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14:22-33/ 왜 의심하였느냐 / 한경직 목사
2014-08-26 15:44:18

오늘 읽은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5,000명에게 떡을 먹이시고 무리를 보내시는 동안 제자들로 하여금 먼저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떠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홀로 산에 올라가서 기도를 늦게까지 하신 후에, 다시 갈릴리 바닷가에 내려오시니 배는 물론 이미 멀리 바다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물 위로 배를 향하여 걸어오셨습니다.

제자들은 처음에는 유령인 줄 알고 두려워하였지만, 그 후에 주님인 것을 깨닫고 기뻐하였으며,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는 그 특성대로 자기도 물 위로 가기를 원하여, 주님의 허락으로 주님을 향하여 처음에는 잘 걸어갔으나, 바람을 보고 두려워하여 빠져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해서 주님을 향하여 구원하여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때에 주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하시는 말씀이,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하셨습니다.

“왜 의심하였느냐?” 혹은 “왜 의심하느냐?”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이는 베드로만은 아닌 줄로 생각합니다. 혹 우리 가운데는 없습니까? 오늘 아침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 의심의 문제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 마음 속에 의심을 일소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의심 없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축복이 우리에게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일상 생활에 있어서 의심이 얼마나 큰 해가 되는가 하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습니다.

가정에서도 부부간에 피차에 의심하기 시작하면 그 가정에는 평화가 없고, 잘못하면 파탄에 이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친구간에도 의심이 싹트기 시작하면 그 사이의 우정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무슨 사업을 같이 할 때에도 동사자간에도 피차에 의심을 품기 시작하면, 동사(同事)는 오래 계속되지 못합니다. 의심이 병이 된다는 말도 있습니다. 의심하는 환자는 잘 회복되지 못합니다. 의심은 기계의 모래와 같습니다. 파괴의 역할을 합니다. 의심은 눈의 티와 같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일반 생활에도 의심이 이러한 해독을 끼친다면, 신앙생활에 있어서 그 해독이 얼마나 더 클 것입니까? 신앙생활에 있어서 의심은 금물입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대로, 베드로가 처음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잘 걸어가다가 그만 갑자기 빠져 들어가게 된 것은 의심 때문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이 험한, 파고 높은 갈릴리 바다 같은 고행인 세상을 걸어가려면 의심 없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내 믿음이 어떠한가?

이 시간 의심 문제와 관련하여 솔직히 내 자신을 살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신앙생활에는 무슨 의심이 없는가? 혹 있다고 하면, 어떠한 의심인가? 자세히 살펴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바랍니다.

사실, 의심 가운데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20세기를 의심의 세기라고도 합니다. 과거의 전통, 도덕, 사상, 종교 등 모든 것을 한번 의심해 보아야 한다는 사상이 많습니다. 이런 풍조에 휩쓸려서 무엇이나 의심하려는 이들도 혹 있습니다. 이러한 의심은 말하자면 감기와 비슷한 유행성 의심이올시다. 혹 우리 가운데 이런 유행성 홍콩 감기에 걸린 이는 없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요사이 어떤 청년들은 소위 지성이라는 뜻을 다소 오해해서 지성인이 되려면 의심을 가지고 무엇이나 대하여야 한다는 생각이 있는 듯합니다.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태도입니다. 물론 지성인은 그 지성을 통하여 모든 것을 이해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참 지성인은 또한 인간의 지성이란 제한이 있는 것을 압니다. 신앙 문제에 있어서는 인간의 지성으로 다 깨달을 수 없는 진리도 많습니다. 그러나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여 주시는 계시적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위대한 지성인이 또한 위대한 신앙가가 될 수 있습니다. 뉴턴, 파스칼, 어거스틴, 이런 분들이 다 그러한 이들입니다.

