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27:32-50/십자가 상의 칠언 / 조용기 목사 2014-09-02 10:40:37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십자가상의 칠언’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들 중에 죽음이 다가와서 마지막 유언을 남길 때가 옵니다. 그럴 때는 가족, 친지들이 모두다 주위에 둘러앉아 귀를 기울여서 그 유언에 경청을 합니다. 세상에 살 동안 다른 말은 중요시 안한다고 할지라도 한 사람이 죽을 때 마지막 남기는 유언은 대단히 그 말에 중요성을 두고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 듣고 그 말대로 이루어 주려고 무척 애를 쓰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칠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33년 동안 지상에 사신 마지막 삶을 청산하신 때에 주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일곱 가지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하나님 말씀 아닌 것이 없으므로 모두다 하늘과 땅보다도 중요하시지만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마지막 운명한 그때에 우리에게 남겨주신 그 모든 말씀은 그 말씀 중에 가장 더 깊은 의미가 있고 중요성이 있다고 우리는 확실히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로마 군인들에게 잡혀서 바람도 스쳐 지나가 버리고 없는 바위 동산인 해골골짜기 골고다 산정에 올라가셔서 하늘과 땅 사이에 높이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수족에서 피와 땀을 계속 줄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마에는 가시관 쓴 자리에서 땀이 넘쳐흐르고 등허리는 채찍에 맞은 자리에서 피가 줄줄 흘러 내렸었습니다. 인간으로써 가장 극단의 고통을 당하시면서 주님께서는 아침 9시에 매달리신 것이 오후 3시까지 무려 6시간 동안 십자가에 고초를 받으셨습니다. 정오가 되고 태양이 중천에 떠오를 때 되었을 때는 갑자기 태양이 그 빛을 발하지 아니하고 하늘이 캄캄해지고 그리고 산천초목이 떨고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고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지는 큰 변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6시간 동안 주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계시면서 주님께서는 일곱 번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일곱 번 말씀 중에 제일 먼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그가 십자가에 무자비하게 못 박히고 난 다음에 유대인들과 로마 사람들이 그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고 고함고함 치면서 모욕을 할 때 주님께서 하나님께 기도한 말씀인 것입니다. 그 첫째의 말씀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사람이 눈이 어두우면 눈앞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그 영이 죽고 영안을 잃어버리고 난 다음의 인류의 가장 처참한 비극을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바로 우리를 죄악과 멸망에서 구원하려고 한 구주를 십자가에 못 박아 놓고 그를 향하여 침을 뱉고 모욕하면서도 얼마나 영적인 통찰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던지 그들이 하는 짓이 영원히 가장 비참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고난당하고 있으면서도 저들이 하는 일을 바라볼 때 너무나 불쌍하게 보였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 나중에 하나님 앞에 얼마나 무서운 심판을 받을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 짓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주님께서 그 어렵고 황망한 가운데 하나님 앞에 그는 기도를 해준 것입니다. ‘아버지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그 당시에 가장 위대한 종교라는 유대종교와 그 당시에 가장 위대한 율법이라는 로마 율법이 서로 합쳐서 종교와 율법이 손을 잡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여러분! 영의 눈을 잃어버린 사람은 이 세상에 살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밖에 생각하지 않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 자랑을 취하는 것밖에 하지 아니하고 사람이 어디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깨닫지도 못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에 관해서는 귀도 기울이지 않으려고 하고 일생을 마치 천년만년 살 것같이 살아가다가 급기야 죽음의 회오리바람이 휘말려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한줌 흙으로 육체는 들어가고 영혼은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져 가는 것을 보게 될 때 우리가 얼마나 탄식을 하고 불쌍히 여겨도 끝이 없을 것입니다. 고전1:18~19에 보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이 세상 인간 육신의 지혜나 인간 육신의 총명, 학교에서 공부하고 연구한 그 인간의 지식은 그것 자체를 가지고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지도 못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그 위대한 사랑을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에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의 지혜나 총명과 지식을 가지고 자기의 운명도 구하지 못하고 파멸되어 가는 세계와 역사를 건져 내지도 못합니다. 