딤전1:3-11, 딤전1:18-20/ 믿음과 착한 양심 / 한경직 목사
2014-08-27 13:42:41

이미 읽은 말씀 가운데서 18절 19절 다시 봉독합니다.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에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먼저 “아들 디모데야” 이 말씀을 주의해 보세요.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는 신앙적 견지에서 부자의 관계올시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이 말씀 가운데 무한한 애정과 신임이 표현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이런 말로 시작했습니다. 사랑하고 신임하므로 여기에 엄숙하고 간곡한 경계와 명령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가장 중요한 교훈 혹은 진리를 디모데에게 가르치려고 할 때에는 흔히 이런 말로 시작을 한 것입니다.

디모데전후서를 우리가 상고해 보면 여기 이외에도 세 번 이런 예를 우리가 찾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가령 디모데전서 5장 21절에,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로 편벽되이 하지 말며” 혹은 6장 13절에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로 증거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또는 디모데후서 4장 1절에 볼 것이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이 말씀 가운데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여기 18절에 있습니다.

엄히 명령한 가운데 첫째 되는 명령을 오늘 생각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무엇이오? “선한 싸움을 싸워라” “믿음을 가져라” “착한 양심을 가져라” 그 말씀입니다. 깊은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또 하나님의 딸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엄숙한 경계와 명령을 또한 주십니다. “선한 싸움을 싸워라”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이 말씀은 특별히 청년 디모데에게 주신 말씀이올시다. 오늘 아침 특별히 청년들 깊이 들으시길 바랍니다.

먼저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부탁합니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사랑의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화해와 평화의 종교입니다. 신앙을 통해서 오는 최대의 축복은 물론 평화입니다. 마음의 평화, 가정의 평화, 사회의 평화, 온 세계의 평화인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죄로 말미암아 타락된 이 세상에는 이 사랑에 항거하며 평화를 교란코자 하는 악의 세력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내부에도 있고, 우리 인간의 외부에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먼저 선한 싸움을 싸워라, 평화를 얻기 위해서 선한 싸움을 싸우라, 그리스도의 정병이 되라고 명령합니다. 혹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이런 구절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 참된 평화를 위해서 먼저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속에도 악의 세력이 있습니다. 시기, 질투, 정욕, 허영, 교만, 음란, 방탕 등, 동양의 철학자 왕양명의 말을 빌려서 말하면 도적놈이 있습니다. 이 도적과 내 속에서 싸워 이겨야 합니다.

외부에도 있습니다. 한국적인 실정에서 보면 흔히 정치와 경제에 결부되는 불의와 부정과 부패의 사회악이 있습니다. 혹은 세속주의, 향락주의에서 오는, 특별히 외국에서 많이 침입해 들어오는 타락과 퇴폐로 인도하는 악의 세력이 있습니다.

혹은 공산주의의 이름 아래에서 시작이 되는 유물론, 무신론, 허무주의 등 사상적 악의 세력이 있습니다. 참된 평화를 위해서 이 악의 세력과 먼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세계의 실정을 보아도 역시 그렇습니다. 악의 세력이 아직도 팽배합니다. 바로 어제 뉴욕 유엔본부에서 유엔창립 25주년 기념식을 거행했습니다. 우리는 물론 유엔을 위해 항상 감사히 생각합니다. 유엔의 공적을 높이 평가합니다.

그러나 이 악의 세력들을 볼 때에 너무나 약한 기분을 우리는 항상 금하지 못합니다. 이번에 25주년을 계기로 해서 선언문을 채택한 12조목을 여러분 읽어 보신 분들 많이 계실 줄 압니다. 물론 대단히 좋습니다. 없는 것보다 과연 좋습니다. 그러나 말하자면 너무나 약한 그런 문서다 하는 기분을 우리가 금하기 어렵습니다.

아프리카에 있는 작은 나라들의 인종차별이든지, 혹은 사회악은 잘 지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령 방대한 공산국가의 나라 안에서의 인간의 기본인권을 말살하는 사실, 혹은 국외에서의 침략을 계속하는 이런 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선한 싸움이 필요합니다.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선한 싸움이 필요합니다. 내 속에서, 내 사회에서, 내 나라에서, 세계에서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싸움에서 이기려면 두 가지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오? 믿음과 착한 양심이올시다.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전쟁에서 아주 중요한 것은 사기입니다. 사기가 왕성해야 승리를 합니다. 사기가 어디서 옵니까? 신앙에서 옵니다. 필승의 신념에서 옵니다. 왜 정의가 반드시 이깁니까? 이 우주에는 공의의 하나님이 계신 까닭입니다. 천지의 대주재가 되시고, 인간의 역사를 주장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언제나 우리에게 용기를 주고, 사기가 왕성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정병에게는 무엇보다도 신앙이 필요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신앙은 아마 히브리서 11장에서 사용한 그런 의미로 사용한 줄 생각합니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가 될 만한 산 신앙을 의미합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이를 보는 것같이 해서, 모든 것을 참는 모세의 신앙과 같은 신앙을 의미합니다.