그리고 소위 문자 그대로 병적인 의심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의심 안 할 것까지 의심합니다. 밤에 문을 잠그고도 의심이 나서 또 한 번 나가 보고야 잡니다. 소위 의처증란 말이 있습니다. 아내를 의심하는 의처증이 있는 남자들이 혹 있습니다. 반대로 의부증, 남편을 의심하는 그런 증세가 있는 여자들도 혹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여자는 자기 남편이 다른 여자와 같이 거리에서 한 번 대화를 하는 것만 보아도 야단을 칩니다. 이것은 심리적 질환입니다. 이런 이들이 성경을 읽을 때에는 의심나는 구절만 표하여 놓습니다. 이것은 커다란 마음의 병입니다. 이런 이는 내가 환자인 것을 알고, 그 병을 주님 앞에 나와 솔직히 고백하고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또 의심 가운데는 불륜의 생활로 인하여 일어나는 의심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생활 속에 숨은 죄가 있습니다. 이런 이들은 고의로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의심하고자 합니다. 왜? 성경의 말씀이 다 진리이면 자기 자신은 멸망할 수밖에 없는 것을 그의 잠재의식이 가르쳐 주는 까닭입니다. 이런 의심은 지적 문제가 아니요, 도덕적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마음이 깨끗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장로 야고보는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깨끗이 하라”고 경책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은 먼저 죄를 회개하여야 모든 의심이 풀릴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 여러 가지 의심 이외에 이른바 정직한 의심이 또한 사실 있습니다. 가령 열두 제자 중 하나인 도마는 처음에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였습니다. 믿으려는 마음은 있었으나 너무 이상하여 믿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의심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아브라함까지도 하나님의 약속이 빨리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 그만 의심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베드로도, 여러분 아십니다.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곧 이런 이름을 가진 이도 바람과 물결을 볼 때 잠깐 의심했습니다. 이러한 의심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다 이런 의심에 부딪힙니다.

이 정직한 성도의 의심을 퇴치하는 길이 무엇일까? 특별히 이점을 계속해서 잠깐 생각하고자 합니다.

먼저 여러분, 주의해서 들으세요. 도마가 그 의심을 어떻게 풀었는가? 우리는 잘 기억합니다. 그는 그 다음 주일 제자들이 모이는 그 다락방에 가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 의심을 풀었습니다. 시편 73편을 읽어 보면 그 시를 쓴 시인이, 세상에서 악한 사람이 너무 형통하고 선한 사람이 너무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과연 하나님께서 선한 사람에게 복을 주시는가, 의심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시를 다 읽어 보면, 마지막에 성소에 들어가서 곧 모든 성도들이 모이는 성소에 들어가서 그 의심을 풀었다고 하였습니다.

자세히 들으세요. 누구나 의심이 일어나면 어떤 지혜 있는 사람에게 가는 것보다도, 어떤 책을 읽는 것보다도, 믿는 사람들이 모이는 성소, 곧 교회에 나가는 것이 제일 유익합니다. 그 이유는 교회에는 믿는 성도들이 모이고, 또 성도들이 모이는 곳에 주님께서 약속하신 그대로 같이 계시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의심이 있을수록 성도가 모이는 집회에 참여하고, 그 모임을 통하여 성령의 도우심으로 모든 정직한 의심은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과거나 현재의 모든 성도들의 공통된 경험이올시다. 의심이 있을수록 성도가 모이는 곳을 찾을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다소 의심이 날지라도 계속해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은 처음 읽을 때는 의심나는 구절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을 계속해서 읽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는 중에 과거 모든 위대한 신앙의 용사들과 접촉하게 됩니다. 또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의 심령이 친히 들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심령이 성경을 읽는 중에 신령한 주님을 친히 대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모든 정직한 의심은 차차 해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여러 가지 의심이 들어올 때에 의심 없이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조용히 찾아내어 내가 믿을 수 있는 그 진리를 우선 철저히 믿고, 그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만 하면 다른 의심들은 점차로 해소가 됩니다. 믿을 수 있는 진리를 철저히 믿고, 먼저 그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지금 해결 안 되는 의심은 차차 해결이 됩니다.