얼마 있지 아니하여 이 세상은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 그리스도가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써 이 땅에 강림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울며 이를 갈며 통곡하고 탄식을 해도 이미 때가 늦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구원의 때가 지나가고 심판의 때가 다가와서 그때는 하나님의 자비의 역사가 끝나고 무자비한 심판이 시작될 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이 영적인 통찰력을 잃어버리고 처참할 정도로 무지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유대 종교주의자들 로마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불쌍히 여겨서 하나님께 용서의 기도를 해준 것입니다. 여기에 볼 때 예수님께서 얼마나 긍휼에 넘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와서 “내게 범죄 하는 사람을 일곱 번만 용서하면 되겠습니까?”하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 “아니라. 그가 범죄하고 와서 너에게 잘못했다고 회개하면 하루에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줘라. 여기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끝없는 자비와 긍휼, 한 사람이라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다 주를 알고 영생에 이르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가 절실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이 시간 여러분과 내가 주 앞에 나와서 우리 죄를 고백하고 예수를 구주로 믿기만 하면 우리의 과거의 일체의 죄는 주님께서 다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을 보고도 용서해 달라고 주께서 십자가에 고통 중에 부르짖은 그 주님께서 죄를 고백하고 그 앞에 나오는 사람을 주께서 용서하고 구원하지 아니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우리는 긍휼에 넘치는 예수를 다시 한 번 우리 마음속에 깨닫고 우리는 마음속에 크나큰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예수께서 외치신 것은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오늘 내가 너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우편에 강도 한사람, 좌편에 살인강도 한사람이 같이 못 박혔습니다. 그러니 십자가에 못 박혀서 물과 피를 쏟고 있으니 빨리 죽는 것도 아니고 얼마나 쓰리고 고통스럽고 괴로웠겠습니까? 그래서 우편 강도가 고통 속에 일그러진 얼굴을 가지고서 예수님을 쳐다보고 그는 분노에 꽉 들어찬 음성으로 말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그러면 너와 우리를 이 십자가에서 구원하라!” 분노와 울분에 가득 찬 비명을 부르짖었습니다. 그럴 때 우편 강도가 그 사람을 향해서 꾸짖었습니다. “이 사람아! 어떻게 네가 동일한 형벌을 받으면서 그런 말을 하는가? 너와 나는 마땅히 우리 저지른 죄 값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거니와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고난을 당할 일을 한 적이 없고 그가 한일은 좋은 일 밖에 한 것이 없다.” 그런 다음 그는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써 예수를 쳐다보고 말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이러자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예수님은 그 말에 즉시로 대답해서 말씀하기를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여기 보십시오. 예수님이 구원하시는 그 은총은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고 살이 찢기면서도 마지막까지 한사람이라도 회개하는 사람은 버리지 않고 구원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강도는 미처 교회에 들어가서 회개할 여가도 없었습니다. 그는 물로 세례 받을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는 지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기가 죄인인 것을 솔직히 주님 앞에서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나라에 임할 때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믿음의 고백을 하자마자 예수님은 즉시로 그 자리에서 구원하셔서 그를 하나님 백성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영혼을 사랑하시고 구원하겠다는 그 열렬한 뜨거운 마음은 이 자리에서 여러분이 여실히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이 지금 고통과 괴로움에서 죽어가면서라도 한사람 강도 한사람 건져 낸 것입니다.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극악한 강도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오늘날에 회개하는 사람은 버리지 않고 건져 주시는 것입니다. 가장 무서운 죄가 무슨 죄인지 압니까? 성경은 말하기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하고 있으므로 예수 안 믿는 죄가 오늘날 가장 큰 멸망 받을 죄인 것입니다. 그러나 무슨 죄를 지었던지 깨어져서 회개하고 예수 앞에 나와서 무릎을 꿇어 그 일생을 항복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셔 들이면 그 자리에서 오늘 이 시간에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 하나 놀라운 것은 믿는 자의 죽음이 얼마나 복된 죽음이란 것입니다. 