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5:21-26/ 신앙 생활과 분노의 감정 / 한경직 목사
2014-08-26 22:27:37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에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주님의 산상보훈의 한 구절입니다.

이 산상보훈에서 우리 주님은 모세의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온전케 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밖에 나타나는 행동을 금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 행동의 내적 근원까지 금지하십니다. 제일 먼저 실례로 여섯 번째 계명, 곧 “살인하지 말라” 여기에 대해서 이렇게 교훈하십니다.

모세는 다만 살인하지 말라.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고 하였지만,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라.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 곧 욕설을 하는 자는 공회에, 지금으로 말하면, 대법원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 곧 남의 인격을 모독하고 멸시하는 악한 언행을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주님은 첫째로 분노는 살인의 근원인 것을 지적합니다. 둘째는 분노가 멸망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또한 지적합니다. 그러므로 노를 삼가라고 교훈하십니다.

오늘 아침, 주님의 이 엄숙한 교훈을 중심하여 신앙생활과 분노의 감정에 대하여 성경의 교훈을 생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노의 위험성을 알아야 합니다.

분노의 감정은 매우 위험합니다. 여기에서 주님은 분노야말로 살인의 근원이 됨을 지적하셨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4장에 있는 인류 역사상 첫 살인사건을 기억합니다. 아담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입니다. 아벨은 양을 치는 자가 되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로 제물을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아벨의 제물은 하나님께 열납이 되었으나 가인의 제물은 열납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때에 가인은 심히 분하여 그 안색이 변하더니 그 후 아벨이 들에서 일할 때에 그를 가인이 쳐 죽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첫 살인사건은 시기로 일어난 분노로 말미암아 발생하였습니다. 살인사건의 열이면 여덟, 8할이 분노를 참지 못하는 데서 일어난다고 합니다. 어떤 책을 보니, 미국 같은 나라에서도 매년 약 6만의 5세 미만의 어린이들이, 부모 혹은 어른들의 분노로 말미암아 희생이 된다고 합니다. 한국 같은 사회에서는 그 비례가 더 클는지 모릅니다. 신문에 거의 매일같이 보도되는 온갖 폭행 치사사건, 치정 살인사건, 방화사건 등은 거의 다 분노의 결과로 일어나는 흉악한 범죄 사건들입니다. 노는 이렇게 위험합니다.

해방 전, 제가 신의주에 있을 때에 어떤 해 음력 섣달 마지막 날 밤에, 신의주 채소거리에서 큰 불이 일어나서 수백 동의 집이 사라졌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어떤 가난한 젊은 부부가 농촌에서 신의주에 들어와서 갖은 고생을 둘이 같이하면서 장사를 해서 좀 살게 되니 그 남편이 몰래 첩을 얻었어요. 그 아내가 그걸 알게 됐습니다. 그날 저녁도 밤새도록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끝내 안 돌아오니 그만 홧김에 아내가 자기 집에 불을 놓았다고 합니다.

옛날 알렉산더 대제가 어떤 날 저녁에 자기 부하들과 같이 연회를 하다가 술이 취한 중에 사소한 말다툼으로 성이 나서 자기 일생의 친구요 전쟁터에서 몇 번이나 자기 생명을 구하여 준 유명한 대장 클리터스를 창으로 찔러 죽인 사건은 너무나 유명한 역사의 얘기입니다. 이런 일을 한 후에 알렉산더가 며칠이나 음식을 전폐하고 후회하였으나 후회막급이올시다. 친구는 이미 죽은 것입니다. 분노는 이렇게 위험합니다. 분노는 이렇게 뜻하지 아니한 일을 몰아옵니다. 그러므로 노를 삼가야 합니다.

영어에는 노한 사람을 흔히 매드(mad)라고, 곧 미쳤다고 합니다. ‘He is mad.’ 이렇게 말합니다. 미쳤다고 해요. 사실 사람이 분노하게 되면 일시적으로 미칩니다. 바로 보지 못하고, 바로 생각지 못합니다. 이성을 잃습니다. 그러므로 앞을 생각지 못하고 사리를 분별치 못하고, 무슨 짓이나 할 수 있습니다. 분노는 이렇게 위험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경고합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노를 삼가라고 엄히 경고하십니다.

둘째로 기억할 것은, 노의 우준성(愚蠢性)입니다.