신앙의 행로는 캄캄한 밤에 작은 등불을 가지고 길을 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내가 가진 진리의 등불이 10리 밖은 비추지 못합니다. 그러나 내 발 앞은 비춰 줍니다. 우선 이 작은 빛이 비춰 주는 것만큼 나아갈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10리길이라도 능히 갈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진리를 일시에 다 깨달으려고 하지만, 우선 단순한 구원의 도리를 철저히 그대로 행하며 그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의심나는 문제는 점차로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십니다.

그리고 이 의심의 병에 걸리지 아니하는 비결을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말씀드립니다.

전에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회개를 외치며 세례를 베풀 때에 그 무리 가운데 주님이 나타났습니다. 세례 요한이 손을 번쩍 들어 주님을 가리키면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때에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인 것을 분명히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렇게 증거를 했지요. 그러나 여러분 압니까? 그 후에 그가 오래 감옥에 있는 동안에 그는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장차 오시리라고 하시던 이가 당신입니까? 혹은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까?” 물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세례 요한 같은 이도 감옥에 오래 있는 동안 예수님을 좀 의심하였습니다. 곧 일하지 아니하고 가만히 있으면 의심이 나기 쉽습니다. 의심의 병에 걸리지 아니하는 비결은 일하면서, 곧 봉사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많은 잡념과 의심은 영적 소화불량으로 오는 심리적 현상입니다. 주의 일에 분주한 사람은 의심할 겨를이 없습니다.

도마에 대해서 내려오는 이런 전설이 있습니다. 한 번 의심을 했던 도마가 또다시 의심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믿음 많은 베드로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찾아가 보니 베드로는 여러 사람들에게 전도하고 가르치기 분주해서 베드로와 조용히 앉아 이야기할 기회를 도무지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다음에는 다시 믿음 많은 사도 바울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베드로보다 더 분주합니다. 만날 기회를 도무지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만나보지도 못하고 돌아오면서 도마는 혼자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형제 베드로도 의심치 않고 예수님 부활을 잘 믿고 열심히 일 잘하고 있고, 형제 바울도 의심치 않고 일 잘하는데, 왜 나만 공연히 의심하면서 이렇게 허송세월만 하는가? 나도 이제는 의심치 않고 일하여야 하겠다.’ 그 자리에서 길을 떠나 멀리 인도로 가서 크게 복음을 전파했다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영락 교우 여러분, 일하면서 예수를 믿으세요. 생명의 양식도 먹기만 하고 일하지 아니하면 소화불량에 걸려서 쓸데없는 공상과 의심만 생깁니다. 전도하며 심방하며 가르치며 남을 도우며 봉사하며 신앙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의심치 말고 믿으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회의적인 신앙은 마음에 평화가 없습니다. 기도에도 응답이 없습니다. 유혹과 시험도 이기지 못합니다. 사실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의심치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어제 오늘의 종교가 아닙니다. 과거 수천 년, 수억만 많은 사람들이 이미 믿고 구원을 얻고, 현재도 세계 1/3의 인구가 믿는 종교입니다. 의심치 말고 하나님을 믿으세요. 하나님의 공의를 믿으세요.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세요.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세요. 내세가 분명히 있습니다. 천당과 지옥을 믿으세요. 의심치 마세요.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나에 대한 사죄와 구원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사람을 보면, 내가 구원을 얻었을까, 못 얻었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의심치 말고 믿으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특별히 기도할 때에 의심치 말고 기도합시다. 그래야 응답이 됩니다. 믿음을 의심치 말고, 의심을 믿지 마세요. 갈릴리 바다 같은 이 험한 세상이라도 능히 걸어갈 수 있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세요. 기도합시다.

아버지시여, 이 시간 하늘 문 넓히 여시고 우리 하나하나에게 의심 없는 확실한 믿음을 채워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해서 험한 바다라도 걸어갈 수 있는, 큰 산이라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어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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