지금 비록 육체적으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몸부림치며 고통을 당하지만은 예수님께서 주신 약속을 보면 오늘날 내가 너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사람은 죽어서 무덤에 들어가면 없어진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지 아니하시고 지금은 육체로 고통을 당하지면 이 육체의 생명이 끊어지면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그 시간에 참 속사람 영혼은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가시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러분과 내가 오늘 저녁이라도 우리가 육신의 장막 집을 떠나가면 우리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 영원히 잠들어 버리는 것이나 허공중에 떠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가서 눈물과 근심과 탄식과 죽음과 곡하는 것이나 앓는 것이 없는 처소에서 우리의 생명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어머니 뱃속에서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나는 것처럼 우리의 죽음은 저 영광스러운 낙원으로 새로 태어나는 하늘나라 시민으로써 태어나는 위대한 순간인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 주안에서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하나의 세계로 들어가는 기회가 되는 것이요, 더 위대한 삶으로 들어가는 계기가 되는 것이요, 더 풍성한 세계로 들어가는 하나의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이 진리를 아는 사람은 마음에 두려워하거나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기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있을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네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내가 가서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와서 나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러므로 여러분은 모두다 예수를 구주로 믿으셨기 때문에 여러분의 이름이 그리스도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처소를 예비해 놓고 있습니다. 어느 때 어느 순간에 우리가 육신의 장막 집을 벗어 버리면 여러분과 나는 이 어두운 캄캄한 죄악의 세상을 떠나서 밝고 맑고 환하고 영광으로 충만한 세계로 그리스도와 함께 들어가게 되는 찬란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서도 회개하는 우편 강도를 향해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를 구원한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께서는 “여자여 보소서 아들 이니이다” 십자가 밑에서 십자가를 쳐다보고 울고 또 울고 몸부림 치고 몸부림 치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밑에는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서서 울고 울고 몸부림 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속수무책이었었습니다. 유대의 종교와 로마의 율법이 합쳐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들은 다 도망 처 버렸는데 연약한 여자들로써 그곳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몸부림치고 가슴을 치며 울 수 있는 것 이외에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여기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 극치의 고통 가운데서 형언할 수 없는 괴로움 가운데서도 주님께서는 육신의 어머니를 등한이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여 보소서. 당신의 아들이니이다.” 여러분 어머니로써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못 박힌 모습을 볼 때 칼로써 그 심장을 꿰뚫은 것 같지 않았겠습니까? 그는 울면서 부르짖었습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그 옆에 요한을 보고 말하기를 “요한아, 네 어머니시다” 성경은 말하기를 그때부터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를 자기 집에 모셨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떠날 때 마지막 남은 혈육인 그 어머니를 등한이 하지 않습니다. 요한에게 어머니를 돌보도록 그렇게 맡긴 것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자기 친족을 돌보지 않는 자는 믿지 않는 자보다 더 악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나는 예수 믿기 때문에 가족을 안 돌봐도 좋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천하에 용납될 수 없는 말인 것입니다. 나는 두고두고 기억나는 것이 서대문에 있을 때 한 사람이 내게 신앙상담을 온 것입니다. 그분의 모습이 지금 내 눈에도 보입니다. 그는 가방을 들고서 아주 의기양양해서 나에게 왔습니다. 와서 그가 하는 말이 “목사님! 나를 목사님의 제자로 삼고 이 교회에서 주의 종으로 사용해 주십시오.” 그래서 그에게 “당신이 누굽니까?”물었더니, 그가 하는 말이 “나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늘나라를 위해서 내 부모도, 처자도, 전토도 다 버린 사람입니다.” 그래서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요?”라고 다시 물으니, 그러니까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내 아내와 자식들을 분토와 같이 버리고 나왔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에 내가 아주 충격을 느꼈습니다. 아주 자랑스럽게 말하는 그에게 내 마음속에 번개같이 “자기 혈족 즉,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는 자는 믿지 않는 자보다 더 악하니라.”는 성경말씀이 기억이 났습니다. 그래서 “뭐라고요? 당신이 당신 아내와 자식을 분토와 같이 버렸다구요? 그러면 나도 당신을 분토와 같이 버리노라. 나가시오. 나가!” 그러자 그 사람은 “왜 나 같은 사람을 쫓아내요?” 저는 그 사람에게 “자기의 처자도 돌보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양 무리를 돌볼 가치가 없는 사람이요. 당신 나가시오!”