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서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을 주께 보고하는 장면입니다. 여기에 보니까 죽어서 몸을 땅에 파묻고 영만 올라간 모세나 몸채로 그대로 올라간 엘리야나 똑같이 신령한 몸으로 나타나서 예수님께 보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게 될 때에 그러므로 사람은 몸 안에 있으나 몸 밖에 있으나 똑같다는 것입니다. 몸 밖에 나간 사람도 신령한 몸 그대로 있고 몸 안에 있어서 몸을 가지고 올라간 사람도 신령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 혈과 육은 문제가 아니라 이 속에 있는 영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400년 전에 죽은 모세도, 850년 전에 불 수레 타고 올라간 엘리야도 죽고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1400년 후에 나타나고 850년 후에 나타나서 그리스도에게 보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보면 분명히 사람은 죽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육체와 혈과 육은 사라져도 영혼은 영생한다는 사실을 여기에 너무나 똑같이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보세요.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어린아이로 인간으로 출생하여 우리가 똑같이 33년간 성장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모든 고통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그의 우편 강도와 좌편 강도가 함께 못 박혔는데 우편 강도가 예수께 말했습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에 나를 기억 하소서.”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오늘날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했었습니다. 분명히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데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육체가 낙원에 내려갔습니까? 아닙니다. 뭐가 낙원에 내려갑니까? 예수님의 영혼이 낙원으로 내려갔고 그 우편 강도의 영혼이 낙원에 내려간 것입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여기에서 주님께서 우리 죽어 없어진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죽고 난 다음 미래가 어떻게 될지 불투명하다고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간 그 우편 강도를 바라보고 당신도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면서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가 있으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실제 환경을 보면 예수님의 몸은 낙원에 있지 않고 무덤에 들어갔고 우편 강도는 다리가 잘려서죽어서 장례 지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는 이와 같이 죽었으나 그 속사람은 낙원으로 내려간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습 그대로 육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는 것을 부활절을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낙원에 내려갔다가 그 다음 그 육체의 몸에 들어오셔서 그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 몸이 무덤에 남이 있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인 인간으로 주님께서는 죽으시고 대표적인 인간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죽음으로 끝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여기에 보여 주셨습니다. 고린도 전서 15:44~45에 보면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면 예수님은 살려주는 영이 되어서 육의 몸이 있은즉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이 육의 몸이 없어진다고 해서 이 속에 살고 있는 신령한 몸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육의 몸이 없어질 때는 신령한 몸이 살아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죽어서 육의 몸으로 심으면 우리는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여러분 죽음 그 자체가 우리를 없애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셋째로, 사도시대와 사후의 세계를 우리가 알아보십시다. 사도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다음 계속적으로 나타나시는 것을 보고 난 다음 사람은 죽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산다는 것을 알고 대단히 담대해졌습니다. 그래서 주를 위해서 죽어도 영원히 산다는 뚜렷한 확신을 그들은 얻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만져 보기도 하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앉아서 식탁을 같이 하기도 하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교훈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러므로 그들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보고 예수님이 부활한 사실을 너무나 또렷이 알았기 때문에 사람으로서 죽으나 또 신령한 사람으로서 영원히 산다는 사실을 그들은 마음에 뚜렷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제자인 베드로도 죽은 자를 살렸었습니다. 그가 욥바에 가서 다비다라는 여제자가 죽었는데 그가 평소에 너무나 착한 일을 많이 한즉 그를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이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불러서 다비다를 살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가니까 다비다를 씻겨서 다락 위에 얹어 놓은지라 그가 가서 사람들 다 내려 보내고 하나님께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난 다음에 돌아보고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하니까 즉시로 일어나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린 것처럼 베드로도 죽은 자를 살렸습니다. 그가 일어나라고 하며 그의 영혼이 돌아와서 그는 살아난 것입니다. 사도 바울 선생도 죽은 자를 살린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드로아에 가서 바울선생이 주일날 설교를 아침부터 시작한 것이 그 이튿날 새벽까지 설교를 하므로 창에 앉아 있던 유두고가 너무 졸려서 그만 창에서 떨어져서 죽었습니다. 저는 가끔 가다가 설교할 때에 성도들이 조는 것을 보고 내가 기도가 부족해서 조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는데 바울 선생 설교를 듣다가도 졸았다고요. 그러니까 조는 것은 팔자라. 그것은 설교하는 사람이 은혜가 없어서 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바울 선생에서 위로는 받는데, 바울 선생 같이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위대한 종이 설교를 하는데도 유두고가 3층 창문에 앉아 있다가 너무 졸다가 떨어져서 그만 죽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전부 탄식을 하고 청년이 죽었다고 할 때에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서 기도하고 난 다음에 생명이 그 속에 있다고 일으키니까 그가 안 죽고 살아났습니다. 여기에서도 보면 죽은 자도 사도들이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불려 드리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바울 선생은 정말로 극적인 체험을 한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그가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증거 하다가 잡혀서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원수들이 그가 죽은 것을 확인하고 그를 끌고 도시 밖에 시체에 버리는 거름무더기에 갔다 내어 던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 사도 바울의 죽은 시체를 어떻게 할까? 