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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18:21-35/ 신앙생활과 용서 / 한경직 목사 2014-08-26 21:09:32 오늘 아침 읽은 성경 본문을 잘 들으셨으면, 그 뜻을 이미 깨달으신 줄 생각합니다. 한번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아와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 하고 물었습니다. 당시의 유대교 랍비들은 흔히 세 번까지 용서하여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일곱 번까지 생각한 것은 당시의 다른 사람들보다 더 넓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할지니라” 하셨습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면, 490번입니다. 그러나 그 뜻은 수의 제한이 없이 얼마든지 용서하여 주라는 말씀이올시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비유를 한 가지 들었습니다. 어떤 임금에게 한 종이 있어서 빚 일만 달란트를 졌습니다. 한 달란트가 미화로 지금은 약 1,000불가량 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미화로 1천만 불의 큰 빚을 이 종이 임금에게 졌습니다. 이 빚을 갚을 수가 없어서 이 종은 좀 참아 달라고 임금에게 사정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임금은 그 종을 불쌍히 여겨서 그 큰 부채를 그저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종이 이렇게 큰 빚에 탕감을 받고 나오다가 자기에게 빚 100 데나리온, 곧 미화로 말하면 20불쯤 됩니다. 20불을 빚진 자기의 동관 하나를 만났습니다. 이 동관이 또 이 종에게 사정을 했습니다. 내가 장차 갚을 테니 좀 참아 달라고 간절히 사정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옥에 가두고 그 빚을 다 받고야 말았습니다. 다른 동관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임금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임금은 크게 노해서 그 종을 다시 불러다가 하는 말씀이 “이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면서 그 빚을 다 갚도록 그 종을 다시 붙잡아서 옥졸에게 붙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시면서 우리 주님은 결론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네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경고하셨습니다. 이 교훈 가운데 우리는 몇 가지 진리를 분명히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첫째는, 우리 인간은 누구나 다 하나님께 큰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1천만 달러의 빚을 졌습니다. 곧 우리 인간은 누구나 다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지었습니다. 성경은 지적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곧 하나도 없다”고 하십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한국에 옛날부터 내려오는 속담 가운데에도, 사람이 하루에도 죽을 죄를 세 번 짓는다고 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이 죄의 빚을 갚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 크신 긍휼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서 이 큰 빚을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듣건대, 한번은 마틴 루터가 꿈 가운데 악한 마귀가 나타나서 그가 일생에 범한 죄의 목록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자세히 그 두루마리를 보니 모두 루터가 자기 손으로 쓴 것입니다. 이 목록을 보이면서 마귀가 하는 말이, “네가 이 모든 죄를 짓고도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냐?” 이 말을 들을 때에 루터는 잠깐 참 마음이 아득했습니다. 그러나 즉시 요한일서 1장 7절이 생각이 났다고 합니다. 그 절의 내용은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게 하실 것이요”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 구절을 그 두루마리 위에 자기 손으로 다시 쓰니 그 모든 죄의 목록이 사라져 없어졌다고 합니다. 사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혈로 모든 죄를 탕감받았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오직 그 은혜로, 크신 긍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음으로 구원을 얻었고,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말하자면, 1천만 달러의 큰 죄의 탕감을 받은 것입니다. 둘째로 깨달을 것은, 우리 형제 가운데 누군가 나에게 무슨 죄를 지었든지 그 죄는 100데나리온 곧 미화로 20달러에 불과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탕감 받은 죄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형제가 우리에게 무슨 죄를 지었든지 그 죄를 서로 용서하여 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마땅히 할 일입니다. 이 마땅히 할 일을 하지 아니하고 오래 원망이나 분한 마음을 품고 있으면, 우리도 이 비유에 나타나는 불의한 종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하게 되면 이미 탕감 받은 죄가 취소를 당할 염려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이 점에 대하여 종종 엄중히 경고하십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네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태복음 6장 14절에도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1장 25절에도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에도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형제의 죄를 사하여 주는 것은 내 죄의 용서함을 받는 필수 조건이 됨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지금부터 약 40년 전, 제가 신의주 제2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할 때에 한번은 그때 곽산교회의 원로목사로 계시던 김진근 목사님께서 신의주에 오셔서 우리 교회에서 예배를 보시고, 하루 저녁 저와 얘기를 같이 나누었습니다. 그 김진근 목사님은 아마 여러분 아시는 분 많이 계실 겁니다. 본 교회 김득삼 집사님 부친이올시다. 그때 들은 이야기 하나가 있는데, 지금까지 잊히지 아니합니다. 자기가, 김 목사님의 말씀이오. 신학을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기 위해서 어떤 다른 신학 졸업생과 같이 노회에서 시취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때는 노회 시취위원이 따로 없고, 그저 시취 받는 목사 후보생을 노회 가운데다 내다 세우고는 그저 노회원은 누구나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김 목사님과 그 다른 형제 한 분이 이렇게 시취를 받는 중에 대답을 무던히 잘해서 그저 잘 통과가 될 만한 분위기처럼 처음에는 보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그때에 선천에 있던 어떤 한 선교사가 일어나서 하는 말이, 그저 시취는 무던히 된 것 같으나, 자기 생각으로는 아무래도 이 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미비한 점이 있어서 아직은 목사 되기에는 부족하니 그저 한 노회 기간을 기다려서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 의견을 발표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노회의 공기가 갑자기 변하면서 여러 노회원들이 한 노회 기간을 연기하자고 동의하고 제청하고 가결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니까 말하자면 목사시험에 낙제하지 않았습니까? 