역대의 예언자와 성도들의 신앙에 대해서 히브리서 11장에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장 13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싸움에 이기려면 이런 능력이 필요합니다.

또한, 여기 ‘신앙’이란 말은 우리 기독교의 중심 진리도 의미하는 줄 생각합니다. 기독교 우주관, 기독교 인생관, 역사관, 사회관, 내세관 등 기독교 중심 진리의 확실한 파악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모든 그릇된 사상에 대항해서 선한 싸움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독실한 믿음, 건전한 믿음, 내용에 충실한 믿음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선한 싸움을 어디서나 옳게 싸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가르칩니다. “착한 양심을 가지라.”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유명한 말을 여러분 여러 번 들었을 겁니다. “하늘엔 별이 있고 인간의 속에는 양심이 있다.” 양심은 이렇게 귀한 존재입니다. 불란서의 문호 루소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정욕은 육신의 음성이요, 양심은 영혼의 음성이다.” 영혼의 음성을 우리가 들어야 합니다.

영국의 청교도 문호 존 밀턴(John Milton)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양심은 인간의 속에 있는 엄파이어(umpire 심판자)라.” 여러분 그 베이스볼(야구) 구경 다 하셨죠? 거기 가보면 가운데서 볼 던지는 피처 뒤에 엄파이어라고, 그 재판장이 하나 섰습니다. 그래서는 볼을 던진 후에는 그게 스트라이크인지 볼인지 그것을 분간해서 늘 말해 줍니다. 우리 양심이 이와 같은 역할을 우리 속에서 하는 것입니다.

정포은 선생 유명한 시조 여러분 다 기억하는 분 많죠?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이렇게 시작해서 마지막 절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 있으랴.’ ‘일편단심’이란 말 무슨 뜻인지 압니까? ‘양심’입니다. 양심은 영혼의 지성소입니다. 양심은 우리 속을 비춰 주는 하나님의 등불입니다. 양심은 우리 속에서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왜? 성경에 기록한 대로 양심은 마음에 새긴 하나님의 율법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양심이 귀합니다. 그러므로 착한 양심을 언제나 지녀야 합니다.

양심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행하는가에 대해서는 길게 말할 필요가 없는 줄 압니다. 무엇보다 양심은 우리에게 시비와 선악을 판단해서 우리에게 갈 방향을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배로 말하면 나침반의 역할을 합니다. 신호등의 역할을 합니다. 안전할 때 푸른빛을 비춰 주고 위험할 때 붉은빛을 비춰 줍니다. 그릇된 길로 가려고 할 때에, 죄를 범하려고 할 때에, 그것은 안 되는 일이라고 붉은빛을 비추어 줍니다. 범죄하기 전에 양심의 경고가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양심은 재판장의 역할을 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릇된 길로 그냥 계속해 가보세요. 죄를 범합니다. 그렇게 되면 양심이 어떻게 합니까? 책망합니다. 채찍을 내립니다. 벌을 줍니다. 예수님께 끌려왔던 간음한 여자 얘기 여러분 다 알죠? “이런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하려고 하십니까?” 질문을 했죠? 그때 예수님께서 조용히 있다 말씀하시되,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들어서 저 여자한테 던지라” 했죠. 그리고 좀 있노라니까 슬며시 다 돌아가버렸습니다. 무엇이 그 사람들을 그 마당에서 쫓아냈습니까? 양심의 채찍이올시다.

우리 한국의 속담에 ‘도적놈이 발이 저린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왜 발이 저립니까? 양심의 채찍이 있는 까닭입니다. 왜 죄를 지으면 불안과 공포에 빠집니까? 양심의 채찍이 있는 까닭입니다. 어떤 때는 양심의 채찍이 너무 심해서 심지어 자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룟 유다의 경우가 그런 경우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우리가 옳은 길로 가면, 양심은 우리를 칭찬합니다. 후한 상을 줍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봉사할 때 무서운 유혹의 시험을 양심의 경고를 받고 이겨낸 것입니다. 그러나 그만 잡혀서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몸에는 괴로움이 왔죠. 그러나 요셉의 마음 속에는 기쁨이 충만한 것입니다. 왜? 양심이 그를 칭찬했기 때문입니다. ‘장하다. 네가 그 유혹을 이겼구나.’ 칭찬했습니다.