전도서 7장 9절에,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노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른다고 하였습니다. 곧 어리석은 자의 품에 노는 머무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땅을 지나갈 때에 모압 왕 발락이 부러워서 당시 선지자였던 발람을 뇌물을 많이 주고 청하면서 와서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여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이 부탁을 받고 발람이 나귀를 타고 모압 왕에게 가던 도중에 갑자기 나귀가 발을 멈추고 가지 않습니다. 그것은 앞에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들고 길을 막는 까닭이었습니다. 그것을 모르고 발람은 성이 나서 채찍으로 나귀를 때리다가, 여러분 다 아는 대로 나귀에게 책망을 받은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이 때에 발람은 나귀에 대하여 분풀이를 하였으나, 실상 근본 원인은 자기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선지자로서 안 갈 길을 가다가 길이 막힌다고 공연히 노해서 나귀만 때렸습니다.

이런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무엇이 잘 안되면 자기의 허물은 생각지 아니하고, 공연히 환경을 저주하며 남을 원망하며 분노를 발할 때가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 맏아들이 들에서 돌아오다가 자기 집에서 크게 풍류소리가 나고 잔치한다고 하는 말을 듣고, 그것은 자기 동생이 돌아온 까닭이라고 하는 말을 들을 때에, 그 맏아들은 크게 노해서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분노도 역시 어리석은 분노입니다. 공연히 자기도 고통을 받고, 아버지의 마음만 괴롭힌 것입니다. 이런 분노도 역시 어리석은 자기 잘못에 기인하는 분노입니다.

옛날 선지자 요나가 노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고 하셨습니다. 합당치 않게 성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말하기를, 두 사람이 변론할 때에 어느 편이 옳은지를 알려고 하면 누가 먼저 성내는지를 가만히 보라고 했습니다. 왜? 흔히 변론하다가 말문이 막히면 그 편에서 성만 냅니다. 이런 것들은 다 어리석은 품 안에서 일어나는 분노의 감정입니다.

분을 함부로 냄으로 말미암아 오랜 우정을 깨뜨리는 일도 있습니다. 얼마나 미련합니까? 분을 함부로 냄으로 말미암아 여러 해 쌓은 공적을 하루아침에 허무는 이도 있습니다. 얼마나 미련한 일입니까? 분을 함부로 냄으로 말미암아 성공할 수 있는 사업을 실패로 마치는 이도 있습니다. 얼마나 미련한 일입니까? 분을 함부로 냄으로 말미암아 가정의 평화를 깨뜨리고,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아내나 부모님들의 마음을 괴롭힐 때도 있습니다. 얼마나 미련한 일입니까? 분노의 우둔성을 기억해야 합니다. 분노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분노를 삼가야 합니다.

셋째는, 이 분노란 감정의 보편성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상 지적한 대로 노가 이렇게 위험하고 어리석은 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다 이점에 자주 실패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실수 가운데 하나입니다. 또 성령과 역사를 보면, 이 분노의 감정으로 말미암아 큰 인물이라도 허물을 남긴 예가 한둘이 아닙니다.

이미 말한 대로, 요나 같은 선지자는 온 니느웨 성을 한 달 동안에 다 회개시킨 위대한 선지자입니다. 그러나 편협한 민족적 감정으로 인한 분노 때문에 그의 생활에 큰 오점이 찍힌 것입니다. 위대한 지도자 모세 같은 이도 백성들이 물이 없다고 불평을 말할 때에 반석을 한 번 치라는 것을 성이 나서 두 번 쳤으므로, 그런 위대한 일을 하고도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성경은 지적합니다. 이러한 위대한 인물들도 이런 실수를 하는데, 하물며 우리 같은 보통 인간들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조심해야 됩니다. 노를 발하지 않도록 삼가야 합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이 분노의 감정에 대한 대책이 무엇일까?

성경의 교훈을 좀더 구체적으로 찾아보기로 하십시다. 야고보서 1장 19절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그다음에 무슨 말이 있는지 압니까?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입니다. 잠언 16장 32절에,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이 두 성경 구절이 다 노를 더디 하라고, 마음을 다스리라고, 곧 분노를 참으라고 권합니다.

무슨 불쾌한 말을 들어도 성이 나지 않도록 우리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성내기를 더디 해야 합니다. 더욱이 성이 난다고 그 성나는 것을 다 발표해서는 아니됩니다. 성나게 되면 흔히 입에는 욕설로 발표가 되고, 마지막에는 주먹으로 발표가 되서 싸움이 됩니다. 모든 감정을 제어할 줄 알아야 하지만, 특별히 분노의 감정을 제어할 줄 아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품격입니다. 이것이 곧 믿음이요, 믿음으로 인한 수양입니다.