의논하고 기도하는데 바울선생이 살아 일어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13년이 지난 후에 그 사건을 그는 고린도후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2: 1~ 4에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14년 전에 바울 선생은 이 죽음의 경험을 통해서 그의 속사람이 낙원에 올라가서 도저히 말로써 표현 할 수 없는 아름다운 장면을 보았는데 그는 말하기를 그때의 체험이 몸 안에서 갖는지 몸 밖에서 갖는지 도무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죽으면 저 구름과 안개같이 공중에 떠다니면서 희미하게 그렇게 있을 줄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고 바울 선생을 말을 들으십시요. 내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도무지 분별이 되지 않는다고 두 번이나 말했습니다. 직접 몸으로 간 것같이 너무나 뚜렷하게 하늘에 올라가서 자기를 인식하고 하늘을 바라보고 그곳에 있는 영광을 이야기했다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신다고 하므로 바울 선생은 자기가 직접 몸으로 올라갔는지 그렇지 않으면 몸 밖의 영혼이 나와서 올라갔는지 지금도 분별할 수 없을 정도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죽으면 다 모르겠지 그냥 세상도 다 모르고 일가친척도 모르고 희미하게 되겠지?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오늘날 이 세상 삶의 연속으로서 더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세계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바울 선생은 이 체험을 하고 난 다음에 항상 천국이 그리웠습니다. 빌립보서 1:21~23에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라고 말했습니다. 차라리 육체를 떠나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이 더 좋다고 말했습니다. 그 바울은 죽음을 오히려 사모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 1에도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있는 육신의 장막집이 무너진다고 우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이 인간의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이 있다고 말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5: 8~ 9에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차라리 담대해진다면 우리 몸을 떠나서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더 좋다고 바울은 말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몸 안에 있던지 몸 밖에 있던지 우리는 주를 섬긴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여러분 베드로도 그는 만연에 주님께서 정한 뜻이 있어서 그 육신의 장막집을 떠날 날이 가까워 온다고 말했었습니다. 베드로후서 1:12~14에 “이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하노니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베드로가 죽기 전에 말했습니다. 내가 장막을 벗어날 시간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장막은 뭡니까? 천막입니다. 내가 천막 안에서 살다가 이 천막집을 벗어버리고 떠날 날이 가까워 왔다가 말했습니다. 내가 이 땅에 사라질 날이 가까워 왔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내 장막집에 살다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 장막집을 벗어버리고 주님께로 나아갈 기한이 가까워 왔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더구나 사도 요한의 체험을 보세요. 사도 요한은 그가 로마 십대 황제의 핍박 때에 네로 황제에게 잡혀서 밧모 섬에 유배를 갔을 때에 주일날 기도하다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놀라운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요한계시록 4: 1~ 6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또 보좌에 둘려 이십 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 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여기에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서 하늘로 들려 올라갔었습니다. 하늘의 문이 열리고 그는 하늘 문을 통해서 하늘에 들리어 올라가서 거기에 하나님이 보좌에 앉아 계시고 그리고 24장로들이 하는 일을 보았습니다. 12장로는 구약을 대표하고 12장로는 신약을 대표합니다. 그 구약의 구원받은 사람 신약에 구원받은 대표들이 이미 면류관을 쓰고 흰옷을 입고 보좌에 앉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죽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 문이 열리고 하늘로 올라간다는 사실을 사도 요한은 여기에 뚜렷하게 체험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 1~ 3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 죽음을 당할 때에 예수님이 와서 우리를 데리고 주님이 예비한 영원한 처소에 가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살다가 굼벵이같이 죽어서 흙으로 변해 버리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주께서 우리를 인도하셔서 우리를 눈물과 근심과 탄식과 이별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앓는 것이 없는 영원한 천국으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인간이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는 말은 마귀의 거짓말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옷을 벗어버릴 때에 어떤 이는 거지 나사로 같이 낙원으로 가고 이 땅에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하나님을 무시한 부자 같은 사람은 음부에 내려갈 것입니다. 히브리서 9: 27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심판을 받았음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져서 용서와 의를 가지고 영광스럽게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 무신론자들이나 불가지론자들이나 실존주의자들이 죽으면 없어진다는 그 거짓말하는 것에 유혹되지 마세요. 우리는 잠시 잠깐 후에 이 육신의 장막집을 벗어버리고 영원히 천국에 들어가서 주님과 함께 거하게 될 것이요 그전에 주님이 오시면 우리는 주님 안에서 변화되어 약한 몸이 강한 몸으로 추한 몸이 영화로운 몸으로 육이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 주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사람은 영인지라 천국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살든지 하나님을 배반하고 지옥에 내려가서 영원히 심판을 당하든지 둘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인간은 중간에 있을 수 없습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이러므로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 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말했었습니다. 육체도 죽고 영이 죽으면 그보다 더 비참한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러므로 주님께서 은혜를 베풀 때에 우리가 간절히 기도해서 주의 구원의 손을 잡고 영원한 생명을 확보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여. 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 수 있을까라고 욥은 질문했습니다만 우리 주 예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인간은 다시 살고 영원히 산다는 것을 확실히 증명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내 아버지 우린 오늘 이 시간 여의도순복음교회에 앉아 있지만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 이 세상과 육체를 떠나게 될 것인데 한 사람도 남김없이 그리스도를 믿어 확실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 영원한 천국에서 만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 받들어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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