낙제했단 말입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 집에 돌아오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습니다. 그 선교사에게 대해서 분한 마음이 일어나서 처음에는 그저 기도도 잘 안 되더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후에 그가 다시 생각하기를, 그 선교사가 자기와 무슨 사혐(私嫌)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말한 것은 아무래도 자기에게 무슨 미비한 점이 있고, 결함이 있고, 또 교회의 덕을 생각해서 그렇게 말한 이유일 것이라고 이렇게 양해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평화를 회복하고, 그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그저 무엇이나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 달라고 기도를 한 후에 그날 저녁 평안히 잤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이튿날 선천 거리에 나갔다가 오후에, 그 전날 같이 시험을 쳤다가 낙제한 그 친구를 만났다고 합니다. 만났는데, 그 친구는 그때까지 성이 풀리지 않고 성이 나서 그 선교사를 단단히 욕을 하더라고 합니다. 그럴 것 없다고 말렸지만 듣지 않더라고 합니다. 그 후 6개월 후에야 다시 시취를 하고, 두 분이 다 목사 장립을 받고, 교회 일을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다른 한 친구는 목사가 된 후에도 여전히 그 선교사를 욕하더라고 합니다. 그 분한 마음을 풀지 못했습니다. 길게 얘기할 것 없이, 그 다른 친구는 수년 후에 목회하는 일에서 아주 떠나게 되었다고 그런 말을 하셨습니다. 저는 이 얘기를 그때에 젊은 교역자로서 깊이 들었습니다. 교역자나 장로나 권사나 집사나 누구나 사실이었든지 오해이었든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아니하고, 분한 마음을 오래 품고 있으면, 그 자신이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그런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지 못합니다.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셋째로 우리가 또한 기억해야 될 것은, 용서야말로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 주었습니다. 간음한 젊은 여자의 죄를 용서하였습니다. 살인강도의 죄도 용서하였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의 죄도 용서하였습니다. 용서는 가장 고귀한 인격의 표현입니다. 옛날 서반아(스페인) 속담에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악마적이요,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은 인간적이요, 그러나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신적이라.’고, 곧 하나님과 같이 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의 죄를 용서하면서 사는 것은 하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원수까지 사랑하며 그들의 죄를 용서하였습니다. 스데반도 자기를 돌로 치는 자들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순교하면서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국이 낳은 성자 손양원 목사도 자기 아들을 죽인 공산당을 용서하여 주고, 그를 자기 아들로 대신한 것입니다. 19세기에 터키라고 하는 나라에서 그 나라의 소수 민족이요, 또 기독교 민족인 알메니아 사람들을 크게 핍박하고 학살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에 터키의 한 군인이 잘 믿는 알메니아 사람 남매를 쫓아가서 그 오빠를 쳐 죽였다고 합니다. 그 후에 그 어린 누이동생이 커서 어떤 병원의 간호원(간호사)이 되었는데, 하루는 터키의 한 군인이 중상을 입고 입원을 하였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 군인은 몇 해 전에 자기 오빠를 쳐 죽인 그 군인이었습니다. 중상을 입었으므로 그저 간호만 좀 소홀히 해도 그 군인은 살기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이 여자는 일시 복수심이 일어났으나, 곧 자기는 그리스도의 딸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모든 것을 용서하고, 정성껏 그를 간호하였다고 합니다. 얼마 후에 그가 점점 나아서 자기를 간호하는 간호원을 자세히 쳐다보니, 그 간호원은 몇 해 전에 자기가 쳐 죽인 그 알메니아 사람의 여동생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군인은 놀라서 그 사실 여부를 간호원에게 물어보니 과연 자기가 그의 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는 그 군인은 한 번 더 놀라서 “그렇다면 나는 당신의 원수인데 어떻게 당신이 나를 이렇게 정성껏 간호를 해 줍니까?” 물었다고 합니다. 그 간호원은 대답하기를 “나는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원수까지도 사랑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그 군인은 “기독교가 이런 종교라고 하면, 나는 회교를 버리고 기독교를 믿겠습니다.” 하고 그때부터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용서는 내 영혼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이들의 영혼까지 구원하는 길입니다. 하늘나라는 용서를 받은 이들만 모인 곳입니다. 또 용서를 하는 이들만 가는 곳입니다. 하늘나라에는 용서라는 말이 가장 귀한 말입니다. 이 말을 모르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용서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이요,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악마의 마음이올시다. 누구나 용서를 받아야 하고 또 누구나 피차에 용서를 해야 합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 스펄전(Spurgeon) 목사는 일찍이 말하기를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고 아주 잊어버리라. 미친 개를 파묻을 때에 그 꼬리를 내놓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아주 잊어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한국의 속담에도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중상을 당하였거나, 무슨 재산에 손해를 보았거나, 무슨 모략을 당한 후에 그것을 용서하고 분한 마음을 버리는 것은 결코 보통 사람으로는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1천만 달러의 큰 죄의 빚을 하나님께로부터 탕감받은 것을 기억하고, 언제나 형제간에 작은 과실과 죄들을 용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 이것만이 우리가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는 길임을 알게 될 때에 우리는 아무리 어려워도 용서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간절한 마음이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또한 용서할 수 있는 은혜까지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피차에 용서하는 것을 배워야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용서를 받고 용서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항상 기도하십시다. 기도합시다. 감사합니다. 저희들의 지은 죄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없으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써 우리의 죄를 다 사하여 주시고 우리를 깨끗게 해 주시고 아버지의 자녀로 삼아 주신 것을 생각할 때 무엇으로 다 감사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큰 긍휼과 은혜를 마음 속에 기억하고 우리 형제간에 사소한 모든 허물이나 죄를 피차에 용서하고 온전히 주님의 그 거룩한 길을 따라갈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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