라면서 쫓아 보낸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친 예수께서도 어머니를 우상으로 삼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육신의 어머니를 그대로 내버려 놓고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를 제자 요한에게 맡겨서 공양하고 돌보도록 한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기에서 내 부모나 처자나 전토를 우상으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고 난 다음에는 내 부모나 처자나 내 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먼저 할 것 먼저하고 나중할 것 나중하라는 말이지 실제로 부모도 버리고 처자도 버리라는 말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어머니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십자가에서도 자기 어머니를 자기 제자에게 맡기는 효도의 도를 끝까지 가르친 것입니다. 이러므로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참 제자라면 여러분은 부모나 처자를 잘 돌보는 책임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넷째로, 예수님께서 외친 것이 “엘리 엘리 라막사박다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지 이제 여섯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지칠 대로 지치고 기진맥진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무궁 전부터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고 하나님이 그 안에 있어서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진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온 인류의 죄악을 짊어지자마자 하나님께서 예수에게 대해서 고개를 돌려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천지가 어두워지고 예수님은 하늘과 땅 사이에 매달려서 아무도 그를 돌보아줄 수 없는 처참한 버림받은 지옥의 고통에서 그는 견딜 수 없어서 외쳤습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예수님의 고난의 극한 상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여러분과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버림당하고 만 것입니다. 사람이 버림당한다는 것 이것보다도 처참한 지경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없어지고 사랑받는 사람도 없어지고 이 세상에 필요 없는 존재가 되고 버림받은 쓰레기더미에 견딘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것인데 예수님은 온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아버지에게서 완전히 처참하게 버림을 당했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겠습니까? 그래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예수님도 너무 고통이 심했기 때문에 그 이유를 해석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심히 고통을 하고 나은 자식을 그 끝없는 사랑으로써 사랑하는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자식을 더 깊이 사랑하는 것은 어머니는 목숨을 걸어 놓고 고통 중에서 어린 아기를 낳았기 때문에 그 고통이 크면 클수록 그 사랑도 깊은 것입니다. 이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이 이처럼 컸기 때문에 예수님이 여러분과 나를 사랑하는 그 사랑과 은혜도 이 고통보다 더 크고 깊은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렇기 때문에 이렇게 큰 대가를 주고 여러분과 나를 샀는데 그렇게 쉽게 호락호락 여러분과 나를 잊어버리고 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어머니가 그 품안에 앉은 적자를 잊어버릴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말씀했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내 부모는 나를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영접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대가를 지불하고 여러분과 나를 구원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여러분과 내가 예수님 안에서 얼마나 귀중한 존재란 것을 알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들은 여러분을 별로 가치 있게 생각하지 않을지 몰라도 예수님은 여러분을 끝없이 가치 있게 생각합니다. 여러분을 온 천하보다 귀하게 여깁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 앞에 여섯 시간 동안 버림을 당하면서까지 라도 여러분과 나를 손잡고 놓지 않고 끝까지 건져 내신 것입니다. 그다음 다섯째로, 예수께서 부르짖은 것이 “내가 목마르다” 외쳤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니 피와 물을 쏟고 땀을 쏟았으니 육신의 목인들 얼마나 말랐겠습니까? 성경에 보니 “내 혀가 말라서 천장에 붙어 버렸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럴 뿐 아니라 마음이 목말랐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 돌보아준 제자들이 다 버리고 도망쳐 버리고 예수님 친히 손잡아 병 고쳐 주고 위로하던 사람이 모두 다 돌아서서 머리를 흔들고 욕을 하니 예수님이 마음에 목마름, 마음에 사람과의 교제가 단절된 그 상태에서 마음의 고독과 처절한 절망에 목마름이 있었고 예수님은 영적인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아무리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부르짖어도 하나님께서는 대답하지 않습니다. 버려 버렸기 때문에 그러므로 예수님은 영적으로 목이 마르고 마음이 목이 마르고 육체가 목이 말라서 주께서 외쳤습니다. “아, 내가 목마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그 목마름을 축여줄 자 없었습니다. 원수들은 오히려 해융에다 신포도주를 먹여 가지고서 그 입술에 갖다 때렸습니다. 