더욱이 분을 관계없는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밖에서 불쾌한 일을 당하고 집에 돌아와 죄 없는 아내에게 분풀이하는 남편이 더러 있습니다. 남편에게 꾸지람을 듣고 공연히 죄 없는 어린아이들을 때리는 어머니들도 더러 있습니다. 옛날부터 ‘시어머니 역정에 개 옆구리 찬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옛날 동양의 성현도 ‘군자는 불천노(不遷怒)’라고, ‘군자는 노를 옮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노를 옮겨서는 아니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불천노해야 됩니다. 분노를 잘 다스리도록 수양을 해야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조심하지 아니하므로 쉽게 성을 자주 내는 이들이 있습니다. 조심하지 아니하면 성내는 것도 습관이 됩니다. 한 번 성내면 그다음엔 성이 더 쉽게 납니다. 두 번 성내면 그다음에는 성이 좀더 쉽게 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습관적으로 항상 성내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여러분,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이야말로 실로 불행한 사람이올시다. 왜? 우선 자기가 괴롭고, 또 이런 이에게는 누구나 가까이하기를 꺼려합니다. 이런 이하고는 함께 일하기를 누구나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아주 고독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성내는 것을 더디 해야 합니다. 성이 난 후에도 마음을 다스릴 줄 꼭 알아야 합니다. 한 번 어떻게 성이 났을지라도, 그다음에는 절대로 다시 내지 않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26절과 27절에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고 권합니다. 여기에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했습니다. 분낸 후에 조금 잘못하면 큰 죄를 짓습니다. 또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했습니다. ‘해가 지도록’ 이라는 말은 다음 날까지 분을 품지 말라는 뜻입니다.

옛날 유대 풍속은 해가 지면 새날이 시작된 것입니다. 곧 분을 다음 날까지 품지 말라는 뜻입니다. 분을 마음 속에 품고 있으면 우선 자기에게 크게 해롭습니다. 심리적, 육체적 질환으로 나타납니다. 흔히 화병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원인에서 나는 병들입니다.

그리고 분을 품고 마음 속에 억눌러 두면, 이것이 기회만 있으면 갑자기 화산처럼 폭발해서 큰 죄를 범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이 남에 대해서 속에 이 분을 품고, 원한과 증오심을 그냥 가지고 있으면 절대로 안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선 자기가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그런 마음에서는 성령이 떠나십니다.

그러면 분한 일을 당할 때에 이런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오직 주님과 같이 이해와 용서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위해서 “아버지여 이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기도하였습니다. 여기에 이해와 용서가 있습니다.

사실 당시에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은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사실 예수가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인 줄 알았다면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는 하나님을 훼방하는 한 거짓 선지자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누가 무슨 욕설을 한다고 하여도 그것이 만일 사실이 아니면, 그는 다만 몰라서 그러는 것뿐입니다. 그러니 그런 일로 나까지 노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어떤 이의 하는 말처럼, 내게 대해서 사실이면 그것은 내가 회개할 기회인 줄 알고, 내 스스로 반성해서 고칠 것을 고쳐야 할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어떤 이가 내게 대하여 부당한 일을 할 때에 우리는 항상 이해하기를 힘쓰고, 몰라서 그러는 경우가 많은즉 그리스도의 본을 받아서 용서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마음에 품은 분을 풀어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기도가 필요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였는데, 이런 때일수록 쉬지 말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감화를 받고, 성령의 감화를 소멸하지 아니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귀가 틈을 타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의 형제를 ‘우레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마 이들은 성품이 급해서 노하기를 잘한 모양입니다. 사실 예수께서 사마리아를 지나가실 때에 한 동리에서 예수님의 하루저녁 유숙을 거절하는 것을 보고, 그들은 격노해서 하늘로써 불을 내려서 멸망시키자고 하다가 예수님의 책망을 받은 일도 있습니다.

성품이 이러하던 요한이 그 후에 요한일서를 기록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신앙을 통하여 분노를 다스리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기도와 성령의 역사와 간단(間斷 끊임)없는 신앙의 노력으로 분노의 감정도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혹 과거에 이점에 실패하였다고 할지라도, 결코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계속해서 주 안에서 힘쓰면 가능한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에 바울은 외쳤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렇게 위험한 분노의 감정도 주 안에서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주님의 엄숙한 교훈을 저희들이 받았습니다. 저희들은 다 약한 인간들이라서 때때로 이런 점에 실수를 많이 합니다.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저희들과 언제나 같이 계시고, 저희들이 언제나 성령의 충만한 은혜 가운데서 이 분노의 감정까지도 옳게 다스리며 원만한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는 그리스도의 높은 인격과 생활로 우리 하나하나 이끌어 올려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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