불란서의 문호 빅토르 위고의 유명한 소설 <레미제라블>이라고, 장발장의 얘기 여러분 다 들으셨죠? 그는 무서운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멀리 도망해서 딴 곳에 가서 사업을 합니다. 뒤이어 정계에 진출해서 그곳의 시장까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번 신문을 보니까, 자기가 살던 곳에서 어떤 늙은 노인이 붙잡혔는데, 그 노인이 장발장으로 오해를 받아 곧 정죄를 받아서 죽게 생겼습니다. 장발장은 자기인데, 다른 사람이 죽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밤새도록 그 신문을 보고 잠을 못 잤습니다. 그러다가 여러분 아시죠? 그이가 담대히 그 재판정에 가서 선고를 내리기 직전에 “실상 장발장은 나올시다. 나를 처벌해 주시오.” 그리고 감옥으로 끌려갈 때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은 일변 놀라는 동시에 그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때에 장발장은 외쳤습니다. “여러분, 나를 불쌍히 여기지 마세요. 내 속은 기쁨이 충만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부터는 나와 같이 계십니다. 양심의 칭찬이 있는 까닭입니다.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격려합니다. 여기에 ‘착한 양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무슨 뜻일까요? 이렇게 귀한 양심이라도 계속해서 양심의 명령에 불복하면 그 양심이 점점 둔해집니다. 이것은 성경의 말대로 화인 맞은 양심이 됩니다. 뜸장처럼 감각이 없어지는 양심이 됩니다. 그러다가는 마지막으로 심지어 왜곡되어서 그릇 가르치는 양심이 되고 맙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 믿음은 아주 파손이 되고 맙니다. 뇌물을 첫 번 받을 때는 양심의 가책이 있는 것을 불구하고 받습니다. 그러나 여러 번 받게 되면 그때는 신성한 마음으로 받습니다. 그러다가 좀더 오래 있게 되면, 뇌물 안 가지고 오면 오히려 큰소리를 치게 됩니다.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하는 말은 언제나 양심의 명령에 순종해서, 예리한 순전한 양심을 가지란 말입니다. 과거에 무슨 죄를 지었을지라도, 삭개오와 같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온전히 회개하고 불안과 공포가 없는 평안한 양심을 가지란 말입니다. 부끄럽지 않은 양심을 가지란 말입니다.

왜 이렇게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우리의 양심이 우리를 칭찬할 때에,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을 때에, 우리는 그때에 가장 강한 사람이 됩니다. 사자보다 강합니다. 어떤 싸움이나 이겨낼 수 있습니다. 승리합니다. 그러나 불안한 양심을 가진 사람, 부끄러운 양심을 가진 사람, 선한 싸움을 싸우지 못하고 패배하고 맙니다.

제가 들으니 미국 어떤 대학에서 대학을 졸업한 어떤 대학 출신이 몇 달 후에 졸업장을 대학으로 도로 반려했다고 합니다. “왜 이것을 반려(返戾)하느냐?” 물어보니까 “부끄러운 말이지만, 제가 졸업시험을 볼 때 속여서 시험을 치렀습니다. 내 양심이 불안해서 이 졸업장을 그냥 가질 수 없습니다.” 대학 학장이 그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이렇게 나한테 죄를 이미 자백했으니 이제는 그냥 가져도 괜찮으니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말이, “아니올시다. 내 양심이 불안해 견딜 수 없으니, 그 졸업장보다 착한 양심이, 착한 양심이 내게는 귀합니다.”라고 했답니다. 착한 양심이 귀합니다.

헬라의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양심은 이혼할 수 없는 아내”라고. 양심과는 이혼할 수 없습니다. 떠날 수 없습니다. 언제나 같이 살아요.

이번에 큰 비극을 빚어낸 원주의 기차 충돌 사건의 원인이 무엇이라고? 신호등이 고장났다고. 신호등이 고장나서 그런 참변을 가져왔습니다. 양심은 우리 속에 있는 신호등입니다. 이것이 고장나면 우리의 믿음 생활, 가정 뭐뭐 할 것 없이 다 결국 파멸로 돌아갑니다. 착한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천로역정>을 보면 거기에 정직이라고 하는 사람이 미스터 아니스트(Mr. Honest)였습니다. 정직이라고 하는 사람이 강을 건너갈 수밖에 없는데, 오늘처럼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넘쳐서 건널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아주 위험하지만 강을 건널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에 전에부터 잘 알던 착한 양심이라고 하는 미스터 굳 컨션스(Mr. Good Conscience)라는 사람이 와서 손목을 쥐고 무사히 강을 건넜다 하는 이 얘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착한 양심이 없으면 우리가 마지막에 건너갈 요단강을 안전하게 건너갈 수가 없습니다. 왜? 착한 양심이 없으면 믿음이 파손되는 까닭입니다. 착한 양심을 지녀야 합니다. 착한 양심을 꼭 회복하세요. 삭개오와 같이 주님께 나와서 과거에 어떤 잘못을 했든지 온전히 회개하고 착한 양심을 회복하세요.

특별히 청년들에게 주는 엄숙한 명령을 우리 주의하십시다. “선한 싸움을 싸워라”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내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 양심이 마비된 시대, 이런 사회일수록 착한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만은 착한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께서 저희들에게 주신 엄숙한 경계의 말씀을 저희들이 분명히 들었습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라.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져라. 듣기만 하는 자 되지 말고, 오늘 여기 출석한 우리 하나하나가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고 선한 싸움을 잘 싸워서 승리적 생활을 하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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