그리스도가 여러분과 나를 위해서 당한 그 고초를 생각할 때 여러분 우리가 오늘날 예수 위해서 무엇을 했다고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 다음 여섯 번째로 주님께서 부르짖은 것이 이제 마지막 “내가 다 이루었다.” 이것은 위대한 승리의 개가인 것입니다. 테틀레스타이 “이제 깡그리 내가 갚았다. 창세 이후로 죄와 죽음과 저주와 질병과 마귀와 절망에 묶여서 이 빚을 갚지 못하고 자자손손 죽어가는 사람들의 빚을 내가 다 이제 다 갚았다.” 영원한 하나님이 육신을 쓰고 오셔서 유한한 인간의 모든 죄가를 다 청산하심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여섯 시간 만에 우리의 죄를 갚고 우리의 죽음의 빚을 청산하고 저주의 빚을 갚아 버리고 질병의 빚을 갚으셨으며 이 세상에 영원한 멸망의 빚을 주님 갚으시고 하늘과 땅 사이에서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 이외에 진실로 여러분과 나를 구출할 위대한 능력은 이 지구상에 없습니다. 이제 어떠한 종교도 철학도 인간의 정치도 과학도 현실적인 육신의 일을 도모해줄지 몰라도 여러분과 나를 영원한 인생 문제에서 해결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 번째 주님께서 크게 고함쳤습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고개를 숙이고 그 영혼이 떠나가셨습니다. 여러분 여기 보십시오. 예수님도 성부, 성자, 성신 제2위 하나님 그러나 그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인간의 육신을 쓰고 오셨을 때는 하나님 아버지께 절대로 죽기까지 충성했습니다. 철저한 헌신을 하시고 철저히 순종하시고 철저한 믿음으로 마지막까지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맡겼습니다. 빌2:6~11에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할렐루야.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절대 순종, 절대 예배, 절대 믿음으로 하나님께 그 영혼을 맡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기까지 복종했습니다. 이러므로 오늘날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셨던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버림받은 인류들을 구원하시고 이제는 수천, 수만, 수백만, 수십만, 수억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감사를 드리고 찬양을 드리고 하나님 자녀로써 태어나게 되셨으니 하나님께서 예수를 얼마나 기뻐하고 사랑하시는지 그래서 오늘날 예수 이름만 불러도 하나님께서 기를 기울이시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만 찬양해도 천사들이 모두 다 일어나서 나래를 움츠리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무엇이든지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면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응답하여 주시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에게는 예수 이름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노래인지 예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응답하시고 예수 이름으로 회개할 때 용서하시고 예수 이름으로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손을 내밀어 건져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 고난 중의 예수님 속에서 철저히 하나님이신 예수님, 철저히 인간이신 고난당하는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의 처절한 고통과 그 구원의 한없는 은혜와 축복을 우리는 뼈 속까지 피부를 찌르는 감동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여섯 시간동안 십자가에 인류 역사상 어떠한 사람도 체험하지 못한 가장 쓰디쓴 잔을 마시고 가장 처절한 고통을 통해서 여러분과 나를 한사람 두 사람 하나님의 백성을 낳게 된 것입니다. <기도> 살아계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죄를 지었고 불의하고 추악하며 버림받아 천 번, 만 번 죽어야 마땅할 우리들을 주님께서 십자가에 올라 가셔서 하나님이시자 사람인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써 겪을 수 있는 극한의 고통을 당하시고 가장 처절한 절망에도 스스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도 아니하시고 열두 영이나 되려는 천사를 불러서 자기를 구출하지도 아니하시고 그 고난을 다 겪으시고 그 쓴잔을 다 마셔서 우리를 위해서 속량하여 주신 것을 감사하옵나이다. 만일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하셨더라면 열두 영되는 그 천사를 불러서 스스로를 구원해서 하늘로 올라가 버릴 수 있을 것이요, 그랬다면 우리들은 영원히 멸망하고 말았을 것이옵나이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예수님 고맙습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예수님 고맙습니다. 그 한없는 고통 중에도 우리를 생각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끝까지 고통 참아 주신 것 감사하옵나이다. 우리를 저버리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끝까지 주님께서 우리를 건지시겠다는 일념의 사랑으로 견뎌 주신 것을 감사하옵나이다. 이제 예수님 우리 가운데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 가운데서 찬양을 받으소서. 우리 가운데 존귀를 받으소서. 우리 가운데 높임을 받아 주시옵소서. 모든 구속받은 사람들 가운데서 찬양을 받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우리에게 구주로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 왠 말이요, 이 왠 은혜로 소이까? 우리 아버지 오늘 저녁 넘치는 영광과 찬양을 당신의 백성들에게서 받으소서. 예수님 이름 받들어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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